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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삼척 김씨(三陟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시조(始祖) 김위옹(金渭翁)은 신라(新羅) 제56대 경순왕(敬順王)의 여덟째 아들인 일선군(一善君ㆍ혹은 三陟君이라고도 함) 김추(金錘)의 둘째 아들(외아들이라고도 함)로 검교사농경 겸 어사대부(檢校司農卿兼御史大夫)ㆍ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ㆍ상주국 좌승상(上柱國左丞相)에 이르렀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冊祿)되어 실직군(悉直君ㆍ실직은 삼척의 옛 이름)에 봉해졌으며, 뒤에 실직군왕(悉直郡王)에 추봉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삼척(三陟)을 관향(貫鄕)으로 삼고, 김위옹(渭翁)을 시조(始祖)로 하여 선산 김씨(善山金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

▲ 1849년 간행된 을유보(乙酉譜).

삼척 김씨(三陟金氏)의 시조(始祖)이며,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손자(孫子)인 김위옹(金渭翁)의 능(陵)을 실직군왕릉(悉直郡王陵)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고려 태조인 왕건(王建)이 신라 경순왕의 복속을 받아들이고 실직군왕으로 책봉(冊封)하여 대우한 것이라 한다. 비문(碑文)에 그 직위(職位)가 ‘三韓壁上功臣 銀靑光祿大夫 檢校 司農卿兼 上柱國左承相 封 悉直君王’이라 적혀 있다.

▲ 강원도 삼척시 성북동 갈야산의 동남쪽 사면에 위치한 실직군왕릉(悉直郡王陵ㆍ강원도기념물 제15호).

▲ 실직군왕릉(悉直郡王陵)과는 3~4km 떨어진 강원도 삼척시 사직동에 자리한 실직군왕비릉(悉直郡王妃陵).

‘삼척군지(三陟郡誌)’에 의하면 조선 헌종 4년(1838) 가을에 김학조(金學祚)ㆍ김흥일(金興一) 등이 실직군왕의 지석(誌石)과 유적을 찾으려고 삼척부사(三陟府使) 이규헌(李圭憲)에게 간청하여 허락을 받은 후 먼저 사직릉(史直陵ㆍ실직군왕비 밀양 박씨의 능)을 발굴하였더니, 유해가 풍장하여 지금까지도 완전하였으며 내외관곽은 돌로 깎아 쌓았는데 보물 그릇은 기와로 만든 동이(추정 토기항아리)가 몇 쌍 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갈야산에 있던 갈야릉(葛夜陵)을 발굴하자 역시 그와 같아서 개축하고 봉하였으며, 그 후 1937년 삼척 김씨 종중에서 수축할 것을 건의하고 석의를 갖추어 능으로 봉하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묘 부근에 다른 묘를 쓰기 위해 땅을 파면 샘물이 쏟아져 나오고 백호가 나타나 묘를 쓸 수 없었다고 한다.

▲ (상)시조 김위옹(金渭翁)을 불천지위로 봉안한 사당인 삼척시 당저동 보본단(報本壇). (하)홍서대(紅犀帶)를 보관하기 위해 보본단 내에 지어진 보대운한각(寶帶雲漢閣).

삼척 김씨(三陟金氏)는 고려조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위옹(渭翁)의 장남 자영(自英)은 배융교위(陪戎校尉), 차남 자남(自男)은 삼중대광 태사(三重大匡太師)였다. 그리고 5세손 복영(僕永)는 관찰사(觀察使), 승련(承鍊)은 사공(司空ㆍ정1품)을 지냈고, 6세손 정위(正位)는 동래부사(東來府使), 7세손 자주(自柱)와 10세손 윤성(允成)은 대장군(大將軍), 정휘(正暉)는 도통사(都統使)ㆍ대장군(大將軍), 산수(山壽)는 안동부사(安東府使), 11세손 득강(得江)은 간의대부(諫議大夫), 해(偕)는 호부상서(戶部尙書), 응(膺)은 상장군(上將軍) 등을 역임하였다.

11세손 인궤(仁軌)는 고려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윤성(允成)의 아들로 충열왕(忠烈王) 16년(1290년)에 합단적(哈丹賊)의 칩임시 호군(護軍)으로서 왕을 호위하여 많은 공을 세워 가야향(加也鄕)을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시켜 주었다. 그는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ㆍ문하시중(門下侍中)을 거쳐 조현대부(朝顯大夫)ㆍ전법총랑(典法摠郞)ㆍ호군전객령(護軍典客令) 등을 지냈다고 하는데, 경산 김씨(慶山金氏)에서 시조로 받들고 있다.

▲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돈재공파(遯齋公派) 파조 돈재공(遯齋公) 김광유(金光裕)의 유허비.

 

 

조선조에 와서도 11세손 천봉(天奉)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13세손 익정(益精)은 이부상서(吏部尙書), 학(鶴)은 전의감(典醫監), 광연(光鍊)은 전리판서(典理判書), 광유(光裕)는 중랑장(中郞將), 14세손 충민(忠敏)은 한성판윤(漢城判尹), 미(美)는 대사간(大司諫), 15세손 성경(成慶)은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욱(郁)은 병조판서(兵曹判書), 중순(仲淳)과 계순(季淳)은 상장군(上將軍), 말순(末淳)은 군자정감(軍資正監)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조에 동래부사(東來府使)를 지낸 양필(良弼)은 14세손인 난손(蘭孫)의 둘째 아들로 삼포왜란(三浦倭亂)때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고,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경상도절제사(慶尙道節制使) 겸 동래부사(東來府使)로 부임해 그 치적이 주민의 함송(咸頌)하는 바 있었다고 한다.

▲ 척주군(陟州君) 김양보(金良輔)의 호성공신록(扈聖公臣錄ㆍ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 제87호).

양필(良弼)의 동생인 양보(良輔)는 호는 송봉(松峰)으로 학문이 뛰어난 선비로서 중종(中宗) 때 과거에 등과해서 가선대부(嘉善大夫)ㆍ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어가(御駕)를 의주(義州)까지 호송하였다가 환어(還御)도 함께 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고, 척주군(陟州君)에 봉(封)해졌다.


그외에 조선조 건국 초의 원종공신(原從功臣) 성고(成告), 목릉(穆陵)의 용사역(龍蛇役)에 공을 세워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으로 추증(追贈)된 논동(論仝),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왕자사부(王子師傅)로서 왕을 호송(護送)한 공으로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으로 책록(冊祿)되어 진성군(眞城君)으로 봉하여진 기문(起文) 등이 가문을 더욱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