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이씨(廣州李氏)의 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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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이씨(廣州李氏)의 시조 이당(李唐)은 고려 말 국자감(國子監)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조선조에 들어와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吏曹判書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보면 이당은 본래 광주(廣州) 출신의 관리로 국자생원(國子生員)에 올라 행실이 어질었으며,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신라 제17대 내물왕(奈勿王) 때 내사령(內史令)을 지낸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라고 하는 설(說)이 있다. 이자성(李自成)은 칠원(漆原ㆍ지금의 경남 함안)에 세거해 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신라에서 칠원백(漆原伯)이 되어 성주(城主)의 작위를 세습해 왔다.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의 기록에 의하면, 제56대 경순왕 때 고려가 건국되자 이에 불복하고 절의를 지켰기에 고려 태조가 강계(降階ㆍ벼슬의 품계를 낮춤)하여 회안호장(准安戶長ㆍ회안은 지금의 廣州)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자성(李自成)이 내물왕 때부터 고려 초까지 살았다면 600여 년간을 살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 기록은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광주 이씨는 시조에 관한 여러 주장이 었갈려 왔으나, 처음에는 본관을 회안(准安)으로 칭관하다가 태조 23년(940년) 지명이 광주(廣州)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廣州)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에는 합의를 보고 있다. 그 후 광주 이씨는 이자성(李自成)으로부터의 소목(昭穆)이 실전되어, 고려 말에 현달했던 현조(顯祖)를 각각 일세조로 하여 수보(修譜)를 하게 되었다.
▲ (上)경북 영천시 북안면 도유동 시조 이당(李唐)의 묘. 뒤쪽 묘는 그를 3년간 숨겨준 최원도(崔元道) 부인 영천 이씨의 묘. (下)영천 이씨 묘에서 내려다본 이당(李唐)의 묘.
광주 이씨의 분파는 ‘병진보(丙辰譜)’에 의하면, 둔촌공파(遁村公派)와 율정공파(栗亭公派)ㆍ석탄공파(石灘公派)ㆍ암탄공파(巖灘公派)의 3파는 그 선대로 올라가 한희(漢希)의 후손으로 연결이 된다. 익비(益庇)ㆍ익강(益康)은 한희(漢希)의 둘째와 셋째 아들이고, 율정공(栗亭公) 녹생(祿生)은 익비(益庇)의 7세손, 그리고 둔촌공(遁村公) 집(集)은 4세손이고, 석탄공(石灘公) 양중(養中)과 암탄공(巖灘公) 양몽(養蒙)은 익강(益康)의 5세손이다. 그러나 이 세 파간의 시조에 대한 의견은 일치하지 않고 있다.
‘광주이씨세보(廣州李氏世譜)’ 중 현존하는 최고본인 ‘경술보(庚戌譜)’ 편찬 당시 시조에 관해 각 파간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해 합보하지 못했으며, ‘병진보(丙辰譜)’에도 각 파의 시조 이상의 조상의 세계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있어 별보(別譜)로 편수ㆍ간행하였다. 그러다가 1987년 대동보(大同譜) 간행에 의해 ‘정묘보(丁卯譜)’로 완전 합보하였다. 그런데 율정공파(栗亭公派)ㆍ석탄공파(石灘公派)ㆍ암탄공파(巖灘公派)는 소수이고, 둔촌공파(遁村公派)가 대다수이므로 대부분의 광주 이씨들은 당(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遁村) 집(集)을 광주 이씨의 제1세조로 기록하고 있다.
▲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에 자리한 이당(李唐)의 부인 인화 이씨(仁華李氏)의 묘는 갑자사화로 실전되었다가 1754년 후손이 언덕에 묻혀 있던 비석을 발견해 찾게 되었다.
고을 원님의 아전(衙前)으로 살고 있던 당(唐)이 원님의 딸과 혼사를 맺게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야화가 전해내려온다. 고려말에 광주고을의 한 원님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 집 뜰에 있는 나무에 걸터 앉아 있었다. 꿈을 깬 원님이 이상히 여겨 뜰에 나가 나무 위를 올려다보니 자기의 아전인 당(唐)이 나뭇가지에 다리를 걸치고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고 있던 터라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원님은 벙어리 딸을 그에게 시집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택일을 하고 혼수준비를 하느라고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채단 끊는 사람이 가위를 잃어버리고 쩔쩔매고 있었다. 이때 벙어리 신부가 갑자기 말문이 터져 “문틀 위에 가위가 있다”고 말을 하니 사람들이 매우 신기하게 여겨 원님에게 알렸고, 원님은 용꿈의 신통함을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신랑신부가 혼례를 올리고 살면서 인령(仁齡)ㆍ원령(元齡)ㆍ희령(希齡)ㆍ자령(自齡)ㆍ천령(天齡)의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아전의 자식으로 5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에게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모두가 부러워하였다고 한다.
▲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영정과 ‘둔촌선생잡영(遁村先生雜詠)’.
당(唐)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집(集ㆍ1314~1387)은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성로(成老), 호는 묵암자(墨巖子)이었으나, 그 말년에 이름을 집(集), 자를 호연(浩然), 호를 둔촌(遁村)이라 고쳤다. 광주군 구천면 둔촌(遁村ㆍ지금 서울 강동구 둔촌동) 출신으로 충목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몽주(鄭夢周)ㆍ이색(李穡)ㆍ이숭인(李崇仁) 등과 교우하였다. 공민왕 17년(1368년) 신돈(辛旽)의 횡포를 논박하다가 그의 미움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자 노부(老父)를 등에 업고 영천(永川) 최원도(崔元道)의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공민왕 20년(1371년) 신돈이 주살(誅殺)되자 개경(開京)에 돌아와 재생(再生)의 뜻에서 이름을 집(集), 자를 호연(浩然), 호를 둔촌(遁村)으로 고쳤다. 그 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驪州) 천녕현(川寧縣ㆍ지금 여주군 금사면 이포)으로 물러나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그가 조선 왕조의 벼슬을 지냈다고 잘못 기록된 것을 광해군(光海君) 3년(1611년) 8대손인 영의정(領議政) 덕형(德馨)의 주장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시정하게 되었다. 현종(顯宗) 10년(1669년) 광주(廣州) 암사강변(巖寺江邊ㆍ지금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 구암서원(龜巖書院)을 세우고 그를 제향하였다. 아들로는 지직(之直)ㆍ지강(之剛)ㆍ지유(之柔)의 3형제를 두었고, 저서로 ‘둔촌집(遁村集)’이 전한다.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자리한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묘와 재실인 추모재(追慕齋).
집(集)의 장남 지직(之直ㆍ1354~1419)은 자는 백평(伯平), 호는 탄천(炭川)으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우왕 6년((1380년) 전구서승(典廐署丞)으로 과거에 2등으로 급제하고, 한림(翰林)ㆍ교리(校理)를 거쳐 관동(關東)과 호서(湖西) 지방의 관찰사를 지냈다. 태조 7년(1398년)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재임시 소도(昭悼)의 변란(제1차 왕자의 난)이 있자, 이를 극렬히 간하다 화를 입게 되었다. 이에 이방원(李芳遠)이 “이는 나의 친구인데 어찌 다른 사람의 부덕을 받고 하는 일이겠는가”라고 하고,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또한 그를 강력히 변호하여 금고(禁錮)의 처벌만 받게 되었다. 이후 광주(廣州)의 탄천(炭川)에 은거하며 독서를 일삼았는데, 배우려 오는 사람이 모두 ‘탄천선생’이라 하였다. 태종이 말년에 세종에게 다시 등용하라고 당부하여 말하니, 세종이 즉위하면서 곧바로 형조우참의(刑曹右參議)에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도 “이지직은 강직하기가 이제(伯夷·叔齊)와 같다”고 할 정도로 청렴ㆍ강직해 사후 ‘청백리(淸白吏)’로 올려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자리한 이집(李集)의 장남 탄천(炭川) 이지직(李之直)의 묘.
집(集)의 차남 지강(之剛ㆍ1363∼1427)은 자는 중잠(仲潛)으로 우왕 8년(1382년) 과거에 급제하여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녹사(錄事)를 지냈고, 1392년 기거주(起居注)로서 조선 건국에 참여해 이방원(李芳遠)의 측근이 되었다. 태종 7년(140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예문관 직제학(禮文館 直提學)ㆍ수원부사 등을 지냈다. 1411년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로서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에 파견나가 전라도 수군도절제사 홍유룡(洪有龍), 당진감무(唐津監務) 임을생(任乙生), 임실감무(任實監務) 최참(崔慙) 등의 비리를 밝혀 냈다. 그 뒤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ㆍ한성부윤ㆍ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1419년 세종이 즉위하자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호조참판으로 재정의 체계를 바로 세우는 데 노력하였다. 1425년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성품이 단정하고 검소했으며, 특히 재정 부서에 오래 근무했음에도 결코 축재에 관심이 없었다 한다. 문장에 능했고, 행정 업무에 있어 결단력이 있었으며, 후사가 없었다. 시호는 문숙(文肅).
▲ 경기도 하남시 덕풍동에 자리한 이집(李集)의 차남 문숙공(文肅公) 이지강(李之剛)의 묘와 신도비.
지직(之直)은 아들 3형제를 두었다. 장남 장손(長孫ㆍ1390~1420)은 태종 11년(1411년)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지냈으며, 30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묘자리를 정할 때 지사(地師)가 “좋은 자리는 틀림없으나 장자에게 나쁘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는 동생 인손(仁孫)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장하였으며, 이듬해 사망하였다. 이후 창녕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되었다.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둔촌(遁村) 이집(李集)의 묘 바로 아래 자리한 손자 이장손(李長孫)의 묘.
장손(長孫)의 아들 극규(克圭)는 자는 공서(公瑞)로 성종 2년(1471년) 문과(文科)에 급제, 성종 16년(1485년) 지평으로 있으면서 4품 이상의 당하관(堂下官)에게 역마(驛馬)를 이용하도록 하는 것은 역로의 조폐(凋弊ㆍ쇠잔해지는 폐해)를 가져오므로 불가함을 주장하였고, 그의 사촌인 극균(克均)이 병조판서가 되자 피혐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전라ㆍ황해도의 도사(都事)를 역임하고, 다시 영안도도사(永安道都事)에 제수되자 이를 회피하는 사사로운 청으로 탄핵당하기도 하였다. 1495년 연산군이 즉위하자 장례원 판결사(掌?院判決事)ㆍ호조참의ㆍ병조참의를 거쳐 1496년에 대사간이 되었으며, 1498년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은 법률에 따라 논단해서 신하로서 두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해주 수양산(首陽山)으로 낙향하여 지방인재들을 양성하였고, 창녕 운곡서원(雲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자리한 이장손(李長孫)의 아들 이극규(李克圭)의 묘.
지직(之直)의 차남 인손(仁孫ㆍ1395∼1463)은 자는 중윤(仲胤), 호는 풍애(楓厓)로 태종 17년(1417년)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지냈다. 그뒤 여러 벼슬을 거쳐 세종 11년(1429년)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좌랑(刑曹佐郞)ㆍ집의(執義)ㆍ경상도 관찰사ㆍ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단종 1년(1453년)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는데, 이 때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1455년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으며, 세조 5년(1459년) 우의정이 되었다. 시호는 충희(忠僖).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신지리에 자리한 충희공(忠僖公) 이인손(李仁孫)의 묘와 재실인 숭모재(崇慕齋).
지직(之直)의 3남 예손(禮孫ㆍ?~ 1459)은 자는 계윤(季胤)으로 세종 18년(1434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에 제수되었고, 이어 여러 관직을 거쳐 세조 3년(1457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제수받고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와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냈다. 1459년 관압사(管押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죽었다.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자리한 형조참의(刑曹參議) 이예손(李禮孫)과 부인 밀양 박씨의 합장묘.
지직(之直)의 차남 인손(仁孫)은 극배(克培)ㆍ극감(克堪)ㆍ극증(克增)ㆍ극돈(克墩ㆍ극균(克均)을 두었는데, 이들 5형제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오자등과(五子登科)’로 유명할 뿐 아니라 형제 중 4명이 공신(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세칭 ‘오극집(五克家)’이라 일컬어졌다. 아버지인 인손(仁孫)과 극배(克培)ㆍ극균(克均) 등 3부자가 정승(政丞)에 오르고, 다른 형제들도 판서를 지냄으로써 당대 제일의 문벌로 성장하였다.
인손(仁孫)의 장남 극배(克培ㆍ1422∼1495)는 자는 겸보(謙甫), 호는 우봉(牛峰)ㆍ매월당(梅月堂)으로 세종 29년(1447년) 진사가 되고,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어 감찰(監察)ㆍ정언(正言)ㆍ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으며, 세조 3년(1457년) 예조참판 겸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병조참판ㆍ예조참의 겸 집현전제학(禮曹參議兼集賢殿提學)을 지냈다. 1459년 북변의 야인정벌 때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출전하고 돌아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462년 이래 이조ㆍ형조ㆍ예조ㆍ병조판서를 지냈고, 외직으로는 평안도 절도사ㆍ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성종 2년(1471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1479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1485년 우의정을 거쳐 1493년 영의정에 제수되고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항상 자기 가문의 세력이 너무 성(盛)함을 염려하여 두 손자의 이름을 겸(謙)과 공(恭)으로 지어 주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도리는 이 두 글자(謙ㆍ恭)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훈계하였다 한다. 시호는 익평(翼平).
▲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에 자리한 익평공(翼平公) 이극배(李克培)와 부인 경주 최씨의 묘.
인손(仁孫)의 2남 극감(克堪ㆍ1427~1465)은 자는 덕여(德輿)로 세종 26년(144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가 되었다.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세손강서원 우찬독(世孫講書院右贊讀)이 되었다. 문종 즉위년(1450년) 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었고, 다음해 정인지(鄭麟趾)의 추천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세조 1년(1455년)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과 광성군(廣城君)에 책록되었으며, 그뒤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ㆍ이조참의ㆍ좌승지ㆍ이조참판ㆍ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1458년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태조 때부터 문종 때까지 정치에 모범이 될 만한 사적을 모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했고, 1460년 모련위(毛憐衛) 여진족을 정벌할 때 기무를 관장했으며 이듬해 왕명을 받아 ‘북정록(北征錄)’을 편찬했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동생 극균(克均)과 아들 세좌(世佐)가 모두 주살되었으며, 그의 묘를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려고 하자 갑자기 뇌성벽력이 일어나 묘를 파헤치지 못하여 화를 면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문경(文景).
▲ 경기도 성남시 야탑동에 자리한 공장공(恭長公) 이극증(李克增)의 묘.
인손(仁孫)의 3남 극증(克增ㆍ1431~1494)은 자는 경위(景祁), 호는 삼봉(三峯), 문종 1년(1451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종묘서녹사(宗廟署錄事)가 되었으며, 세조 2년(145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군기시직장(軍器寺直長)에 임명되었다. 1461년 이조정랑, 1463년 성균관 직강 겸 의정부 검상(成均館直講兼議政府檢詳)을 거쳐 사인(舍人)이 되었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 예종 즉위년(1468년)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책록되면서 광천군(廣川君)에 봉해졌다. 성종 1년(1470년) 이조판서에 올랐고,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호조판서와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성종 13년(1482년) 우참찬(右參贊)으로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어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병조판서ㆍ지경연사ㆍ형조판서ㆍ좌참찬을 지냈다. 1484년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제수되어 문묘(文廟) 중수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1488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벼슬은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숭정대부 판중추부사(崇政大夫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장(恭長).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자리한 이극돈(李克墩)의 묘.
인손(仁孫)의 4남 극돈(克墩ㆍ1435~1503)은 자는 사고(士高)로 세조 3년(1457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해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가 되고, 이어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ㆍ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ㆍ필선(弼善) 등을 지냈다. 1468년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에 올랐고, 이어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 1470년 대사헌ㆍ형조참판을 거쳐, 1473년 성절사(聖節使)로 중국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484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94년 이조판서ㆍ병조판서ㆍ호조판서를 지내고 평안ㆍ강원ㆍ전라ㆍ경상ㆍ영안(永安) 5도의 관찰사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그는 성종 이후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士林派)와 반목이 심한 훈구파(勳舊派)의 거목으로, 연산군 4년(1498년) 훈구파가 ‘성종실록’에 실린 사초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사림파를 모함한 사건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파의 많은 학자를 제거할 때 주동자였다.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광원군(廣原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라 하였으나 뒤에 관직과 함께 추탈되었다.
▲ 죽은 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여 시신 대신 의관만으로 만든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리 이극균(李克均)의 묘.
인손(仁孫)의 5남 극균(克均ㆍ1437∼1504)은 자는 방형(邦衡)으로 세조 2년(1456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460년 회령도사(會寧都事)를 거쳐 지평ㆍ도체찰사의 종사관을 지냈다. 성종 3년(1472년) 천추사(千秋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474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1484년 대사헌을 지내고, 1491년 이조판서로 서북면도원수가 되어 야인(野人)정벌에 공을 세웠다. 연산군의 음탕한 행실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인동(仁同)으로 귀양가서 사사(賜死)되었다. 죽음에 임한 그는 형관(刑官)에게 “내 나이 장차 칠십이고 몸에 백병(百病)이 얽혔으니 지금 죽어도 한은 없다만, 나라를 위한 공로가 있고 몸에 아무런 죄가 없음을 네가 돌아가서 반드시 임금께 아뢰어라. 만약 아뢰지 않으면 내 죽은 넋이 꼭 너를 벌하고야 말리라”고 말하여, 형관이 돌아가 그의 말을 연산군에게 전하니 연산군이 더욱 노하여 뼈를 부수도록 했다고 한다. 현재의 묘는 죽은 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여 시신이 없고 대신 의관만을 만들어 모셔져 있으며, 후에 신원되었다.
극감(克堪)의 아들 세좌(世座ㆍ1445∼1504)는 자는 맹언(孟彦)으로 예종이 즉위한 뒤 판관을 지냈고, 성종 8년(1477년) 첨정(簽丁)으로 식년문과에 응시해 갑과로 급제하여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1479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ㆍ참찬관(參贊官)을 거쳐 이듬해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ㆍ우부승지ㆍ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482년 우승지ㆍ좌승지를 거쳐 이듬해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고, 이어 예조참판이 되었다. 1485년 10월 호조참판으로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으며, 다음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고 이듬해 3월에 귀국하여 그뒤 광양군(廣陽君)에 봉해졌다. 1489년 다시 예조참판이 되고, 이어 대사헌ㆍ호조참판ㆍ호조판서를 지냈다. 연산군 3년(1497년)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로 공신문(拱辰門) 밖의 담을 축조하는데 유위군사(留衛軍士)를 동원하였으며, 이어 이조판서ㆍ판중추부사ㆍ예조판서를 거쳐 1501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하였다. 1503년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에 참석하였는데, 어사주의 잔을 돌릴 때 잘못하여 어의(御衣)에 술을 쏟는 실수를 저질러 귀양갔으며, 이듬해 갑자사화 (甲子士禍) 때 거제로 유배되던 중 곤양군 양포역(良浦驛)에서 자살의 명을 받고 자결하였다.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자리한 문익공(文翼公) 이덕형(李德馨)의 묘와 영정.
덕형(德馨ㆍ1561~1613)은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민성(敏聖)의 아들이며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선조 13년(1580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으며, 1582년 명나라에서 온 조사(詔使) 왕경민(王敬民)이 만나보고 싶어했으나 사적인 면대는 도리에 어긋남을 들어 사양하였다. 이에 왕경민은 만나보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그의 인격을 칭찬하는 글귀를 보내왔다고 한다. 그 뒤 부수찬ㆍ정언ㆍ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8년 이조정랑으로서 일본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해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1590년에는 동부승지ㆍ우부승지ㆍ부제학ㆍ대사간ㆍ대사성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어 대제학을 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일본사신 겐소[玄蘇] 등과 화의 교섭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뒤 선조를 호송하였고, 청원사로 명(明)나라에 건너가 원병파견을 요청,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었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 이조판서, 1595년 경기도ㆍ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 체찰부사를 지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해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는 등 공을 세워 우의정에 올랐으며, 이어 좌의정으로 훈련도감 도제조(訓鍊都監都提調)를 겸하였다. 1601년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로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ㆍ강원도의 4도체찰사를 겸하여 전란 뒤의 민심수습과 군대정비에 힘썼으며, 대마도 정벌을 건의하였다. 1602년 영의정, 1606년 영중추부사로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명나라에 다녀와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광해군 5년(1613년)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 삭직당했다. 그는 이황(李滉)의 학맥을 잇는 남인 출신으로 특히 이항복과 절친하여 많은 일화가 전하며, 글씨에 뛰어났다. 포천(抱川) 용연서원, 상주(尙州) 근암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익(文翼).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에 자리한 충정공(忠正公) 이준경(李浚慶)의 묘.
준경(浚慶ㆍ1499~1572)은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ㆍ남당(南堂), 극감(克堪)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세좌(世佐), 아버지는 홍문관 수찬 수정(守貞)이다.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윤경(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학업을 닦고, 이연경(李延慶)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중종 17년(1522년)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중종 26년( 153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그 해 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가 중종에게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입은 사류들의 무죄를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ㆍ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ㆍ대사헌 등을 지내고, 1544년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형조참판이 되었다. 명종 3년(1548년) 병조판서에 올랐으나 이기(李芭) 일파의 탄핵으로 1550년 충청도 보은(報恩)에 유배되었다가 1553년 함경도순변사(咸鏡道巡邊使), 이어 우찬성 겸 병조판서가 되고, 우의정ㆍ좌의정을 거쳐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명종이 죽자 하성군(河城君) 균(鈞ㆍ선조)을 왕의 자리에 오르게 했으며,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들을 신원하는 동시에 억울하게 수 십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ㆍ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ㆍ이이(李珥) 등 신진 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선조 4년(1571년)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유차(遺箚ㆍ유훈으로 남기는 차자)를 올려 이이ㆍ유성룡(柳成龍) 등 신진 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淸安)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
▲ 1670년 이한명(李漢命)이 사랑채를 건립하였고, 사당은 5대손 묵헌(默軒) 이만운(李萬運)의 사후 유림의 뜻에 따라 1820년 건립된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묵헌종택(默軒宗宅).
만운(萬運ㆍ1736~1797)은 자는 원춘(元春), 호는 묵헌(默軒), 정조 1년(1777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은 높지 못했다. 1782년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에 임명되기에 앞서 영조 46년(1770년)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보정하라는 왕명을 받아 9년에 걸쳐 완성함으로써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라 했으나 간행되지 못하고, 고종 40년(1903년) ‘증보문헌비고’라 하여 간행되었다. 1785년 금화현감, 1790년 강화경력(江華經歷), 1796년에는 당상관이 되었으며, 왕명으로 ‘동국문헌비고’ 재보완에 착수했으나 이듬해에 죽게 되어 아들 유준(儒準)이 완성하였다. 천문ㆍ역산(曆算)ㆍ지리ㆍ명문(銘文)에 이르기까지 박학다식했다.
그외 도승지(都承旨) 기만(耆晩)의 아들 하원(夏源)은 영조(英祖)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ㆍ나이가 많은 임금이나 실직에 있는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문관을 위해 마련한 경로당)에 들어가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어 명문의 대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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