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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부안·부령 김씨(扶安扶寧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자리한 경순왕릉(敬順王陵ㆍ사적 제244호)
 

신라 제56대 경순왕(敬順王) 9년(935년) 국세가 쇠잔함으로 나라를 지탱하기 어려워 경순왕은 고려(高麗)에 양국(讓國)하니 태자(太子)인 일(鎰)은 양국을 반대했으나, 뜻을 이룰 수 없어 어머니 죽방왕후 박씨(竹房王后 朴氏)와 태자비 김씨(太子妃 金氏), 그리고 두 아들과 충신ㆍ의사(義士)ㆍ유민(遺民) 등 수만 명을 거느리고 설악산 근처 인제군 상남면 금부리(金富里) 부근에 신라소국(新羅小國)을 세워 조국광복을 도모하고자, 항려 투쟁을 벌이다가 형세가 불리하자 마의(麻衣ㆍ베옷)를 입고 개골산(皆骨山ㆍ금강산)에 들어가 초식을 하며 은거했으니, 이 분이 곧 마의태자(麻衣太子)로 부안 김씨(扶安金氏)의 시조(始祖)라고 한다.
 

 

그의 5세손 경수(景修)가 고려 문종(文宗ㆍ1067~1082)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춘(春)이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ㆍ부령은 부안의 옛 지명)에 봉해져 부령(扶寧)을 식읍으로 하사받았기에 후손들은 경수(景修)를 1세조로 하고 본관(本貫)을 부령(扶寧)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 후 조선조 태종 16년(1416년)에 부령현(扶寧縣)과 보안현(保安縣)을 합쳐 부안군(扶安郡)이 되자 부안 김씨(扶安金氏)라고 부르게 되었다.

 

경수(景修)의 6세손으로 중시조인 구(坵ㆍ1211~1278)는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로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여 신동이라 불리었으며 12세에 조사시에 합격하였고, 고종 19년(1232년) 22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정원부사록(定遠府司錄)ㆍ제주판관(濟州判官)ㆍ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원종조(元宗祖)에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어 원나라에 대한 외교문서를 맡았으며, 이어 원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다녀왔는데 그때에 ‘북정록(北征錄)’이란 책을 집필하였다.



원종 4년(1263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ㆍ종3품)에 이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ㆍ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등을 역임하고 정당문학(正堂文學)ㆍ이부상(吏部尙書)를 거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으며, 충렬왕 원년(1274년)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통문관(通文館ㆍ역어를 맡아보던 벼슬) 설치를 건의하여 궁내의 연소자(年少者)들에게 한어(漢語)를 배우게 했다. 1263년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인질과 병정, 처녀를 징발하라고 하자 응할 수 없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는 국서를 보냈는데, 원나라 세조가 오히려 양 5백 마리를 보내 포상했다.

원종(元宗) 때 이장용(李藏用)ㆍ유경 등과 함께 신종(神宗)ㆍ희종(熙宗)ㆍ강종(康宗) 3대의 실록(實錄)을 수찬(修撰)하고 충렬왕(忠烈王) 때는 ‘고종실록(高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시문(時文)에 능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나이가 들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부안으로 돌아와 부안읍 선은동에 살며 지금의 부안군 변산면 지지포(현 지서리)에 별장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여생을 보냈다. 시호는 문정(文貞).  

 

 

 

구(坵)의 아들 4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는데, 그 중 장남 여우(汝盂)는 충렬왕(忠烈王)이 세자(世子) 때 원(元)나라에 4년 간 볼모로 가 있을 때 이를 호종한 공(功)으로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올랐고, 차남 종우(宗盂)는 수창궁(壽昌宮) 녹사(綠事)를 거쳐 전교시 부령((典校寺副令)을 지냈으며, 셋째 숙우(叔盂)는 서도판관(西都判官), 막내 승인(承印)은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와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여우(汝盂)의 두 아들 각(恪)과 식(軾)도 평장사(平章事)와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각각 역임하여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다. 

 

▲ 지포(止浦) 김구(金坵)를 주벽으로 아들 김여우(金汝盂) 등을 배향하기 위해 1534년 세워진 도동서원(道東書院)은 1865년 훼철되고 부안읍 도동리에 그 터만 남아 있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계(啓ㆍ1528~1574)가 유명하다. 자는 회숙(晦叔), 호는 운강(雲江)으로 명종 7년(155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헌납(獻納)이 되었으며, 중국어에 능통하여 평안도사로 이전에 이미 두 번이나 중국에 다녀왔기 때문에 1558년 한학교수가 되었다. 선조가 즉위하자 장령이 되었으며, 이듬해 승지가 되었다. 선조 4년(1571년)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동래부사를 지내다 1573년 병조참지가 되었으며, 중국어에 능통하여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로 발탁되었다. 이어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으며, 강관으로서 이황(李滉)ㆍ김인후(金麟厚)ㆍ기대승(奇大升)ㆍ이이(李珥) 등과 도의(道義)를 강론하였고, 문무를 겸비하였다.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제향되었다.

기묘명현(己卯名賢ㆍ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유신들) 석홍(錫弘)의 아들 해(垓)는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호종하여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었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인조(仁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조정랑(禮曹正郞)에 올라 문명(文名)을 떨친 호(灝)와 공조참판(工曹參判) 한익(漢益)이 유명했으며, 익(瀷)은 호남(湖南)의 거유(巨儒)로 일생동안 학문 연구에 전력하여 경서(經書)에 밝았고 문하에서 많은 학자(學者)가 배출되었으며, 익(瀷)의 아들로 ‘서호별곡(西湖別曲)’을 지은 상성(相誠)은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 후창(後滄) 김택술(金澤述)을 제향하기 위해 세워진 전북 정읍군 이평면 창동리 창동서원(滄東書院)과 시문집인 후창집(後滄集) 및 묘.
 

조선 말기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일컬어지는 택술(澤述ㆍ1884~1954)은 자는 종현(鍾賢), 호는 후창(後滄)으로 7세에 여숙(閭塾)에서 수학을 시작하여, 15세경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1900년 전우(田愚)를 사사하여 학문의 대도를 배웠는데, 이때 후창(後滄)이라는 호를 받고 창동처사(滄東處士)라 하였다. 32세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함께 죽었을 때, 3년간 시묘(侍墓)하여 포로고행(圃老高行)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점된 뒤로 망국의 한을 품어오던 중, 1915년 일제의 상사금(賞賜金)을 질척(叱斥)하였고, 또 장자를 왜교(倭校)에 입학시키라고 강요하는 것을 단호히 반대하였다. 1925년에 동문인 오진영(吳震泳)이 스승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의 선생의 뜻을 저버린 죄를 성토하였다. 이 때문에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수차호출을 당하였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였다. 1930년경 늑삭령(勒削令)과 창씨령(創氏令)에 불응하여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1964년에 문인과 유림들이 그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하여 출생지인 정읍군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滄東書院)을 건립하여 향사하였는데, 이 서원은 1975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되었다. 부안 계양사(繼陽祠)에도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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