진성·진보 이씨(眞城眞寶李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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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 이씨(眞城李氏)의 시조 이석(李碩)은 누대(累代)로 진보현(眞寶縣)에 토착해 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진보현(眞寶縣)의 아전으로 있다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다. ‘시조공묘갈명(始祖公墓碣銘)’에 보면, 그의 아들 자수(子修)가 고려 공민왕 13년(1364년) 봉상대부 지춘주사(奉常大夫知春州事)로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전공을 크게 세워 안사공신(安社功臣)으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으므로, 그 공으로 인하여 이석(李碩)은 봉익대부 밀직사(奉翊大夫密直司)에 증직(贈職)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석(李碩)을 시조로 받들고, 선조의 본향지인 진성(眞城)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켰다.
진보(眞寶)는 신라 초기에는 칠파화현이라 하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진보현(眞寶縣)으로 고치고 시조(始祖)의 맏아들 송안군(松安君)이 출사(出仕)한 시기인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 공첩(公貼)인 ‘전의정안(典儀政案)’의 기록에는 본관(本貫)이 보성부(甫城府)로 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까지 공첩(公貼)에 본관(本貫)을 보성부(甫城府)로 하여 내려왔음을 볼 수 있다. 보성부(甫城府)는 곧 진보현을 통합한 행정명(行政名)으로 후일 조선초에 다시 신라 때의 원래 이름인 진보현(眞寶縣)으로 분리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중기에 이르러 본관을 진보(眞寶)로 하였으며, 퇴계(退溪)의 숙부인 송재(松齋) 우(?)가 반정(反正)에 공로가 있어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지고, 아버지인 노송정(老松亭) 계양(繼陽)에게 보조공신으로서 진성군(眞城君)의 군호를 추증을 받게 된 이후로 관향(貫鄕)을 진성(眞城)으로 하여 내려오고 있다. 따라서 진성은 곧 진보현의 별호(別號) 또는 별칭(別稱)임을 알 수 있다.
▲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오래된 족보로 1600년 간행된 진성 이씨 최초 족보인 경자보(庚子譜). 3책으로 된 목활자본.
시조 이석(李碩)은 전후 부인을 두었는데 먼저 호장(戶長)인 김현(金玄)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후취부인은 그 성씨(姓氏)를 알 수가 없다. 아들 자수(子修)가 안동으로 옮겨와서 살게 되자 그 뒤 자손들이 먼 곳에 흩어져 살고 세대가 멀어져서 제때에 성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묘가 있는 곳을 잃게 되었다. 그후 6대손 대사헌(大司憲) 해(瀣)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황(滉)이 항상 일가 사람들을 거느리고 제단을 만들어 신위(神位)를 모시고 산속에서 망제(望祭)를 지냈는데, 그 뒤부터 정례적인 의식이 되었다.
그런데 1645년 원손(遠孫) 시립(時立)이 어머니를 그 산속에 장사 지낼 때에 파고 있던 구덩이 앞에 3위의 큰 묘가 연이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뒷쪽 두어 걸음 거리에 또한 묘가 있어 시립(時立)이 그 묘를 파서 지석(誌石)을 얻었으니 바로 시조 이석(李碩)의 증손(曾孫)인 주부(主薄) 양호(養浩)의 무덤이었다. 그 글에 쓰여져 있기를, ‘선조에게 붙여서 제사를 받는다’라고 했으니, 이 글자만으로도 그 세 위의 분묘가 시조및 전후취(前後娶)의 묘임은 너무도 분명했다. 이에 자손들은 시조 묘를 다시 찾아 봉분을 개수하고 가토하였다.
▲ 경북 청송군 파천면 신길에 자리한 시조 이석(李碩) 묘와 묘 아래 자리한 기곡재사(岐谷齋舍ㆍ경북도지정문화재 제219호). 시조의 묘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으로 감람묘(甘藍墓)라고 부른다.
진성 이씨의 분파는 ‘임자보(壬子譜)’에서는 5세조를 파조(派祖)로 하여 6개 파로 분파된다. 여담(如聃)의 후손이 생현파(?峴派), 종담(從聃)의 후손이 병방파(?方派), 우양(遇陽)의 후손이 주촌파(周村派), 흥양(興陽)의 후손이 망천파(輞川派), 계양(繼陽)의 후손이 온혜파(溫惠派), 선호(善浩)의 후손이 후평파(後平派)로 나누어진다. 생현파(?峴派)에서 여담(如聃)의 현손인 원충(殷豊)의 후손이 은풍파(殷豊派)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그 후손에서 다시 몇 개의 파로 나누어진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 시조 이석(李碩)의 아들인 자수(子脩)는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 정세운(鄭世雲)을 따라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는데 공로가 있어 송안군(松安君)으로 봉군(封君)되었고, 벼슬이 통헌대부 판전의사사(通憲大夫判典儀寺事)에 이르렀다. 진보(眞寶)에서 풍산(豊山) 마애리(磨厓里)에 옮겨 살다가 만년에 주촌(周村)으로 옮겼다고 하며, 작산사(鵲山祠)에 제향(祭享)되었다. 황씨(黃氏)에게 장가들었으며, 두 아들 운구(云具)와 운후(云侯) 대에서 중흥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가 지었다고 전하는 경북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진성 이씨 대종택(경북민속자료 제72호).
운구(云具)와 운후(云侯) 형제는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인지 분명치 않아 논란 거리가 되었던 적이 있다. 아마도 종가는 운후(云侯) 계열로 전해져 내려왔는데, 족보상에는 운구(云具)가 형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이 의문을 야기하였을 것이다. 퇴계는 이 점을 바로잡기 위해 종가의 문서를 뒤졌으나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문건이 없었고, 외거노비(外居奴婢)의 별급문기(別給文記)에서 관계 기록을 찾아 형이 운구(云具)이고 아우가 운후(云侯)임을 확인했다. 종가에서 상대의 문건들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장파(長波)인 운구(云具) 계열에 그것들이 유전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上)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480년 퇴계의 조부 3형제가 창건한 경북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 작산정사(鵲山精舍). 1715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下)이자수(李子脩)의 손자인 이정(李禎)의 묘제를 위해 1480년 작산정사의 뒷편에 별도로 건립한 가창재사(可倉齋舍). 경북도민속자료 제21호.
조선 초기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던 운구(云具)는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군수를 역임했던 차남 양검(養儉)과 주부(主簿)를 지낸 막내 양호(養浩)가 유명했다.
한편 자수(子修)의 둘째 아들로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된 운후(云侯)는 부인 안동 권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정(禎)을 낳았고, 안동부의 동쪽 가구산(佳邱山)에 안장되었다. 한편 부인 안동 권씨는 안동부 북쪽 도답촌 수리동에 안장되었다. 내외의 자손 중 가구에 사는 사람도 있고 주촌에 사는 사람도 있어서 편한 대로 제를 올렸다. 가구에 사는 자손은 가구의 묘소에 가서 제를 올리고, 주촌에 사는 자손은 수리동 묘소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후세의 자손들도 그 법도를 따라 행하여 결국 세대가 멀어지게 되자 향화(香火)가 끊어지기도 하여 운후(云侯)의 묘소는 지금은 실전되었다.
▲ 경북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 작산정사(鵲山精舍) 초입에 자리한 이정(李禎)의 묘.
운후(云侯)의 아들 정(禎)은 빠르고 용감하여 활쏘기와 말타기가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상국(相國ㆍ정승) 최윤덕(崔潤德)에게 종군하였을 때 건주위(建州衛)에 큰 호랑이가 험준한 산골에서 구멍을 뚫고 살면서 인근 사람과 가축을 잡아먹으니, 사람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최윤덕이 유능한 포수를 모집할 때 정(禎)이 자청하여 말하기를, ‘장차 오랑캐를 처 부술 때를 당해서 이 호랑이를 죽여 나의 용력을 시험해 보겠다’ 하고 즉시 말을 달려 호랑이 굴 앞에 이르렀다. 호랑이가 으르렁대면서 말 뒷덜미로 뛰어 오르는 것을 공은 날쌔게 말머리를 돌려 화살 한 대로 쏘아서 호랑이가 뻗어 뒹굴게 하였으니 온 군중(軍中)이 탄복하였다.
또 안동부서 수 십리 지점에 제비원이란 곳이 있는데, 큰 돌에 미륵상을 새겨서 얹고 집을 지어 그 위에 덮었으니 높이가 수십 백장(數十百丈)이나 되어 여기에 올라보는 자 두려워서 감히 아래로 굽어볼 수 없었다. 정(禎)은 여기에 올라서 몸을 공중 전환하여 뛰어 내리니 그 용감하고 날램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효용이 있으면서도 스스로 자부하지 아니하고 항상 겸손하고 조심성이 있었으며, 선산도호부사를 역임한 후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슬하에 아들 우양(遇陽)ㆍ흥양(興陽)ㆍ계양(繼陽)이 현달(顯達)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 노송정((老松亭) 이계양(李繼陽)이 은거한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老松亭)과 단종을 기리기 위해 세운 국망봉 제단.
계양(繼陽ㆍ1424~1488)는 자는 달보(達父), 호는 노송정((老松亭)으로 단종 1년(45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봉화현 훈도(奉化縣訓導)가 되었다. 그러나 2년 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양하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로 돌아와 집 앞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는 자신의 집을 ‘노송정(老松亭)’이라 이름하였다. 그 뒤 그는 한번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몸소 밭을 갈아 생계를 꾸리고, 온혜리 서쪽에 있는 국망봉(國望峰ㆍ481m)에 단을 쌓고 매년 10월 24일이면 단에 나아가 북쪽을 바라보고 절하기를 30여 년 동안 하였다. 중종 1년(1506년) 아들 우(?)가 중종반정에 끼친 공로로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록되고 청해군(淸海君)에 봉군되면서 보조공신 이조참판 진성군(輔祚功臣吏曹參判眞城君)에 추증되었다. 예안의 향사우(鄕祠宇)에 제향되었다.
▲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조부인 노송정((老松亭) 이계양(李繼陽) 묘.
계양(繼陽)의 장남 식(埴ㆍ1463~1502)은 자는 기지(器之)로 황(滉)의 아버지이다. 아버지 계양(繼陽)이 과거를 포기하고 자식들을 가르치고 독서하는 것을 주로 하였으므로 동생 우(?)와 함께 학문을 배웠다. 문소 김씨(聞詔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장인인 예조정랑 김한철(金漢哲)이 서적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일찍 죽자 그 책들을 물려받아 이를 계기로 경사(經史)ㆍ제자백가(諸子百家) 등을 연구하였다. ‘나는 밥 먹을 때에도 글과 함께, 잠 잘 때에도 글과 함께, 앉아서도 글, 길을 걸을 때에도 글이었다. 글이라면 한시반각도 마음에서 떠나본 적이 없었는데, 너희들은 이같이 유유히 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이래서야 어찌 능히 다음날 성취되기를 바라겠느냐.’라고 자제를 훈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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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자리한 정민공(貞敏公) 이해(李瀣)의 묘.
식(埴)의 5남 해(瀣ㆍ1496∼1550)는 자는 경명(景溟), 호는 온계(溫溪)로 황(滉)의 형이다. 중종 20년(1525년) 진사가 되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3년 사간(司諫)ㆍ정언(正言)을 거쳐 1541년 직제학(直提學)에 올랐으며, 이어 도승지ㆍ첨지중추부사ㆍ대사헌(大司憲)ㆍ대사간ㆍ예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를 우의정에 임용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명종 즉위년(1545년) 강원도 관찰사에 이어 1547년 황해도ㆍ청홍도 관찰사를 거쳐 1550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小尹)이 득세하였기 때문에 이기의 심복인 이무강(李無疆)의 탄핵을 받아 무고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이 때 주위에서 권세에 의탁하기를 권하였으나 거부하였고, 또한 인근에 살던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로 이끌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명종은 그의 결백함을 알고 갑산(甲山)에 유배보내는 것으로 옥사를 결말지으려 하였는데, 귀양가는 도중에 양주(楊州)에서 병사하였다. 특히 예서(隸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영주 삼봉서원(三峰書院)과 예안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민(貞敏).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황(滉ㆍ1501~1570)은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으로 12세 때 숙부 우(?)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중종 18년(1523년)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ㆍ박사(博士)ㆍ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1539년 수찬(修撰)ㆍ정언(正言) 등을 역임했고,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15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ㆍ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명종 즉위년(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 1554년 형조ㆍ병조의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선조 1년(1568년)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스스로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설립하여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그의 사후인 1574년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창설되었고, 1575년에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중종ㆍ명종ㆍ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 문순(文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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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 자리한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묘. (下)1454년 조부 이계양(李繼陽)이 건립했다고 전하는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퇴계종택(경북도기념물 제42호)은 1929년 후손에 의해 새로 지어진 건물이다.
그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유성룡(柳成龍)ㆍ정구(鄭逑)ㆍ김성일(金誠一)ㆍ조목ㆍ이덕홍ㆍ기대승ㆍ금응협(琴應夾)ㆍ이산해(李山海)ㆍ정탁(鄭琢)ㆍ정자중ㆍ구경서(具景瑞)ㆍ조호익(曺好益)ㆍ황준량(黃俊良) 등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이르렀고, 나아가서 성혼(成渾)ㆍ정시한(丁時翰)ㆍ이현일(李玄逸)ㆍ이재(李栽)ㆍ이익(李瀷)ㆍ이상정(李象靖)ㆍ유치명(柳致明)ㆍ이진상(李震相)ㆍ곽종석(郭鍾錫)ㆍ이항로(李恒老)ㆍ유중교(柳重敎)ㆍ기정진(奇正鎭) 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한국유학사상의 일대장관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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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계(古溪) 이휘령(李彙寧)의 시문집인 고계집(古溪集).
구한말에 와서는 퇴계 황(滉)의 10대손 휘령(彙寧ㆍ1788∼1861)은 자는 군목(君睦), 호는 고계(古溪)로 아버지는 승순(承淳)이며, 종가의 지순(志淳)에게 입양하여 이황(李滉)의 10세 종손이 되었다. 순조 16년(1816년) 진사시에 합격해 1821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고,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ㆍ의금부도사ㆍ탁지랑(度支郎)ㆍ동복현감ㆍ서산군수ㆍ밀양부사ㆍ청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철종 2년(1851년) 동래부사를 거쳐 1853년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1855년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벼슬살이를 하면서 여가에 학문에도 주력하여 퇴계의 성리학에 전심, 가학(家學)을 이었다. 저서로는 ‘고계집(古溪集)’ 8권이 있다.
그밖의 인물로는 중언(中彦ㆍ1850∼1910)은 자는 중관(仲寬)ㆍ소자(小字), 호는 동은(東隱)으로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만우(晩佑)이다. 고종 16년(1879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ㆍ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ㆍ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ㆍ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으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세상의 혼란을 개탄하여 봉화(奉化) 임당산(林塘山)에 숨어 살며 농사를 지었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분개하여 김도현(金道鉉) 등과 함께 안동ㆍ영양(英陽) 등을 중심으로 창의, 전방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5적을 죽이라고 상소하였고, 1910년 국권피탈이 강행되자 단식을 하다가 순절하였다. 이 무렵 일본경찰 몇 명이 와서 음식을 먹도록 권하라고 식구들을 협박하자, 때마침 베개를 의지하고 졸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 벼락같은 호령을 하고 나서 머리를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똑바로 앉아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만도(晩燾ㆍ1842∼1910)는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으로 고종 3년(186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고, 이어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낸 뒤 부친상으로 사직했다. 뒤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복직되어 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했고, 부교리ㆍ장령ㆍ지평ㆍ병조정랑 등을 지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반대의 상소를 올린 최익현(崔益鉉)을 변호하여 파직되었으며, 뒤에 복직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양산군수로 부임하여 양민구휼과 탐관오리 소탕에 큰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執義)가 되고 홍문관ㆍ사헌부ㆍ사간원의 중책을 지냈으며, 1882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발탁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고향으로 내려가 백동(柏洞)에 서재를 지어 경적을 연구하는 등 학문을 닦았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며, 순종 4년(1910년) 국권피탈의 소식을 듣고 24일간 단식하다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1934년 6월 20일자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작성한 이육사(본명은 活)의 사진.
육사(陸史ㆍ1904∼1944)는 본명은 활(活)로 육사(陸史)는 호인데, 대구형무소 수감번호인 264에서 취음한 것이다. 중국 북경(北京) 조선군관학교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25년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대구지점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것을 비롯하여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번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1943년 서울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송치된 뒤 1944년 베이징감옥에서 죽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잡지를 발간하고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사회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5년 30살이 넘어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1937년 서울에서 신석초(申石艸)ㆍ윤곤강(尹崑岡)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하고, 목가풍의 시 ‘청포도’ 등을 발표, 상징주의적이면서도 호사한 시풍으로 일제강점기의 민족의 비극을 노래하였다. 유저로는 친지들에 의해 발간된 ‘육사시집(1946)’과 ‘광야(1971)’ 등이 있다.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되었고, 1964년 경북 안동에 시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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