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 학 방/성씨 연원(김)

광주 김씨(廣州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광주 김씨(廣州金氏)의 시조(始祖) 김녹광(金祿光)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인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7세손으로, 고종 4년(1217년) 부사(副使)를 역임하고 고종 18년(1231년)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고종 23년(1236년) 몽골군이 침입해 왔을 때 상장군(上將軍)으로 출정해 이를 격퇴시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고, 광주(廣州)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삼고 시조의 봉군지(封君地)인 광주(廣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광주 김씨(廣州金氏)는 의성 김씨(義城金氏)에서 분적한 성씨로 파명(派名)을 보면, 2세 굉(鍠), 3세 훤(暄), 4세 남물(南物)과 개물(開物)에 이르면서 분파(分派)되기 시작하였다. 가산파(佳山派)를 비롯하여 고성파(古城派), 광봉파(光峰派), 구봉공파(九峰公派), 누실파(樓室派), 덕산파(德山派), 덕천장파(德川長派), 도리월파(道里月派), 동산파(東山派), 미파(未派), 서면파(西面派), 서송파(西松派), 석천파(石泉派), 선천원파(宣川院派), 성적파(聖蹟派), 수유파(水踰派), 순덕파(順德派), 양무공파(襄武公派), 영변파(寧邊派), 영사파(永思派), 옥산공파(玉山公派), 운엄공파(雲嚴公派), 원평파(元平派), 은헌공파(殷軒公派), 장좌파(長佐派), 장화파(長化派), 정주파(定州派), 중파(中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철산장파(鐵山長派), 해수공파(海叟公派), 호수공파(湖叟公派)로 나뉘어졌다.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에 자리한 시조 김 녹광(金祿光)의 기적비(紀蹟碑)와 파조비.

녹광(祿光)의 손자 훤(暄ㆍ1234∼1305)은 자는 용회(用晦), 호는 둔촌으로 원종 1년(1206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절사(聖節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원(元)나라에 갔을 때, 권신(權臣) 임연(林衍)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왕으로 세웠다. 이에 원제(元帝)는 원나라에 있는 세자(世子) 담(湛ㆍ뒤의 忠烈王)을 동안공(東安公)으로 책봉하고 군사를 보내어 임연(林衍) 일당을 토벌코자 하였으나 훤(暄)은 만일 세자가 공(公)으로 책봉되면 국내 민심이 임연(林衍)에게 기울어진다고 주장, 원제의 계획을 중지하게 하였다. 이듬해 금주방어사(金州防禦使)로 있을 때 밀성(密城)사람 방보(方甫)가 공국병마사(攻國兵馬使)를 자칭, 난을 일으켜 부사(副使) 이이(李頤)를 죽이고 진도(珍島)의 삼별초(三別抄)에 호응하려 할 때 경주판관(慶州判官) 엄수안(嚴守安) 및 안렴사(按廉使) 이숙진(李淑眞)과 함께 이를 토벌하여 난을 평정하였다. 또한 삼별초의 잔적(殘賊)이 경상도에 쳐들어오는 것을 막은 공으로 예부낭중(禮部郞中)이 되고, 뒤에 도호부사(都護府使)가 되었다.


 

충렬왕 1년(1275년) 총랑(摠郎)에서 전라도부 부사(府使)가 되어 부임 도중 청호역(菁好驛)에서 전라도 안찰사(全羅道按察使) 노경륜(盧景綸)이 서울에 보내는 많은 내선(內膳) 중의 태반을 차지한 사선(私膳)을 몰수하여 국고에 바친 일로 양주부사(襄州副使)로 좌천되었다. 뒤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ㆍ밀직학사(密直學士) 등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지냈고, 충선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춘궁시독(春宮侍讀)으로 시종하다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무고를 당하자 자청하여 귀국, 사직하고 뒤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예서(隸書)에 능하였다.


 

훤(暄)의 두 아들 중 맏아들 남물(南物)은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냈으며, 개물(開物)은 충숙왕(忠肅王)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고 시ㆍ글씨ㆍ그림에 모두 능했다.


 

고려 명종(明宗) 때의 문신인 극기(克己)는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못하고 있다가 무신들이 정권다툼을 치열하게 벌이던 때 용만(龍灣ㆍ지금의 義州)의 좌장(佐將)을 거쳐 한림(翰林)이 되었으며,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였다.

뛰어난 문장가로서 특히 농민반란이 계속 일어나던 시대에 핍박받는 농민들의 모습을 친근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또한 농촌문제를 자기 것으로 삼았던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당시 문인들이 그의 시를 평하여 “문장의 표현이 맑고 활달하며 말이 많을수록 내용이 풍부하다.”고 하였으며, 이인로(李仁老)는 그의 문집 ‘김거사집(金居士集)’에서 “참으로 난새나 봉황 같은 인물이었다.”고 하여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고고한 행적을 찬양했다. 고려 말엽에 간행된 ‘삼한시구감’에 의하면 그의 문집은 135권 또는 150권이나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동문선(東文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東國輿地勝覽)’ 등에 시가 많이 남아 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한 차문(次文)과 경연관의 참찬관(參贊官)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된 차무(次武) 형제가 유명했고, 상주목사(尙州牧使) 경보(敬寶)와 강릉부사(江陵府使) 대근(大根),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희증(希曾)이 명문의 대(代)를 이었다.

 

 

  ▲ 1599년 양무공(襄武公) 김태허(金太虛)가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창건하였고, 1866년 후손들이 중건한 경남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 모정마을 박연정(博淵亭ㆍ경남문화재자료 제235호).

특히 조선조에서 가문(家門)을 크게 일으킨 인물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명장 태허(太虛ㆍ1555~1620)를 들 수 있다. 자는 여보(汝寶), 호는 박연정(博淵亭)으로 아버지는 호조참판 희로(希魯)이며, 선조 13년(1580년) 무과(武科)에 급제해 옥포만호(玉浦萬戶)가 되었다. 인품이 충직 순박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밀양성이 함락된 뒤 밀양부사(密陽府使)로 임명되어 분전하였다. 이어 울산군수(蔚山郡守)로 전임되고, 울산성전투에서 도원수 권율(權慄)을 도와 큰 전공을 세워 당상관에 올랐다. 1599년 성주목사를 거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경상좌도 병마절도사ㆍ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ㆍ호위대장(扈衛大將)을 역임하였으며, 그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다. 시호는 양무(襄武).
 

 

 ▲ 경남 밀양시 하남읍 대사리에 자리한 양무공(襄武公) 김태허(金太虛)의 묘.

태허(太虛)의 아들 수겸(守謙)도 아버지를 따라 전공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되고 안동영장(安東營將)ㆍ중추부사(中樞府事) 등을 역임했다.


 

▲ 동래성전투에서 순절한 김기(金琦)를 배향하는 경남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남수정(攬秀亭).

공조참의(工曹參議) 차문(次文)의 증손(曾孫) 기(琦)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판관(判官)으로 의병을 일으켜 동래성(東萊城)전투에서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 및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추증되고 안락서원(安樂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 경남 밀양시 하남읍 대사리에 자리한 영남유학(嶺南儒學)의 중진 김태을(金太乙)의 묘.

한편 태허(太虛)의 사촌 태을(太乙ㆍ1530-1571 )은 자는 여상(汝祥), 호는 구옹(矩翁)으로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임하고 돌아와 학문으로 일생을 마쳐 영남유학(嶺南儒學)의 중진으로 일컬어졌다. 그의 아들 수인(守訒)도 광해군(光海君)의 패륜을 개탄하여 향리로 돌아와 아버지 태을(太乙)의 학문을 이었다.


 

 

 ▲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창단해 항일투쟁을 벌인 김상윤(金相潤)의 기념비. 경남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 소재.

한말(韓末)에 와서도 광주 김씨는 진성(振聲)ㆍ석창(錫昌)ㆍ상윤(相潤)을 비롯한 많은 항일투사를 배출하여 충절의 전통을 이어 가문을 더욱 빛냈다.


 

 

클릭하시면 큰 계보도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