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성 이씨(鶴城李氏)는 조선 세종(世宗) 때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공을 세워 절충장군용양위사상호군(折衝將軍龍驤衛司上護軍)에 오르고, 이어 자헌대부(資憲大夫)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와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을 역임한 이예(李藝)를 시조로 한다. 그의 선대(先代)는 고려조의 명문으로 조선이 건국되자 충절을 지켜 울산(蔚山)으로 낙향하였다고 하나 문헌이 실전되어 자세한 세계를 알 수 없으므로 이예(李藝)를 시조로 받들고 있으며, 학성(鶴城)은 울산(蔚山)의 별칭이므로 학성 이씨(鶴城李氏)라 칭하였다.
▲ 일본 대마도에 설치된 통신사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의 공적비.
이예(李藝ㆍ1373~1445)는 자는 중유(仲游), 호는 학파(鶴坡)로 원래 울산군의 기관(記官) 출신인데, 태조 5년(1396년) 왜적에게 잡혀 간 지울산군사(知蔚山郡事) 이은(李殷) 등을 시종한 공으로 아전(衙前)의 역을 면제받고 벼슬을 받았다. 정종 2년(1400년)에는 어렸을 때 왜적에게 잡혀 간 어머니를 찾기 위하여 조정에 자청하여 회례사(回禮使) 윤명(尹銘)을 따라 일본의 삼도(三島)에 갔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태종 1년(1401년) 처음으로 이키도(壹岐島)에 사신으로 가서 포로 50명을 데려와 그 공으로 좌군부사직(左軍副司直)에 제수되었으며, 그뒤 1410년까지 해마다 통신사가 되어 삼도에 내왕하면서 포로 500여 명을 찾아 오고 벼슬도 여러번 승진하여 호군(護軍)이 되었다.
1416년에는 유구국(琉球國)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포로 44명을 찾아 왔고, 세종 1년(1419년)에는 중군병마부수사(中軍兵馬副帥使)가 되어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를 도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일본에 다녀왔으며, 1438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승진된 뒤 대마도경차관(對馬島敬差官)이 되어 대마도에 다녀왔다. 1443년 왜적에게 잡혀 간 포로를 찾아오기 위해 자청하여 대마주체찰사(對馬州體察使)가 되어 다녀온 공으로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승진되었는데, 조선 초기에 사명으로 일본에 다녀온 것이 모두 40여 차례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피로인(被虜人)은 물론 명나라의 피로인의 쇄환(刷還)에 힘써 명에서도 공패를 받았으며, 또한 화통완구(火筒碗口) 등 병기 제작에도 공적이 컸다. 시호는 충숙(忠肅).
▲ 1445년 2월 23일(정묘일) 세종실록에 기록된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의 졸기(卒記).
이예(李藝)의 아들 종실(宗實)은 일본국 통신사(日本國通信使) 송처검(宋處儉)의 부사(副使)로 동행했으나 급류(急流)를 만나 세조 6년(1460년) 10월 6일 배가 전복되어 실종되었으며, 그가 목판(木板)을 부여잡고 파도에 떠내려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았다는 생존자의 기록이 실록에 전해온다. 세조는 조관(朝官)을 보내어 시체를 수색케 하고 겸하여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며, 울주군 온양읍 고산리에는 가묘인 고산단(高山壇)이 세웠졌다.
한편 1475년 6월 4일(신사일) 성종실록에는 종실(宗實)이 양식과 물건을 탐내어 배에 실은 것이 매우 무거웠고, 또 날씨가 순조롭지 못하여 통신사 송처검(宋處儉)이 출발하지 아니하고자 하였으나, 종실이 송처검에게 술을 권하여 그가 취한 틈을 타서 홑이불로 싸서 배 안에 두고 배를 출발시켰으므로 얼마 되지 아니하여 갑자기 물에 빠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左)탄 배가 전복되고 이종실(李宗實)은 목판을 부여잡고 파도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았다는 생존자의 기록이 실린 1460년 1월 3일(신사일) 세조실록. (右)이종실(李宗實)이 양식과 물건을 탐내어 배에 실은 것이 매우 무거웠고, 날씨도 순조롭지 못해 출발을 만류하는 통신사 송처검에게 술을 권해 그가 취하자 배를 출발시켜 침몰했다고 기록된 1475년 6월 4일(신사일) 성종실록.
이예(李藝)의 손자 직겸(直謙)은 군자감 판사(軍資監判事)를, 직유(直柔)는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ㆍ궁중에서 쓰는 생선, 고기, 소금, 연료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종3품 벼슬)을, 직강(直剛)은 훈련원 봉사(訓練院奉事)를 각각 역임하였다.
▲ 경북 포항시 흥해읍 덕성리에 자리한 군자감 판사(軍資監判事) 이직겸(李直謙)의 묘.
겸수(謙受)ㆍ겸익(謙益) 형제는 수사(水使) 종실(宗實)의 5세손으로 당시 울산 서생포(西生浦)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의 정세탐정에 큰 공을 거두어 겸수(謙受)는 정주판관(定州判官)을 제수받았고, 원종훈삼등공신(原從勳三等功臣)에 책록(冊錄)되고 남강사(南岡祠)에 제향되었다. 그리고 겸익(謙益)은 현종 때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을 지냈다.
▲ 정주판관(定州判官) 이겸수(李謙受)을 제향하는 경남 양산시 주남동 남강서원(南岡書院)은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2009년 복원되었다.
경연(景淵)은 임진왜란이 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 때는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함께 경남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 전투에 참가 큰 공을 세워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임명되었다. 인상(仁常) 역시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많은 전투에서 왜적과 분전하여 공을 세우고 도산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했으며, 봉수(鳳壽)는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진중에서 순직하여 선무1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녹봉되었다.
▲ 애일당(愛日堂) 이열(李說)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애일당(愛日堂)과 그의 묘.
열(說ㆍ1553~1609)은 자는 천뢰(天賚), 호는 애일당(愛日堂), 군자감 판사(軍資監判事) 직겸(直謙)의 현손이며, 정릉참봉(靖陵參奉) 덕원(德元)의 아들이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방어사 곽재우(郭再祐) 장군이 지휘하는 화왕산회맹(火旺山會盟)에 참가하여 열읍의사(列邑義士)들과 함께 수성(守城)에 공을 세웠다. 전란이 평정된 뒤 전공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그 후 후손들이 공의 유고(遺稿)를 모아 ‘애일당실기(愛日堂實紀)’를 간행하고 애일당(愛日堂)을 창건하여 추모하고 있다.
▲ 반계(磻溪) 이양오(李養吾)의 시문집인 반계집(磻溪集).
양오(養吾)는 조선 영조 때 학자로 자는 용호(用浩), 호는 반계(磻溪)로 평생동안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석계서원(石溪書院)에서 후진을 가르치기에 온 힘을 다함으로써 문하에서 많은 출사자들이 나왔다. 한편 제구운몽후(題九雲夢後)와 사씨남정기후(射氏南柾記後) 등의 평론과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및 세태고발시 20조와 다산(茶山)의 하일대주(夏日對酒)에 견주는 과거부정을 고발한 세평시(世平詩)와 유고(遺稿) 12책과 배수집(排愁集), 시학지남(詩學持南), 파수집(罷睡集) 등 책을 남겼으므로 ‘울산읍지(蔚山邑誌)’에서도 ‘양오(養吾)는 강좌시객(江左詩客) 중에서 제일자야(第一者也)’라고 기록했다.
▲ 반계(磻溪) 이양오(李養吾)는 시조 이예(李藝)를 배향한 석계서원(石溪書院)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아래는 1924년 석계서원 전경.
조선 현종 때의 대문장가 동영(東英)은 국난에 전공을 세워 관직을 받고도 이를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자연과 함께 노닐었던 할아버지 한남(翰南)의 뜻을 기려, 현종 3년(1837년) 봄 태화강변에 이휴정(二休亭ㆍ울산광역시문화재자료 제1호)을 지었다. 현재의 이휴정(二休亭)은 본래 울산도호부(蔚山都護府)의 객사인 학성관(鶴城館)의 남문루로서 ‘태화루’라는 현판을 달아 한 때 태화루라 모칭되기도 하였으나, 1940년 울산공립보통학교(현울산초등학교)의 교정을 확장하면서 이 건물을 헐게 되자 학성 이씨 문중에서 사들여 현 위치에 이축하게 되었다. 이축 당시 본래 학성 이씨 월진파의 정각이었던 이휴정(二休亭) 이름을 빌려 왔고, 건물도 정자형식으로 부분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 (上)이동영(李東英)이 조부의 뜻을 기려 지은 이휴정(二休亭). 현 건물은 학성관(鶴城館)의 남문루를 학성 이씨 문중에서 사들여 현 위치에 이축하고 이휴정(二休亭) 이름을 빌려 왔다. (下)이동영 가문에서 조부 이한남(李漢南)의 대를 이어 누대를 원근의 벗을 모아 시문과 정담을 나누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돌벼루.
인중(仁中ㆍ1825~1896)은 자는 성원(性元), 호는 기산(企山)ㆍ간우(艮宇)로 이종상(李種祥)의 문인이며,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자 그만두고 성리학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중문(中門) 밖에 방 한 칸을 따로 지어 그 안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뒤에 수많은 문도들이 몰려들어 ‘간우선생(艮宇先生)’이라 일컬었다. 철종 6년(1855년)에는 융릉(隆陵)의 전례(典禮)문제로 ‘의리소(義理疏)’를 지어 윤가묵(尹家默)과 함께 상경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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