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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언양 김씨(彦陽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언양 김씨(彦陽金氏)의 연원

 

언양 김씨(彦陽金氏)의 시조(始祖) 선(鐥)은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28세손인 경순왕(敬順王)의 일곱째 아들로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외손이며, 고려 때 언양군(彦陽君)으로 봉해짐으로 후손들이 언양(彦陽)을 관향(貫鄕)으로 하였다.

▲ 언양 김씨 시조 김선(金鐥)의 단소(壇所).

그런데 시조(始祖)로부터 5세 수(壽)까지의 소목(昭穆)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후 병인(丙寅)ㆍ임인(任寅)ㆍ계유(癸酉)ㆍ정사보(丁巳譜)까지 시조 선(鐥)ㆍ2세 진(進)ㆍ3세 정보(精寶)까지는 밝혀졌으나 연대수로 맞지 않았으나, 신유보(辛酉譜ㆍ1981년)에 여러 사료(史料)와 동원방계(同源傍系)의 보첩에 의거해 1세 선(鐥)ㆍ2세 진(進)ㆍ3세 정보(精寶)ㆍ4세 경숙(鏡淑)ㆍ5세 수(壽)로 선계소목(先系昭穆)을 밝혔다.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면 송대리 능골에 자리한 선조(先祖) 팔위단(八位壇).

대표적인 인물로는 5세 수(壽)가 신호위 별장(神虎衛別將ㆍ국방을 담당한 6위 중의 하나로 정7품 벼슬)을 역임했으며, 수(壽)의 손자로서 부(富)가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다.

부(富)의 아들인 취려(就礪ㆍ?∼1234)는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가 정위(正尉)에 임명된 뒤 동궁위(東宮衛)를 거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고종 3년(1216년) 거란(契丹)의 왕자 금산(金山)ㆍ금시(金始)가 대요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 칭하며 몽골군에게 쫓겨 쳐들어온 것과, 1218년의 재침을 평정했다. 또 한순(韓恂) 등이 의주(義州)에서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는 등 공로가 많아 판병부사(判兵部事)를 거쳐 시중(侍中)까지 되었으며, 성품이 곧고 청백하여 군기를 엄정히 하고 부하를 아꼈다. 싸움에서는 기발한 계략를 꾸며 큰 공을 세웠으며, 역사상 언양 김씨가 배출한 주요 인물은 모두가 그의 후손이다. 시호는 위열(威烈).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송대리에 자리한 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의 묘. 울산광역시문화재기념물 제7호.

▲ 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의 묘로 올라가는 입구에 자리한 1670년에 세운 김취려 태지유허비각(胎地遺墟碑閣).

취려(就礪)의 아들 전(佺ㆍ1202~1271)은 고종 45년(1248년) 좌복야(左僕射), 원종 원년(1260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원종 3년(1262년) 추밀원사(樞密院事), 이듬해 수사도 지문하성사 태자소부(守司徒知門下省事太子少傅)가 되었다. 1268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서 단련조병도감 판사(團練造兵都監判事ㆍ종1품)에 제수되었으며, 원종 12년(1271년)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ㆍ정2품)를 지냈다. 시호는 익대(翊戴).

전(佺)은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 변(?ㆍ1248~1301)은 자는 손지(損之)로 원종 5년(1264년) 16세 어린 나이에 음보(蔭補)로 동북면 판관(東北面判官)을 역임하면서도 어른도 감당키 어려운 직책을 무난히 수행하니, 수령반백(首領斑白)들도 그 자질과 지도력을 일찍부터 알고 놀라워 했다. 21세에 춘장문과(春場文科)에 급제해 다음해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고, 이어 각문지후예부랑중(閣門視候禮部郎中)으로 원나라에서 충열왕(忠烈王)이 세자로 있을 때 보필한 공으로 이등공신이 되었다. 충렬왕(忠烈王) 16년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거처 우승지(右丞旨)ㆍ봉익대부(奉翊大夫)ㆍ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가 되고 외직(外職)으로는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지냈다. 시호(諡號)는 문신(文愼).

전(佺)의 손자 문연(文衍ㆍ~1314)은 양감(良鑑)의 셋째 아들로 아버지와 두 형님이 일찍 죽자 인생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해 승려(僧侶)로 지냈으나, 30세 때에 환속(還俗)하여 좌우위산원(左右衛散員ㆍ정8품) 재임하던 중 동생 숙창원비(淑昌院妃)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자 좌우위산원(左右衛散員)을 거쳐 밀직사(密直使)에 기용되었다. 충렬왕 31년(1305년)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충선왕과 충렬왕 부자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무리들을 징계하려다가 도리어 태형(笞刑)을 받았다. 1307년 충선왕이 원나라 무제의 즉위에 공을 세우고 고국의 정권을 다시 장악하게 되자 특명을 받아 귀국, 간신들을 제거하고 첨의중호(僉議中護)에 임명되었다. 후에 볼모를 데리고 원에 가서 신무장군진변만호(神武將軍鎭邊萬戶)ㆍ언양군(彦陽君)에 올랐으며, 귀국 도중 병사했다. 그는 자기의 직위나 가문의 배경을 내세우지 않고 온화한 성품에 대인 관계에서 도량이 넓고 신의가 두터웠으며, 행동을 급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사가 없어 절손(絶孫)되었으며, 시호는 영신(榮信).

▲ 국립진주박물관(右)과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상대리 영정각(左)에 소장된 공양공(恭襄公) 김관(金瓘) 영정

 

전(佺)의 손자이며 변(?)의 아들인 윤(倫ㆍ1277~1348)은 음보(蔭補)로 정도감 부사(正都監副使)를 거처 감찰시승(監察侍丞)으로 큰 업적을 쌓았다. 원나라에서 충렬왕(忠烈王)을 배종(陪從)할 때 일부에서 심왕(潘王)을 고려왕(高麗王)으로 책립하려 하자 이를 반대, 결국 충숙왕(忠肅王)의 지위를 확보하는데 공을 세웠다. 또한 조적(曺?)의 난(亂) 때 충혜왕(忠惠王)이 화를 입게 되자 잘 보필한 공으로 언양군(彦陽君)으로 봉해지고, 충목왕(忠穆王)때 좌정승(左政丞)을 지낸 뒤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이 되었다. 시호(諡號)는 정렬(貞烈).

조선 초기 문신인 문(汶 ?∼1448)은 자는 윤보(潤甫), 호는 서헌(西軒)으로 전서(典書) 복생(復生)의 아들이다. 세종 2년(1420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주부(注簿)를 거쳐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ㆍ집현전 부교리ㆍ집현전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으며,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모든 분야에 밝았고 특히 사학(史學)에 정통했다. 집현전 동료들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여 집현전이 항소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할 때와, 정창손(鄭昌孫) 등이 언사(言事)로 투옥되어 집현전의 모든 관원이 대궐에 들어가 그 용서를 빌 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해 세종은 사서(四書)를 번역시킨 뒤 품계(品階)를 높여 등용하려 했으나, 중풍으로 기거(起居)를 못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후일 세조에 의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추록되었다.

▲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용산리 방축동에 자리한 공양공(恭襄公) 김관(金瓘)의 묘.

 

취려(就礪)의 9세손인 관(瓘ㆍ1425∼1485)은 자는 영중(瑩中), 호는 묵재(默齋)로 아버지는 선천부사(宣川郡事) 숙보(叔甫)로 문종 1년(1451년) 증광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1461년 도관좌랑(都官左郎)으로 김치원(金致元)의 종사관이 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다녀왔으며, 전라도 경차관(全羅道敬差官)에 이어 1465년 예조정랑이 되었다. 세조 13년(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도총부사(都摠副使) 조석문(曺錫文)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여 그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고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었다. 그 뒤로 강원도ㆍ충청도ㆍ황해도ㆍ영안도(永安道ㆍ함경도)ㆍ전라도 관찰사를 고루 역임하였으며,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졌다. 산수화를 잘 그렸으며, 시호는 공양(恭襄).

▲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을 배향한 전남 나주시 대호동 정렬사(旌烈祠)와 간찰 및 교지.


천일(千鎰ㆍ1537∼1593)은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로 이항(李恒)의 문인이다. 선조 6년(1573년)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 등을 거쳐 담양부사ㆍ수원부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ㆍ박광옥(朴光玉)ㆍ최경회(崔慶會) 등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의하였으며, 그 뒤 나주에서 의병 300명을 모아 수원에 도착하여 독성산성(禿城山城)을 거점으로 활동하여 금령전투(金嶺戰鬪)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곧 창의사(倡義使)의 군호(軍號)를 받고 강화도로 진을 옮겨 전투태세를 재정비하였으며, 한편 관군 등과 합세하여 양화도전투(楊花渡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593년 2월 권율(權慄)의 행주산성전투에 강화도로부터 출전, 참가하였다. 6월 약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여 관군과 합세해 항전하였으나, 약 10만의 적군에게 성이 함락당하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자결하였다. 부인 김해 김씨도 비보를 듣고 자결하였으며, 나라에서는 영의정을 추증하고 아들 상건(象乾)에게는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열(文烈).

▲ 진주성이 함락당하자 아들과 함께 투신자결한 문열공(文烈公) 김천일(金千鎰)의 묘.

▲ (上)장무공(壯武公) 김준(金浚)과 그의 아내 및 아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전북 정읍시 용계동 삼강정려(三綱旌閭ㆍ전북문화재자료 제169호). (下)장무공(壯武公)을 제향하는 전북 정읍시 소성면 흑암리 정충사(旌忠祠)와 신도비.

무신 준(浚ㆍ1582∼1627)은 자는 징언(澄彦)으로 선조 38년(1605년) 무과에 급제하고 부장(部將) 때 천거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이어 교동현감(喬桐縣監)을 지냈으나,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을 보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에 복직하여 경력(經歷)ㆍ죽산부사(竹山府使)를 지냈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에는 후영장(後營將)으로 임진강 상류에 있는 영평산성(永平山城) 등을 수비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의주부윤(義州府尹)ㆍ훈련원정(訓練院正)ㆍ봉산군수(鳳山郡守)를 거쳐 1625년 안주목사 겸 방어사(安州牧使兼防禦使)가 되어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後金)의 대군에게 안주성이 함락되자 적군(敵軍)의 운집을 유인하여 미리 준비한 화약포대(火藥包袋)에 점화하여 수천(數千)의 적과 함께 장렬하게 분사(焚死)하였다. 뿐만 아니라 첩 김씨와 아들 유성(有聲), 봉산군수(鳳山郡守)의 며느리로 출가한 딸이 함께 죽은 사실을 듣고, 인조(仁祖)가 ‘한 집안에서 충신ㆍ효자ㆍ열녀가 났다’(一家之內 三綱備矣 萬古綱常賴而父子)라고 극찬하였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고 삼강정려문(三綱旌閭門)과 불천지위(不遷之位) 부조묘(不?廟)를 명하였으며, 좌찬성(左贊成)을 추증(追贈)하고 장무(壯武)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 정묘호란 때 부인과 함께 분신자결한 전북 정읍시 소성면 주천리 장무공(壯武公) 김준(金俊)의 묘.

 

▲ 김중만(金(重萬) 장군의 공신록과 교지.

 

조선 영조(英祖) 때 무신인 중만(重萬ㆍ1681~1755)은 신장이 8척으로 지략이 출중하고 활을 잘 쏘아 백보 앞의 버들잎을 맞추었다고 하며, 숙종 38년(1721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부모님의 병간호를 위해 낙향하였다. 영조 4년(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이서봉(李瑞鳳)ㆍ이서린(李瑞麟) 등이 찾아와 반란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있자, 열흘 후 다시 찾아와 거사에 가담할 것을 강요하자 단호히 거절하였고, 이후 청주에서 반란군이 북상하여 국가 존망이 위태로움을 느낀 그는 거사에 따르는 체 하여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이인좌의 반란군을 연합하기 위해 거사를 준비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상경하여 고변하자, 조정에서는 오명항(吳命恒)을 도순무사로 파견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헌하여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으로 녹선되었으며, 영조 6년(1729년) 희천군수(熙川郡守)에 임명되고 이어 충청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영조 31년(1755년) 75세로 죽자 조정에서는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로 추증하고 왕명으로 도화원(圖畵院)에 초상화를 그려 하사하도록 하였다.

▲ 충남 천안시 입장면 연곡리에 자리한 김중만(金(重萬) 장군의 묘.

▲ 김중만(金重萬) 장군 영정과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 서 있는 동학농민운동가 김덕명(金德明) 추모비.

 

조선 말기 동학농민운동가인 덕명(德明ㆍ1845∼1895)은 초명은 준상(峻相), 자는 덕명(德明), 호는 용계(龍溪)로 전북 김제 출신이다. 1891년 동학의 접주가 되어 이 지방에 순회 온 제2세 교조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듬해 전북 삼례에서 벌어진 동학교도 교조신원운동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 참가하였다. 1893년에는 보은 장내리(帳內里) 집회에 참가, 여기서 금구포(金溝包)라는 포명과 대접주의 직첩(職帖)을 받았다. 1894년에 전봉준(全琫準)ㆍ손화중(孫華仲)ㆍ김개남(金開南)과 더불어 호남창의소를 설치, 동학운동의 횃불을 올렸는데, 오시영(吳時泳)과 더불어 총참모가 되어 운동 초기부터 전봉준의 주력을 이루었다. 전봉준과 행동을 같이하여 전봉준이 공주공략에서 패하여 금구 원평에 와서 재수습할 때 그와 함께 동학군을 재편성, 12월 21일 8천명의 병력으로 포진, 일본군과 항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몸을 피해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安靜寺洞)에 숨었다가 붙잡혀 서울로 압송, 4월 23일 전봉준ㆍ손화중ㆍ최경선ㆍ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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