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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사성 김해 김씨(賜姓金海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시조(始祖) 김충선(金忠善)의 자(字)는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이다. 본래 일본인으로 본명은 사야가(沙也可)로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22살의 나이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좌선봉장(左先鋒將)으로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부산 동래(東萊)에 상륙하였으나, 평소 우리나라의 의관문물(衣冠文物)과 예의풍속(禮儀風俗)을 흠모하여 향화지의(向化之意)를 게방(揭枋)하였다.

“임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저는 섬오랑캐의 천한 사람이요 바닷가의 보잘것 없는 사나이입니다.… 사람이 사나이로서 태어난 것은 다행한 일이나 불행하게도 문화의 땅에 태어나지 못하고 오랑캐 나라에 나서 끝내 오랑캐로 죽게 된다면 어찌 영웅의 한되는 일이 아니랴 하고 때로는 눈물짓기도 하고 때로는 침식을 잊고 번민하기도 했습니다.”

 

 

▲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 영정과 모하당집(慕夏堂集).
 

사야가(沙也可)가 귀순하기를 청한 편지의 일부다. 그는 곧바로 부하들에게 약탈을 금하는 군령을 내리고 이틀 뒤 침략의 뜻이 없음을 알리는 ‘효유서’(曉諭書)를 백성들에게 돌린다.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은 이 글을 보고 안심하고 직업을 지킬 것이며 절대로 동요하거나 흩어지지 말라. 지금 나는 비록 선봉장이지만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 마음으로 맹세한 바 있었으니 그것은 너희 나라를 치지 않을 것과 너희들을 괴롭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까닭은 내 일찌기 조선이 예의의 나라라는 것을 듣고 오랫동안 조선의 문물을 사모하면서… 한결같은 나의 사모와 동경의 정은 잠시도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에게 항복한 뒤 귀부(歸附)한 그는 절도사(節度使) 이덕형(李德馨),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등과 협의 후 도 각진에 조총(鳥銃)과 도약지법(搗藥之法)을 군관(軍官) 일본인 김계수ㆍ김계충 등으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니 아군도 정예(精銳) 무기화하였다. 그후 경주 울산전투에서 적을 대파하게 되니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장군과 어사 한준겸(韓俊謙)의 주청(奏請)으로 성명(姓名)이 하사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고, 의관제복(衣冠制服)을 하사하였다.
   

 

▲ 녹동서원 뒷산으로 20여 분 걸으면 그의 묘지가 나온다.
 

이때 하사받은 성(姓)이 김씨(金氏)요, 관향(貫鄕)은 김해(金海)로, 이름은 충선(忠善)이다. 그후 북쪽 변방에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자 방어임무를 자청하여, 선조 35년(1605년)에 10년 동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 광해군(光海君)이 친히 후원(後苑)에 크게 잔치를 베풀고 정헌대부(正憲大夫)의 벼슬을 내리고 교지(敎旨)에 어필로 ‘자원잉방기심가가(自願仍防其心可嘉)’ 8자의 글을 하사하였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에는 이괄의 부장(副將) 서아지(徐牙之)를 포참(捕斬)한 공으로 대구(大丘)ㆍ경산(慶山) 등 7읍의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守禦廳)에 반납하여 둔전(屯田)을 만들었다.

“어영청에서 말씀 올리기를, 산행포수(山行砲手) 17명과 항왜군인(降倭軍人) 25명을 지방진으로부터 데려와 본청에 두기로 한 일은 이미 재가를 받았습니다. 인솔한 대장은 항왜영장(降倭領將) 김충선인데 그 사람됨으로 말하면 담력과 용력이 뛰어났으나 성질은 매우 공손하고 근신합니다. 지난번 이괄의 반란 때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달아난 괄의 부장 서아지를 뒤쫓아가 잡는 일을 경상감사가 김충선에게 맡겼더니 아무런 수고로움 없이 능히 이를 처치했습니다. 진실로 가상한 일입니다.”(‘승정원일기’ 인조 6년 4월23일)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소명(召命)을 기다리지 않고 광주(廣州 쌍영(雙領) 싸움에 출전하여 적 5백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그후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구하고자 달려갔으나 호병(胡兵)과 이미 화의(和議)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대구(大丘ㆍ大邱)의 우록촌(友鹿村)으로 돌아와 인조 20년(1642년) 9월 30일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가훈(家訓)을 지어 유계(遺戒)하였으며, 자손들에게 충효정신과 예의법도를 당부하였다. 

 

 

▲ 모하당(慕夏堂) 김충선(金忠善)을 추모하기 위해 정조 13년(1789)에 건립한 녹동서원(鹿東書院)과 전적들.

 

1643년에 삼정산(三頂山) 현 유택(幽宅)으로 장례를 치루었으며, 현종 14년(1669년) 군수(郡守) 유비(兪秘)가 묘갈문(墓碣文)을 지어 그 공을 찬양하였고, 1752년에 삼남유생(三南儒生)들이 일등공신으로 상소하였으나 때 마침 국상(國喪)으로 인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조 18년(1794년) 10월에 녹동사(鹿洞祠)를 세워 그 이듬해에 봉안하였다. 정조 22년(1798년)에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을 출판하였으며, 고종 8년(1871년)에 서원철폐령으로 녹동사鹿洞祠)는 철폐당하였다.

 

이후 7년여를 지나 경상도 사림(士林)들이 상소하여 1879년 도장(道狀)에 대한 비답(批答)이 내리게 되었으며, 1892년 8월 29일 이조(吏曹)에 다시 보고가 되고 8월 30일에 고종 황제가 부조지전(不祧之典)의 윤허가 내려 병조판서에 증직(贈職)과 성현(聖賢)의 대우를 하게 되었다. 서원철폐령이 시행된 이후 정식으로 봉현(奉賢)된 사실은 처음으로 전국 47현(賢)에서 1현(賢)이 추가되어 48현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하당 김선생(慕夏堂金先生)으로 유림향사(儒林享祠)를 봉(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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