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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강릉 김씨(江陵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강릉 김씨(江陵金氏)의 연원
 

강릉 김씨(江陵金氏)의 시조(始祖) 김주원(金周元)은 신라 통일을 이룩한 태종(太宗)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5세손이다. 그는 혜공왕 13년(777년) 이찬(伊?)으로 시중(侍中)이 되었고, 신라 제37대 선덕왕 6년(785년) 왕이 죽고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군신회의를 열고 김주원을 추대하기로 계획되었다. 김주원은 경주의 왕궁으로부터 북쪽으로 20리 밖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마침 폭우로 인하여 알천(閼川ㆍ현 경주 부근의 하천)의 물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해 입궐(入闕)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신하들은 하늘의 뜻이라고 여기고 당시 상대등인 김경신(金敬信)을 추대하니 이가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이다.

김주원(金周元)은 비가 개인 후 임상(臨喪)차 단기(單騎)로 입궁(入宮)하니 왕위에 오른 김경신(金敬信)이 그에게 왕위에 오르기를 권했으나 “인군대위(人君大位)는 천명(天命)”이라 하며 사양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명주(溟州)로 퇴거하였다. 그로부터 2년후 원성왕(元聖王)은 왕위를 양보한 덕을 생각하여 명주군(溟州郡ㆍ지금의 강릉)을 중심으로 강릉ㆍ울진ㆍ평해ㆍ삼척 등 동해안 일대를 분할하여 다스리게 하고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강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명주군왕릉 입구에 있는 숭열전(崇烈殿)은 신라 제29대 무열왕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며, 숭의제(崇義齊)는 명주군왕의 재실이며, 명주군왕의 재실과 함께 있는 청간사(淸簡祠)는 김시습(金時習)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자리한 강릉 김씨 시조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묘. 뒤쪽은 부인의 묘.?

 

 

▲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묘 아래 위치한 능향전(陵享殿)과 좌우의 석수(石獸)들.

시조 김주원(金周元)은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다. 장남 종기(宗基)는 원성왕 6년(790년)에 이찬(伊?)에서 시중(侍中)에 오르고, 벽골제(碧骨提ㆍ지금의 김제) 평야에 제방을 만들어 수리시설을 하고 농경정책에 기여하여 김씨가 제방을 쌓았다 하여 김제(金提)로 불려지고 있다. 그의 아들 정여(貞茹)와 장여(璋茹) 형제도 시중(侍中)을 지냈고, 손자 양(陽)은 정여(貞茹)의 아들로 문성왕 9년(847년)에 시중 겸 병부령(侍中兼兵部令)을 제수받고 나이 50에 후사없이 죽으니 태종 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아래에 장사하였다.


차남 헌창(憲昌ㆍ?~822)은 애장왕 7년(806년) 시중(侍中)에 오르고, 무진주(武珍州·광주)ㆍ청주(靑州·진수)의 도독(都督)을 지냈다. 헌덕왕 13년(821년) 웅천주(熊川州ㆍ공주)의 도독이 되었으나 아버지 주원(周元)이 원성왕에게 밀려 왕위에 오르지 못한 데에 원한을 품고 그 이듬해에 반란을 일으켰다. 무진주ㆍ완산주(完山州·전주)ㆍ청주ㆍ사벌주(沙伐州·상주)ㆍ국원경(國原京)ㆍ서원경(西原京)ㆍ금관경(金官京)을 장악하여 국호를 장안국(長安國),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고 왕이 되었으나, 신라 관군에게 패하여 웅진성(熊津城)에서 자살하였다.


그의 아들 범문(梵文)도 헌덕왕 17년(825년) 고달산(高達山)의 산적 수신(壽神) 등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난을 일으켜, 평양(平壤ㆍ楊州)에 수도를 정하려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공격하였으나 북한산주도독 총명(聰明)이 이끄는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고 그도 잡혀 죽었다.

 

▲ 김주원(金周元)이 식읍으로 받은 명주(溟州)를 도읍지로 정하고 통치하던 구지(舊址)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장안동 입구의 고도기적비(古都紀蹟碑)와 비각.

3남 신(身)은 804년에 한산군수(韓山郡守), 806년에 사찬(沙飡)에서 대아찬(大阿飡)에 오르고 그해 8월에 당나라 헌종(憲宗) 즉위식에 축하사절로 입당하여 원외위위경(員外衛尉卿)의 벼슬을 받고 807년에 파진찬(波珍飡), 810년에 한산주 도독(漢山州都督), 그후 이찬(伊?)에 오르고 814년에 시중(侍中)에 명하였으나 받지 아니하고 명주(溟州)로 퇴거하였다. 강릉 김씨는 모두 신(身)의 후손으로 증손 3형제에서 강릉 김씨의 최초 분파가 되었다.

▲ 청도 운문사(雲門寺)에 봉안된 김주원(金周元)의 6세손 김식희(金式希) 영정.

주원(周元)의 6세손 식희(式希)는 대내마(大奈麻ㆍ신라 17관등 중 열째 등급) 영진(英珍)의 장자이다. 경명왕 2년(918년)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날로 세력이 커지고 있었고, 신라는 허물어져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대야성을 침공하며 경향각지에서 크고 작은 초적들의 반란이 끓임없이 일어나 국정이 극도의 혼란에 빠졌을 때 명주(溟州)에서 왕성(王城)으로 파견되어 대장군 손긍훈(孫兢訓)과 함께 화랑의 군사훈련장인 대작갑사(大鵲甲寺)에 들어가 수만의 군사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견훤이 궁성을 침범하니 고려의 왕건에게 견훤을 격파할 것을 제의하고 황산성(黃山城)에서 대승을 거두어 고려의 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워 개국부의삼사사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태사(開國府儀三事司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로 봉작을 받았다. 지금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그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매년 음9월9일 제례를 행하고 있다.


주원(周元)의 8세손 상기(上琦ㆍ1031~?)는 문종 24년(1070년) 우보궐(右補闕)을 거쳐서 선종 1년(1084년) 이부시랑(吏部侍郎)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하며 과거를 주관하였다. 1085년 호부상서(戶部尙書)로서 예부시랑 최사문(崔思文)과 함께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ㆍ정당문학(政堂文學) 등을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로 국사(國史)를 편찬했다. 숙종이 즉위하자 수사도(守司徒)ㆍ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에 오르고, 태부(太傅)에 승진되었다. 시호(諡號)는 문정(文貞).

상기(上琦)의 아들 인존(仁存)과 고(沽)도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인존(仁存ㆍ?~1127)은 초명은 연(緣), 자는 처후(處厚)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내시(內侍)로 선종ㆍ현종ㆍ숙종의 3대를 섬기었다. 개성부사(開城府使)를 지낸 뒤, 상서예부원외랑(尙書禮部員外郞)ㆍ기거사인(起居舍人)ㆍ기거랑(起居郞)을 역임하였다. 숙종 7년(1102년) 요(遼)나라 학자 맹초(孟初)가 사신으로 오자 접빈관(接賓官)이 되어 응접했는데 학문이 뛰어나 크게 찬양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이부랑중 겸 시강학사(吏部郎中兼侍講學士)ㆍ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숙종이 붕어하자 고부사(告訃使)로 요나라에 다녀와서 예부시랑 간의대부(禮部侍郞諫議大夫)에 올랐으며, 예종 때 여진(如眞)이 9성(城)의 반환을 요구하자 국방상의 어려움과 북방 백성의 희생을 들어 돌려줄 것을 주장, 이를 실현하게 하였다. 요와 금(金)의 싸움으로 국경이 소란해지자 판서북면병마사(判西北面兵馬使)로 부임하여 변방을 안정시켰으며, 인종 때 척신(戚臣) 이자겸(李資謙)이 권세를 잡자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당대의 석학으로 중요한 국사는 왕이 그에게 의논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

 

 

▲ 매월당 김시습 영정과 유묵.

시습(時習)은 주원(周元)의 22세손으로 3세에 이미 시(詩)에 능했고, 5세 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통달하여 신동(神童)으로 이름났다. 일찌기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김반(金泮) 문하에서 글을 읽고, 사범지종(師範之宗)으로 일컬어진 윤상(尹祥)에게서 ‘예서(禮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웠다. 세조 1년(1455년) 나이 21살 때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ㆍ세조)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고친 후 방랑의 길을 떠났다.


 

 

세조 4년(1458년) 책을 구하러 한양에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의 일을 맡았으며, 세조 11년(1465년)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독서를 시작하여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썼다. 그후 수 차례에 걸쳐 ‘금오신화(金鰲新話)’와 ‘매월당집(梅月堂集)’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절개를 지키며 고고한 지성으로 불교와 유교의 정산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의 세계를 문학에서 찾으며 살다간 불행한 천재였다.

 

▲ 명주군왕의 재실과 함께 있는 청간사(淸簡祠)는 김시습(金時習)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예조판서를 역임한 첨경(添慶)의 현손(玄孫) 시혁(始奕ㆍ1676~1750)은 자는 회이(晦而), 호는 매곡(梅谷), 숙종 34년(1708년)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지내고,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나가 중국에서 전해온 번벽법으로 강화도의 외성(外城)을 개축하여 그 공으로 영조 20년(1744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이듬해 공조판서로 승진하고 좌참찬(左參贊)에 올랐다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다.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에 자리한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김시혁(金始奕)의 묘.

시혁(始奕)의 아들 상철(尙喆ㆍ1712~1791)은 자는 사보(士保), 호는 화서(華西)로 영조 12년(1736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ㆍ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1775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영조의 신임을 받았고, 나라와 조정을 위한 일이 있을 때는 왕명에 거슬려도 서슴지 않고 진언하였으며 널리 인재를 등용시켰다. 우의정 때 조선의 문물제도를 부분별로 나누고 많은 문헌을 수집하여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하였고, 영조 47년(1771년)에는 영조의 명으로 ‘신묘중광록(辛卯重光錄)’을 편집ㆍ간행하였다. 정조 초 조정이 어지러울 때에 의리를 밝히고 인재를 양성하는 등 50년 동안 국사에 몸을 바쳤으나, 정조 10년(1786년) 아들 우진(宇鎭)이 숙종 때의 병신처분(丙申處分)의 잘못을 지적하고 소론을 옹호하여 제주도에 유배될 때에 함께 삭탈관직되었다. 사후 정조의 조처로 복관(復官)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에 자리한 충익공(忠翼公) 김상철(金尙喆)의 묘.

시환(始煥ㆍ1661~1739)은 자는 회숙(晦叔), 호는 낙파(駱坡)로 숙종 26년(1700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정언(正言)ㆍ지평(持平) 등 여러 관직을 거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ㆍ좌참찬ㆍ예조판서ㆍ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만년에는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한 집에서 무려 열 사람이 급제하여 조복(朝服)이 상床)에 가득하였지만 몸가짐이 항상 성실하고 조심스럽고, 집에서는 우애가 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만석군(萬石君)의 기풍이 있다고 하였다. 시호는 효헌(孝憲)으로 세 아들 상규(尙奎)ㆍ상익(尙翼)ㆍ상성(尙星)이 모두 판서를 지냈다.

▲ (좌)형조참판을 역임한 김상적(金尙迪) 영정. (우)영의정을 역임한 김상철(金尙喆) 영정.

▲ 문헌공(文憲公) 김상성(金尙星)의 유묵. ?

 

시환(始煥)의 아들 상성(尙星ㆍ1703~1755)은 자는 사정(士精), 호는 도계(陶溪)ㆍ손곡(損谷)으로 6살 때 글을 지었고, 13살 때 영평(永平)의 ‘금수정기(金水亭記)’를 썼으며 신동(神童)이라는 평을 들었다. 경종 3년(17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하였고, 특히 소장(疏章)을 잘 지어 당대 조정에서 으뜸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

시형(始炯ㆍ1681~1750)은 자는 계장(季章)으로 숙종 43년(1717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ㆍ집의(執義) 등을 지내고, 영조 4년(1728년) 호서ㆍ호남지방의 안무사겸순찰어사(按撫使兼巡察御史)가 되어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소란해진 민심 수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730년 승지(承旨)에 오르고, 1732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교학(敎學)의 진흥을 위해 애썼고, 1736년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어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영조 16년(1740년) 호조판서ㆍ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ㆍ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효헌(孝獻).

시형(始炯)의 아들 상집(尙集ㆍ1703~?)은 자는 사능(士能)으로 영조 31년(1755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61년 정언(正言)이 되고, 이듬해 경현당(景賢堂)의 문신제술(製述)에서 장원하여 이름을 떨쳤다. 1763년 3월에 송명흠사건(宋明欽事件)으로 홍양한(洪良漢)의 일파로서 삭직(削職)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ㆍ강원도의 암행어사를 지내고, 1766년 부수찬(副修撰)ㆍ교리(校理)ㆍ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1772년 이조참의(吏曹參議)ㆍ승지(承旨)를 지내고 1773년 대사간에 올랐다. 정조 8년(1784년)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ㆍ형조판서를 거쳐 1787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화전(火田)이 늘어나는 것을 방지하지 못하여 한때 파직되었다가 다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병조판서와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였다.

▲ 이괄(李适)의 난 때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진 김기종(金起宗) 영정.

 

철명(哲命)의 아들 기종(起宗ㆍ1585~1635)은 자는 중윤(仲胤), 호는 청하(聽荷)로 광해군 10년(1618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 정자(正字)가 되고 이듬해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록,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다. 호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시호는 충정(忠定).

행(行)은 국평(國平)의 장자로 자는 주도(周道), 호는 장포(長浦)로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과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문하에서 사사하였으며, 성수침의 아들인 성혼(成渾)과는 동문수학한 사이다. 명종 21년(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형조ㆍ호조좌랑, 고양군수, 광주목사 등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성품이 강직하여 주로 외직에 머물었다. 문사와 글씨에 뛰어나 ‘해동서성(海東書聖)’이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선조 8년(1575년)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되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증도가(證道歌)’를 간각(刊刻)하여 간행했고 도승지에 증직되었다.

화진(華鎭ㆍ1728~1803)은 자는 성재(聖載), 상적(尙迪)의 아들로 백부(伯父)인 부사(府使) 상우(尙遇)에게 입양되었으며, 일찍이 사찰(寺刹)에 들어가 수학(修學)하였다. 영조 31년(1755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검열(檢閱)이 된 뒤 정언(正言)ㆍ수찬(修撰)ㆍ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영조 46년(1770년)에는 승지(承旨)가 되고 이어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이어 안동부사(安東府使)ㆍ경기감사(京畿監司)ㆍ경상감사(慶尙監司)를 지냈으며 영조 52년(1776년)에는 대사헌을 역임하고 정조 2년(1778년)에는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 1781년에는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고 같은 해 다시 호조판서가 되어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임했으며, 1782년에는 형조판서에 이어 우참찬(右參贊)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공부(貢賦)ㆍ식화(食貨)ㆍ조운(漕運) 등 문제의 시정에 힘썼다. 정조 9년(1785년) 형조판서가 되어 김범우(金範禹) 집에 모인 천주교도들을 체포했으나 대부분 양반자제들이어서 타일러 보내고 중인(中人) 김범우(金範禹)만을 단양(丹陽)으로 귀양보냈으며, 정조 21년(1797년)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익헌(翼憲).

화진(華鎭)의 아들 계락(啓洛ㆍ1753~1815)은 자는 경순(景淳)으로 영조 49년(177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만녕전 참봉(萬寧殿參奉)이 되었다가 정조 7년(178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병조 좌랑ㆍ홍문관 교리ㆍ수찬 ·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ㆍ검상(檢詳)을 거쳐 179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고, 이후 형조참의ㆍ형조참판ㆍ대사간 ·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했다. 순조 6년(1806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1807년에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고, 후에 공조ㆍ형조ㆍ예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고 특히 병려문(騈儷文)ㆍ사부(詞賦)ㆍ시율(詩律)ㆍ표(表)ㆍ전(箋)ㆍ송(頌)ㆍ책(策) 등의 시문(詩文)에 능하고, 글씨에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시호는 문정(文靖).

서울의 팔판동(八判洞)은 당시 강릉 김씨(江陵金氏)의 판서들이 집단적으로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전해진다. 이중 유일하게 영의정에까지 오른 사람은 상철(尙喆)이다. 중기 이후엔 명종(明宗)~숙종(肅宗)대에 8명의 판서(선팔판<先八判>), 영조(英祖)~정조(正祖)대에 또 8명의 판서(후팔판<後八判>)를 배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는다.

선팔판(先八判)은 첨경(添慶-형<刑>·예<禮>·이판<吏判>), 홍주(弘柱-병판<兵判>), 득원(得元-병판<兵判>), 홍권(弘權-이판<吏判>), 시환(始煥-예<禮>·이판<吏判>), 시현(始鉉-이판<吏判>), 시혁(始奕)-이판<吏判>), 시경(時烱-병판<兵判>)이다. 한편 후팔판(後八判)은 상익(尙翼-예판<禮判>), 상성(尙星-예<禮>·호<戶>·이판<吏判>), 상중(尙重-형<刑>·공판<工判>), 상집(尙集-형<刑>·공<工>·호<戶>·병판<兵判>), 상철(尙喆-육판<六判>·영의정), 노진(魯鎭-예<禮>·형<刑>·이판<吏判>), 화진(華鎭-예<禮>·형<刑>·호<戶>·공판<工判>), 계락(啓洛-공<工>·형<刑>·예판<禮判>)을 이르는데 이 시기에 강릉 김씨(江陵金氏)는 절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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