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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수원 김씨(水原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수원김씨갑술대동보(水原金氏甲戌大同譜)’에 의하면 수원 김씨(水原金氏)의 시조(始祖) 품언(禀言)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4대손으로 아버지는 염(濂)이다. 염(濂)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품언(禀言)은 수원 김씨의 시조가 되고, 둘째 아들 심언(審言)은 영광 김씨(靈光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 수원 김씨의 시조 김품언(金禀言)의 4대조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영단(靈壇).

품언(禀言)은 고려 제8대 현종(顯宗) 때 거란(契丹)이 침입하자 도원수(都元帥) 강민첨(姜民瞻)과 함께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충순적덕정난공신(忠順積德靖難功臣)에 책록되어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올라 수성군(隨城君ㆍ수성은 수원의 고호)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수원(水原)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인동 김씨(仁同金氏)ㆍ용성 김씨(龍城金氏)ㆍ용담 김씨(龍潭金氏)ㆍ서흥 김씨(瑞興金氏))ㆍ한남 김씨(漢南金氏)ㆍ용궁 김씨(龍宮金氏)ㆍ풍산 김씨(豊山金氏)ㆍ김녕 김씨(金寧金氏), 평해 김씨(平海金氏) 등의 시조는 모두가 품언(禀言)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 수원 김씨의 족보인 (左)을축보(乙丑譜ㆍ1925년), (上)계사보(癸巳譜ㆍ1773년), (下)경진보(庚辰譜ㆍ1820년).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품언(稟言)의 맏아들 이(夷)가 태자소보(太子少保)를 역임했고, 차남 순보(順輔)는 중서령(中書令)에 올라 명성을 떨쳤으며, 손자 세익(世翊)은 중추원 좌승선(中樞院左承宣)을 역임하여 공부시랑(工部侍郞)을 지낸 인순(仁順)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세익(世翊)의 증손(曾孫) 사경(仕境)은 순(純)과 함께 중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가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계(桂)의 아들 한진(漢眞)은 충목왕(忠穆王) 1년(1345년)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한 공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고 이어 공민왕 2년(1353년) 순성보절공신(純誠保節功臣)에 올라 수성군(隋城君)에 봉해졌다. 그후 개성윤(開城尹)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치사했으나,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한산(漢山)의 유의동(柳依洞)으로 은거했다.

 

 

▲ 충남 예산군 신암면 오산리에 자리한 수성군(隋城君) 김한진(金漢眞)의 아들 김상려(金尙旅)의 묘.
 

조선조에 와서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상려(尙旅 : 한진의 아들)와 판서(判書) 복룡(福龍)이 유명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상일(尙鎰)은 판관(判官)을 지낸 응생(應生), 부총관(副摠管) 이준(以俊), 부호군(副護軍) 신조(愼祖)ㆍ덕해(德海)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 성종 9년(1478년) 남계(南溪) 김정(金淀)에게 인동현감(仁同縣監)을 명한 교지.
 

한진(漢眞)의 증손인 정(淀ㆍ1426∼1493)은 호가 남계(南溪)로 포항 지역에 들어와 정착한 예중(禮仲)의 아들이다. 세조 2년(145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였고, 성종 6년(1475년) 사포서 사포(司圃署司圃)를 거쳐 성종 9년(1478년) 인동현감(仁同縣監)·, 성종 24년(1493)에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일부 문헌에 의하면 정(淀)이 인동 김씨(仁同金氏)의 시조로 되어 있는데, 그가 인동현감(仁同縣監)을 역임한 연유에서 그의 후손이 본관을 인동(仁同)으로 하게 된 것으로 보이나 수원김씨세보에도 그의 후손들이 영일파(迎日派)의 남계공파(南溪公派ㆍ교리공파)로 기록되어 있다.


 

 

 ▲ 수월재(水月齋) 김견룡(金見龍)이 임진왜란에 참전한 후 기록한 ‘용사일기(龍蛇日記)’.


 

견룡(見龍ㆍ1550∼1620)은 자는 덕보(德普), 호는 월동(月洞)ㆍ수월재(水月齋)로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주성(慶州城)이 함락되자, 동생 원룡(元龍), 사촌 우호(宇灝)ㆍ우결(宇潔)ㆍ우정(宇淨) 등과 함께 안강전투(安康戰鬪)에 참전하여 영천성(永川城)과 경주성의 수복에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 두모포만호(豆毛浦萬戶)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만 힘썼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1620년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추증(追贈)되었으며, 임진왜란 참전기인 ‘용사일기(龍蛇日記)’가 전한다.

 

 

▲ 김팔음(金八音)의 무과 급제 홍패(1676년)와 1693년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명한 교지.
 

그밖의 인물로는 한진(漢眞)의 후손으로 숙종 2년(1676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ㆍ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역임한 팔음(八音ㆍ1651∼1729)과 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문명(文名)을 날렸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고향 의주(義州)로 내려가 후진양성에 일생을 바친 학자(學者) 구명(九鳴)이 가문을 더욱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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