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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청도 김씨(淸道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청도 김씨(淸道金氏)의 연원

청도 김씨(淸道金氏)의 시조(始祖) 김지대(金之岱ㆍ1190~1266)는 초명은 중용(仲龍)으로, ‘갑자보(甲子譜)’ 세록(世錄)편에 보면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悅)의 8세손으로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김여흥(金餘興ㆍ수원 김씨 시조 김품언<金稟言>의 현손)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고종 4년(1217년) 3만명의 거란병이 침입하였을 때, ‘충효쌍수(忠孝雙修)’라는 시를 남기고 아버지를 대신해 출전하였다. 당시 모든 군사들이 방패머리에 기이한 짐승을 그렸으나, 그는 “국가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의 근심할 바이다.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과 효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라는 시를 지어 붙였다. 원수 조충(趙沖)이 병사를 점검하다가 이것을 보고 놀라서 그를 중용하였다.

▲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쟁터에 종군하면서 지은 시와 행적 등에 관한 기록을 후손들이 모아 판각한 ‘영헌공실기책판(英憲公實記冊板)’.

▲ 1258년 몽고병의 서북도 침입시 김지대(金之岱)가 파견되어 서북 40여 성이 안도하게 되었고, 후일 백성들과 관리에 의해 세워진 서북도정란비(西北道靖亂碑). 1885년 파손된 채로 발견되었으며, 당시 탁본한 것이 남아 있다.

 

 

 

 

1218년에는 조충(趙沖)이 시험관으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그를 일등으로 발탁하고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하였다. 그는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고 강호(强豪)를 억제함으로써 이민(吏民)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으며, 그뒤 내직으로 들어와 보문각 교감(寶文閣校勘)을 맡았다.

1240년 전라도 안찰사(全羅道按察使)로 있을 때, 진도에서 최우(崔瑀)의 아들 최만전(崔萬全)이 진도에 숨어 횡포를 부리면서 자기의 수하인 통지(通知)라는 사람을 김지대(金之岱)에게 보내 그의 요구를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응하지 않고 김지대(金之岱)가 직접 최만전(崔萬全)을 만나 그의 요구를 즉석에서 들어주었다. 그러나 최만전(崔萬全)이 또다시 통지(通知)를 보내 여러 가지를 요구하므로, 통지(通知)를 결박하여 강물에 던져버렸다. 최만전崔萬全)은 원망을 하였으나, 김지대가 청렴하고 근엄하여 감히 해치지를 못하였다.

1255년에는 판사재사(判司宰事)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진사를 뽑았고, 고종 45년(1258년) 몽골군이 북쪽 변방을 침입하자 조정에서는 당시 군무를 소홀히 하던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事) 홍희(洪熙)가 여색만 탐하고 군무를 제대로 돌보지 않자, 김지대(金之岱)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승진시켜 파견하자 서북 40여 성이 안도하게 되었다.

원종 1년(1260년) 12월 정당문학 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에 오르고, 1261년 5월에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하고 오산군(鰲山君ㆍ오산은 지금의 淸道)에 봉하였다. 시호는 영헌(英憲). 그리하여 후손들은 청도(淸道)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그곳에 살면서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명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 경북 청도군 청도읍 대현상동에 자리한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의 묘와 묘실(墓室)인 염수당(念修堂).

▲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의 충효쌍수(忠孝雙修)의 위업을 숭상하기 위해 1704년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에 세운 남계서원(南溪書院ㆍ경남지정문화재자료 제229호). 1869년 훼철되었으며, 그후 중건하였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지대(之垈)의 아들 선장(善莊)이 충혜왕 복위 1년(1340년) 조적(曺?)의 난이 일어난 후 왕이 원(元)나라에 불리어 갈 때, 대호군(大護軍ㆍ5위의 종3품인 무관 벼슬)으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김선장(金善莊) 등을 1등공신으로 삼아, 전각에 초상을 그려 걸고 그 부모와 처에게도 작위를 내리고 전(田) 백결과 노비 10명을 주었다.”고 적혀 있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 인물조(人物條)와 ‘오산지(鰲山誌)’에도 선장(善莊)의 공으로 그의 고향이 밀양군(密陽郡)의 한 현(縣)에서 청도군(淸道郡)으로 격상되었고, 그에게 군(郡)을 담당하는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제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와 원정공(元貞公) 김한귀(金漢貴)를 고을 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곳인 경북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성황사(城隍祠).

 

선장(善莊)의 증손(曾孫) 복기(福基)는 합문지후(閤門?候)를 지냈으며, 복기(福基)의 손자 한귀(漢貴)는 공민왕 11년(1362년) 대장군으로서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 등과 함께 홍건적에게 빼앗겼던 개경을 공격하여 수복하였다. 1363년, 지난해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전공판서(典工判書)로서 1등공신록에 오르고 사전(私田)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이때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하고 원나라에 와 있던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의 왕으로 왕위를 이으려고 고려를 침입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자, 광주도병마사(廣州道兵馬使)로 부임하였다. 1365년에는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었으며, 뒤이어 개성윤(開成尹)과 밀직부사를 지냈고 1367년에는 전라도순문사(全羅道巡問使)가 되었다. 왕으로부터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원정(元貞)이다. 현재 경북 청도군 화양읍(華陽邑)의 성황사(城隍祠)에 청도 김씨의 시조 김지대(金之岱)와 함께 청도 고을의 수호신으로 배향되어 있다.

▲ 원정공(元貞公) 김한귀(金漢貴)의 재사(齋舍)인 오산재(鰲山齋).

한귀(漢貴)의 손자 점(漸)은 공민왕 때의 문신 린(潾)의 아들로 24세의 나이에 이성계(李成桂)의 눈에 띄어 장군이 되고 대호군(大護軍) 등 관직을 역임하였다. 조선 태종(太宗) 때 외직으로 청주목사(靑州牧使), 내직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ㆍ예조참의(禮曹參議)를 거쳐 동지우군총제ㆍ우군총제 등 군부의 요직을 지냈다. 태종 말년 명나라에 성절사로 북경(北京)에 다녀왔는데, 이는 명나라가 남경(南京)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후에 중국으로 건너간 조선 최초의 사신이었다. 귀국 후 주로 명나라 사신을 접반하는 외교 관련 업무을 자주 맡아 처리했다.

세종(世宗) 즉위 초에 호조판서(戶曹判書)ㆍ형조판서(刑曹判書)를 지낸 다음 평안도 관찰사(平安道 關察使)를 지냈으며, 다시 내직(內職)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임명되었으나 평안감사 재직 시에 일어난 비리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이에 당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그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상왕 태종(太宗)과 세종은 김포에 있는 그의 집으로 돌려보내는 정도로 무마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4대에 걸쳐 일관되게 충성을 다했다는 점과 그의 부인 권씨가 명나라 제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의 모후인 권마마와 혈연관계에 있다는 것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말년을 조용하게 보내던 그는 1457년 89세의 나이로 경기도 김포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세조(世祖)는 호강(胡剛)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호강공(胡剛公) 김점(金漸)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세운 유허단비(遺墟壇碑). 호강공 묘소가 북한(경기도 장단군)에 있어 그의 장자인 김유손(金裕孫)의 묘 인근에 유허단비를 세웠다.

▲ 병산(?山) 김난상(金鸞祥)의 유묵.

 

난상(鸞祥ㆍ1507∼1570)은 자는 계응(季應), 호는 병산(?山)으로 중종 23년(1528년)에 이황(李滉)과 같이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도의(道義)를 함께 닦았으며, 1537년 식년문과에 별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이 되었다. 명종 2년(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남해(南海)ㆍ단양(丹陽) 등지로 유배되었다. 선조(宣祖) 초에 풀려나와 집의(執義)ㆍ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며, 선조 2년(1569년) 사류망담(士類妄談)의 잘못을 논하다가 파직되었다. 난상(鸞祥)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진사(進士)에 함께 합격한 인연으로 두터운 교분을 유지했다. 두 사람은 서로가 모르는 점을 묻고 격려하는 편지를 교환했는데, 이 편지는 모두 이황(李滉)의 문집에 수록돼 있다. 영천의 오산사(梧山祠)에 배향되었다.

▲ 김난상(金鸞祥)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1786년 한양 도제동(지금의 서울역 근처)에 건립한 정자를 1882년 현 위치(영주시 가흥동)로 이건한 매양정(梅陽亭). 현판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글씨다.

▲ 1850년경 경북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에 세워진 의병장 김준신(金俊臣)을 기리는 충의비(경북기념물 제113호).

 

극유(克裕)와 준신(俊臣)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구국의 활약을 한 인물들이다. 극유(克裕)는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활약,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있을 때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동래만덕령(東來萬德嶺)을 넘어 양산(梁山)으로 쳐들어 온 왜군을 맞아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쳤다. 조정에서는 그 공을 기려 극유(克裕)를 선무공신원종이등(宣武功臣原從二等)에 기록했다.

준신(俊臣)도 창의(滄義)해 상주군수의 추천으로 판관(判官) 권길(權吉)과 함께 상주성(尙州城)을 지켰다. 왜군의 총공격으로 성이 함락될 위기에 빠지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성(城)을 버리고 도망쳤으나, 준신(俊臣)은 후사관(後事官) 윤섬(尹暹)ㆍ이경류(李慶流)ㆍ박호 등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그의 나이 32세로, 뒷날 영남유생(嶺南儒生)들의 상소와 경연관의 장계(狀啓)로 그의 충절이 세상에 알려져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다. 경북 상주시 화동면 판곡리에 준신(俊臣)의 충의비(忠義碑)가 세워져 있다.

▲ 금포(錦浦) 김시성(金是聲)를 제향하는 남호서원(南湖書院)이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자 세워진 경산시 하양읍 남하리 금포당(錦浦堂).

시성(是聲ㆍ1602∼1676)은 자는 문원(聞遠), 호는 금포(錦浦)로 인조 15년(1636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익찬(翊贊)으로서 소현세자(昭顯世子)ㆍ봉림대군(鳳林大君)을 따라 심양(瀋陽)에 다녀왔다. 그 뒤 용천부사(龍川府使)ㆍ강계부사(江界府使)ㆍ어영중군(御營中軍)을 거쳐 통제사(統制使)에 이르렀다. 용천부사(龍川府使)로 있을 때 군내(郡內)에 호랑이 2마리가 나타나 사람을 해쳤는데, 단 두 발의 화살로 사살할 만큼 활솜씨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1786년 사림(士林)이 남호서원(南湖書院)에 봉안했다.

▲ 전북 고창군 해리면 임해리에 자리한 성리학자 김응하(金應夏)를 제향하는 모유재(慕裕齋).

순조(純祖) 때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이름난 응하(應夏ㆍ1783~1830)는 문하(門下)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시켰으며, 문장에 능하여 ‘정수재유고(靜修齋遺稿)’를 집필하였다.

▲ 경북 청도군 청도읍 평양리에 자리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공적비. 청도 김씨 족보에는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고산자(古山子) 정호(正浩)는 어려운 집안에서 출생했으나 학문을 열심히 닦아 정밀한 지도 작성에 뜻을 품고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36여 년간의 노력 끝에 순조(純祖) 말 ‘청구도(靑丘圖)’ 2첩을 완성했다. 그후 ‘청구도(靑丘圖)’에 불만을 느끼고 다시 전국을 답사하여 철종 12년(1861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2첩을 교간(校刊)하고, 이어 ‘여지승람(與地勝覽)’의 착오를 정정,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집필하였다. 특히 그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손수 그려서 판각하여 이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게 바치자, 그 정밀함에 놀란 나머지 조정은 나라의 기밀을 누설한다는 죄목으로 각판(刻板)을 불태우고 억울하게 투옥시켜 옥중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 조선 헌종 때 직재(直齋) 김익동(金翊童)이 건립한 구연정(龜淵亭). 현재 대구대학교 캠퍼스 내에 위치하며 금호강을 굽어보는 암벽 위에 북동향으로 자리잡고 있어 주변 경관이 좋다.

그 외 학자로 1819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해, 이듬해에 정시(庭試)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자 과거를 단념하고 노은정사(老隱精舍)와 구연정(龜淵亭) 등을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전력한 직재(直齋) 익동(翊童)과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를 지낸 도일(燾一)이 있다. 효자 성민(成敏)은 부모의 병환 때 손가락을 끊어 피로 탕약을 대신해 회생시키니, 주위 사람들을 감동케 하여 그 효심(孝心)을 기린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져 가문을 빛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