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 학 방/성씨 연원(김)

함창 김씨(咸昌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함창 김씨(咸昌金氏)는 근원(根源)을 달리하는 두 계통에서 크게 세 파(派)로 분류된다.

첫째로는 김해(金海)의 구지봉(龜旨峰)에서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함께 금합(金盒)에서 태어난 고령가야왕(古寧伽倻王)을 시조(始祖)로 하고, 시조의 발상지(發祥地)인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ㆍ현 함창)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고령가야(古寧伽倻)는 낙동강 일대인 함창(咸昌)ㆍ문경(聞慶)ㆍ가은(加恩) 지방을 영역으로 하여 세워진 나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5가야조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령군조에 그 이름이 보이고 있다. 고령가야(古寧伽倻) 원년(元年)이 신라 유리왕 18년(41년)이며, 그해 3월에 고로왕(古露王) 백진(白珍)이 태조(太祖)왕으로 즉위하여 115년간 재위하였고, 2대 마종왕(摩宗王)은 65년간 재위하였으며, 3대 이현왕(利賢王)은 35년간 재위하다가 신라 제12대 첨해왕 8년(253년) 신라의 침략을 받아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으나 가야연합군으로 격퇴한 후 곧 김해(金海)로 이도(移都)하였다고 하는데, 이때는 이미 주권을 상실하고 금관가야(金官伽倻)로 병합되었는 듯하다.

 

 

▲ 상주군 사벌면 상주박물관에 전시된 100년 전의 傳 고령가야 왕릉과 왕비릉.
 

유적으로는 함창읍내 남쪽 중촌리에 고령가야국의 시조능(始祖陵)이라 전해오는 커다란 고분 2기가 있는데, 고령가야(古寧伽倻) 태조왕릉과 동쪽으로 200m 떨어져 있는 태조왕비능이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무덤인지 이를 입증할 어떠한 기록이나 유물이 전혀 없어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무덤의 이름 앞에 전(傳)을 붙인 것이다.

능(陵)은 ‘동국여지승람’과 ‘함창읍지(咸昌邑誌)’에 모두 “伽倻王陵 縣南二里許”에 있다고 하였고, ‘능지(陵誌)’는 조선 선조(宣祖) 25년(1592년) 능하(陵下)의 본손(本孫)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수(金睡ㆍ1537∼1615)와 함창현감(咸昌縣監) 이국필(李國弼) 등이 왕릉을 보수하던 중 무덤 앞에 묻혀 있던 묘비(墓碑)를 발견하여 가야왕릉(伽倻王陵)임을 확인했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그후 숙종 38년(1712년) 왕명으로 묘비(墓碑)와 석양(石羊) 등의 석물을 마련한 후, 후손들에 의해 여러 차례 묘역이 정비되어 오늘에 이른다.

 

 

▲ 함창 김씨의 시조의 능으로 전하는 고령가야 태조릉(太祖陵). 

 

 

함창 김씨의 시조의 왕비로 전하는 고령가야 태조왕비릉(太祖王妃陵).
 

왕손은 나라가 망한 후 대다수는 가야연맹의 각국으로 이산(離散)하고 혹은 백제(百濟)로 망명했으며, 일부는 고국(故國)과 주변에 은둔하면서 투쟁을 계속하였다. 신라 제14대 유례왕儒禮王) 10년(293년) 신라가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과 사벌국(沙伐國) 유민(流民) 중 항거하는 왕족과 호족(豪族) 80여 가(家)를 영덕(盈德)의 사도성(沙道城)으로 이주시켰다. 그때 추방된 일파(一派)에서 고려 인종(仁宗) 때 출생하여 현달(顯達)한 덕원군(德原君) 종제(宗悌)와 덕양군(德陽君) 종계(宗繼) 형제를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새로이 문호를 열었으며, 그 후 의산군(宜山君) 세순(世詢)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파(派)와 어사공(御使公) 내(匂 혹은 균<鈞>)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파(派)로 분파(分派)되었다.


  

 

  ▲ 함창김씨 직장공파 세보(1세~10세). 클릭!

 

함창 김씨는 중시조 덕원군(德原君) 종제(宗悌)가 중흥의 기반을 닦은 이후 많은 인물이 나와 성세를 누려오다가 단종조(端宗朝) 정난을 고비로 풀이 꺾였다. 요(饒)는 종제(宗悌)의 10세손으로 가정(稼亭) 이곡(李穀ㆍ1298∼1351)의 처남이 되며, 충숙왕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내고 중국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쳤다.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왕을 호종하였고, 난을 평정한 공으로 함녕군(咸寧君)에 봉해졌다. 고려가 망하자 함창의 서쪽 강촌으로 내려가 세칭 강촌(江村)선생이라 하였다.



유양(有暘)은 요(饒)의 다섯째 아들로 하동현감 겸 진주진관 병마절제도위(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지냈다. 그의 일곱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그 후손이 함창ㆍ옥천ㆍ장수ㆍ하동ㆍ문경ㆍ관동 등지에 세거하면서 크게 번성한 중흥의 파조(派祖)다.

종제(宗悌)의 10세손 이음(爾音ㆍ?∼1409)은 자는 백옥(伯玉), 호는 삼로(三路)로 아버지는 용(勇)이다.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우왕 2년(1376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으며, 공양왕 1년(1389년) 지평(持平), 2년 뒤 문하사인(門下舍人)이 되었다. 조선 건국 뒤에는 우사간(右司諫)이 되었고, 태종 5년(1405년)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효행이 뛰어나 정문(旌門)이 세워졌으며, 영주의 삼봉서원(三峯書院)에 배향되었다.
 

 

 

▲ 물암(勿巖) 김융(金隆)이 후진 양성을 위해 1569년에 세운 경북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 두릉서당(杜稜書堂). 현판은 이황의 친필이다.
 

융(隆ㆍ1549∼1594)은 자는 도성(道盛), 호는 물암(勿巖)으로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중용(中庸)ㆍ대학(大學)을 연구하고 산법(算法)과 천문학에도 능통하여 스승의 격찬을 받았다. 선조 25년(1592년) 집현전 참봉(集賢殿參奉)을 역임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상주(喪主)의 몸으로 창의(倡義)하는 격문(檄文)을 지어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에게 토적휼민(討賊恤民)하는 방책(方策)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효종(孝宗) 2년(1651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융(隆)의 4세손 시빈(始繽ㆍ1684∼1729)은 자는 휴백(休伯), 호는 백남(白南)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정휘(鼎輝)이다. 숙종 28년(170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그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필선(弼善)을 거쳐 영조 즉위년(1724년) 장령(掌令)이 되어 영조의 탕평책을 두둔하다 오히려 화근이 되어 명천군수(明川郡守)로 좌천되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이 영남지방으로 확대되자 채성윤(蔡成胤)의 천거로 영남의 요충을 방비하는 데 적합한 인물로 뽑혀 울산부사(蔚山府使)가 되었으며, 그곳에 부임하여 폐습을 과감히 개선하는 등 선정을 베풀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함창 김씨(咸昌金氏)의 다른 한 계통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 인관(仁琯)의 14세손 선(瑄)을 시조로 한다. 선(瑄)은 세조 14년(146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강원감사(江原監司)로서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되었고, 함원군(咸原君ㆍ함원은 지금의 함창)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선대(先代)의 세거지인 함창(咸昌)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