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 학 방/성씨 연원(김)

선산 김씨(善山金氏ㆍ김선궁系)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선산 김씨(善山金氏ㆍ김선궁系)의 연원 

선산 김씨(善山金氏)는 신라(新羅) 왕실의 후손으로 경순왕(敬順王)의 여덟째 아들이자 고려(高麗) 왕건(王建)의 외손(外孫)인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는 계통과 신라 46대 문성왕(文聖王)의 8세손인 김선궁(金宣弓)을 시조(始祖)로 하는 두 계통이 있다.

그중 김선궁계(金宣弓系) 시조(始祖) 김선궁(金宣弓)은 ‘경오보(庚午譜)’(1690년)를 보면, 신라 태보공(太輔公) 김알지(金閼智)의 30세 손이며 신라 46대 문성왕(文聖王)의 8세손으로, 신라 김씨(金氏) 왕세대(王世代)의 마지막 왕손인 체의공(體誼公)의 아들이다. 그는 초명(初名)이 선(宣)으로 어려서 아버지에게 상해를 입힌 자의 목을 베고 처벌을 자청하여 투옥되었으나 조정(朝廷)에 의해 효자(孝子)라고 석방되어 표창까지 받았다.

그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를 정벌차 남행(南行)하던 중 숭선(崇善ㆍ선산의 옛 지명)에 이르러 모병(募兵)할 때, 그가 종군(從軍)할 것을 희망하니 태조(太祖)가 기뻐하며 친히 활을 하사하고 선궁(宣弓)이라 사명(賜名)했다. 후백제군과의 일이천(一利川)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고려 삼한통일에 기여한 개국공신의 반열에 올랐으며, 태조의 부름을 받고 개경에서 출사 길에 오른 후 벼슬이 고려 ‘개국벽상공신삼중대광영문하시중(開國壁上功臣三重大匡領門下侍中)’으로 선주백(善州伯)에 봉해졌다.

▲구미시 해평읍 금호동 미석산(彌石山)에 자리한 순충공(順忠公) 김선궁(金宣弓)의 단비.

▲ 고려 말의 절신(節臣) 백암(白巖) 김제(金濟)가 종적을 감추며 남겨둔 두 시를 새겨 놓은 바위. ?

만년에 벼슬을 그만 두고 지금의 선산에 이르러 비봉산(飛鳳山) 밑 봉하루지(鳳下樓地)에 터를 닦고 여생을 보냈으며, 고려 제3대 정종(定宗)은 그의 넓은 도량(度量)과 충효를 겸비한 성품을 찬양하고 그에게 다시 대승(大丞)을 추봉(追封)하고 시호(諡號)를 순충(順忠)이라 내렸다.


‘순충공신도비명(順忠公神道碑銘)’에는 봉문(奉文)ㆍ봉술(奉述) 두 아들을 두었는데, 봉문(奉文)은 삼사우윤(三司右尹)과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으며, 봉술(奉述)은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6대까지 실전이 되어 알 수 없지만 그 후손 중 한 부류는 중앙관직으로, 다른 한 부류는 지방 사족으로 나뉘어졌다. 이 후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삼고 시조 발상지인 일선(一善)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일선’의 지명은 그 후 선주(善州) · 숭선(崇善) 등 몇 차례 바뀌었다가 조선조(朝鮮朝) 태종(太宗)이 국령(國令)을 내려 ‘일선군(一善郡)’을 ‘선산부(善山府)’로 개칭하고 도호부사(都護府使)를 두어 다스리게 한 후 500여 년이 계속되면서 ‘선산(善山)’이라는 지명으로 고착되었다. 이에 따라 ‘일선(一善)’의 본관 또한 ‘선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후 선산 김씨는 봉문(奉文) 후손에서 5개파, 봉술(奉述) 후손에서 12개파로 나뉘어졌다.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백암파(白巖派)ㆍ농암파(籠巖派)ㆍ병암파(屛庵派)ㆍ간의공파(諫議公派)ㆍ화의군파(和義君派)ㆍ낭장공파(郞將公派)ㆍ취수공파(醉睡公派)ㆍ송천공파(松川公派)ㆍ성암파(省庵派)ㆍ소암파(素庵派)ㆍ곤육재파(困六齋派)ㆍ대장군파(大將軍派)ㆍ우윤공파(右尹公派)ㆍ양양공파(良襄公派)ㆍ정조공파(正朝公派)ㆍ강호파(江湖派)ㆍ과당공파(苽堂公派)ㆍ점필재파(?畢齋派)로 나뉘어졌다.
?

▲ 고려 말의 절신(節臣) 백암(白巖) 김제(金濟)의 부조묘(不?廟)인 홍일묘(紅日廟).

백암(白巖) 김제(金濟)는 고려 말의 절신(節臣)으로 평해군수(平海郡守)에 재직시 고려가 망하자 처자를 결별한 후 갈대삿갓을 쓰고 기성면 구산리 북쪽 해안 절벽 아래로 가서 서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통곡한 후, 충절시 두 수를 지어 놓고 바다로 갔는데 종적을 알 수 없다. 그후 조선조 정조(正祖) 임금이 그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손수 제문을 지어 좌승지(左承旨) 이익운(李益運)으로 하여금 구산리 앞바다에서 제사를 올리게 하고 그가 남긴 시 두 수를 절벽에 새겼다. 그리고 그 시가 새겨진 바위를 도해암(蹈海岩)이라 하였다. 시가 새겨진 암벽은 1964년 7월 구산리 방파제축조공사에 따라 이 절벽을 폭파하게 되어 그 흔적이 없어졌고, 그후 1985년 선산 김씨 후손들이 다른 암벽에 시 두 수를 새겨 놓았다.


이렇게 고려에서 명성을 날린 선산 김씨는 조선조에 와서도 많은 명신(名臣)들이 배출되어 명문의 대(代)를 이었는데, 그 중 학자로 이름난 숙자(叔滋)ㆍ종직(宗直) 부자가(父子)가 대표적이다.

▲ 강호산인(江湖散人) 김숙자(金叔滋)와 아들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유묵.

숙자(叔滋ㆍ1389∼1456)는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어려서 당대의 석학(碩學) 길재(吉再)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세종 1년(141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를 거쳐 선산교수(善山敎授)ㆍ개령현감(開寧縣監)ㆍ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ㆍ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등을 역임했다.

세조 1년(145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즉위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밀양(密陽)에 돌아가 정주학(程朱學)을 발전시켰으며, 후진을 교육함에 있어 경사는 물론 활쏘기ㆍ말타기ㆍ산수에 이르기까지 가르쳤다. 명필로 이름이 났고, 낙봉서원(洛峰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

▲ 경남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자리한 강호산인(江湖散人) 김숙자(金叔滋)의 묘.

숙자(叔滋)의 아들 종직(宗直)은 5형제 중 막내로 밀양(密陽)에서 출생하여 22세에 진사가 되고, 세조 5년(145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ㆍ젊고 재주 있는 문신으로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ㆍ휴가를 얻어 집에서 공부함)로 학문을 연구한 후 정자(正字)ㆍ교리(校理)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성종(成宗)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그후 도승지(都承旨)ㆍ이조참판ㆍ공조 및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성종(成宗)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 문인(門人)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다.

▲ 사림의 조종(祖宗)으로 절의를 중요시하여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생가.

특히 그는 길재(吉再) 및 아버지인 숙자(叔滋)의 학통을 이어받아 효제충신(孝悌忠臣)을 주안으로 하는 실제적 방면의 학문을 추구했다. 그의 문하에서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위(曺偉)ㆍ남효온(南孝溫) 등 쟁쟁한 석학(碩學)과 신유(臣儒)를 배출하였고, 서화(書畵)에도 재질이 뛰어나 총재관(摠裁官)으로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5권을 증수(增修)했다.


그가 일찌기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은 바 있는데, 연산군 4년(1498년)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이것을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다. 그는 부관참시(副官斬屍) 당하고 많은 문집이 불태워졌으며, 제자들은 모두 참화(慘禍)를 입었다.

▲ 경남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자리한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묘와 그가 죽자 무덤 옆에서 날마다 술피 울다가 숨을 거뒀다는 호랑이를 기리기 위해 김종직의 묘 옆에 세운 인망호폐비(人亡虎斃碑).

 

 

▲ 김종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67년 세운 덕성서원(德城書院)이 임진왜란 때 불타자 지금의 위치(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옮겨 다시 지은 예림서원(禮林書院).

후손 응기(應箕)는 성종 때 등과(登科)하여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올랐으며, 연산군 5년(1499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ㆍ중추부의 종2품 벼슬)로 명나라에 다녀와 이조ㆍ예조ㆍ병조ㆍ형조ㆍ공조판서를 역임한 후 중종 8년(1513년)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화접리에 자리한 김효원(金孝元)의 묘.

그외 동인(東人)의 영수(領袖)로 유명한 효원(孝元ㆍ1542~1590)은 자는 인백(仁白), 호는 성암(省庵)으로 이퇴계(李退溪)의 문인(門人)이다. 명종 20년(1565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선조(宣祖) 때 사림파(士林派)의 중심인물이 되어 명종비(明宗妃) 심씨(沈氏)의 아우로 권세 높던 심의겸(沈義謙)과 개인적으로 대립했던 것이 마침내 사색당파(四色黨派)의 효시가 되어 당쟁이 격렬해지자 크게 뉘우치고 10년간 한직(閑職)에만 있으면서 자숙했다고 한다.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 소암(素庵) 김이원(金履元)의 영정 원본과 30년 전 다시 그린 영정.

그의 아우 이원(履元ㆍ1553∼1614)은 초명은 신원(信元), 자는 수백(守伯), 호는 소암(素庵)으로 선조 9년(1576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선조 16년(1583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호조좌랑(戶曹佐郎)ㆍ수찬ㆍ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593년 의주목사(義州牧使)로 나간 해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자가 많자, 명(明)나라 곡식을 들여와 구제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경기도 관찰사로서 명나라 병사들을 잘 다루어 도내행정을 바로잡았으며, 병조판서를 거쳐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 왕자 진의 옥사, 김직재(金直哉)의 옥사를 모두 다스려서 두 번 훈봉(勳封)을 받았다.

▲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에 자리한 소암(素庵) 김이원(金履元)의 묘와 1752년 세워진 신도비.

▲ (左)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의 유묵. (右)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유묵.

인조(仁祖) 때 학자로 이름을 날린 세렴(世濂ㆍ1593∼1646)은 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으로 효원(孝元)의 손자다. 광해군 8년(1616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郎)이 되었으며,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를 겸하였다. 이어 홍문관(弘文館)에 기용되어 수찬(修撰)ㆍ지제교(知製敎)를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는데 폐모(廢毋)를 주장하던 자를 탄핵하다가 곽산(郭山)에 유배되었고, 1년 뒤 강릉(江陵)으로 이배되었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수찬(修撰)으로 다시 기용된 뒤 헌납(獻納)ㆍ교리(校理)ㆍ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성품이 단아하고 정중하고 경서(經書) 연구에 전심하였으며, 시를 잘 지었다. 저서에 ‘동명집(東溟集)’‘ㆍ해사록’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

▲ 충주시 앙성면 본평리 본복마을에 자리한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묘.

클릭하시면 큰 계보도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