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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이)

우계 이씨(羽溪李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우계(羽溪)는 강원도 강릉(江陵)의 옛 지명으로 일명 옥당(玉堂)이라고도 했다. 고구려 때는 우곡현(羽谷縣)이라고 불리워졌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우계현(羽溪懸)으로 변경되어 삼척군(三陟郡)에 속했고, 현종 9년(1018년) 강릉(江陵)에 속하였다. 근년에 명주군(溟州郡) 옥계면(玉溪面)이 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부로 강릉시 옥계면으로 변경되었다.

우계 이씨(羽溪李氏) 시조(始祖) 이양식(李陽植)은 신라 초기 6촌의 양산촌장(楊山村長) 이알평(李謁平ㆍ경주 이씨 시조)의 47세손인 이선용(李宣用)의 둘째 아들로 고려 인종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좌복야(左僕射)를 지냈으며, 만년에 낙향하여 강릉의 속현인 우계현(羽溪縣)에 세거하였다. 

 

 

▲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현내리에 소재한 우계 시조 이양식(李陽植)의 사우(祠宇)와 경모비(敬慕碑).
 

그의 아들 순우(純祐ㆍ?~1197)는 초명은 청(請), 자는 발지(拔之), 의종 18년(1164년) 문과(文科)에 장원, 예부상서(禮部尙書)ㆍ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으며, 경주(慶州)에서 우계(羽溪ㆍ강릉의 속현)로 이거(移居)하였다. 명종 16년(1186년) 공역승 겸 직한림원(供驛丞兼直翰林院)으로 명을 받아 유창(乳瘡)으로 고생하는 왕태후(王太后ㆍ恭睿太后 任氏)를 위해 기도문을 지었는데 “종기는 어머니의 젖에 났으나 아픔은 짐의 마음에 있다(瘡生母乳痛在朕心)”는 글귀로 왕의 총애를 받기 시작, 우정언(友正言)ㆍ국자제주(國子祭酒)ㆍ한림학사(翰林學士)ㆍ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을 역임했다. 그 뒤 태자빈객(太子賓客)ㆍ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ㆍ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을 역임하고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으나, 명종 27년(1197년) 최충헌(崔忠獻)의 난이 일어나 참지정사(參知政事) 이인성(李仁成)과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 등 36인과 함께 화(禍)를 입었다.


 

그 후 양식(陽植)의 4세손 구(球)는 초명은 옥(沃)으로 고려 충렬왕 8년(1283년) 원(元)나라에 들어가 약관 18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환국(還國)후, 고려 조정에 중용(重用)되어 예빈경(禮賓卿)에 이르렀으며, 당대의 문명(文名)을 날렸다. 특히 시문(詩文)에 능하여 삼척(三陟) 죽서루(竹西樓)에 그 시문과 더불어 오늘에까지 명성이 전래되고 있으며, 구(球)에 이르러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우계(羽溪)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 조선 초기 누각인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죽서루(竹西樓ㆍ보물 제213호)에 걸려 있는 이구(李球)의 시가 적힌 현판.
 

시조 양식(陽植)과 2세(世) 순우(純祐)의 거주지 기록은 알 길이 없으나 당시 도읍지가 개성(開城)이었으므로 관직의 수행에 따라 개성과 우계를 오가며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며, 3세 적(迪)은 우계현 북쪽 20리에 있는 해령산(海靈山)에서 10년간 은거했다는 기록과 6세 옥천부원군 녹후(祿厚)의 묘가 우계 송악산(松岳山) 동록(東麓)에 연봉(連封)으로 있음이 대동보에 실려 있으나 분명하지 않고, 7세 흥원(興元)의 묘도 송악산(松岳山)에 있다 하였으므로 7세 이상은 우계(羽溪)에서 세거(世居)하였으나 실전(失傳)되었다.

우계 이씨 분파내력(分派來歷)은 크게 나누면 맏집인 종파(宗派)와 둘째집인 옥천부원군파(玉泉府院君派)로 나누어진다.

종파(宗派)의 파조(派祖)는 8세 억(薿)으로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유장(儒將)으로 강계원수(江界元師)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재임 중 우왕 14년(1388년) 원사(元師) 홍인계(洪仁桂)와 더불어 선봉으로 요동을 공격하여 적군을 격멸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재차 원정하여 요동정벌시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하여 개국하고 그에게 도평의사사사(都評議使事事)의 높은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절의(節義)하에 순흥(順興ㆍ지금의 영주시 순흥면)에 퇴거하였다. 태조는 여러 차례 소명(召命)하였으나 불응하자 교지를 내려 전토(田土)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그 아래 중시조인 중파(中派)로는 종파(宗派·홍천공파)ㆍ별좌공파(別坐公派)ㆍ감역공파(監役公派)ㆍ참봉공파(參奉公派)ㆍ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ㆍ부사정공파(副司正公派)ㆍ사정공파(司正公派)ㆍ사과공파(司果公派)ㆍ직장공파(直長公派)가 있다.

 

 

▲ 단종의 안위를 걱정하며 세조 2년(1456년)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이 원호(元昊)ㆍ조여(趙旅)와 함께 바위에 이름을 새겨 놓고 충절을 보였다는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삼공제명암(三公題名岩)과 그의 생애를 기록한 ‘도촌선생실기(桃村先生實記)’.
 

억(薿)의 4세손 수형(秀亨ㆍ1435~1528)은 자는 영보(英甫), 호는 도촌(桃村)으로 17세에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평서서령(平市署令)이 되었으나, 단종이 수양(首陽)에게 양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을 때 나이 21세였다. 이후 원호(元昊)ㆍ조여(趙旅)와 함께 영월 수주면의 무릉계곡(武陵溪谷)에서 자주 만나 단종의 안위를 염려하였으며 치악산에 올라 충절을 맹세하여 바위에 이름을 새기고 관직을 버리고 영주(榮州) 도촌(桃村)에 은거하였다.

조선 세조와는 등극하기 전에 교분이 두터웠던 사이라 세조가 여러 번 등용하려 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사후에는 사림(士林)에서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하고, 순흥의 도계서원(道溪書院)에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주벽(主璧)으로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제향되었다. 철종 9년(1858년) 승정원 좌승지(承鄭院座承旨)에 증직되었다가 고종 때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吏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官)에 추증되었다. 
  

 

 

▲ (上)경북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도계서원(道溪書院)은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을 제향하기 위해 1610년 세워졌으나 1868년 훼철되고 최근 복설되었다. (下)우계 이씨 종택에 보관되어 있던 이 현판은 도계서원에 걸려 있던 현판으로 사료된다.
 

옥천부원군파(玉泉府院君派)의 파조(派祖) 6세 녹후(祿厚)는 초명이 제수(悌守)로, 고려 충숙왕 10년(1323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전이사사 겸 대사헌(判典理司事兼大司憲)ㆍ문하시중(門下侍中)ㆍ평장사(平章事)ㆍ삼중대광(三重大匡))의 품계(品階)로 후에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아래 중시조인 중파(中派)로는 찬성공파(贊成公派)ㆍ참판공파(參判公派)ㆍ충위공파(忠衛公派)가 있다.



우계 이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14명을 배출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예빈사승(禮賓寺丞)을 역임한 구(球)의 현손인 광식(光軾)과 그의 아들 전(戩)이 참판(參判)을 역임했으며, 광식(光軾)의 아들 감(戡)이 대사헌(大司憲), 감(戡)의 아들 성헌(成憲)이 판관(判官), 성헌(成憲)의 아들 명남(命男ㆍ1556~?)은 자는 신보(申甫)로 우부승지(右副承旨)ㆍ예조참판(禮曹參判)ㆍ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냈고, 명남(命男)의 아들 경익(慶益)은 광해군 때 정언(正言)을 지내 4대 문과 급제가 나왔다.

광식(光軾)은 자는 백흠(伯欽)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중종 18년(1523년) 세자익위사 사어(世子翊衛司司禦)를 지냈다. 중종 23년(1528년) 첨정(僉正)에서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에 제수되었으나 경력이 얕은 자가 갑자기 승진되었다는 대간의 논박으로 체직(遞職)되어 김해부사로 내려갔다. 그러나 나이가 젊고 무재(武才)가 있는 자이기에 오히려 양계(兩界ㆍ변방지역으로 국방을 위한 특수행정구역)에 적합하다는 대간의 지적에 따라 갑산부사(甲山府使)에 제수되었다. 이후 종성부사를 거쳐 중종 28년(1533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고, 이어 여주목사ㆍ성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 39년(1544년) 평안도절제사 재직시 국경지역의 야인 진무에 공을 세웠고, 청렴하고 근실한 노장(老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광식(光軾)의 아들 감(戡)은 자는 언신(彦信)으로 중종 38년(1543년) 생원시에 합격, 그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명종 즉위년(1545년) 예문관 봉교(行藝文館奉敎)로 있으면서 중국에 보내는 자문(咨文)의 글씨를 잘 써서 칭찬을 들었으며, 이어 정언(正言)이 되어 윤원형(尹元衡)ㆍ윤춘년(尹春年)과 결탁해 사류를 공격하는 데 가담하였다. 이어 사헌부ㆍ홍문관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558년에는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뒤 이량(李樑)이 중용되어 국정을 전단하자 그의 심복이 되었으며, 병조참판ㆍ형조참판ㆍ대사헌에 기용되었다. 이때 이량의 사주로 허엽(許曄)ㆍ기대승(奇大升)ㆍ윤근수(尹根秀) 등 사림을 탄핵하여 밖으로 내쫓으려 하였으나, 도리어 홍문관 부제학 기대항(奇大恒)의 탄핵으로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명종 말엽 윤원형 세력이 몰락하고 사림들이 득세하자 양사 및 홍문관에서 여러 차례 죄를 주자고 주장하였으나 왕의 중재로 무마되었으며, 선조 14년(1581년) 천재가 심하여 대사면이 단행되자 방면되었다.

감(戡)의 아들 성헌(成憲ㆍ1534~1601)은 자는 중장(仲章)으로 명종 15년(1560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아버지 감(戡)이 윤원형(尹元衡)ㆍ이량(李樑)의 당여로 실권을 장악하고 있어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ㆍ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ㆍ박사 등 청요직을 두루 섭렵하였다. 명종 20년(1565년) 윤원형 세력이 몰락하고 사림이 득세하자 아버지 감(戡)이 탄핵됨을 계기로 그도 사판(仕版)에서 삭제되고 직첩도 환수되었다. 선조 14년(1581년) 천재(天災)가 심하여 대사면이 단행되자 직첩을 돌려받고 다시 사환(仕宦)을 한 것 같으나 직책은 알 수 없다. ‘문과방목(文科榜目)’에는 판관(判官)을 최종 벼슬로 기록하고 있다.

 

 

▲ 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의 유묵.
 

한편 전(戩)의 손자 복남(福男ㆍ?~1597)은 선조 때 무과(武科)에 급제, 선조 25년(1592년) 나주판관(羅州判官)이 되고, 이듬해 전라방어사(全羅防禦使)ㆍ충청조방장(忠淸助防將), 1594년 남원부사(南原府使)ㆍ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듬해 나주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했다. 다시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남원성(南原城)에서 왜군과 싸우던 중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산성별장(山城別將) 신호(申浩) 등과 함께 전사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광해군 4년(1612년) 남원 충렬사(忠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

특기할 일은 정유재란시 그의 셋째 아들 경보(慶甫)가 7세의 어린 나이로 왜군에게 끌려갔다가 그곳에 정착하였는데, 일본(日本)에서 살아온 그의 후손들이 장주 이가(長州李家)로 정성(定姓)하였다. 그의 후손인 문학박사(文學博士) 이가정문(李家正文)은 자신의 독특한 성씨에 의문을 품고 자료를 찾던 중 뿌리를 찾아 1982년 한국을 방문하였고, 일본국에 귀화한 이방인(異邦人)의 신분이기는 하나 대동보에 해외편으로 합보하였다.

 

▲ 취사(炊沙) 이여빈(李汝馪)의 시문집인 ‘취사문집(炊沙文集)’.

 

여빈(汝馪ㆍ1556~1631)은 자는 덕훈(德薰), 호는 취사(炊沙)ㆍ감곡(鑑谷)으로 참봉 효신(孝信)의 아들이다. 선조 24년(1591년) 사마시에 합격,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벽사도찰방(碧沙道察訪)으로 나갔으나 1년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광해군 2년(1610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등용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을 문란하게 하므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정인홍 등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반대하자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뒤 벼슬을 단념하고 감곡(鑑谷)에 은거하여 시문(詩文)으로 소일하니 학덕이 높고 유집(遺集)이 많았다. 숙종 41년(1715년)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취사문집(炊沙文集)’ 6권이 전한다.

이 외에도 무관(武官)으로 용맹을 떨친 경여(慶餘)는 수순절도사(水軍節度使)를, 태망(台望)은 승지(承旨)와 아장(亞將)을 지냈으며, 봉래(鳳來)는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