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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광산 김씨(光山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광산김씨 시조 김흥광이 자리를 잡고, 8명의 평장사가 배출되었다는 담양군 평장동 평장사 전경.
 
# 광산김씨는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신라계 김씨에서 경주 김씨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성관이다.
광산김씨의 유래는 신라 왕자의 하나로 알려진 김흥광(金興光)이 광주지역(광주시 서일동과 담양군 평장동)에 자리 잡으면서 ‘광산’이라는 본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우리나라의 주요 문벌 중의 하나로 꼽히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을 이끌어가는 인재의 산실, 삼한 갑족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8명의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5명의 정승과 대제학(大提學) 7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을 배출하였다. 또한 조선 예학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과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부자가 동국 18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렸다.

현재도 본관별 성씨 인구 순위는 김해김씨·전주이씨·밀양박씨·경주김씨·경주이씨·경주최씨·진주강씨 다음으로 8위에 속하며, 인구는 83만7000명이다(2000년 인구센서스, 통계청). 

 

신무왕묘. 광산김씨 시조 김흥광은 신무왕의 셋째 아들로 전해진다. 신무왕은 경주에서 왕위 다툼에 패해 장보고에게 의탁했다가 장보고의 힘을 빌려 민애왕을 죽이고 45대 왕에 등극하지만, 6개월 만에 죽었다.
# 광산김씨의 시조와 유래

앞서 거론했듯이 광산김씨는 신라의 왕자 김흥광이 신라 말기 혼란스러운 경주를 피해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시)에 터전을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김흥광이 신라의 왕자 출신이라는 것은 고려 충렬왕 때 제안황대전고(提按黃臺典誥) 벼슬을 지낸 김이(金珥)의 광산현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에 나온다. 그 문건에 의하면 “이 고을은 신라 때 왕자 김흥광이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왕궁을 버리고 서인이 되어 이 땅 서일동에 와서 사셨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광산김씨의 시조 김흥광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그가 신라 45대 신무왕의 셋째 아들이라는 설(정유대동보)과 다른 하나는 49대 헌강왕의 아들(동국만성보, 조선씨족통보)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두 번째 가설은 신빙성이 높지 않다. 왜냐하면 신라 49대 헌강왕 시대에는 한두 건의 반란은 있었지만, 서울인 경주는 기와집에 숯으로 밥을 하는 대단히 화려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토록 화려했던 경주에서 왕자가 혼란을 피해 무주로 숨어들어 은거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흥덕왕 사후,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희강왕과 다투다 패하여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였다가, 장보고의 힘을 빌려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45대 신무왕의 이력을 볼 때, ‘광산현제영시서’의 글과 연관성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왕위에 오른 신무왕이 6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은 문성왕시대에도 친족 간의 왕권다툼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첫 번째 주장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광주에 자리를 잡은 김흥광은 그의 아들 김식(金軾)이 각간에 오르고, 손자 김길(金吉) 때에 고려에 귀의하여 무공을 세움으로써 광산부원군으로 책봉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고려시대에 대대로 8명의 평장사(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급)를 배출함으로써 ‘평장동’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광산을 본으로 삼은 때는 광산부원군으로 책봉된 고려 초기 이후로 판단된다.

하지만, 광산현제영서와 다른 기록도 보인다. 즉, 동지추밀원사를 지낸 김양감(金良鑑)의 아들 김의원(金義元) 묘지명에 쓰여 있는 나주광양현인(羅州光陽縣人)이라는 금석문이 있다.

이로 인해 이수건 교수 등은 광산김씨가 광주의 토성으로 있다가 고려 말에 가문을 일으키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뒤, 광양김씨 선계에 자신을 이어 붙인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운다(고려토성연구 上). 그러나 이 주장은 고려시대 성관의 의미가 확고하지 않았으며 어떤 때는 출생지를, 어떤 때는 본관을 기록하는 경우가 함께 존재했고, 광산김씨가 인구도 많지 않고 뚜렷한 명문가문도 아닌 광양김씨에게 세계를 이어붙일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쉽게 납득되지 않는 가설이다.

 

 

김장생은 이율곡의 제자로서 조선 예학의 태두이다. 그의 아들 김집과 함께 동국 18현으로 성균관에 배향되었고, 송시열·윤증 등 기호학맥의 본거지를 형성했다.
# 광산김씨의 분파와 갈래

김흥광을 시조로 하는 광산김씨는 세계를 내려오면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중 광산김씨 내에서는 양간공파·낭장공파·문숙공파·문정공파·문원공파·사온직장공파 등 6개 파가 생겨났고, 각 파는 또다시 수많은 지파로 나뉘어졌다.

아예 새로운 성이나 본관을 만들어 나간 파도 적지 않다. 그중 하나로 김흥광의 31세 손이면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충장공(忠壯公) 김덕령 장군을 시조로 하는 용안김씨(龍安金氏)가 있다.

용안김씨는 김덕령 장군이 무고로 옥사를 하고 부인도 자결을 하자, 홀로 남은 아들 김광옥(金光沃)이 전북 익산군 용안면에서 은거하다, 외숙인 이인경의 임지인 평안도에 가서 정착한 데서 유래한다. 현재 인구는 50가구 244명(1985년 인구조사)으로 서울과 부산 등에 거주하고 있다.

그 외 은진김씨(恩津金氏)도 있다. 은진김씨의 시조는 김전개(金田槪)이다. 그는 광산김씨 별파인 감찰어공파의 사람으로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판관이 되었다. 국조방목(國朝榜目)에는 그의 본관이 광산이고, 후손들의 분포지는 관서지방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후손들이 은진(논산시)에서 관서로 이주한 것 같다.

이들은 평안북도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서울 경기 등에 89가구 532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 시조 김흥광의 14세 손 김경량의 아들인 김수(金須)를 시조로 하는 초계김씨(草溪金氏)가 있다. 문과에 급제한 후 영암부사로 간 그는 삼별초군이 제주에 몰려들자 부하들과 제주를 지키려다 전사했다.

그 후손들이 광산김씨에서 분파한 후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충남과 서울, 부산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들은 총 189명(1985년 인구조사)으로 파악되었다.

또 다른 분파로 보령김씨(保寧金氏)가 있다. 보령김씨는 중종 때 예조판서를 역임한 김극성(金克成)을 시조로 하는 파와 김극성 후손으로 병조정랑을 지내고 보령에 정착한 김억적(金億積)을 1세조로 하는 파가 있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 보령김씨는 남한에 579가구 24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조선 명종조에 장례원 직장을 지낸 김태진(金泰辰)을 시조로 하는 남해김씨(南海金氏)가 있다. 김태진은 광산김씨 문숙공하 판도판서공파인 김극신의 증손인데, 연산군의 혼정을 탄핵했다가 관직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이후 어찌된 연유인지 몰라도 남해에 정착하게 되었다. 후손들은 경기 김포와 서울 성동구 일원에서 살고 있다. 남해김씨의 인구는 총 539명(1985년 인구조사)이며, 주로 서울과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다.

이외에도 청거김씨(淸渠金氏)가 있다. 청거김씨의 시조 김승진은 김흥광의 16세손으로 화평군에 봉해진 충숙공 김심의 아들이다. 그는 공민왕 때 상호군을 지내고 광산부원군에 봉해졌는데, 후손들이 광산김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청거(진안군 속면)로 정한 것 같다. 그외에도 김남우(金南雨)을 시조로 하는 무주김씨(茂州金氏), 김천리(金天利)를 시조로 하는 무풍김씨(茂豊金氏) 등도 광산김씨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구체적인 분적 기록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광산김씨에서 아예 성씨를 바꾼 성관도 존재한다. 사씨(舍氏)가 그들이다. 사씨는 원래 광산김씨였는데, 10대조 김극윤(金克胤)이 사씨로 개성하였다고 전한다. 1930년 국세조사 때 처음으로 등장한 사씨는 1985년 조사 때는 23가구 8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천주교 개혁에 헌신했으며, 민주화운동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커다란 족적을 남긴 故김수환 추기경.
# 광산김씨의 연혁과 인물

광산김씨는 김흥광의 10세 손인 김체의 아들 김위(金位)와 김주영(金珠永)의 형제 대에서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져 김광세(金光世)와 김광존(金光存)의 양대산맥을 이룬다.

김광세의 후손으로는 삼별초의 난에 순절한 대장군 김경량이 있고, 세조 때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김성원이 있으며, 손자인 김구(金絿)는 조광조와 함께 혁신정치를 도모하다 사사된 기묘명현(己卯名賢)에 속한다. 특히 김구는 필법과 문장에 뛰어났다. 그로 인해 그가 살던 인수방 마을 이름을 딴 인수체(仁壽體)라는 필체가 생길 정도였다.

김광존의 후손을 보면, 그의 고손자 김진이 대제학에 올랐고, 김정의 아들 김약채(金若采) 이후 광산김씨의 화려한 명맥이 이어졌다. 김정은 추성보리공신에 책록되고, 벼슬은 중대광(重大匡, 종1품)에 이르렀고, 광성군에 봉군되었으며, 김약채·김약항·김약시 등 세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특히 김약채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논산시 연산면 일대에 자리를 잡아 훗날 기호학맥의 본거를 형성하는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 등을 배출하였다. 김장생에서 시작된 기호학파는 영남학파와 견주며, 조선 학맥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사계 김장생의 단일 후손에서는 7명의 대제학이 배출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가례집람(家禮集覽) 3권, 경서변의(經書辯疑) 8권 등 총 21권의 저서를 남긴 김장생은 조선 예학의 최고봉을 이룬다. 이러한 그의 학문은 아들인 김집과 송시열, 송준길, 윤증으로 전승되어 조선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으며, 본인은 아들과 함께 동국 18현으로 성균관에 배향되었으며, 안성의 도기서원과 연산의 돈암서원 등 10여개 사원에 제향되었다.

숙종조에 들어와서 인경왕후(숙종의 비)의 아버지인 김만기와 서포 김만중(金萬重)은 형제가 모두 대제학에 올라 명성을 드높였는데, 그중 김만중은 효심이 지극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지은 구운몽(九雲夢)도 귀양살이로 인해 어머니 곁을 떠나 있게 된 상황에서 어머니의 시름을 달래주려는 의도에서 지은 순 한글 소설이다. 그외 그의 저작으로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집(西浦集) 등이 전해진다.

이렇듯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광산김씨는 한국사회에서 최고의 명문거족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조선시대 광산김씨에서 배출된 인물만 하더라도 정승 5명, 대제학 7명, 왕비 1명(인경왕후)이 있고, 조선시대에 문과 269명, 무과 7명, 사마시(생원 진사를 뽑는 과거) 275명, 역과(번역관) 15명, 의과 4명, 음양과(천문 지리)에 1명, 율과(잡과 중 하나)에 1명, 주학에 19명 등 584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했다(김진우, 한국인의 역사).

현재도 수많은 인물이 광산김씨에서 배출되고 있다. 최근 작고한 김수환(金壽煥) 가톨릭 추기경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출생하여 1951년에 사제서품을 받고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며, 추기경으로 재직하면서 한국 천주교의 개혁에 헌신하고 민주화 운동과 서민을 돌보는 데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외에도 꽃을 노래한 시인으로 유명한 김춘수씨,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김황식 총리 등이 있으며, 김숙희(전 교육부 장관), 김하중(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장수(전 국방부 장관) 등과 김대중(조선일보 전 주필), 김용옥(철학과 교수), 김희수(김안과 병원장, 건양대 초대 총장), 김택수(전 국가대표 탁구선수), 김용건·김아중(영화배우) 등 수많은 인물이 배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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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김씨(光山金氏)의 연원
 

 

‘광산 김씨 정유대동보(光山金氏丁酉大同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 및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계(先系)는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고, 다만 김흥광(金興光)이 신라의 왕자(王子)임은 틀림이 없다고 본다.

김흥광(金興光)은 당시 신라(新羅)가 어지러워 장차 국난(國難)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경주(慶州)를 떠나 광주(光州) 서일동(西一洞ㆍ현 담양군 평장동)에 자리를 옮겨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으며 살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선조의 세거지(世居地)인 광산(光山ㆍ광주와 동일)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으며, 그의 후손들이 누대(累代)에 걸쳐 평장사(平章事ㆍ정2품의 벼슬)를 8명이나 역임하여 세상 사람들은 그곳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에 자리한 광산 김씨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의 단소(壇所).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크게 문정공파(文正公派)ㆍ문숙공파(文肅公派)ㆍ양간공파(良簡公派)ㆍ낭장공파(郎將公派)ㆍ사온직장공파(司?直長公派)의 5개 파로 분파되었다. 원래는 문정공파(文正公派)ㆍ문숙공파(文肅公派)ㆍ양간공파(良簡公派)의 3개 파로 분파되었는데,1957년 ‘한성대보(漢城大譜)’를 간행할 때 낭장동정(郎將同正) 규(珪)를 파조(派祖)로 하여 파보(派譜)를 따로 간행하던 일파(一派)를 13세(世) 대린(大鱗)의 장자(長子)로 삽입토록 결의하여 이 때부터 4개 파로 되었고, 1985년 17세 사온직장(司?直長) 영(英)의 후손으로 충북 지역에서 따로 파보를 간행해 오던 일파를 사온직장공파(司?直長公派)로 받아들여 5개 파가 되었다. 그리고 황대전고(黃臺典誥)를 지낸 이(珥)는 대린(大鱗)의 3자로 들어왔으나 후계가 미상이다. ?

 

 

▲ 1739년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에 세워진 광산 김씨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의 유허비(전남지정문화재 기념물 제200호).

후손에서는 김흥광(金興光)의 아들 식(軾)이 신라에서 각간(角干)을 지냈고, 손자 길(佶)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후당(後唐)에 조공사(朝貢使)로 다녀 오는 크게 공을 세웠으며, 벼슬은 삼중대광(三重大匡) 사공(司空)에 이르렀다. 이 사실이 중국의 사서(史書) ‘책부원구(冊府元龜)’의 외신부(外臣部) 조공조(朝貢條)에 “청태 원년(고려 태조 17년ㆍ934년) 8월 청주(靑州ㆍ중국 산동성 소재)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고려조의 조공사 김길의 선박이 해안에 이르렀다.”(淸泰元年 八月 靑州言 高麗入貢使 金吉 船至岸)라고 되어 있다.


준(峻)은 길(佶)의 아들로 벼슬이 좌복야(左僕射ㆍ상서도성의 정2품 벼슬)에 이르렀으며, 아들 책(策)은 광종 15년(964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과거제도(科擧制度)가 있었는데 조익방(趙翌榜)에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니 임금께서 잔치를 베풀고 급제를 축하하고 특별히 의봉문(儀鳳門)을 열어 말(馬)을 하사하면서 마부로 하여금 고삐를 잡고 출입케 하여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였다. 그후 여러 요직을 거쳐 좌복야(左僕射)ㆍ한림학사ㆍ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한편 ‘광산탁씨족보(光山卓氏族譜)’에 의하면 그 시조 탁지엽(卓之葉)이 책(策)의 문하에서 공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책(策)이 관직을 떠난 후 바로 광주(光州)에서 터를 잡고 글을 가르쳤다고 본다.

책(策)의 아들 정준(廷俊)은 정종 1년(1034년) 전중시어사(殿中侍御事ㆍ어사대의 정6품이나 종5품 또는 감찰사의 정6품 벼슬)에 제수되었고, 정종 7년(1040년)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과 권지승선(權知丞宣)이 되었다가 정종 10년(1043년) 승선(丞宣)이 되었다. 문종 4년(1049년) 중추원사(中樞院事)와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를 거쳐 문종 8년(1053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가 문종 10년(1055년)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문종 12년(1057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할 때 어구마(御廐馬) 1필(匹)을 하사받았다.

 

 

▲ 1715년 발간된 현존 최고(最古)의 광산 김씨 족보. 문안공(文安公) 김양감(金良鑑)의 후손들 이름이 지금의 족보와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고증을 요한다.


양감(良鑑)은 정준(廷俊)의 아들로 문종 5년(1051년)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 24년(1070년) 상서우승좌간의대부(尙書右丞左諫議大夫)에 이어 상서좌승지어사대사(尙書左丞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074년 태복경(太僕卿)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 노단(盧旦)과 함께 송(宋)나라에 사은사로 가서, 요(遼)나라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종래 등주(登州)를 거치던 송나라와의 왕래 항로를 변경하여 명주(明州ㆍ浙江省)를 정박지로 정하는데 합의하고 돌아왔다. 이듬해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ㆍ참지정사판상서병부사(參知政事判尙書兵部事)ㆍ권판중추원사(權判中樞院事)를 거쳐 1082년 좌복야(左僕射)에 올랐다. 선종이 즉위하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서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이정공(李靖恭) 등과 시정(時政)의 득실을 진술하고 이어 판상서호부사(判尙書戶部事)를 거쳐 수태위(守太尉)에 올랐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저자라고 전해지며, 시호는 문안(文安)으로 1957년 고창(高敞)의 화동서원(華東書院)에 철향(綴享)되었다.

 

 

▲ 문안공(文安公) 김양감(金良鑑)을 제향하는 전북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 화동서원(華東書院).

약온(若溫ㆍ1059∼1140)은 양감(良鑑)의 둘째 아들로 초명은 의문(義文)이며, 자는 유승(柔勝)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 상의봉어(尙衣奉御)를 거쳐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1122년 인종이 즉위한 뒤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임명되었고, 1140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사직하였다. 성품이 공검(恭儉)하고 교만하지 않아 이자겸(李資謙)이 권력을 휘두를 때 그와 인척간이면서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시호는 사정(思靖).


의원(義元)은 양감(良鑑)의 셋째 아들이며 약온(若溫)의 동생으로 고려 인종 때 17세로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아버지 문안공(文安公)의 음덕으로 관직에 올라 장사랑(將仕郞)과 군기시 주부동정(軍器注簿同正)이 되었다, 선종 6년(1088년) 23세에 수어도감판관(戍御都監判官)을 지냈고, 여러번 승진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감찰어사(叢察御史)로 연천(漣川)을 지킬 때 여진족을 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예종 17년(1122년)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이어 호부상서ㆍ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ㆍ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러 치사(致仕ㆍ나이가 많아 벼슬에서 물러남)하였다. 그의 아들 광중(光中)은 간의대부(諫議大夫ㆍ고려 문하부의 관직)와 비서감(秘書監ㆍ종3품 관직)을 역임하였다.

 

▲ 실전된 묘를 1749년 개성에서 찾았으나 국토 분단으로 찾을 수 없는 문숙공(文肅公) 김주정(金周鼎)의 묘산도(墓山圖).

주정(周鼎ㆍ1228∼1290)은 자는 지숙(之淑)으로 문숙공파(文肅公派)의 파조로 성격이 침착ㆍ관후하며 과묵하고 누구와도 함부로 사귀지 않았다. 음서(蔭敍)로 부성위(富城尉)가 되었으며, 원종 5년(126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해양부록사(海陽府錄事)에 임명되고, 또 김준기(金俊器)의 추천에 의해 내시(內侍)직에 소속되었다가 여러 번 관직을 옮겨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충렬왕 1년(1274년) 대부경 좌사의대부(大府卿左司議大夫)에 임명되었고, 1278년 충렬왕이 원나라에 갈 때 행종도감사(行從都監使)가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왕경유수군(王京留守軍)ㆍ합포진수군(合浦鎭守軍) 및 황주ㆍ봉주(鳳州)ㆍ염주(鹽州)ㆍ백주(白州) 둔전군의 뒷받침이 번거로워 백성들의 고통이 심한 것과, 김방경(金方慶)이 큰 공이 있음에도 억울하게 무고를 입어 유배된 것을 상소하여 석방케 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1281년 김방경(金方慶)과 같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로 향하였으며, 5월에는 주사(舟師)로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대명포(大明浦)에 이르렀으나 태풍을 만나 병선이 전복되어 많은 군사들이 익사하게 되었는데 이때 많은 사람을 구출하였다고 한다. 그 후 광정대부 도첨의사사 보문각태학사 동수국사판삼사사(匡靖大夫都僉議使司寶文閣太學士同修國史判三司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묘는 실전되어 수호하지 못하다가 후손 천상(天相)이 영조 26년(1749년)에 개성부 동문외 중서면 연하동 덕달곡에서 찾아 수호하게 되었으나 국토 분단으로 설단하였다.

 

 

▲ 양간공(良簡公) 김연(金璉)의 단소와 좌우로 장남 김사원(金士元)과 차남 김사형(金士亨)의 단소.

 

▲ 양간공(良簡公) 김연(金璉)을 주벽으로 모시고 제향하는 전북 고창군 고수면 전불 노산사(蘆山祠ㆍ전북지방문화재 제100호).

연(璉ㆍ1215~1291)은 양간공파(良簡公派)의 파조로 초명은 중룡(仲龍), 자는 기지(器之), 아버지는 증문하시랑 평장사(贈門下侍郞平章事) 대린(大鱗)이다. 천품이 준수 비범하였고 눈섭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았으며, 어릴 때부터 내시(內侍)가 되어 임금을 가까이 모셨다. 고종 43년(1255년)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선정하였고, 네 고을에 치척을 남겼으며 병부시랑(兵部侍郞)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충렬왕 2년(1275년) 경상도 도지휘사가 되어 동정(東征ㆍ원나라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일)할 전함 900척을 만들 때 총책임자가 되었다. 이때 어느 날 밤에 홀연히 꿈에 허리에 찬 금어(金魚ㆍ벼슬아치가 차고 다니던 황금으로 물고기 모양처럼 만든 주머니)가 땅에 떨어지니 스스로 해몽하기를, “몸의 장식이 이미 갔으니 이제 오래 머물 수 없다” 하고 사퇴하니 지도첨의(知都僉議)로 승진시키고 이어 광정대부 첨의시랑 찬성사(匡靖大夫僉議侍郞贊成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양간(良簡)으로 정조 6년(1781년) 고창군 고수면 전불 노산사(蘆山祠)에 배향되었다.

 

▲ 제주도에서 삼별초(三別抄)와 싸우다 순절한 김수(金須) 장군 유적비와 단소.

수(須)는 문과에 급제해 어사(御史)를 거쳐 영암부사를 지내고, 원종 12년(1271년) 진도(珍島)에서 패한 삼별초(三別抄)가 제주(濟州)로 몰려들자 안찰사(按察使) 권단(權但)의 명으로 2백 명의 관군을 이끌고 제주를 지키다가 전사했다.


수(須)의 아들 태현(台鉉ㆍ1261∼1330)은 자는 불기(不器)로 문정공파(文正公派) 파조이다. 충렬왕 2년(1275년) 감시(監試)에 수석으로 합격,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고 판도총랑(版圖摠郎)ㆍ우승지(右承旨)를 거쳐 충렬왕 28년(1301년) 밀직부사(密直副使) 때 성절사(聖節使)로 원(元)나라에 갔다. 그때 원의 황제가 간쑤[甘肅]에 가 있으면서 모든 진공사(進貢使)는 연경(燕京)에서 대기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가 황제의 명을 어길지언정 행재소(行在所)에 가는 것은 우리 군주의 명이니 어길 수 없다고 맞서자 중서성(中書省)이 허락하여 행재소에 가게 되었으며, 그의 충성을 높이 산 원제(元帝)로부터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다. 이때 신하들이 분당하여 충렬왕과 아들(충선왕)을 이간시켜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충렬왕 32년(1305년) 지도첨의사사(知都僉義司事)로 원나라에 가서 도당들의 흉계를 밝혀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충선왕의 복위 뒤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충숙왕 때 평리(評理)ㆍ권정동행성사(權征東行省事)를 지내다 중찬(中贊)에 이르러 사임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

 

▲ 개성에 자리한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의 묘산도(墓山圖).

▲ 문민공文敏公) 김광철(金光轍)의 묘지명은 길이 116㎝X폭 47㎝로 청석(靑石)을 판형으로 다듬어 한쪽 면에 그의 행적을 새겨 놓았다.?

태현(台鉉)의 아들 광재(光載)는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충혜왕(忠惠王)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한 공으로 사복시승(司僕寺承)을 거쳐 도관정랑(都官正郞)에 올랐다가 충혜왕 복위 5년(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판도판서(版圖判書)ㆍ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역임하고 충정왕(忠正王) 때 참의평리(參議平理)ㆍ전리판서(典理判書) 등을 지냈다. 공민왕(恭愍王) 때 어머니가 죽자 여막(廬幕)을 짓고 거상(居喪)하여 왕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 곳을 영창방(靈昌坊) 효자리(孝子里)로 정표(旌表)를 세우게 하였다.

태현(台鉉)의 아들 광철(光轍ㆍ1284~1349)은 ‘고려사(高麗史)’에 열전(列傳))이 남을 정도로 광산 김씨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인물로, ‘고려사(高麗史)’에는 충정왕 원년(1349) 6월 병자일에 ‘화평군 김광철이 졸(卒)했다’는 아주 짧은 행적만 나와 있다.

하지만 묘지명을 통해 김광철이 17세에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 나간 후 학문과 관계가 깊은 예문관 대제학(禮文館大提學)을 비롯해 성균관 제주(成均館祭酒)ㆍ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고, 지제교(知製敎) 같은 문한직(文翰職)을 두루 지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묘지명에 의하면 광철은 죽기 전에 둘째 사위에게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이 반드시 즉위할 것이니 너희들은 절대로 두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은 나중에 충정왕에 옹립된다. 이 같은 언급은 이 시대 원(元) 간섭기 고려 권력층에서 차기 권력의 향배를 둘러싸고 숨막힌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능통한 첨(瞻)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한 회조(懷祖)의 아우로 우왕 2년(1376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지냈으며, 음률(音律)에 밝아 아악(雅樂)을 교정하고 의례(義禮)에도 정통했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황주(黃州)에 은거하여 끝까지 절개를 지킨 약시(若時)는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의 한 사람으로 조선 순조(純祖)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국광(國光)은 감찰(監察)을 지낸 철산(鐵山)의 아들로 세종 23년(144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어 감찰ㆍ지평 등을 역임하고, 세조 13년(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병조판서로서 평정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세조(世祖)가 죽자 신숙주(申叔舟) 등과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맡았고, 우의정을 거쳐 성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에 올라 성종 2년(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이 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일찌기 세조의 명으로 최항(崔恒)ㆍ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였다. 그의 동생 겸광(謙光)은 단종 1년(1453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내고 세조 때 야인정벌에 공을 세워 군기감정(軍器監正) 및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 충남 계룡시 두마면 왕대리에 자리한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의 묘와 신도비각.

 

 

 

▲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의 아들 김극뉴(金克?)의 묘는 조선 8대 명당의 하나로 전북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에 자리하며, 김극뉴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고조부가 된다.

극성(克成 1474∼1540)은 자는 성지(成之), 호는 청라(靑蘿)ㆍ우정(憂亭)으로 연산군 4년(1498년)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연경(燕京)에 서장관(書狀官)으로 파견되었다. 연산군이 심순문(沈順門)을 죽이려 할 때 죽기를 무릅쓰고 이를 간했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광성부원군(光成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조판서를 지낼 때 김안로(金安老)의 모함으로 흥덕(興德)으로 귀양갔으나, 뒤에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방면되어 중종 32년(1537년) 우의정이 되었다. 저서로 ‘우정집(憂亭集)’이 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

 

 

 

▲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광성부원군(光成府院君)에 봉해진 충정공(忠貞公) 김극성(金克成)의 묘.

계휘(繼輝ㆍ1526~1582)는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으로 어려서부터 사서와 경서를 탐독하였으며, 문장에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명종 4년(1549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혔다. 1557년 김홍도(金弘度)와 김여부(金汝孚)의 시기로 옥사(獄事)가 일어났을 때, 김홍도의 당으로 몰려 파직되었다가 복직되었으나 부친상의 기간이라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첨정(僉正)ㆍ사간(司諫)ㆍ집의(執義)ㆍ응교(應敎)ㆍ전한(典翰)ㆍ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냈다. 1566년에는 증시문과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선조 4년(1571년)에는 이조참의ㆍ예조참의에 제수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공조참판ㆍ형조참판ㆍ동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평안도 관찰사로 있다가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한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어 예조참판에 올라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죽은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나주(羅州)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제향되었다.
 

▲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자리한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의 묘와 신도비(충남유형문화재 제110호).


대대로 석학(碩學)과 명신을 많이 배출한 가문에 명문의 뿌리를 더욱 깊게 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대가 장생(長生ㆍ1548~1631)은 계휘(繼輝)의 아들로 광산 김씨의 우뚝 선 인물이다.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로 선조 11년(1578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올랐으며, 창릉참봉(昌陵參奉)ㆍ정산현감(定山縣監)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戶曹正郎)으로 공을 세웠으며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었다. 선조 35년(1602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이후 익산(益山)군수와 회양(淮陽)ㆍ철원(鐵原)부사를 지냈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에 연루되어 심문받았으나 누명을 벗은 뒤에 관직을 사퇴, 연산(連山)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 1687년 송시열 등이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유고를 모아 간행한 사계유고(沙溪遺稿).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장령(掌令)에 보직되었고, 사업(司業)ㆍ상의원정(尙衣院正)ㆍ집의(執義) 등을 거쳐 공조참의(工曹參議)ㆍ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그후 다시 사퇴, 낙향하였으나 1625년 특명에 의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고 행호군(行護軍)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군량미 조달에 힘쓰며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였다. 1628년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었으나 사퇴하고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송익필(宋翼弼)과 이이(李珥)의 문인으로서 예학(禮學)과 성리학(性理學)을 배웠고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아들 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예학의 태두로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등의 유학자를 배출하였으며, 서인(西人) 중심의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루었다. 숙종 14년(1688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되고 안성(安城)의 도기서원(道基書院), 연산(連山)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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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 김씨 전성기의 문을 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묘.


그의 학문을 계승한 아들 집(集ㆍ1574~1656)은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로 18살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재랑(齋郎)이 되었으나, 광해군 때의 어지러운 정국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인조반정 후 등용되어 부여현감을 거쳐 임피현령ㆍ공조참의(工曹參議) 등을 지내다가 공서(攻西)가 집권하자 퇴직하였다. 효종 즉위 후 예조참판ㆍ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北伐)계획을 세웠다. 대립관계에 있던 김자점(金自點)이 이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사퇴하였다가 뒤에 대사헌ㆍ좌찬성ㆍ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다. 영남학파(嶺南學派)와 더불어 조선 유학계의 쌍벽을 이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형성에 공헌하였고, 글씨에도 능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



장생(長生)의 아들로 집(集)의 동생인 반(槃)은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광해군 5년(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10년 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인조 2년(1624년)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전적(典籍)을 거쳐 형조좌랑(刑曹佐郞)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을 역임한 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주향으로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중향으로 제향하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반(槃)의 아들 여섯 명 중 둘째 익희(益熙)는 인조 때 대사성(大司成ㆍ정3품)을 지내고 효종 때 형조 및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셋째 익겸(益兼)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이 포위되자 성(城)을 사수하다가 함락되자 분신자살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어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넷째 익훈(益勳)은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으며, 막내 익경(益炅)은 어려서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현종 3년(1662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를 거쳐 형조참의ㆍ동부승지를 역임한 후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올랐다. 현종 15년(1674년) 예조참판 때 죽은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ㆍ9개월)을 주장했으나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朞年說ㆍ만 1년)이 채택되자 양성(陽城)에 유배되었다.

 

▲ (좌)사계(沙溪) 김장생 영정. (우)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영정.

조선의 이름난 소설가 만중(萬重)은 익겸(益兼)의 유복자로 현종 6년(1665년)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정언ㆍ지평ㆍ수찬ㆍ교리를 거쳐 현종 12년(1671년)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ㆍ삼남(三南ㆍ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의 정사(政事)를 조사하였고, 숙종 5년(1679년) 예조참의를 지내고 숙종 11년(1685년)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한 후 주위의 탄핵으로 남해(南海)로 유배되기도 했다. 효성이 지극한 그는 귀양갈 때 외에는 노모 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전문을 한글로 한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하여 소설 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숙종 32년(1706년) 그의 효행에 대하여 나라에서 정표(旌表ㆍ선행을 칭찬하고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림)가 내려졌다.

 

▲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이 지은 고전소설 구운몽(九雲夢).

조선 초기 한호(韓濩)ㆍ양사언(楊士彦)ㆍ안평대군(安平大君)과 함께 4대 서가(書家)로 유명한 구(絿)는 현감(縣監)을 역임한 계문(季文)의 아들로 당대에 이름난 학자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중종 6년(1511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러 기묘사화로 개령(開寧)에 유배되었다가 중종 28년(1533년) 풀려나 고향에서 죽었다. 그가 생전에 한양 인수방(仁壽坊)에 살았으므로 그의 서체를 인수체(仁壽體)라 불렀다, 어느 날 옥당(玉堂)에서 숙직을 하며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뜻밖에 중종(中宗) 임금이 말하기를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들리기에 내 여길 왔으니 어찌 군신의 예(禮)가 필요있으리요, 친구로서 서로 대함이 마땅하도다” 하고 술을 함께 즐겼다고 한다.

덕령(德齡)은 붕섭의 아들이며 성리학(性理學)의 대가(大家) 성혼(成渾)의 제자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익장군(虎翼將軍)의 호(號)를 받아 선조 27년(1594년) 의병을 정돈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으며, 고성(固城)에 상륙하는 왜군을 격퇴하여 왜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의병장의 한 사람이 되었다.

 

▲ 충장공(忠壯公) 김덕령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충장사(忠壯祠)와 묘.

그후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토벌하다가 내통했다는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국문(鞠問)을 받다가 옥사하여 현종 2년(1661년) 관작이 복구되고 뒤에 병조참의(兵曹參義)에 추증되었으며, 정조 12년(1788년) 좌찬성(左贊成)에 가증되었다.


고종 때 대제학을 지낸 영수(永壽)와 판서(判書)를 역임한 영덕(永德), 그리고 독립운동가 영숙(永肅)등은 가문의 기백을 굳건히 지킨 인물들이다. 특히 영덕(永德)은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이를 통탄하여 자결하였으며, 일본이 주는 은사금을 거절하고 위협과 유혹을 물리치며 지조를 지키다가 자결한 지수(志洙) 등 수많은 인물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 광산 김씨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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