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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가평 이씨(加平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가평 이씨(加平李氏)는 신라(新羅) 때 완산호장(完山戶長)을 지낸 이인보(李仁輔)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 조상은 중국에서 건너 온 이신(李莘)으로 은(殷)나라 기자(箕子)가 중국인 5천여 명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이주(移住)할 때 호종(扈從)하였다고 하며, ‘가평이씨세보(加平李氏世譜)’에는 그 후손 이경의(李景義)가 고조선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금마군(金馬郡)에 이르러 마한(馬韓)의 한왕(韓王)이 되도록 도운 공으로 좌명공신대사도(佐命功臣大司徒)가 되고 완산군(完山郡)에 봉해졌다고 적혀 있다. 그후 자손들은 여러 대를 완산(完山)에서 살았다.

‘계해보(癸亥譜)’에는 관적이 완산(完山)ㆍ조종(朝宗)ㆍ가평(加平)으로 변하는 ‘신축보(辛丑譜)’의 서문과 조선조에 다림(多林)이 가평군(加平君)에 봉해졌다는 ‘정유보(丁酉譜)’의 서문이 함께 실려 있다. ‘무술보(戊戌譜)’에는 8세손 기문(起文)이 가평 조종현(朝宗縣ㆍ조종은 가평의 옛 지명)에 입거(入居)하여 본관을 조종(朝宗)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가평 이씨는 중조(中祖)를 다림(多林)으로 삼아 세계표(世系表)도 그로부터 시작되는데, 이인보의 31세손이 된다. 한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다림(多林)의 8대조로 호장(戶長)을 지낸 진수(珍守)를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 충남 논산시 연산면 한전리에 자리한 시조~30세조 제단 및 세단비(世壇碑).
 

그 후 29세손인 춘계(椿桂)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그의 증손 형손(亨孫)이 조선 세조(世祖)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한 공으로 가평군(嘉平君)에 봉해졌으며, 지명의 변천으로 조종(朝宗)이 가평(加平)으로 개칭됨에 따라 본관(本貫)을 가평(加平)으로 삼고 춘계(椿桂)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현재의 가평군 하면 신상리와 하판리 일대에 수십 기의 대형 고분이 산재하고 있는 바 이는 가평 이씨의 분묘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어, 1995년11월 가평문화원의 협조로 고분 5기를 발굴하였으나 이미 도굴된 상태로서 고증할만한 유물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가평 이씨(加平李氏)는 34세손에서 첨정공파(僉正公派·世溫)ㆍ첨사공파(僉使公派·世良)ㆍ학생공파(學生公派·世恭)ㆍ감찰공파(監察公派·長憲)ㆍ가원군파(嘉原君派·長生)ㆍ현감공파(縣監公派·長卿)ㆍ진사공파(進士公派·長彦)ㆍ찰방공파(察訪公派·長弘)ㆍ사직공파(司直公派·長俊)ㆍ서령공파(署令公派·長輔)ㆍ학생공파(學生公派·長業)로 분파되었다.

 

 

 

▲ 충남 논산시 연산면 한전리 시조 제단 아래 자리한 중시조 가평군(加平君) 이다림(李多林)의 묘.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춘계(椿桂)의 손자 다림(多林)과 증손인 윤손(允孫)ㆍ형손(亨孫) 형제가 유명했다. 다림(多林ㆍ1394~1468)은 태종 12년(1412년) 무과(武科)에 급제, 40여 년간 해안지방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하고 대마도 징벌(1419년)과 북방 변경에 설치된 4군과 6진에 침범하는 여진족 방어에 참여하여 부장(部將) 또는 지휘관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문종 원년(1451년) 함경도 부령부(咸鏡道富寧府)의 도호부사 겸 병마첨절제사(都護府使兼兵馬僉節制使)와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지내고, 세조가 즉위하자 전농시판사(典農寺判事)을 거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ㆍ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ㆍ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등을 역임하였다.
 

 

 

 

▲ 충남 논산시 연산면 한전리에 자리한 장간공(章簡公) 이윤손(李允孫)의 묘와 세조가 평안도 도절제사 이윤손에게 내린 천순원년이윤손유서(天順元年李允孫諭書ㆍ보물 제1289호).
 

다림(多林)의 장남 윤손(允孫ㆍ1414~1467)은 초명은 원손(元孫), 자는 맹숙(孟叔), 조선 정종(定宗) 때 등과하여 세종 때 경상좌도 병마절제사ㆍ한성부윤ㆍ호조참의 등을 역임했다. 단종 1년(1453년) 경상좌도 병마절제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ㆍ호조참의를 지냈다. 1455년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평안도 도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457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이듬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있던 중 진하사(進賀使)로 부사인 형조참판 송처관(宋處寬)과 같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ㆍ한성부윤(漢城府尹) 등을 지냈다. 1459년 호조참판에 이어 공조참판ㆍ형조참판ㆍ한성부윤을 역임하고, 이듬해 행상호군(行上護軍)을 지냈다. 그 뒤 세조 7년(1461년) 평안도 관찰사ㆍ충청도 도절제사ㆍ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ㆍ충청도 도절제사, 1466년에는 내금위장(內禁衛將), 이듬해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 제수되었다. 시호는 장간(章簡).

 

 

▲ 평호공(平湖公) 이형손(李亨孫)과 정부인 단양 우씨의 위패를 봉안한 충북 보은군 탄부면 덕동리 부조묘(不祧廟).
 

다림(多林)의 차남 형손(亨孫ㆍ1418~1496)은 자는 창백(昌伯)으로 세조 1년(1455년) 판관(判官)으로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녹훈되고, 전라도절도부사 겸 전주부윤(全羅道節度副使兼全州府尹)이 되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연산군(連山君)에 봉해졌다가 곧이어 가평군(嘉平君)으로 개봉되었다. 성종 3년(1471년) 행공주목사를 거쳐, 1477년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전임되었다가 12월에 청주목사가 되었으나 청주목사로 도임할 때 너무 많은 물건과 수행원들을 거느렸다는 비판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1479년 다시 서용되고 1483년 10월 다시 가평군(嘉平君)으로 봉해졌으며, 옥구ㆍ무장ㆍ석성의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옥구현감(沃溝縣監) 당시 체임(遞任)된 적이 있으나 이는 그가 현명한 대처를 하지 못하였다기보다는 그 지역 민심이 나빠서 잘 다스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체임된 이후 ‘30년 동안 옥구현에서 수령의 역할을 제대로 한 인물이 하나도 없었다.’는 승정원(承政院)의 보고는 사실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1490년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고 성종 23년(1492년) 서얼(庶孼)의 인재를 거두어 쓰고자 우림위(羽林衛)를 설치할 때 그 장(將)을 겸임토록 했으며, 전라도 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아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는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시호는 평호(平湖).

 

 

▲ 1509년 이장생(李長生)이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축성한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충청수영성(오천성ㆍ사적 제501호)과 불망비.
 

장생(長生ㆍ1467~1522)은 성종 21년(1490년) 무과(武科)에 급제, 연산군 1년(1495년)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한 후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ㆍ함경북도 병마우후(咸鏡北道兵馬虞候)ㆍ훈련원 도정(訓練都正)ㆍ함경남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중종 4년(1509년) 충청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왜구 등 외적의 침범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충청수영(忠淸水營ㆍ오천성)이 토성으로 너무 허술한 것을 석성(石城)으로 축성했으며,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部承旨)와 좌승지(左承旨)를 지내고 중종 7년(1512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호조참판(戶曹參判)ㆍ형조참판을 지냈다. 1513년 중추부 동지사 겸 형조참판(中樞府同知事兼刑曹參判)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ㆍ병조참판(兵曹參判)ㆍ동지의금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同知義禁府事兼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냈다. 중종 14년(1519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재임 중 가원군(嘉原君)에 재 봉군(封君)되었으며, 중종 17년(1522년) 병으로 사임하였다.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에 자리한 이장경(李長卿) 신도비.
 

장경(長卿ㆍ1472~1531)은 자는 원로(元老), 연산군 원년(1495년) 소과(小科)에 합격해 진사(進士)가 되고, 음서(蔭敍)로 별좌(別坐)로 출사한 후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ㆍ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ㆍ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翊衛司)ㆍ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중종 11년(1516년) 의령현감을 거쳐 예산현감에 보임되고, 중종 21년(1526년)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고 행안음현감(行安陰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 충북 보은군 탄부면 덕동리에 자리한 포제(圃霽) 이명백(李命百)의 묘와 교지.
 

명백(命百ㆍ1552~1593)은 자는 인노(仁老), 호는 포제(圃霽), 의병장 조헌(趙憲)의 문인(門人)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이 칠백의사를 이끌고 왜적과 싸울 때, 어머니가 편찮아 고향인 덕골로 낙향하여 고향인 보은에서 활동하였다. 적암(赤岩)에서도 왜적과 싸워 승전하였으며, 청주성 탈환에도 기여하는 등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우고 다음해 전사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순절의 비보가 전해지자 정부인(貞夫人) 신평 이씨(新平李氏)는 현장으로 직접 달려가 시신을 치마폭에 친히 거두었다.

구병산 남쪽 국도변에 있는 적암리(赤岩里)는 일명 사기막(士氣幕)이라고 하는데, 그가 의병을 일으켜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실제 적암리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시루봉의 암릉이며, 구룡산 일대의 암릉들은 붉은 기운을 띠고 있다.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청동리에 자리한 백봉(白峰) 이민진(李敏進)의 묘와 정려(향토유적 제19호) 및 충노비(忠奴碑).
 

민진(敏進ㆍ1608~1636)은 자는 자선(子善), 호는 백봉(白峰),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가 도성을 떠나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분기하여 논산 지역에서 3,0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출정에 앞서 죽음을 각오하고 사후 표징으로 검게 표시한 행전과 버선을 착용하였고, 경기도 광주 험천(險川)에서 적의 기병을 맞아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시체는 노비인 영상(永上)과 귀상(貴上)이 적진을 뚫고 모셔와 안장했다. 조정에서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를 증직하였고, 이후(1834년) 이조참판을 가증(加贈)하고 정려(旌閭)를 내려 충렬을 기렸으며, 그후 논산 충곡서원(忠谷書院)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