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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신안동 김씨(新安東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신안동 김씨(新安東金氏)의 연원

 

신안동 김씨(新安東金氏)의 시조(始祖) 김선평(金宣平)은 신라(新羅) 말 고창군(古昌郡ㆍ안동의 고호)의 성주(城主)로서 고려 태조 13년(930년) 권행(權幸ㆍ안동 권씨의 시조)ㆍ장길(張吉ㆍ안동 장씨의 시조) 등과 함께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안동땅에 침입한 후백제(後百濟)의 견훤군(甄萱軍)을 대파하고 왕건에 귀부하여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었고, 삼중대광 태사아부(三重大匡太師亞父)에 이르렀다. 그로 인해 고창군이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그 후 시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알 수 없어 후손들은 공수부정(公須副正)을 지낸 습돈(習敦)을 일세조로 삼고 안동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천등산(天燈山) 기슭에 설치된 시조 김선평(金宣平)의 묘단(墓壇).

 

‘안동김씨족보’에 의하면 김선평(金宣平)은 신라 효공왕 5년(901년) 흥덕궁(興德宮)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봉의 눈과 용의 수염을 가졌고 눈이 별처럼 반짝이는 위엄을 풍겨주고 있으며, 서른 여섯살에 ‘고창성주’가 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의 묘는 실전(失傳)되었으며, 조선 인조(仁祖) 4년(1626년) “안동부 서쪽 10여 리 되는 천등산의 왼편 기슭에 봉우리가 있는데 태장이라 한다(府西十餘里 天燈山左麓有峰曰台庄)”고 기록된 ‘여지승람(與地勝覽)’에 의거하여 안동시 서후면 태장동 천등산(天燈山) 기슭에 묘단(墓壇)을 설치하고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시향을 지내고 있다.

 

 

▲ 시조 김선평(金宣平)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1750년 후손에 의해 묘단(墓壇) 입구에 태장재사(台庄齋舍)를 지었으나, 식수난과 질병이 겹쳐 원래 있던 승려장을 철거하고 1793년 다시 지었고 1963년 수리하였다.

 

흔히 안동 김씨를 ‘금관자가 서말(金貫自三斗ㆍ조선 때 정3품 이상 고관들의 망건줄에 꿰던 옥이나 금으로 만든 고리)’이라고 하여 큰 벼슬을 많이 지냈다는 비유로 삼는데, 안동 김씨가 중앙 무대에 등장하는 시기는 번(?)의 손자인 극효(克孝)가 당시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사위가 되면서부터이다. 정유길(鄭惟吉)의 다른 딸이 광해군의 장인(丈人)인 류자신(柳自新)에게 시집을 가면서 극효(克孝)는 그와 동서지간이 되었고, 이때부터 안동 김씨가 조선의 중앙 무대에 등장하는 시초로 극효(克孝)는 안동 김씨의 중시조(中始祖)가 된다.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 석실마을에 자리한 김번(金?)의 묘는 조선 8대 명당 중의 하나라고 한다.

 

 

번(?ㆍ1479∼1544)은 자는 문서(文瑞)로 중종 8년(1513년) 문과에 급제해 사관(史官)이 되었고 중종 10년(1515년) 전적(典籍)을 거쳐 이듬해 정언(正言)을 지냈다. 평양서윤(平壤庶尹)이었던 1523년 관서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자 둔전책(屯田策)을 건의하고 농업에 힘썼으며, 민식(民食)과 창름(倉稟)을 넉넉히 하고 군졸에게 잡다한 세(稅)을 없애 주어 백성의 주거를 편안하게 하였다. 그러나 뒤에 대간(臺諫)으로부터 요승(妖僧) 학조(學祖)의 조카라 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신임으로 화를 면하였다.

가난하게 살던 번(?)이 죽어 묻힌 묘자리는 옥호저수형(玉壺貯水形ㆍ옥 항아리에 물을 담은 형국) 명당으로 조선 8대 명당 중에 하나라고 한다. 이 곳을 묘자리로 정한 사람은 번(?)의 큰아버지인 학조대사(學照大師)로 그는 일찍 출가하여 세조(世祖) 시절 불경을 국어로 번역ㆍ간행하거나 해인사 중창에도 깊이 간여하였다. 번(?)이 죽을 당시 회암사(檜巖寺) 주지였던 학조대사(學照大師)는 번(?)이 죽자 이곳을 추천, 가문의 발복을 욕심내었다고 한다. 이 곳은 원래 번(?)의 부인인 남양 홍씨(南陽洪氏) 가문의 땅이었고, 방앗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뒤늦게 이 곳이 명당임을 알게 된 남양 홍씨 가문에서는 몰래 물을 갖다 붇고 물이 많아 묘자리로는 쓸 수 없는 땅이라고 하여 돌려 주기를 원하였지만, 역시 명당(名堂)임을 알고 있던 번(?)의 부인은 양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천군수를 역임하고 아버지 김번(金?)의 묘 옆에 안장된 김생해(金生海)의 묘.

 

▲ 김번(金?)과 아들 김생해(金生海)의 묘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자리한 김번(金?)의 손자 김극효(金克孝)의 묘.

 

번(?)의 손자인 극효(克孝)는 광해군(光海君) 때 정3품 당상관직인 도정(都正)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올랐는데 그 중에서 상용(尙容ㆍ1561~1637)이 두각을 나타냈다. 상용(尙容)은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으로 선조 23년(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ㆍ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왜군토벌과 명군(明軍) 접대에 공을 세움으로써 1598년 승지에 올랐고, 1601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북인의 배척을 받아 지방관을 지내는 등 한직(閑職)에 있다가, 광해군 9년(1617년)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렸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뒤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및 병조ㆍ예조ㆍ이조의 판서를 지냈는데,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빈궁(嬪宮)ㆍ원손(元孫)을 수행하여 강화(江華)로 피난하였다가 성이 함락되자 순절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청렴하여 군자의 기품이 있었으며,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아우 상헌(尙憲)과 함께 문장절의(文章節義)로 유명하였으며, 강화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

 

 

경기도 와부읍 덕소리에 자리한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의 묘(경기도기념물 제99호)와 영정.

 

▲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양자로 간 백부(伯父) 김대효(金大孝)의 묘.

상헌(尙憲ㆍ1570~1652)은 상용(尙容)의 동생으로 극효(克孝)의 아들이지만 백부(伯父) 대효(大孝)의 후사가 없어서 양자(養子)를 갔다.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으로 선조 29년(1596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ㆍ교리(校理)ㆍ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하였으나,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혼인관계로 인해 한때 파직되었으며, 서인(西人)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의 우두머리로 다시 등용되었다. 대사간ㆍ도승지(都承旨)ㆍ대사헌ㆍ대사성ㆍ대제학 등을 거쳐 병자호란 때는 판서로서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하였는데 화의를 극력반대하고 끝내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낙향했다. 그로 말미암아 선양[瀋陽]에 잡혀가 3년간이나 있었는데 심문에도 끝내 굽히지 않아 청나라 사람들이 그 충절에 감동하여 돌려보냈다. 귀국 후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정(文正).

 

▲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유묵.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묘(경기도기념물 제100호).

 

상헌(尙憲)의 후손에서는 영의정ㆍ대제학(大提學) 등 12명의 정승(政丞)과 왕비(王妃) 셋을 비롯하여 수십 명의 판서(判書)가 배출되었으며, 상용(尙容)의 후손에서도 정승ㆍ판서 등이 많이 나오고, 형제가 영의정에 오른 수흥(壽興)ㆍ수항(壽恒)과 왕비 셋이 나와 가문을 세도가의 반석 위에 오르게 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수흥(壽興ㆍ1626~1690)은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으로 영의정 수항(壽恒)의 형이다. 인조 26년(1648년) 사마시를 거쳐, 효종 6년(1655년)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수항(壽恒)과 함께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교리(副敎理)ㆍ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현종 7년(1666년) 호조판서, 1673년 의금부판사가 되었으며, 영릉(寧陵ㆍ효종릉)의 석재(石材)가 갈라진 사건으로 인책되어 수항(壽恒)이 우의정에서 물러나자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1674년 영의정으로 자의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를 정할 때, 남인의 기년설(朞年說ㆍ1년)에 대해 대공설(大功說ㆍ9개월)을 주장하다가 부처(付處)될 뻔하였고, 현종이 죽자 양사(兩司)의 탄핵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숙종 6년(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使), 1688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689년 다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장기(長?)에 유배, 이듬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시호는 문익(文翼).

 

 

▲ 기사사화로 진도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사사(賜死)된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 영정과 문곡집(文谷集).

 

수항(壽恒ㆍ1629∼1689)은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으로 효종 7년(1656년) 문과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정언ㆍ교리 등 여러 청환직을 거쳐, 뒤에 우의정에 올랐다. 1674년 효종비(妃)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인조의 계비)의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 남인들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說ㆍ1년)이 채택되자 벼슬을 내놓았다. 1675년 좌의정이 되어 윤휴(尹?)ㆍ홍우원(洪宇遠)ㆍ조사기(趙嗣基) 등의 동궁(東宮)에 대한 불손한 언사를 탄핵하였다가 도리어 남황(南荒)에 유배되었고, 숙종 6년(1680년) 종실(宗室)인 정(楨)ㆍ남의 모역이 발각되어 윤휴(尹?) 등이 주살되고 그 일당인 남인(南人)이 모두 쫓겨나자 배소에서 불려올라와 옥사를 다스리고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부터 한동안 당쟁이 잠잠하고 조정의 기강이 유지되었으나, 숙종 15년(1689년)에 기사사화(己巳士禍)로 남인들이 재집권하자 진도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전서(篆書)를 잘 썼고, 저서에는 ‘문곡집(文谷集)’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 돌로개마을에 자리한 문충공(文忠公) 김수항(金壽恒)의 묘.

수흥(壽興)과 수항(壽恒)의 형 수증(壽增ㆍ1624∼1701)은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으로 165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2년에 처음 관직에 나아가 여러 직책을 거쳤다. 젊어서부터 산수(山水)를 좋아하고 기행문 등을 남겼는데 45세 때 강원도 화천군에 은거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이룩하여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해 곡운구곡(谷雲九曲)이라 하고, 화가 조세걸(曺世傑)을 시켜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를 그리게 하였다. 그뒤 기사사화(己巳土禍)로 송시열과 동생 수항(壽恒) 등이 죽고 정권을 남인들에게 빼앗기자 세상을 피하여 춘천의 곡운산으로 들어가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를 지었다. 이때 성리서(性理書)를 탐독하였는데, 특히 소강절(邵康節)의 음양소식관(陰陽消息觀)을 정사의 조경에 응용하였다. 그는 예서(隷書)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저서에 ‘곡운집(谷雲集)’이 있다.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자리한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의 묘.


 

수항(壽恒)의 아들인 창집(昌集ㆍ1648∼1722)은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로 노론(老論) 4대신 중의 한 사람이다. 숙종 10년(1684년) 공조좌랑(工曹佐郎)으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벼슬이 이조ㆍ호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숙종이 죽은 뒤 숙종의 계비인 김대비(金大妃)의 후원으로 왕세제(王世弟ㆍ영조) 책봉을 실행하였다. 경종 1년(1721년)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시행하게 하였으나 소론의 반대로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자 거제도(巨濟島)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되었다. 1724년 영조 즉위 뒤 복직되고 영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헌(忠獻).

 

 

▲ (상)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의 영정과 문집인 몽와집(夢窩集). (하)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초현2리에 자리한 김창집의 묘.

창집(昌集)의 아우 창흡(昌翕ㆍ1653∼1722)은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으로 15살 때 이단상(李端相)에게 배우고, 현종 14년(1673년)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사양하고 유불도 삼가(三家)에 심취했다. 성리학에 뛰어나 창협(昌集)과 함께 형제가 이이(李珥) 이후의 대학자로 명성이 높았다.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유배된 형 창집(昌集)의 일로 지병이 도져 이듬해 석교(石郊) 촌사(村舍)에서 죽었다. 영조 즉위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삼연집(三淵集)’, ‘심양일기(瀋陽日記)’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


 

▲ 문강공(文康公) 김창흡(金昌翕)의 영정과 그의 문집인 삼연집(三淵集).

 

창집(昌集)의 손자인 원행(元行ㆍ1702∼1772)은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ㆍ운루(雲樓)로 숙종 45년(1719년) 진사과에 제3위로 합격했으나 경종 2년(1722년)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할아버지 창집(昌集)이 세자책봉문제로 참화를 입어 온 집안이 모두 귀양갔으나 그는 모면했다. 영조 1년(1725년) 할아버지의 죄가 용서되어 그의 집안 자손들이 다시 벼슬에 오르게 되었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고향에서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영조 16년(1740년)부터 내시교관(內侍敎官)ㆍ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ㆍ사헌부지평ㆍ서연관(書筵官)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퇴했고, 영조 35년(1759년) 왕세손이 책봉되자 영조는 세손의 교육을 위해 그를 등용코자 불러들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영조 37년(1761년) 공조참의ㆍ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ㆍ세손유선(諭善)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미호집(渼湖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


 

 

▲ 김창집의 손자 문경공(文敬公) 김원행(金元行) 영정과 그의 문집인 미호집(渼湖集).

 

창집(昌集)의 5세손 조순(祖淳ㆍ1765∼1832)은 초명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로 아버지는 부사 김이중(金履中)이다. 영조 9년(1785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ㆍ규장각 대교가 되었다. 1789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그 뒤 부제학ㆍ병조판서ㆍ이조판서ㆍ선혜청제조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였다. 순조 2년(1802년) 딸이 순조비(純祖妃ㆍ순원왕후)로 봉해지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훈련대장ㆍ호위대장ㆍ금위대장 등을 거쳐 1826년에는 벼슬이 양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식견이 뛰어나고 품성이 곧고 밝아 정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순조임금을 어린 왕세자 때부터 30년간 보좌하였다. 그의 집권은 훗날 철종 때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이 되었다. 문장에 능하고 그림도 잘 그려 죽화(竹畵)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풍고집(楓皐集)’이 있다.


 

▲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닦은 풍고(楓皐) 김조순 영정과 풍고집(楓皐集).

 

 

 

▲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에 자리한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의 묘.

 

조순(祖淳)의 아들로 순조비(純祖妃)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동생인 좌근(左根ㆍ1797~1869)은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으로 순조 25년(1825년) 조상의 덕(德)으로 벼슬에 있다가 1838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중추적 인물로서 1839년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 1842년 이조판서ㆍ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ㆍ공조판서를 지내고 이듬해 대사헌, 1846년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철종 1년(1850년) 우참찬(右參贊)ㆍ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ㆍ금위대장(禁衛大將)ㆍ형조판서를 거쳐서, 이듬해 훈련대장(訓練大將)ㆍ공조판서, 1852년 우의정을 지내고, 이듬해부터 1863년까지 영의정에 세 번이나 보직되어 세도를 누렸다. 1862년 이정청(釐整廳)이 설치되자 총재관(摠裁官)이 되었으며, 고종 1년(1864년) 대원군의 등장으로 영의정을 사직하고 실록총재관(實錄摠裁官)으로서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에 참여하고, 1868년 삼군부(三軍府)가 설치되자 영삼군부사(領三軍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


 

 

▲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에 자리한 충익공(忠翼公) 김좌근(金左根)의 묘.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에 자리한 김좌근 고택은 아들 김병기가 지은 것으로 99칸 중 42칸이 남아 있으며, 후손들이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였다.

흥근(興根ㆍ1796~1870)은 자는 기경(起卿), 호는 유관(游觀)으로 순조 25년(1825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었다. 헌종 1년(1835년) 예조판서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안동 김씨 세도를 배경으로 방자한 행동을 하여 탄핵을 받고 한때 광양(光陽)으로 유배되었다가 철종 2년(1851년) 좌의정,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고종 1년(1864년)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 때 지실록사(知實錄事)를 지내고, 이듬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으나 관직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충문(忠文).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기산8리에 자리한 충문공(忠文公) 김흥근(金興根)의 묘(포천시향토유적 제31호).


병연(炳淵ㆍ1807~1863)은 자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으로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출생했다. 선천부사(宣川府使)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으나, 형 병하(炳河)와 함께 노복 김성수(金聖洙)의 도움으로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도망가 살았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살다가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으나, 자신의 집안 내력을 모르고 할아버지 익순(益淳)을 조롱하는 시제를 택한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방랑길에 올랐다. 57세 때 전라남도 동복(同福)에서 객사하기까지 삿갓을 쓰고 전국각지를 유랑하였으며, 발걸음이 미치는 곳마다 많은 시를 남겼다. 후에 둘째 아들 익균(翼均)이 유해를 영월의 태백산 기슭에 묻었고, 일제강점기에 이응수(李應洙)에 의해 ‘김립시집(金笠詩集)’이 간행되었다. 1978년 후손들에 의해 광주(光州) 무등산 기슭에 시비가 세워졌고, 수많은 한시가 아직도 구전되고 있다.

 


▲ 강원도 영월군 핟오면 와석리 노루목에 자리한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의 묘.


옥균(玉均ㆍ1851~1894)은 호는 고균(古筠)ㆍ고우(古愚)로 충남 공주에서 출생해 7세 때 당숙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가 철종 12년(1861년)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부임한 양부(養父)를 따라 강릉에서 지내며, 송담서원에서 율곡(栗谷)의 학풍을 공부하였다. 고종 9년1872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급제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고종 11년(1874년) 고종의 특지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올랐다. 새로운 사조(思潮)와 사회변동에 예민하여 유홍기(劉鴻基)ㆍ오경석(吳慶錫)ㆍ박규수(朴珪壽)ㆍ이동인(李東仁) 등으로부터 개화사상과 신학문을 배우고 개화당을 조직하여 지도자가 되었다.

고종 18년(1881년) 이동인의 알선으로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진전과정과 정치적 동향을 돌아본 다음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교리에 복직되었다. 고종 19년(1882년) 임오군란 뒤 일본수신사(日本修信使) 박영효(朴泳孝)의 고문이 되어 차관(借款)을 얻어오면서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개화당과 개화정책을 탄압해 온 청(淸)나라와 수구파를 제거하여 나라를 개화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고종 22년(1884년) 12월 우정국(郵政局) 낙성연(落成宴)에서 한규직(韓圭稷) 등 수구파를 제거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의 호조참판으로 재정권(財政權)을 잡았으나 청나라의 무력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사흘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건너가 10년간 망명생활을 계속했다.

고종 31년(1894년)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으나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유해는 청나라 정부의 조처로 조선 정부에 인계되었다. 그 뒤 갑오개혁으로 개화당 내각이 조직된 고종 32년(1895년)에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과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의 상소로 반역죄가 사면되었으며,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좌)갑신정변의 실패로 상하이로 망명했으나 자객 홍종우에게 피살된 김옥균. (우)피살된 그의 머리가 한강변에 방치되어 있다.

 

형규(衡奎)의 아들 좌진(佐鎭ㆍ1889∼1930)은 충남 홍성(洪城) 명문가에서 태어나 1904년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하여 근대화에 앞장섰으며, 이듬해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후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ㆍ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등의 간부를 지내고, 1913년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해 활동하다가 1915년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1917년 만주로 망명, 1919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였다. 이듬해 북로군정서의 군대를 동원하여 청산리(靑山里) 전투를 총지휘하며 일본군 제19ㆍ21사단을 상대로 격전을 벌여, 무장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그 뒤 부대를 이끌고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이동,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여 부총재로 취임하고, 일본군의 보복작전을 피해 1921년 노령자유시(露領自由市)로 이동하였다가, 이듬해 흑하사변(黑河事變)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들어왔다. 1925년 닝안(寧安)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 군사집행위원장이 되고,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정예군을 양성하였다. 항일투쟁과 동포의 단결에 힘쓰다가 과거의 부하였던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의 김일성(金一星)ㆍ박상실(朴相實) 등에게 영안현(永安縣) 중동선(中東線) 산시역(山市驛) 자택 앞에서 암살당하였다.

 

 

▲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에 자리한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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