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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의성 김씨(義城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의성김씨는

경북 의성을 본관으로 삼고 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석(金錫)을 시조로 하는 성관이다. 김석은 고려 초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는데, 그 후손들이 의성김씨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의성김씨의 시조 김석에 대해서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의성김씨 족보)이라는 설과 다섯째 아들(조선씨족통보, 신라김씨분파연원보)이라는 설로 나뉘어 있다. 시조 김석에 의해 처음으로 개관된 의성김씨는 8세손 김공우(金公瑀) 대에서 크게 번성했는데, 장자 김용비(金龍庇)는 태자첨사(太子瞻事)를, 차자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막내 김용주(金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의성김씨는 이들 대에서 5개파로 나뉘어 세계를 이어오고 있는데, 첨사공파·수사공파·충의공파·찬성공파·선락장군공파 등이 그것이다. 의성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25만330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의성김씨의 중시조인 김용비의 묘와 오토제 전경.
#의성김씨 연혁과 인물

의성김씨는 김석이 성관을 연 이후, 고려와 조선조에 이어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명문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군(君)으로 책봉된 사람이 7명이 나왔고, 시호를 받은 사람도 충의공 용주 외에 용소공 영열(英烈), 문원공 원(源) 등 13명이나 된다.

고려조에서는 김공우 아들 3형제 외에도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김훤(金暄)과 우왕 때 도순문사를 지낸 김광부(金光富)가 유명했고, 삼국사기 발문을 쓴 김거두(金居斗)가 있다. 그리고 추밀원부사를 지낸 김춘(金椿), 좌사부대부를 지낸 김옥(金玉), 평장사를 지낸 김연(金衍) 등이 가문을 빛냈다.

조선조에 들어와 의성김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대제학과 좌찬성을 역임한 김안국(金安國)과 정국(正國) 형제를 들 수 있다. 김안국·정국 형제는 김굉필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천문·주역 등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같은 시대 유명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組)와 쌍벽을 이루었다. 조광조가 급진적 개혁을 주창했다면, 김안국은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파직당하기도 했다. 그는 학문의 입문서로 알려진 ‘동몽선습(童蒙先習)’의 저자이기도 하면서 ‘모재집’ 등을 집필했고, ‘이륜행실’ 등의 편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그의 동생인 김정국은 의서(醫書)에 조예가 깊어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를 남겼다.

의성김씨 학봉고택
그 외에 임진왜란 전에 조선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있다. 동인이었던 그는 일본에 다녀온 후 서인 황윤길이 일본의 조선침략 가능성을 언급하자, 이에 반대하여 침략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로 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탄핵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같은 동인이었던 유성룡이 변호하여 살아날 수 있었다. 그 후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招諭使: 난리 시 백성을 초유하는 임시벼슬)로 의병을 모아 진주성을 사수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는 퇴계 이황의 문하생으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는데, 조선후기 영남학파의 학문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그가 살았던 학봉고택은 의성김씨 종가로 유명한데, 그중 운장각은 학봉의 유품과 의성김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옛 책과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특히 의성김씨는 조선 말기에 들어와 많은 의병운동가, 독립지사, 의사, 열사를 배출한 가문으로 유명하다. ‘안동김씨의 나라’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조선시대는 안동김씨의 권세가 막강하였는데(조선 전·중기는 선 안동김씨가, 후기는 후 안동김씨의 세도가 심했다), 조선 말과 일제 때에는 의성김씨 가문에서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심지어 같은 가문, 집성촌 전체가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예도 있었다. 그리하여 의성김씨 한 문중에서만 독립운동 유공자가 85명이나 배출되었다.

심산 김창숙 선생
그중 대표적인 인물로 전국 유림을 대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한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서로군정서를 창립하고 참모장을 역임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전봉준과 함께 갑오농민전쟁을 지휘한 김도삼(金道三), 단발령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김도화(金道和)가 유명하다.

심산 김창숙은 경북 성주 출생으로 어려서 유학을 배우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문을 올려 투옥되었다. 1909년 성명학교를 창립하여 육영사업을 진행했으며, 3·1운동 이후 망명을 결심하고, 전국 유림을 대표하여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진정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건너갔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된 후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다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그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신채호·박은식 등과 신문을 발간하고,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했다. 또한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청년결사대를 국내로 파견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폭파하도록 했다.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도 그의 지도하에 이뤄진 것이다. 그는 또다시 일본영사관원에게 체포되어 14년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 복역하는 중 병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이때 받은 고초로 평생 일어서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되었다. 해방 후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전국의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설립한 성균관대학의 재단 분규로 총장직을 사임한 뒤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962년에 별세했다.

일송 김동삼의 본명은 긍식(肯植)으로 경북 안동에서 출생했다. 1907년 고향에서 유인식 등과 함께 협동중학을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종사하다가 1909년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신민회 결성을 논의하였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이시영·이동녕 등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교포의 안정과 교육 문제에 힘쓰며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이때 설립한 신흥강습소는 후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였다. 1918년에는 서일·김좌진 등 38인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3·1운동이 일어나자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였다. 이것은 다시 상하이임시정부 휘하로 들어가 서로군정서가 되었는데, 그는 서로군정서의 참모장이 되었다. 그 후 만주사변(1931년) 때 하얼빈에서 잡혀 강제 송환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는 중 옥사하였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의성김씨에서는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재춘(金在春)을 비롯하여 국회의원 김중위·김명윤·김원웅·김화남 등이 있으며, 수많은 정관계·학계·재계 인사들이 있다. 

학봉고택에서 치러지는 의성김씨 기제사.
#또 다른 의성김씨-분관 성씨들

의성김씨 후손들은 여러 파로 나뉘었을 뿐 아니라, 많은 성씨가 본관을 분적해 나가기도 했다. 그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성김씨(開城金氏): 개성김씨는 김석의 8세손 김공우의 셋째 아들 김용주를 시조로 삼고 있는 성관이다. 개성으로 성관을 삼은 것은 시조 김용주가 여진정벌에 공을 세우고 추충공신(推忠公臣)으로 책록되고, 개성부사·평장사를 거쳐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짐에 따라 분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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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김씨(義城金氏)의 연원

 

의성 김씨(義城金氏)의 시조(始祖) 김석(金錫)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일설에는 넷째 아들)이며,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외손(外孫)으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의성(義城)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석(金錫)의 9세손 용비(龍庇)가 태자첨사(太子詹事ㆍ동궁의 정3품 벼슬)를 지냈고, 용필(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역임하였다.

▲ 의성김씨세보(義城金氏世譜).

대부분의 다른 가문들이 그러하듯이 의성 김씨의 세계(世系)도 상고하기가 힘들다. 의성 김씨가 실질적인 시조로 받드는 인물은 고려 말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낸 9세손 용비(龍庇)로, 용비(龍庇)의 묘비를 지은 후손 동강(東岡) 우옹(宇?ㆍ1540~1603)은 비문의 첫머리에 “우리 시조는 고려 태자 첨사 용비”라고 적었다.

▲ 의성 김씨의 실질적인 시조인 김용비(金龍庇)의 묘.

 

 

8세손 공우(公遇)의 장자(長子)인 용비(龍庇)는 고려말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이 대거 쳐들어와 임금이 복주(福州ㆍ현 안동)으로 몽진하고 이 고장의 옥산 성골 등지로 피란을 예정할 즈음 의성 일원에서 날뛴 도적의 무리를 현주(縣主)로 있던 그가 물리쳐 소란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 공으로 이등공신 고려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 의성군(高麗金紫光祿大夫太子詹事義城君)이 되었고, 공우(公遇)의 차자(次子) 용필(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 막내 용주(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 의성군 사곡면 토현동에 자리한 김용비(金龍庇)를 제향하는 오토재(五土齋).

 

용비(龍庇)의 첫째 아들인 의(宜)는 전리좌랑(典理佐郞)을 역임했고, 의(宜)의 셋째 아들인 춘(椿)은 광정대부(匡靖大夫)ㆍ추밀원부사동정(樞密副使同正)을 지내고 은청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銀靑光祿大夫門下侍中平章事)를 역임, 의성 김씨에서 분파(分派)하여 예안 김씨(禮安金氏) 시조가 되었다가 조선 말기에 예조(禮曹)의 영(令)을 받아 의성(義城)으로 환본(還本)하였으며, 시호(謚號)는 문정(文貞)이다.

용비(龍庇)의 셋째 아들 영(英)은 문하찬성사직제학(門下贊成事直提學ㆍ정4품)을 지냈으며, 아들 지예(之銳)는 문과에 급제하여 초계군수(草溪郡守)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고, 문량(文良)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고려 때 무관(武官) 광부(光富ㆍ?~1379)는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1363년 2등공신이 되었고, 1372년 부원분자(附元分子) 고철두(高鐵頭)가 변방에 침입하였을 때 수어관(守禦官)으로 이를 물리쳤으며, 그 뒤 계림윤(鷄林尹)을 거쳐 우왕 5년(1379년) 합포도순문사(合浦都巡問使)가 되어 단계(丹溪)ㆍ거창(居昌)ㆍ야로(冶爐) 등을 습격하고 가수현(嘉樹縣)에 침입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殉節)하여 충의단(忠義壇)에 제향(祭享)되었다.

그 외 고려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훤(暄)과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발문(跋文)을 적은 거두(居斗)와 정당문학(政堂文學) 거익(居翼), 추밀원부사(樞密院府使) 춘(椿),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옥(玉), 평장사(平章事) 연(衍) 등이 명문의 대를 이었다.

고려에서 명성을 날린 의성 김씨는 조선조에서도 명문의 대(代)를 이어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 많았다. 옥(玉)의 아들 현주(玄珠)가 찬성사(贊成事)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고, 영렬(英烈)은 태종 4년(1404년) 추충분의좌명공신(推忠奮義左命功臣)에 올라 왕명으로 회맹록(會盟錄ㆍ공훈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책)에 기록되었으며, 존성(存誠)의 아들 효손(孝孫)은 세종(世宗) 때 병조참의를 거쳐 형조(刑曹) 및 예조의 참판을 지내고 대사헌을 역임했으며, 을방(乙邦)은 고려 문신으로 국운(國運)이 다하자 통곡하며 예안(禮安)의 요성산(邀聖山)으로 내려가 초당(草堂)을 짓고 은거하였는데 조선조에서 수 차례에 걸쳐 벼슬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기리며 불취하자 그가 살던 마을을 둔번리(遁燔里)라 불렀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 때 문과에 급제한 흠조(欽祖)는 중종반정 후에 검열(檢閱)을 거쳐 단양(丹陽)과 제주(濟州) 등지의 목사(牧使)를 역임한 후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으며, 윤석(潤石)은 중종 때 등과하여 청송부사로 나갔다가 홍문관 교리를 거쳐 대사성에 올라 이름을 날렸으며, 문신으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워 용맹을 떨친 제민(齊閔)은 당대의 명신(名臣)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선조 6년(157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낭관(郎官)을 거쳐 화순현감(和順縣監)ㆍ순창군수를 지낸 뒤 병으로 사퇴하여 역문연구에 몰두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필적.

 

 

조선 중기에서 의성 김씨를 더욱 빛낸 인물은 모재(慕齋) 안국(安國)과 사재(思齋) 정국(正國)의 형제를 들 수 있다. 모재(慕齋) 안국은 용필(龍弼ㆍ수사공)의 11세손으로 일찍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여 연산군 7년(1501년) 생원(生員)ㆍ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2년 뒤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어 박사(博士)ㆍ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한 후 예조참의(禮曹參議)ㆍ대사간ㆍ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숙종 12년(1517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각 향교(鄕校)의 소학(小學)을 권하고 벽온방(?瘟方ㆍ의관 김순몽, 유영정, 박세거 등이 엮은 의서)ㆍ창진방(瘡疹方ㆍ세조 때 임원준이 쓴 전염병을 논한 의약서) 등을 간인(刊印)하여 보급하였다. 그외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대제학(大提學)ㆍ찬성(贊成)을 지낸 후 중종 36년(1541년) 병조판서에 올라 태지(苔紙ㆍ가는 털과 같은 물이끼와 닥나무를 섞어서 만든 종이)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고 이를 권장했다. 특히 그는 조광조와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ㆍ정치를 가장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사상)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성리학을 포함하여 천문ㆍ주역ㆍ농사ㆍ국문학 등에 조예가 깊어 많은 저서를 남겼다.

??▲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김정국(金正國)이 성리대전(性理大典)을 요약하여 4권으로 편집한 후, 그 당시 나주 관청에 보관해 있던 금성목활자(錦城木活字)를 기본으로 하고 부족한 것은 새로 보충하여 400부를 간행한 성리대전서절요(性理大全書節要ㆍ보물 제1157-2호).

 

 

사재(思齋) 정국(正國)은 형인 안국(安國)과 함께 김굉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중종 4년(150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ㆍ휴가를 얻어 집에서 공부함)를 한 후 이조정랑(吏曹正郞)ㆍ사간 등을 지낸 후 승지에 올랐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직되어 고양(高陽)으로 내려가 학문에 열중하다가 중종 32년(1537년) 복관되고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편민거폐(便民?弊ㆍ백성의 편리를 위하여 폐단을 없애는 것)라는 시정책(施政策)을 건의하여 시행케 했으며, 병조(兵曹) 및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한 후 예조ㆍ병조ㆍ형조참판을 지냈다.

▲ 학봉 김성일 종손가에서 보관하여 온 고문서.??

▲ 학봉 김성일 종손가에 보관된 김성일 유서.

 

용비(龍庇)의 12세손 성일(誠一)은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으로 이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선조 때 등제하고 봉교(奉敎)를 시작으로 여러 벼슬에 올랐다가, 초유사(招諭使ㆍ난리가 일어났을 때 평정하기 위하여 백성을 타이르는 일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를 거쳐 경상우도관찰사 겸 순찰사를 지냈다.

삼척부사 희삼(希參)의 아들 우옹(宇?)은 퇴계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명종 때 문과에 올라 선조 때 호당(湖堂ㆍ젊고 재주 있는 문신으로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혔다. 그외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고 ‘개암집(開巖集)’을 집필한 우굉(宇宏)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을 규합하여 항쟁한 통(統)이 유명했으며, 여건(汝鍵)은 숙종 때 수찬(修撰)을 지냈고, 저서로 ‘북천록(北遷錄)’을 집필하였다.

영남 유림(嶺南儒林)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학자로 이름난 흥락(興洛)은 여러 차례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의병대장 하락(河洛)은 여러 곳의 전투에서 순절하여 문신(文臣)의 뒤를 이어 무신(武臣)으로 가문을 빛내었다. 독립운동가 동삼(東三)ㆍ원식(元植)ㆍ창숙(昌淑) 등도 일본의 강점기에 나라의 독립을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명문 의성 김씨의 자랑스런 후손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 두 아들마저 항일투쟁에 바친 유림의 지도자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창숙(昌淑ㆍ1879~1962)은 자 문좌(文佐), 호 심산(心山)ㆍ벽옹(?翁)으로 경북 성주(星州) 출생이다. 어려서 유학을 배웠고 문장에 능하였다. 광무 9년(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성토하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융희 3년(1909년)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창립, 육영사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망명을 결심, 전국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儒林團陳情書)를 휴대하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제1차 유림단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1921년 신채호(申采浩) 등과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쑨원[孫文]과 교섭, 독립운동기금을 원조받았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어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을 역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회장 및 성균관장을 역임하였고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6·25전쟁 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하야(下野)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李始榮)ㆍ김성수(金性洙)ㆍ조병옥(趙炳玉)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발표하여 권력비호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하였다. 1962년 노환으로 죽은 뒤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되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