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 학 방/성씨 연원(김)

영산·영동 김씨(永山永同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영산·영동 김씨(永山永同金氏)의 연원

영산 김씨(永山金氏)의 시조(始祖) 김영이(金令貽)는 신라 제31대 신무왕(神武王)의 넷째 아들 익광(益光)의 후예(後裔)로 고려조에서 전객시령(典客寺令)을 지내고, 추충동덕보사공신(推忠同德保社功臣)으로 검교(檢校)ㆍ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추증되어 영산군(永山君ㆍ영산은 영동의 고호)에 추봉(追封)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영산(永山ㆍ永同)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아들 길원(吉元)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올라 홍건적(紅巾賊)을 토평한 공으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고, 길원(吉元)의 맏아들 종경(宗敬)이 조선 제2대 정종(定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우찬성(右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거쳐 도총관(都摠管ㆍ정2품)을 지냈으며, 종경(宗敬)의 아들 훈(訓)은 소윤(小尹), 량(諒)은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 (上)영산군(永山君) 김영이(金令貽)가 사위 3명을 데리고 낙향해 여생을 보낸 충북 영동군 양강면 남전리에 1764년 후손들이 세운 빙옥정(氷玉亭). (下)1764년 빙옥정에 세운 김영이와 사위 장비(張丕ㆍ한성판윤)의 단소.??

훈(訓)의 셋째 아들인 수온(守溫ㆍ1410∼1481)은 자는 문량(文良), 호는 괴애(乖崖)ㆍ식우(拭?)로 세종 20년(1438년) 진사가 되고, 세종 23년(144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중시(重試)를 거쳐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 모두 장원하였다.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로 있으면서 세종(世宗)의 특명으로 집현전(集賢殿)에서 ‘치평요람(治平要覽)’과 ‘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에 참여한 후, 부사직(副司直)으로 ‘석가보(釋迦譜)’를 증수(增修)하였다.

성종 2년(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명(明)나라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쳤다. 벼슬이 극품(極品)에 이르렀으나 항상 청빈하게 살았으며, 성종 5년(1474년)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서거정(徐居正)ㆍ강희맹(姜希孟) 등과 문명을 겨루었는데, 산문은 웅방호건(雄放豪健)해서 도도한 기운이 넘쳤고, 시(詩)는 자유분방해서 압운(押韻)의 구속을 벗어나기도 하였다고 한다.

 

 

▲ 문평공(文平公) 김수온(金守溫)의 영정과 유묵.

성종 12년(1481년) 병이 악화되어 운명이 가까워지자 자제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많이 읽지 마라. 내 이제 혼미한 중에서도 눈 앞에 선한 것은 모두 중용과 대학의 글자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학문에 깊이가 있었다. 당대의 석학(碩學) 구종직(丘從直)은 남의 표문(表文)을 써준 것을 보고 모래 위에 꿇어 앉으면서 “평일에 비록 공(公)의 문장이 교묘하다는 말은 들었으나 이 경지에 이를 줄은 몰랐오.” 하며 극찬했다고 한다. 문집에 ‘식우집

(拭?集)이 전하며, 시호는 문평(文平).

 

 

문평공 김수온(金守溫)의 위패를 모신 충북 보은군 보은읍 지산리 부조묘(不?廟ㆍ충북기념물 제48호).

 

 

▲ 충북 영동군 용산면 한곡리에 자리한 문평공(文平公) 김수온(金守溫)의 묘. 충북기념물 제76호.

수온(守溫)의 형 신미(信眉)는 법주사(法住寺)에 출가하여 수미(守眉)와 함께 대장경을 읽고 율을 익혔다. 세조 7년(1461년) 왕명으로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불전(佛典)을 번역ㆍ간행하는 일을 주관하였으며, 그의 주관 아래 ‘법화경’ㆍ‘반야심경’ㆍ‘영가집(永嘉集)’ 등이 언해되었다. 1464년 세조가 속리산(俗離山) 성불사(成佛寺) 복천암(福泉菴)으로 행차하였을 때, 그곳에서 사지(斯智)ㆍ학열(學悅)ㆍ학조(學祖) 등과 함께 대설법회를 열었다. 시호는 혜각존자(慧覺尊者)로 법주사 복천암(福泉菴)에 그의 부도인 복천암수암화상탑(福泉庵秀庵和尙塔ㆍ충북유형문화재 제12호)이 남아 있다.


??

▲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福泉菴)에 자리한 신미(信眉)의 부도인 수암화상탑(秀庵和尙塔).

그밖의 인물로는 효행(孝行)으로 감찰(監察)에 증직된 언건(彦建)이 유명했으며, 광해군(光海君) 때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낸 각(覺)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득진(得進), 부호군(副護軍) 염근(廉謹)ㆍ호덕(好德) 등과 함께 가문을 빛나게 하였다.

▲ 독립운동가 일강(一江) 김철(金澈)이 일제강점기에 세운 것으로 전해지는 전남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영산김씨세장비(전남문화재자료 제142호)와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김철기념관.

근대의 인물로 철(澈ㆍ1886~1934)은 호는 일강(一江)으로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경성법률전수학교를 거쳐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를 1915년 졸업하고, 귀국하여 집안의 소작인들에게 농토를 나누어 주고 노속들을 방면했다. 1917년 상해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시작했으며, 1919년 잠시 귀국하여 3.1운동거사를 모의하고 당시 천석군이었던 가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했다. 상해임시정부 수립을 시작하고 임시정부의 군무장ㆍ재무장ㆍ국무원 비서장 등 국무위원을 역임했고, 1932년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를 주도하던 중 격무로 인한 급성폐렴으로 중국 항주 광자병원에서 죽었으며, 그의 고향에는 일강김철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클릭하시면 큰 계보도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