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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고령 김씨(高靈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고령 김씨(高靈金氏)의 연원

고령(高靈)은 경북 남서단에 위치한 옛 대가야국(大伽倻國)의 중심지로서 16대 520년 간을 계승해오다가 신라 진흥왕 23년(562년)에 신라(新羅)에 병합되었다. 그후 경덕왕 16년(757년) 고양(高陽)으로 불리우다가 고려 현종 9년(1018년)에 영천현(靈川縣)이 되었으며, 조선 태종(太宗) 때 고양(高陽)의 ‘고(高)’자와 영천(靈川)의 ‘영(靈)’자를 따서 고령(高靈)으로 칭하게 되었다.

 

 
▲ 경북 고령군 쌍림면 신곡동에 자리한 시조 충익공(忠翊公) 김남득(金南得)의 아버지 김의(金宜)의 묘.

일찍이 고려시대에서부터 뿌리를 내린 고령 김씨(高靈金氏)는 신라 제56대 경순왕(敬順王)의 제5자인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9세손으로 고려에서 전리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의(宜)의 맏아들 남득(南得)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본명(本名)이 기지(麒芝), 자는 중서(重瑞), 시호는 충익(忠翊)이다. 고려 충혜왕 복위 1년(1340년) 진사(進士)가 되어 감찰집의(監察執義ㆍ정3품)를 지내고, 공민왕(恭愍王) 때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판개성부사 문하평리(判開城府事門下評理)에 이르렀다. 공민왕 13년(1364년) 원제(元帝)가 최유(崔濡)의 농간에 속아 왕을 폐하고자 신하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할 때 접반시랑(接伴侍郎)이 되어 무고임을 역설하였던 바 원제(元帝)가 크게 감회하여 계속 재위케 했다. 그후 사은사(謝恩使)로 원(元)나라에 가서 금자광록대부 예부상서(金紫光祿大未禮部尙書)를 명(命)받고 환국하자, 왕이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책록하고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으로 봉하여 ‘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라고 사명(賜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름을 남득(南得)으로 하였고,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고령(高靈)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경북 고령군 쌍림면 신곡동에 자리한 시조 충익공(忠翊公) 김남득(金南得)의 묘와 재사(齋舍)인 경덕재.

계파(系派)는 고산파(高山派), 노성장선파(魯城長善派), 노성죽헌파(魯城竹軒派), 순천공파(順天公派), 신영파(新寧派), 양천파(陽川派), 충주파(忠州派), 합천묘산파(陜川妙山派)로 분파되었다.


남득(南得)의 아들 무(畝)는 자가 하경(夏景)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해 공양왕 3년(1391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ㆍ남은(南誾) 등이 사직(社稷)을 위해하려는 음모가 있어 이를 탄핵(彈劾)하여 유배(流配)케 하였다. 그러나 1392년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고 조선이 개국되자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탄핵을 받아 우현보(禹玄寶) 부자(父子)와 설장수(?長壽)ㆍ이색(李穡) 등과 더불어 부자(父子)가 함께 원지(遠地)로 유배되었으며, 뒤에 풀려나와 태종 3년(1403년) 지초계군사(知草溪郡事)로 한발 대책을 소홀히 하여 농사를 망친 죄로 파직당했다.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추증(追贈)되었으며, 그의 아들 4명도 모두 벼슬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 배위(配位) 성산 이씨와 합장된 충익공(忠翊公) 김남득(金南得)의 아들 김무(金畝)의 묘. ? ?

무(畝)의 장남 사행(士行)은 조선 세종 2년(1420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산(礪山)ㆍ홍산(鴻山)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으며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올랐다. 그리고 차남 사문(士文)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사충(士忠)은 승지(承旨)를, 막내 사신(士信)은 합천군수(陜川郡守)를 지냈다.


 

 

 

 

▲ 충남 공주시 탄천면 광명리 광명산에 자리한 김무(金畝)의 장남 사복시정(司僕寺正) 김사행(金士行)의 묘.
 
▲ 경북 고령군 성산면 고탄리에 자리한 집의공파(執義公派) 파조 김사문(金士文)의 묘.

사행(士行)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 자숙(自肅)은 세종 11년(1432년) 진사가 되고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고, 자숙(自肅)의 아들 형생(荊生)은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감찰(監察)을 역임하였고, 하양군수(河陽郡守)를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오른 차남 장생(莊生)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 경북 고령군 쌍림면 고곡리에 자리한 형조참의(刑曹參議) 김자숙(金自肅)의 삼위합분(三位合墳).

장생(莊生)의 아들 수(銖)는 중종 5년(1510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고성군수(固城郡守)ㆍ진주목사(晋州牧使)ㆍ순천부사(順天府使) 등을 역임한 후 절충장군(折衝將軍ㆍ정3품)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올랐으며, 아우 구(鉤)는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하동(河東)ㆍ순천(順天)ㆍ수원(水原) 등지의 부사(府使)와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 충남 논산시 노성면 호암리 김임(金?)의 묘. 그의 아들이 세운 신도비는 지금은 비각에 보존되어 있다.

남득(南得)의 5세손 임(?)은 논산시 노성면에 살면서 중종 때 진사로서 호조판서를 증직(贈職)받았는데, 만석꾼 부자로 산림재상(山林宰相)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러나 벼슬을 구하지 않고 선비로서 평생 풍류를 즐겼으며, 그의 아들 수문(秀文)이 명종 16년(1651년) 건립한 신도비(神道碑ㆍ충남문화재자료 제363호)가 전한다.

 
▲ 충남 논산시 노성면 호암리에 자리한 청백리(淸白吏) 김수문(金秀文)의 묘.

임(?)의 아들 수문(秀文ㆍ1504~1568)은 자는 성장(成章)으로 중종 29년(1534년) 무과에 급제하여 영건만호(永建萬戶ㆍ종4품)로서 종성(鍾城)에 침입한 야인(野人)들이 사람을 납치해 가자 역전(力戰)하여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왔다. 명종 10년(1545년) 을묘왜변(乙卯倭變) 때는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으면서 왜적 1,000여 명이 침입하자 단 70명의 병사를 이끌고 왜적을 격파하였으며, 그 후에도 수차에 걸친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이에 그 공이 인정되어 1558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특채되었다. 명종 14년(1559년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호인(胡人)의 침략을 물리치고, 1563년 다시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7월 재차 한성부 판윤을 지내는 등 3회에 걸쳐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였다. 그후 1568년 평안병사(平安兵使)가 되어 서해평(西海坪)의 호인(胡人)을 격퇴하던 중 전사하였으며,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 송암(松菴) 김면(金沔)의 아버지로 경원부사(慶源府使)를 지낸 김세문(金世文)의 묘.

 

 

 

▲ (上)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지은 ‘징비록(懲毖錄)’의 김면(金沔) 기록 부분. (下)김면(金沔)이 지은 ‘송암실기(松庵實記)’의 세계도.


수문(秀文)의 조카이자 경원부사(慶源府使) 세문(世文)의 아들 면(沔ㆍ1541∼1593)은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으로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마하고 많은 후진을 양성했으며, 뒤에 효렴(孝廉)으로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居昌)ㆍ고령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규합, 진주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격퇴시켜 그 공(功)으로 합천군수(陜川郡守)를 역임하여 의병대장의 칭호를 받았다.

후에 곽재우 장군이 “영남을 보존할 분은 이 분 뿐이다” 하며 그의 인품에 탄복하였다 하며, 여러 달 동안 의갑(衣甲)을 풀지 않았다.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충청ㆍ전라도 의병과 함께 금산ㆍ개령에 진을 치고 선산(善山)의 적을 치려 할 때 쌓인 피로로 병에 걸리자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왕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하였고, 선조 40년(1607년)에 다시 선무원종공(宣武原從功)에 기록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송암실기(松庵實記)’ 3권이 있다.

 

▲ 의병장 김면(金沔) 장군의 묘와 그를 제향하는 도암서원(道岩書院).

한주(翰周ㆍ1751~1811)는 정조 6년(1782년) 무과(武科)에 급제하는데, 고령 김씨 문중에서 최후의 과거 급제자가 된다. 1790년 비변사 낭청(備邊司郎廳ㆍ종7품)을 역임하고, 선전관(宣傳官)ㆍ경기암행어사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등을 거쳐 순조조(純祖朝)에 이르러 칠곡부사ㆍ가덕첨절제사(加德僉節制使) 등을 지냈다. 보성군수(寶城郡守) 시절에는 지방관리의 적폐를 일소하고, 불철주야 진휼(賑恤)에 진력하여 수많은 인명을 구하여 임금으로부터 숙마(熟馬) 1필과 비축곡 300석을 하사받았으며, 후손들은 성사공파(聖師公派)의 파조(派祖)로 삼고 있다.

 

▲ (上)충남 공주시 탄천면 안영리에 자리한 성사공파(聖師公派) 파조(派祖) 김한주(金翰周)의 묘. (下)고령 김씨 시조가 김의(金宜)로 기록된 성사공파 세보.

그외 인물로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천장(千章), 현감(縣監) 충립(忠立), 동지중추부사 춘명(春明), 감찰(監察) 응수(應洙) 등이 유명했고, 현종(顯宗) 때 토산현감(兎山縣監)을 지낸 초중(楚重)은 어영별장(御營別將) 자(梓)와 함께 무신(武臣)으로 가문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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