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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공주 이씨(公山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공주 이씨(公山李氏)의 시조 이천일(李天一)은 ‘을축보(乙丑譜)’에 의하면, 신라 박혁거세 5년(기원전 53년) 문장이 뛰어나 중국 한(漢)나라에 들어가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대장군(大將軍ㆍ무관의 종3품 벼슬)에 올랐고, 흉노(匈奴) 정벌에 공을 세워 요동백(遼東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후 신라로 돌아와 여러 벼슬을 거쳐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졌고, 문무(文武)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적혀 있다. 공산(公山)은 공주(公州)의 옛 이름으로, 후손들이 이를 연유로 공주(公州)를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공주이씨세계도(公州李氏世系圖)’에는 시조로부터 중시조(中始祖)까지의 소목(昭穆)이 뚜렷하며, 같은 관향이면서 공주(公州)라 하는 종문(宗門)과, 공산(公山)이라 부르는 종문이 있지만 모두가 그 뿌리가 같다. 그후 31세 백령(栢齡)이 양산 이씨(陽山李氏)의 관조로, 34세 자송(子松)이 수원 이씨(水原李氏)의 관조로 분적(分籍)되었다.

 

 

▲ 충남 공주시 월성동 명탄서원(鳴灘書院) 뒤쪽에 자리한 시조의 단소인 모선단(慕先壇).
 

고려조 후대 36세손 전공시랑(典工侍郞) 우(堣ㆍ揚胡公)의 후손에서 크게 번창하여 우(堣)의 아들 저(苧)는 고려에서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고 화성부원군(花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사손(思孫)이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냈다.

공주 이씨의 세계(世系)는 사손(思孫)의 두 아들인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엽(曄)과 의정부참지사(參知議政府事)를 지낸 서(曙)의 아들 대에서 7파로 갈라졌다. 엽(曄)의 여섯 아들은 경력공파(經歷公派ㆍ明善)ㆍ어사공파(御史公派ㆍ明誠)ㆍ공숙공파(恭肅公派ㆍ明德)ㆍ지평공파(持平公派ㆍ明保)ㆍ참의공파(參議公派ㆍ明尹)ㆍ현감공파(縣監公派ㆍ明義)로, 그리고 서(曙)의 아들이 강양공파(剛襄公派ㆍ敷)로 분파하였는데 그중 경력공파(經歷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후손도 가장 많다.
 

 
 

▲ 공주 이씨의 조선시대 과거급제자 명단.

경력공파(經歷公派) 파조(派祖) 명선(明善)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13년(1326년) 과거에 급제하고 춘추관 좌사연을 거처 송경부에 5년, 사헌부 감찰에 5년, 형조참의에 5년, 승정원 동지부대언에 3년, 병조참의로 3년, 예조참의로 5년을 지냈다. 공민왕(恭愍王) 7년(1359년) 통훈대부 개성경력(개성은 고려의 수도로 경력은 지금 서울시장에 해당)에 이르렀고 1361년 향년 45세로 죽으니 묘는 북한쪽인 강원도 이천군 학봉면 심상리에 있다.

명선(明善)의 현손 겸(謙)이 연산군(燕山君) 때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그곳에서 정착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경성을 중심으로 한 관북지방에 집중 세거하고 있었다.



명선(明善)의 10세손 기수(麒壽)ㆍ붕수(鵬壽) 형제가 임진왜란 때 정문부(鄭文孚)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옥탑평(玉塔平) 싸움에서 순절하여 형은 부제학(副提學), 아우는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원배(元培)는 명선(明善)의 18세손인데 경서(經書)와 학행(學行)으로 이름나 정조(正祖) 임금 앞에서 구경(九經) 질문 62조를 서슴없이 답변하여 많은 포상을 받고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하패리에 자리한 문성공파(文成公派) 파조 이명성(李明誠)의 단소(壇所).
 

문성공파(文成公派) 파조(派租) 명성(明誠)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포은(圃隱) 정몽주와 사귀었고, 고려조에 벼슬하여 감찰전 중시어사(監察殿中侍御史)에 올라 지제고(知制誥)를 겸하고 있으면서 문관들의 문학을 독려(督勵)하고 시험하였다. 고려의 운이 차츰 기울어지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기를 나라가 망함에 있어 이를 구하지 못하면 충이 아니요, 어버이가 늙었는데 이를 끝내 부양하지 못하면 효가 아니다. 그러나 고국의 의리는 중하고 노모의 은혜는 가볍다 하고 드디어 정몽주와 망월대 아래에서 서로 눈물로 이별을 고하고 벼슬을 버리고 이천 산속으로 은거하였다. 조선조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이 중용하고자 벼슬을 주어 여러 차례 불렀으나 그때마다 차라리 귀를 자르고 물에 빠져 죽을망정 나아가지 않겠다는 결의로 이를 거부하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두문동서원지(杜門洞書院誌)에 등재되어 있는 두문동72현의 한 분으로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문성공파(文成公派) 파조 이명성(李明誠)과 공숙공파(恭肅公派) 파조 이명덕(李明德)의 학행을 기려 건립된 충남 공주시 월송동 충절사(忠節祠ㆍ충남문화재자료 제70호). 명탄서원으로도 불리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1851년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공숙공파(恭肅公派) 파조(派祖) 명덕(明德ㆍ1373~1444)은 자는 신지(新之), 호는 사봉(沙峰)으로 엽(曄)의 아들이다. 태조 5년(1396년)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보직되었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사간원 우헌납(司諫院右獻納)ㆍ장령(掌令)ㆍ사인(舍人)ㆍ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ㆍ형조참의(刑曹參議) 겸 지도관사(知都官事) 등을 역임했다. 태종 15년(1415년) 승정원 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이 되고, 좌부대언(左副代言)에 승진했다.

세종이 즉위하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전임, 그 후 강원도 관찰사ㆍ예조참판(禮曹參判)ㆍ대사헌ㆍ동지총제(同知摠制)에 역임, 세종 12년(1430년)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병조판서ㆍ공조판서를 거쳐, 1438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그 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내고, 1442년 70세가 되어 치사(致仕)했으나 다시 지중추부원사(知中樞院事)로 복귀, 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승진하여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우의정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공주의 명탄서원(鳴灘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공숙(恭肅).

 

 

▲ 대전광역시 중구 정생동에 자리한 공숙공파(恭肅公派) 파조 이명덕(李明德)의 묘.
 

또한 그의 8세손 정견(庭堅)ㆍ정헌(庭憲) 형제가 선조(宣祖) 때 함께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무공을 세워 명성을 날렸다. 부산진성 전투에서 순직한 부사맹(副司猛) 정헌(庭憲)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고,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로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전사한 몽구(夢龜)는 이충무공의 좌별도장(左別都將)으로 왜장의 전승 신표인 부채 금선(金扇)을 노획하였다. 그 외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부장(副將) 지현(之賢), 공주 공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부장(副將) 천장(天章) 등 많은 공신이 있다.

지평공파(持平公派) 파조(派祖) 명보(明保)는 조선 태조 7년(1398년) 등제하여 사헌부 8년, 승정원 10년, 사헌부 감찰직에 2년, 양주목사 3년, 한성부 5년, 평양소윤(平壤小尹)과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야사(野史)에는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옛 친구이었으므로 태조가 지평(持平)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했다 하며, 그래서 손자 진을 귀하게 여겨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하였다고 전한다. 묘는 실전되어 후손들이 공주시 유학읍 만천리에 중시조의 단을 설치하고 매년 음력10월 초1일에 제실에서 추향제를 봉행하고 있다.
 

강양공파(剛襄公派) 파조 부(敷ㆍ?∼1422)는 호는 일파(一派)로 조영규(趙英珪)의 부하로서 1392년 7월 이방원(李芳遠)의 지시를 받고, 조영규ㆍ조영무(趙英茂)ㆍ고려(高呂) 등과 함께 정몽주(鄭夢周)를 추격하여 선죽교에서 살해하였다. 그 뒤 배극렴(裵克廉)ㆍ조준(趙浚)ㆍ남은(南誾) 등을 따라 이성계(李成桂)의 사저로 찾아가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 데 가담하였으며, 이 공으로 조선개국3등공신(朝鮮開國三等功臣)에 책립되고 흥원군(興原君)에 봉해졌다.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등을 역임하고, 태종 때는 총제(摠制)가 되어 외갑사(外甲士)를 지휘하는 등 건국 초기의 군사업무에 깊이 관여하였다. 시호는 강양(剛襄).

그외
지평공파(持平公派) 파조 명보(明保)의 14세손 동발(東發ㆍ철종 때 우승지), 참의공파(參議公派) 명윤(明尹)의 13세손 응거(膺擧ㆍ정조 때 한성부 판윤)가 이름났고, 현감공파(縣監公派) 명의(明義)의 18세손 병덕(秉德)은 순조(純祖)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근ㆍ현대에 와서는 독립운동가로서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중 한 명인 목사 필주(弼柱ㆍ1869~1932), 안명근(安明根) 의사와 안악사건(安岳事件)을 주도한 목사 승길(承吉), 분대장으로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전사한 화일(化日)이 있다.

필주(弼柱ㆍ1869∼1932)는 20세 때 군대에 들어가 8년간 장교로 근무,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상동교회 목사 전덕기(全德基)를 중심으로 한 상동청년회에 가입하고 1910년 기독교청년회(YMCA)의 초대 체육교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애국사상을 가르쳤다. 기독교신자로서 미신타파, 계급차별의 배격, 자립정신의 고취를 표방하고 새로운 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 등을 맡아보다가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뒤 목사직에 있으면서 교회부설유치원ㆍ소학교ㆍ부녀자야학을 설치헤 육영사업에 힘썼으며 수원남양교회를 맡아 교역(敎役)에 힘쓰면서 신사참배 거부 등 일제에 항거하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좌)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한 이필주(李弼柱). (우)1932년 1월 8일 일본왕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 순국한 이봉창(李奉昌).
 

봉창(奉昌ㆍ1900~1932)은 서울 용산(龍山) 문창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25년 형 범태(範泰)와 일본으로 건너가 기노시타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으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다. 그 뒤 도쿄[東京]ㆍ오사카[大阪] 등지를 방랑하다 독립운동에 투신하려고 1931년 1월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김구(金九)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일본왕폭살계획을 추진, 인쇄소 직공, 악기점 점원 등으로 일하며 자금을 모았다. 그해 12월 일본왕을 암살할 것을 선서한 뒤 다시 일본으로 가 1932년 1월 8일 일본왕 히로히토[裕仁]가 만주국 괴뢰황제 푸이[溥儀]와 도쿄 요요키연병장[東京代代木練兵場]에서 관병식을 한 뒤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櫻田門] 앞에서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암살에 실패,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비공개재판으로 사형이 선고되고, 10월 10일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