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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순천 김씨(順天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순천 김씨(順天金氏)의 연원
 




▲ 1618년 이수광(李光)이 편찬한 전라도 순천부 읍지인 ‘승평지(昇平志)’와 1770년 간행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기록된 순천 김씨 시조 김총(金摠).



▲ 순천 김씨 시조 김총(金摠) 영정. 영정의 우측 상단에 ‘성황신 김총’이라는 묵서가 쓰여져 있다.



시조(始祖) 김총(金摠)은 신라 왕손(王孫)으로 궁예(弓裔) 때 인가별감(仁駕別監)을 지냈다. 나아가 순천(당시 昇平) 진례(進禮) 땅을 지키며 왜구를 격퇴하고 인정(仁政)을 베푸니 백성들이 흔쾌히 따랐으며, 평양군(平陽君ㆍ평양은 순천의 옛 이름)에 봉해졌으므로 본관(本貫)을 순천(順天)으로 하게 되었다.

그가 죽은 뒤 주민들은 그를 성황신(城隍神)으로 받들었으며, 고려 건국 초에는 태조(太祖)가 공의 유덕을 추모하여 한 사우(祠宇)를 승평(昇平)의 동쪽에 창건하고 ‘안관(安官)’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일설에는 김총(金摠)은 궁예(弓裔)의 손자로 태봉국(泰封國) 태자 청광(靑光)의 아들이라 한다. 911년 왕건의 후백제 금성(錦城ㆍ전남 나주시) 정벌시 황세손으로 출전하여 승리하였으며, 915년에 왕건(王建)은 궁예의 소환령으로 철원으로 돌아갔으나 김총(金摠은 나주지역 방어를 위해 견훤(甄萱)과 대치하고 있던 중 918년에 왕건의 반란으로 태봉국이 멸망하자 난을 피하여 후백제 견훤의 휘하로 들어갔다. 후백제에 귀부한 후 견훤의 휘하에서 인가별감(引駕別監)으로 순천(順天ㆍ당시 昇平) 지방에 나아가 발호하는 외적을 정벌하고 어진 정사(政事)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고 한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김총(金摠)은 견훤(甄萱)에게 벼슬하여 벼슬이 인가별감에 이르렀다” 하였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궁예(弓裔)때 인가별감을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1887년 편찬된 ‘신라김씨선원록서(新羅金氏璿源錄序)’와 1988년 발간된 ‘신라김씨이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에서는 “김총(金摠)은 태봉국 태자 청광보살(靑光菩薩)의 아들로 궁예(弓裔)의 장손(長孫)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순천 김씨는 김총(金摠)이 궁예(弓裔)의 손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곳과 인정하지 않는 곳이 있어 확실치는 않다.

▲ 궁예의 세 아들 이름이 표기된 순천 김씨 세보.




▲ (上)전남 승주군 주암면 주암리 오성산에 자리한 시조 평양군 김총(金摠)의 묘. (下)시조의 영정이 보관된 평양군영당(平陽君影堂).

 

김총(金摠)의 후대에서 윤인(允仁)이 전객서령(典客署令)을 지내고, 윤인(允仁)의 증손(曾孫) 승주(承?ㆍ1354∼1424)는 초명이 을보(乙寶), 호는 월담(月潭)으로 승주(承?)는 하사받은 이름이다. 그의 입사(入仕) 경로는 알 수 없으나,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변혁기에 무반으로 입신(立身)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생애(生涯) 전반기의 경력은 불분명하고, 우왕 6년(1380년)에 흥위위별장(興威衛別將)이 되고, 창왕 1년(1389년) 풍주수령으로 임명되어 왜구를 격퇴시켰다.

▲ 태종 4년(1404년) 11월 당시에 생존하고 있었던 개국공신(開國功臣) 등 66명이 회맹(會盟)한 후 작성한 회맹록을 목판으로 새겨 인쇄한 김승주삼공신회맹록판본(金承承?三功臣會盟錄板本). 1404~1407년 사이에 인쇄되었으며, 17세기 이전의 고문서를 인쇄하여 유포한 예가 많지 않아 사료적인 가치도 매우 높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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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후 동북면 청해도 안무 겸 찰리사(東北面靑海道安撫兼察理使)로 나가 야인 진압에 공을 세웠고, 태조 5년(1396년) 경상도병마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정종 2년(1400년)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太宗)이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하여 태종 1년(1401년) 좌명공신 4등에 오르고,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다. 1407년 동북면병마도절제사 겸 영흥부윤ㆍ도순문찰리사(都巡問察理使) 등을 역임했다. 태종 9년(1409년) 야인이 경원(慶源)에 침입하였을 때 이를 물리쳤으며, 이듬해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에 이어 1413년 서북면도순문찰리사 겸 병마절제사ㆍ평양부윤을 지냈다. 1414년 병조판서로 있다가 이듬해 평양군(平陽君)으로 봉해졌고, 판중군도총제(判中軍都摠制)가 되었다. 그 뒤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올랐으며, 시호는 양경(襄景).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원당리에 자리한 양경공(襄景公) 김승주(金承?)의 묘.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종서(宗瑞ㆍ1390~1453)가 유명하다.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로 태종 5년(1405년) 16세의 나이로 문과(文科)에 급제해 세종 원년에 사간원(司諫院)ㆍ우정언(右正言)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세종 15년(1433년)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야인(野人)들의 변경 침입을 격퇴하고 육진(六鎭)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그 후 형조와 예조판서를 거쳐 우참참(右參贊)에 올랐으며,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고려사(高麗史)’ 개찬(改撰)을 맡아 간행하였다. 특히,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신으로 문종(文宗)이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좌의정(左議政)으로 황보인(皇甫仁ㆍ영의정)과 함께 어린 왕을 보필하여 대호(大虎)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단종 1년(1453년)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에 의해 그는 두 아들 승규(承珪)ㆍ승벽(承璧)과 손자 만동(萬同)ㆍ조동(祖同) 등과 함께 피살되고 그의 동생 종한(宗漢)도 화(禍)를 입었다. 다행히 승규(乘珪)의 막내아들만이 어머니를 업고 도망감으로써 간신히 살아 남아 그의 일가(一家)는 절손(絶孫)됨을 면하게 되었다.?



▲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문종 1년(1451년) 완성한 ‘고려사’와 유묵(遺墨).

이렇듯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고 대역모반죄(大逆謀叛罪)로 효시(梟示ㆍ대죄를 범한 사람의 목을 베어 군중 앞에 공시하여 대중을 경계시키던 일)되었다가 영조 22년(1746년)에 와서 복관(復官)되었다. 작은 체구에 뛰어난 지략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그는 오랑캐를 막기 위하여 함경도 팔진(八鎭)의 지세와 공수(攻守) 방법을 적은 '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저서를 남겼고, ‘호기가(豪氣歌)’를 포함하여 시조 2수가 전하고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

정조 10년(1786년) 12월22에 좌의정이 임금께 아뢰었다. “금년 가을에 한 선비가 백악산 기슭에서 한쪽 귀퉁이가 노출된 옥함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단종조의 상신 김종서의 사판(祠板ㆍ신주)이었다 합니다.” 정조 임금께서 영의정 김치인(金致仁)과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에게 “절제공(節齋公) 충익(忠翼ㆍ김종서의 시호)에게는 후손이 있다고 하니 특별히 부조전을 명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할 듯한데 의향이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이 “옛 상신이 육진(六鎭)을 개척한 공이 매우 크고 충절이 탁월하니 부조(不?)를 특허하는 것이 표창하는 도리에 합당할 듯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 충남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에 자리한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의 묘. 시신을 전부 거두지 못하고 한쪽 다리만 이곳 묘소에 묻었다고 전한다.

 

그외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낸 희열(希說)은 현감 약평(若枰)의 아들로 자는 상경(商卿), 호는 가정(柯亭)으로 중종 14년(151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중종 20년(1525년)에는 지평(持平)에 이어 문학(文學)을 거쳐 헌납(獻納)이 되었다. 1527년에는 병조정랑(兵曹正郞)ㆍ부교리(副校理)를 거쳐 교리(校理)가 되었고, 이어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ㆍ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ㆍ돈녕부 사인(敦寧府舍人)을 역임한 다음 중종 28년(1533년) 사간(司諫)ㆍ집의(執義)ㆍ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 32년(1537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된 뒤 병조참판ㆍ예조참판ㆍ호조참판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중종 37년(1542년)에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한 다음 전주부윤(全州府尹)에 이어 명종(明宗) 6년(1551년)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였다.


▲ 계곡(谿谷) 김복흥(金復興)의 시문집인 ‘계곡집(谿谷集)’.

 

복흥(復興ㆍ1546∼1604)은 자는 경언(景言), 호는 계곡(谿谷), 아버지는 부사정(副司正) 익창(益彰)으로 정염(丁焰)의 문인이다. 문장이 뛰어나 14세 때 도시(道試)에서 장원하였다. 선조 3년(1570년)에 생원ㆍ진사시에 합격, 별제(別提)ㆍ직장(直長)의 벼슬을 거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군량미를 조달하였으며, 명나라 장수 여응종(呂應鍾)과 함께 군사기밀을 의논하는 등 왜적과 싸웠다.


▲ 1704년 이능간(李凌幹)과 정염(丁焰)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전북 임실군 지사면 현계리 현주서원(玄洲書院). 그뒤 1707년 계곡(谿谷) 김복흥(金復興)을 추가 배향하였다.

여물(汝?ㆍ1548∼1592)은 자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자(披逑子)로 찰방(察訪) 훈(壎)의 아들이다. 선조 10년(157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하여 병조낭관(兵曹郎官)ㆍ충주도사(忠州都事)를 거쳐 의주목사(義州牧使)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왕의 특명으로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의 부장(副將)으로 충주(忠州) 방어에 나갔으나 실패하여 탄금대(彈琴臺) 아래에서 신립(申砬)과 함께 투신자결하여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장의(壯毅).


▲ 경기도 안산시 와동 장의공(壯毅公) 김여물(金汝?) 장군의 묘는 그의 의관을 거두어 묻었다.



▲ 경기도 안산시 와동에 자리한 장의공(壯毅公) 김여물(金汝?)과 그의 아들 문충공(文忠公) 김유(金?)의 신도비.

 

여물(汝?)의 아들 유(?ㆍ1571~1648)는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며, 순절자의 아들이라 하여 참봉(參奉)에 기용되었다가 선조 29년(159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복수사(復讐使)로 호서지방에 내려가기도 했고, 승문원(承文院) 벼슬을 거쳐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광해군 4년(1612년) 교리(校理)에 이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617년 정조(鄭造)ㆍ윤인(尹訊)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廢母)를 주장하고 백관이 모여 회의하는 데 참석치 않아 대간의 탄핵을 받고 향리로 물러났다.


▲ 문충공(文忠公) 김유(金?)의 영정과 그의 시문집인 ‘북저집(北渚集)’.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주동적 인물로 가담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지고, 병조판서 겸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병조판서로서 왕의 남행을 호위했으며, 그뒤 우찬성을 지내고 162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체찰사(副體察使)로서 인조를 따라 강화로 피했으며, 돌아온 뒤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역임했다. 1631년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면직되었으나, 2년 뒤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고 인조 14년(1636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했는데, 이때 최명길ㆍ홍서봉(洪瑞鳳)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여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게 했으며, 환도 뒤 화의를 주장한 진소(陳疏)가 잘못되었다는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다시 영의정에 올라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이 되었다.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문집인 ‘북저집(北渚集)’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에 자리한 문충공(文忠公) 김유(金?)의 묘.

유(?)의 아들 경징(慶徵ㆍ1589∼1637)은 자는 선응(善應)으로 1623년 인조반정에 세운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이 되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개시문과(改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후에 도승지를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 강도검찰사(江都檢察使)로 강화도 수어(守禦)의 임무를 띠고 부임했으나, 수비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유흥에 빠져 청(淸)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와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왕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패전과 수비에 실패한 죄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 경기도 안산시 와동에 자리한 사세충열문(四世忠烈門ㆍ경기도기념물 제8호). 장의공(壯毅公) 김여물(金汝?)의 후실 평산 신씨와 아들 김유(金?)의 처 진주 유씨, 손자 김경징(金慶徵)의 처 고령 박씨, 증손 김진표(金震標)의 처 진주 강씨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조정에서 내려준 정문(旌門)으로 1979년 중수하였다.

 

흥국(興國ㆍ1557∼1623)은 자는 경인(景仁), 호는 수북정(水北亭)으로 아버지는 별제 난손(鸞孫)이다. 선조 22년(1589년) 증광문과에 급제,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ㆍ정언(正言)ㆍ북평사(北評事)를 거쳐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영변(寧邊)ㆍ회양(准陽)ㆍ한산(韓山)ㆍ양주(楊州) 등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모두 선정을 베풀어 훌륭한 치적을 남겼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유현(遺賢)으로 천거되어 부제학(副提學)을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아들에게도 묘비에는 양주목사(楊州牧使)라고 쓸 것을 명하는 절개를 보였다. 학문에 힘썼으며 시문을 좋아하여 당시 한문학의 거장 김장생(金長生)ㆍ신흠(申欽) 등과 친교하였고, 시문집으로 ‘수북정집(水北亭集)’을 남겼다. 낙향하여서는 백마강가에 정자를 짓고 날마다 동지(同志)와 더불어 글과 술로 소일하였으며, 스스로를 강상풍월주인(江上風月主人)이라 칭하였다.


▲ 충남 부여군 부여읍 규암리에 자리한 수북정(水北亭ㆍ충남문화재자료 제100호)은 수북정(水北亭) 김흥국(金興國)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다.

순천 김씨에서 분적한 성씨로는 신평 김씨(新平金氏), 승평 김씨(昇平金氏), 양택 김씨(陽澤金氏)가 있다.

 


현대 인물은 김종희((鍾喜,한화그룹 설립자), 김종철(鍾哲,국회의원, 국민당총재), 김승연(昇淵,한국화약그룹회장), 김호연(한양유통사장,빙그레회장), 김채용(판사), 김상욱(판사), 김응열(판사), 김치걸(대법원판사), 김병철(국회의원), 김종식(국회의원), 김동환(부장검사), 김상초(변호사), 김이조(부장판사), 김일룡(법원장), 김승우(판사), 김진오(판사), 김상균(판사), 김동윤(판사), 김춘집(육군준장), 김상천(육군준장), 김광학(육군소장), 김성익(청와대공보비서관), 김상준(대통령경호관), 김명규(양산군수), 김삼석(곡성부군수), 김봉식(광주경찰서장), 김영봉(순천경찰서장), 김상우(안양교도소부소장), 김상현(보사부 보사국장), 김동수(농촌진흥청국장), 김희운(경제기획원 물가조정관), 김동연(전남대교수), 김주연(전남대교수), 김휘천(농촌진흥청연구관), 김두원(신경외과의원장), 김두희(경북대의대교수), 김광수(대구파티마병원 안과과장), 김정순(서울대보건대학원교수), 김상홍(단국대교수), 김광원(전남대교수), 김동소(효성여대교수), 김준현(조선대공대학장), 김정현(치과대교수), 김상화(치과의원장), 김재영(의학박사), 김윤수(의학박사), 김희남(세브란스병원 이비인후과장), 김봉균(의학박사), 김희균(공학박사), 김칠연(순천수산협동조합이사), 김종호(순천김씨 대종회장), 김철희(국사편찬위원), 김재근(철도청서기관), 김병희(철도청서기관), 김길룡(철도청사무관) 씨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