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보 학 방/성씨 연원(김)

도강 김씨(道康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도강 김씨(道康金氏)의 시조 김희조(金希祖ㆍ?~1199)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이다. 고려 중엽 문과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ㆍ상서도성에 속하였던 정2품 벼슬)ㆍ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도강백(道康伯)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삼고 도강(道康)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시조 이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그 계대(系代)를 확실히 밝히지 못하고 있으며, 다만 4명의 후손들에 의해 4개파를 형성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원경(原卿)을 파조(派祖)로 하는 태인사정공파(泰仁司正公派), 문하평리시직(門下評理侍直)ㆍ사재감정(司宰監正) 을경(乙卿)을 파조로 하는 강진시직공파(康津侍直公派), 전공조사(典工曹事) 일(鎰)을 파조로 하는 강진조사공파(康津曹事公派), 팔도병사(八道兵使) 을상(乙祥)을 파조로 하는 인천병사공파(仁川兵使公派) 등으로 분파되어 각각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도강 김씨의 시조 김희조(金希祖)와 김익ㆍ김세보 3위를 제향하기 위해 1971년 강진군 도암면 덕서리에 세워진 둔덕사(屯德祠).
 

도강(道康)은 오늘날 전남 강진군의 북부에 있던 고려 때 고을 이름으로, 조선시대에 들어와 남쪽 고을 탐진(耽津)과 합해 강진군(康津郡)이 되었기 때문에 도강 김씨(道康金氏)를 강진 김씨(康津金氏)라고도 한다.

한편 풍덕 김씨(豊德金氏)는 고려 우왕 8년(1382년) 문과에 급제해 선공서령(繕工署令)ㆍ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등을 지내고 도강군(道康君)에 봉해진 시조 김자앙(金子盎)이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후손으로 전하나 확실한 세계(世系)를 상고할 수 없으며, 강필동(姜必東)이 편저한 ‘만성보(萬姓譜)’에는 도강 김씨(道康金氏) 시조 김희조(金希祖)의 7세손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 역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 (上)태조 4년(1395년) 김회련(金懷鍊)에게 내린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ㆍ보물 제437호). (下)태조 4년 및 6년 김회련(金懷鍊)에게 내린 왕지(王旨ㆍ보물 제438호).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회련(懷鍊)은 고려조에서 문하평리판이조사(門下評理判吏曹事)를 역임한 주(柱)의 외아들로 태어나 1392년 배극렴(裵克廉)ㆍ김사형(金士衡)ㆍ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받들어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으며, 그해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 1395년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고 공주목사를 거쳐, 1398년 해주목사를 지냈다. 태종 10년(1401년) 검교한성판윤 겸 서운관판사(檢校漢城判尹兼書雲館判事)가 되었으며, 죽은 뒤 이조판서 겸 경연(吏曹判書兼經筵)ㆍ춘추관·성균관지사(春秋館成均館知事)에 추증되었다. 전라도 태인(泰仁)의 도봉사(道峰祠)에 향사되었는데, 그에게 내린 공신녹권(보물 제437호)과 왕지(王旨: 보물 제438호)가 보존되어 있다. 시호 충민(忠敏).



약묵(若默ㆍ1500~1558)은 자는 태용(太容), 호는 성재(誠齋)로 참봉 희석(希奭)의 아들이며,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동서간이다. 중종 35년(154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친 뒤 명종 7년(1552년) 한산군수(韓山郡守)로 나갔을 때 검소ㆍ근면한 관리로서 표창을 받았다. 이듬해 다시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하여 표창을 받았으며, 그뒤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고 정3품에 올라 양주목사(楊州牧使)ㆍ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냈다. 학문이 뛰어났으며, 전라도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었다

 
 

▲ 김약묵(金若默)을 추가 배향(配享)한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무성서원(武城書院ㆍ사적 제166호).

그 외 학자로 이름난 후진(後進)은 일찍이 이항(李恒)의 문하에서 경서(經書)와 역서(易書)를 연구하고 임진왜란 때 이귀(李貴)가 장성(長城)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키자 이에 참가하였으며, 그후 많은 군량(軍糧)을 바쳤다. 한편 도언(道彦)은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ㆍ병조좌랑(兵曹佐郞) 등을 지내고 인조 2년(1624년)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 평정하여 문무공신일등(文武功臣一等)에 녹훈되었다.

한말(韓末)의 우국지사 영상(永相ㆍ1836∼1911)은 자는 승여(昇如), 호는 춘우정(春雨亭)으로 학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고종 32년(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민비(閔妃)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국가의 운명을 한탄하여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 후 일본이 주는 노인은사금(老人恩賜金)을 거절하고 독립을 역설하던 중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감옥에서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 (上)동학농민운동 주동자의 한 사람인 김개남(金開南)과 전북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마을에 자리한 생가터. (下)생가터 근처에 자리한  김개남(金開南)의 가묘(假墓).
 

개남(開南ㆍ1853∼1895)은 초명은 영주(永疇), 자는 기선(箕先)ㆍ기범(箕範)으로 1890년경 동학에 입도, 다음해 접주(接主)가 되었다. 고부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호남지방 접주들과 각별한 친교를 맺어, 1892년 삼례(參禮)에서 열린 탐관오리 제거와 교조신원(敎祖伸寃)을 위한 전국 교도들의 시위운동 때 호남접주들과 더불어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신뢰받는 동학지도자가 되었다. 1893년 보은(報恩)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斥倭洋)을 위한 교도들의 민중시위 때, 호남교도들을 이끌고 참가하여 태인포(泰仁包)라는 포명을 받고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전봉준이 고부민란을 일으키자 백산(白山)에 동학운동본부로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설치, 전봉준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총관령(總管領)의 직책을 맡았다.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이어서 전주화약(全州和約) 뒤 남원(南原)ㆍ나주(羅州)ㆍ운봉(雲峰) 등에서 집강소 설치에 응하지 않자 30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단시일에 점령, 전라좌도를 관할하면서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그 해 10월, 1만 병력을 동원하여 서울로 출정하는 도중 새로 부임하는 남원부사 이용헌(李龍憲)과 고부군수 양필환(梁弼煥)을 체포ㆍ참수하였다. 계속하여 진잠현(鎭岑縣)을 점령하고 신탄진(新灘津)을 거쳐 청주(淸州)를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1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태인으로 돌아왔으나 체포되어 전주장대(全州杖臺)에서 참수당하고, 수급은 서울로 이송되어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수(梟首)된 뒤 다시 전주로 보내져 효시(梟示)되었다.


 
클릭하시면 큰 계보도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