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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서흥 김씨(瑞興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서흥 김씨(瑞興金氏)의 연원

서흥 김씨(瑞興金氏)의 시조(始祖) 김보(金寶)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5세손으로 고려 중엽에 금오위정용중랑장(金吾衛精勇中郞將)을 지냈다. 그의 손자 천록(天祿)은 원종 11년(1270년) 삼별초(三別抄)가 진도(珍島)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김방경(金方慶)의 부장(副將)으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고, 원종 15년(1274년)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이 일본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할 때도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워 충렬왕 6년(1280년)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ㆍ상장군(上將軍)ㆍ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에 오르고 서흥군(瑞興君)에 봉해졌다. 원나라에서도 충현교위관군총파(忠顯校尉管軍摠把)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은 김보(金寶)를 시조로, 천록(天祿)이 봉군받은 지명인 서흥(瑞興ㆍ황해도 북부에 위치)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크게는 경기파(京畿派)ㆍ영남현풍파(嶺南玄風派)ㆍ영남초계파(嶺南草溪派)ㆍ호남나주파(湖南羅州派)ㆍ호남해남파(湖南海南派)로 나뉘어지고, 작게는 경기파에 양지파(陽智派)ㆍ숙천파(肅川派)로, 영남현풍파에 장파(長派)ㆍ중파(仲派)ㆍ계파(季派)로 각각 나뉘어졌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천록(天祿)의 아들 세구(世丘)가 판도판서(版圖判書ㆍ판도사의 으뜸 벼슬)를 역임했고, 손자 봉환(鳳還)은 공민왕 2년(1353년) 문과에 급제하여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ㆍ군기감의 종3품 벼슬)를 거쳐 공민왕 12년(1363년) 대사성(大司成ㆍ정3품)에 올랐으며, 아들 선보(善保ㆍ봉순대부·판서운관사를 역임)와 함께 고려조에서 가문을 빛냈다.

조선조에 와서는 선보(善保)의 아들 3형제가 맏아들 중건(中乾)이 세종(世宗)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고, 둘째 중곤(中坤)은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역임했으며, 막내인 중인(中寅)은 세종 4년(1422년)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를 역임하여 이름을 날렸다. 중건(中乾)의 손자 효인(孝仁)은 성종(成宗) 때 등과(登科)하여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정의현감(旌義縣監)을 지내고 성종 20년(1489년) 좌리이등공신(佐理二等功臣)에 올랐으며, 유(紐)는 세조(世祖) 때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제향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도동서원.

한편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거두(巨頭) 굉필(宏弼ㆍ1454∼1504)은 서흥 김씨(瑞興金氏)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ㆍ한훤당(寒喧堂)으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성종 11년(1480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성종 25년(1494년) 행의(行誼)로 벼슬에 천거되어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와 감찰(監察)을 거쳐 연산군 3년(1497년)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을 쓰고 평남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가, 연산군 10년(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순천(順天)에 이배(移配)되어 사약을 받았다.

 

 

▲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제향하는 전남 순천시 옥천동 옥천서원(玉川書院ㆍ전남문화재자료 제4호)과 전남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경현서원(景賢書院).

중종반정 뒤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되었는데, 이는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 결과 중종 12년(1517년) 정광필(鄭光弼)ㆍ신용개(申用漑) 등에 의하여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다. 선조 10년(1577년)에는 시호가 내려졌고, 광해군 2년(1610년)에는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상소에 의하여 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ㆍ길재(吉再)ㆍ김숙자(金叔滋)ㆍ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자리한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묘.

굉필(宏弼)의 아들 3형제는 모두 벼슬에 올라 장남 언숙(彦塾)은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ㆍ종6품의 낭관 벼슬)를 지내고 효행과 학문에 뛰어났으며, 둘째 언상(彦庠)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했고, 막내 언학(彦學)은 선무랑(宣務郞)을 거쳐 동부참봉(東部參奉)에 올라 나라에 공헌하였다.

 

▲ 임진왜란 의병장 김충수(金忠守)와 그의 아들 김함(金涵)의 효행 및 열녀 두 분의 행적을 기려 국가에서 건립한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 삼강정려문(三綱旌閭門ㆍ경기도기념물 제77호).

그밖의 인물로는 중종(中宗) 때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지낸 수열(壽說)과 예산현감(禮山縣監) 건(鍵),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익(翌)ㆍ수종(壽悰), 진도군수(珍島郡守) 선(宣)이 유명했고, 충수(忠守ㆍ1549∼1592)는 임진왜란 때 죽산(竹山)에서 의병을 모아 왜군과 싸워 공을 세운 뒤 아들 함(涵)과 함께 순절하여 숙종(肅宗) 때 정려(旌閭)가 세워지고, 영조 16년(1740년) 장령(掌令)에 추증되었다.

순조(純祖) 때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을 지낸 치곤(致坤)과 헌종(憲宗) 때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오른 대곤(大坤)은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규찬(奎燦), 고종(高宗) 때의 흥해군수(興海郡守) 희국(熙國),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규화(奎華), 현풍군수(玄風郡守) 화식(華植), 봉화군수(奉化郡守) 규충(奎衝),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장권(長權) 등과 함께 명문의 전통을 이어 가문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