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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울산 김씨(蔚山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울산 김씨(蔚山金氏)의 시조(始祖) 김덕지(金德摯)는 호(號)가 덕지(德摯)이고, 신라 경순왕(敬順王)과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 소생의 둘째 왕자인 김굉(金鍠ㆍ김황<金湟>이라고도 함)이다. 경순왕 9년(935년) 고려 태조(太祖)에게 신라를 양위(讓位)하려 하자 형인 일(鎰ㆍ마의태자)과 함께 이를 극력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과 함께 개골산(皆骨山ㆍ금강산)에 들어갔다고 하며, 후에 해인사(海印寺)에서 승(僧)이 되어 스스로 범공(梵空)이라는 승명(僧名)으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일설에는 덕지(德摯)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아홉째 아들이라고 한다.
 

 

 ▲ 울산 김씨 족보 중에서 시조 김덕지(金德摯)에서 중시조 김온(金穩)까지의 기록. 

‘정사보(丁巳譜)’에 보면 울산 김씨(蔚山金氏)는 신라 말의 왕자 학성군(鶴城君) 덕지(德摯)가 학성(鶴城ㆍ지금의 울산)으로 수관(受貫)함으로써 시조가 되었다고 하였고, ‘정사보(丁巳譜)’ 손록(孫錄)에 시조 덕지(德摯)에 관한 기사 중, “나주김씨세보(羅州金氏世譜)에 처자를 버리고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범공(梵空)이라 스스로 이름을 지었다”고 씌여 있다. 또 그에게는 운발(雲發)이란 아들이 있어 나주군(羅州君)에 봉해졌으며 그 후손이 나주 김씨(羅州金氏)가 되었는데, 혹은 울산 김씨(蔚山金氏)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 울산 김씨 시조 김덕지(金德摯)의 단비(壇碑).
 

그런데 시조 이후 13세손까지는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덕지(德摯)의 14세손 환(環) 이후부터의 소목(昭穆)이 분명하다. 환(環)은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ㆍ영도첨의사(領都僉議事ㆍ정1품)에 이르러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지고 충숙왕(忠肅王) 때 문숙(文肅)이란 시호(諡號)를 하사(下賜)받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울산(蔚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시켜 왔다.

그러나 ‘경신보(庚申譜)’ 범례를 보면 그 뒤 조선개국 공신인 학천공(鶴川公) 온(穩)의 후손들만으로 합보(合譜)한다고 하였다. 울산 김씨(蔚山金氏)의 중시조로 온(穩)을 삼는 까닭이 되겠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환(環)의 아들 계흥(季興)이 고려에서 봉익대부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ㆍ판도사의 으뜸 벼슬)를 역임했고, 계흥(季興)의 아들 황(貺)은 봉상대부(奉常大夫) 전공총랑(典工惣郞)을 지냈다.

 

 

▲ 중시조 김온(金穩)의 신도비(右)와 부인 여흥 민씨 묘 옆에 세워둔 신위단(左).
 

울산 김씨(蔚山金氏)의 중조(中祖)로 대접받는 온(穩)은 황(貺)의 큰 아들이다. 온(穩)은 고려 우왕(禑王)조에 등과하여 종부사 주부(宗簿寺主簿)를 지냈고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요동정별(遼東征伐)에 참여해 급과관(給科官)을 지냈으며, 회군(廻軍) 뒤에는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올랐다. 단양군사(丹陽郡事)와 함안군사(咸安郡事)를 거쳐 회군 때와 개국 때의 공으로 공신이 되었고,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지낸 뒤 조선 정종 2년(1400년)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권(錄券)되었으며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는데 혹은 흥려군(興麗君)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양주목사(楊州牧使) 재임 중 태종의 장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 대신 제3자인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세자로 책봉하자 민무구(閔無咎)ㆍ민무질(閔無疾) 형제 등이 장자에 의한 왕위 상속의 정통성을 주장하다가 옥사를 당하였는데, 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일파로 지목받아 사약을 받아 화(禍)를 입었다. 묘는 양주에 있었다고 하나 위치를 알 수 없고, 후손들이 전남 장성군 북이면 명정리 부인 여흥 민씨 묘 옆에 신위단비(神位壇碑)를 세워 두었다 

 
 

▲ 중시조 김온(金穩)은 묘가 실전되어 그의 부인 여흥 민씨 묘 왼쪽에 신위단을 세워 두었다.

온(穩)의 세 아들 중 큰 아들 달근(達根)은 수의부위(修義副尉)ㆍ좌군부사정(左軍副司正)을 지냈고, 손자 율(律)은 문과(文科)에 급제해 2개 군수(郡守)를 거쳐 사예(司藝)에 이르렀고, 증손자 수로(粹老)는 문종조에 의정부록사(議政府綠事)를 거쳐 중부령(中部令)에 올랐다. 단종손위(端宗遜位)를 맞아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들어가 세상에 나오지 않았으며, 단종 승하 소식을 듣고 그를 애도해 읊은 시가 ‘장릉지(莊陵誌)’에 실려 있다.  

 

 

▲ 김천록 정려비(金天祿旌閭碑)와 1982년 전남 광양읍 유당공원 충혼탑 경내로 이건되어 세워진 정려사적비(右).  


광양파(光陽派)

18세손 응봉(應鳳)이 판시위(判侍衛)를 지냈고, 아들 천록(天祿)은 여흥판관(驪興判官)을 지냈다. 그는 용략(勇略)이 뛰어나 선조 1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여주판관(麗州判官)으로 있으면서 단신으로 군량미 등을 운반, 그 공으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오르고 전남 광양군 옥곡면에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아들 눌손(訥孫)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  김대명(金大鳴)이 명나라 서장관으로 갔을 때 황제로부터 받은 옥룡연(玉龍硯).
 

백암공파(白巖公派) 국로(國老)가 봉화현감(奉化縣監)을 지냈는데, 그는 20세손이다. 아들 경중(輕重)은 장예원 사의(掌隸院司議), 손자 석정(碩楨)은 습독(習讀), 증손 추(樞)는 자여찰방(自如察訪)을 지냈다. 고손인 대명(大鳴)은 선조(宣祖) 3년(1570년) 문과(文科)에 장원하였고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정사(正使) 윤두수(尹斗壽)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했다가 선종(禪宗)으로부터 옥룡연(玉龍硯)과 병풍을 받아왔고, 임진왜란에는 의거 모병하여 진주(晋州) 대각서원(大覺書院)에 배향되었다. 
 

 

▲ 김대명(金大鳴)을 추가 배향한 경남 진주시 소곡면 사곡리 대각서원(大覺書院).
 

좌랑공파(佐郞公派) 19세손 신덕(愼德)이 세종조에 음사(蔭仕)로 장락원 주부(掌樂院主簿)를 거쳐 단종 때 송화현감(松禾縣監)에 재수되었다. 단종손위(端宗遜位)에 따라 벼슬을 버렸고, 승하 소식을 접하자 통곡하여 기절했다고 하며, 아들 륜(輪)은 전연사 직장(典涓寺直長)을 지냈다. 23세손 성길(成吉)은 좌랑공파(佐郞公派)의 인물 중 뛰어난 분으로 호(號)를 맥로(麥老)라 했다. 서하(西河)의 유풍(遺風)을 입고 이퇴계(李退溪)의 문인(門人)으로 선조조에 진후훈도(珍厚訓導)를 지냈으며, 광해군 때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 하서(河西) 김인후 영정과 필암서원에 소장된 전적들.
 

울산 김씨(蔚山金氏)의 역대 인물 중 널리 알려진 분은 인후(麟厚ㆍ1510~1560)다. 그는 중조(中祖) 온(穩)의 둘째 아들 달원(達源)의 4세손으로 호(號)는 담재(湛齋), 세칭 하서(河西)다. 조선 전기의 명신(名臣)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李滉)과 함께 학문을 닦고, 중종 35년(154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家讀書ㆍ휴가를 받아 집에서 공부함)를 한 후 박사(博士)ㆍ설서(說書)를 거쳐 부수찬(剖修撰)에 올랐으나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령(玉果縣令)으로 나갔다.

인종 1년(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장성(長城)에 돌아가 성리학에 몰두했고, 여러 차례 교리(校理)에 제수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의학(醫學)ㆍ산학(算學)ㆍ율력(律曆) 등에도 정통했고 시문을 잘 지었으며, 글씨는 행(行)ㆍ초(草)에 뛰어났다. 문묘(文廟)를 비롯 장성(長城)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南原)의 노봉서원(露峰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정사보(丁巳譜)’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되었으며, 문정(文靖)이라 시호(諡號)되었다고 하였다. 그 뒤 정조 때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고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문정(文正)이라 개시(改諡)되었다고 하였다.  

 

 

▲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제향하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필암서원(筆巖書院). 

 
 

▲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에 자리한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의 묘.

인후(麟厚)의 손자 남중(南重)은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는데, 선조조에 광국원종훈(光國原從勳)이 되었다. 그의 후손으로 31세손인 직휴(直休)는 정조조에 음사(蔭仕)로 덕산(德山)ㆍ옥천(沃川)ㆍ진산군수(珍山郡守)를 지냈다.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달기(達技)가 수의부위(修義副尉) 우군부사정(右軍副司正)을 지냈고, 아들 처리(處离)는 세종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으나 단종손위(端宗遜位)를 보고 고향에 돌아갔다. 손자 응두(應斗)는 부응교(副應敎)를 지냈으며, 중종 17년(1522년) 문관에 올라 고부(古阜)ㆍ밀양(密陽)ㆍ순천군수(順天郡守)를 거쳐 삼도순무사(三道巡撫使)를 지내기도 했다. 아들 백내(百匂) 역시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 직제학(直提學)ㆍ대사간(大司諫)ㆍ평안감사(平安監司) 등을 역임했고, 둘째 아들 극추(克秋)는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

백화옹파(百花翁派) 24세손인 광제(光霽)는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냈고, 손자 광설(匡說)은 서산부사(瑞山府使), 광설(匡卨)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28세손인 그의 손자 휘도(輝道)는 부산진수군병마첨절제사(釜山鎭水軍兵馬僉節制使)를 지냈다.

용산공파(龍山公派) 23세손 극제(克悌)는 무과에 올라 보성(寶城)ㆍ해남(海南)ㆍ개천(介川) 등 군수(郡守)를 지냈고, 특히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졌다.

죽청공파(竹靑公派) 국형(國亨)은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을 지냈고, 아들 극련(克鍊)은 통덕랑(通德郞)이었다.

복룡파(伏龍派) 통덕랑(通德郞) 도항(道恒)은 26세손으로 손자 유정(有鼎), 현손 천택(千澤)도 모두 통덕랑(通德郞)이었다.

거마산파(巨馬山派) 23세손 숙명(淑命)이 무공랑(武功郞)을 지냈는데,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장생(長生)에 호응, 창의(倡義)하기도 하였다.

임천공파(林川公派) 25세손 천구(天球)가 세칭 임천거사(林天居士)라고 한 데에서 파가 이루어졌다. 그 후손으로 문택(文澤)과 아들 의정(義楨)이 학행과 효우(孝友)로 사림(士林) 사이에 추중(推重)되었다고 한다. 

 

 

▲ (右)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좌)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근대 인물로는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한  성수(性洙)와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병로(炳魯)를 들 수 있다. 성수(性洙ㆍ1891~1955)는 자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으로 인후(仁厚)의 13대손이다. 호남의 거부였던 경중(暻中)의 넷째아들로, 3세에 큰아버지인 기중(棋中)의 양자가 되었다. 1920년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ㆍ고려대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한국민주당 최고위원으로 1950년 부통령에 취임했으나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독재를 반대하여 이듬해 사임하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병로(炳魯ㆍ1887~1964)는 호는 가인(街人)으로 어려서 전우(田愚)에게 한학을 배우고 선교사에게 산술과 서양사를 배웠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동지들을 모아 순칭읍 일인보청(日人輔佐廳)을 습격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한민당(韓民黨) 창설에 참여, 중앙감찰위원장(中央監察委員長)이 되고, 1948년 초대 대법원장이 되었다. 1963년 민정당 대표최고위원ㆍ국민의 당 대표최고위원 등을 역임,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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