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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학 방/성씨 연원(김)

상산·상주 김씨(商山·尙州金氏)의 연원

by 연송 김환수 2014. 7. 25.

상산·상주 김씨(商山·尙州金氏)의 연원

상산 김씨(商山金氏)의 시조(始祖) 김수(金需)는 나말려초(羅末麗初)에 태어나 고려조(高麗朝)에서 보윤(甫尹ㆍ지방관직)의 벼슬을 역임했다. 1710년 간행된 상산김씨족보(庚寅譜)에는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으나 상고(詳考)할 수 없다.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전하며, 누대(累代)에 걸쳐 상산(商山ㆍ상주의 옛 지명)에 세거(世居)하면서 그의 손자(孫子) 식(湜)과 증손(曾孫) 희일(希逸)은 집사성(執事省ㆍ국가의 기밀과 서정을 관장하던 최고의 행정기관)의 으뜸 벼슬인 시중(寺中)을 지냈다.

 

▲ 상주시 개운1동에 자리한 판사(判事)를 지낸 10세 김녹(金祿)의 묘.

그 후 현손(玄孫) 비궁(匪躬)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어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해졌고, 9세 일(鎰)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상락군(上洛軍上ㆍ상락은 상주)에 봉해졌으며, 10세 녹(祿)은 판사(判事)를 지내고 보정공신(保定功臣) 삼한삼중대광문하시중(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에 올라 상성군(商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수(需)를 시조로 삼고 상산(商山)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보윤(甫尹)을 지낸 김수(金需)의 후손과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지낸 김조(金祚)의 후손으로 나누어지는데, 김조(金祚)의 딸이 김수(金需)의 8세손 일(鎰)의 부인인 것으로 보아 본관은 같지만 다른 일족일 것으로 생각된다. 김수 계통은 상산군파(商山君派)ㆍ낙성군파(洛城君派)ㆍ문충공파(文忠公派)ㆍ상서공파(尙書公派)ㆍ전서공파(典書公派)ㆍ제학공파(提學公派)ㆍ내원령공파(內苑令公派)ㆍ영중추공파(領中樞公派)ㆍ통사공파(統使公派)ㆍ시랑공파(侍郞公派)ㆍ상원공파(祥原公派)로 나뉘어지고, 김조 계통은 상주파(尙州派)ㆍ선산파(善山派)로 각각 나뉘어졌다.

▲ 상산 김씨 전체를 망라한 최초의 대동보(大同譜)로 1763년 인쇄본으로 간행된 계미보(癸未譜).

상성군(商城君) 녹(祿)의 맏아들 득배(得培ㆍ1312∼1362 )는 자는 국자(國滋), 호는 난계(蘭溪)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문충공파(文忠公派)의 파조가 된다.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이 되고, 고려 공민왕 8년(1359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의주(義州)ㆍ정주(靜州)ㆍ인주(麟州) 등이 함락되자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로서 도원수 이암, 부원수 경천흥(慶千興)과 함께 이를 방어했으나 실패하였다. 다시 안우(安祐)ㆍ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분전하여 서경을 탈환했고, 그 공으로 수충보절공신(輸忠保節功臣)에 책록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 지공거가 되어 진사를 뽑고, 정몽주(鄭夢周)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공민왕 10년(1361년) 다시 20만의 홍건적이 침입하자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가 되어 방어했으나 안주(安州)에서 대패, 개경(開京)까지 함락되었다. 이듬해 안우ㆍ이방실ㆍ최영(崔瑩)ㆍ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로 적의 괴수 사유(沙劉)ㆍ관선생(關先生) 등을 베고, 적 10여 만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고 난이 평정되었다.
 

▲ (상)상주시 낙양동 대로변에 자리한 문충공(文忠公) 김득배(金得培)의 유허비와 그를 배향한 상주시 외남면 옥성리 옥성서원. (하)묘가 실전되어 경북 금릉군 어모면 여남에 세워진 단소.

이 때 통병관 정세운과 권력을 다투던 평장사(平章事) 김용(金鏞)이 복주(안동)로 파천해 있던 공민왕을 모시고 있다가 공을 비롯한 여러 장수의 전공을 시기하여 먼저 왕명이라 사칭하여 안우(安祐)ㆍ이방실(李芳實)ㆍ김득배에게 정세운(鄭世雲)을 살해할 것을 명하자, 이들은 그것을 믿고 정세운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죄를 입어 안우(安祐)ㆍ이방실(李芳實)이 살해되었으며, 그도 처벌을 면할 수 없게 되어 도망하여 문경 산양현(山陽縣)에 숨었으나 김용(金鏞)이 보낸 사람에게 잡혀 상주(尙州)에서 효수(梟首)되었다.

공의 문하생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가 왕에게 주청하여 그의 시신을 거두고 제문과 만시를 지어 상주 남쪽에 예장하였는데, 묘는 고려의 쇠망과 함께 실전되었다. 공양왕 4년(1392년) 그의 누명이 벗겨지고, 그 자손도 관직에 오르게 되었고, 경기도 파주군 마전에 있는 숭의전과 상주 옥성서원에 배향되었다.?

▲ 상주시 개운1동에 자리한 낙성군(洛城君) 김선치(金先致)의 묘와 신도비.


득배(得培)의 아우 선치(先致ㆍ1318∼1398)는 낭장으로 전라도 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 유탁(柳濯)을 따라 왜구를 격퇴했으며, 그 뒤 호부낭중(戶部郎中)이 되었다. 1363년에 홍건적을 평정시킨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어 그 형상이 벽상(壁上)에 그려졌고, 토지와 노비가 하사되었다. 뒤이어 이부시랑이 되어 양광도(楊廣道)를 안찰(按察)하였다. 그 때 재상이 남경(南京)의 궁궐을 헐어 백악(白岳)으로 옮기려 하자, 왕에게 “전날 남경을 지을 때 사람과 짐승이 피곤했는데, 이제 다시 헐면 백성들이 실망할 것입니다.”라고 의견을 밝혀 왕이 놀라 그 일을 중지시켰다.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1365년에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고, 그 뒤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이 때 오래 해결하지 못한 강도사건과 그 연루자 1백여 명에 대해 처결을 내렸다. 이 후 상성군(尙城君)에 봉해지고,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이 되었다.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라 전라도 도순문사가 되었고, 1373년에 삭방도 도순문사(朔方道都巡問使)가 되었다. 한편 우왕 초에 투항해온 왜구의 무리를 유인해 죽이려다가 실패한 사건으로 수졸(戍卒ㆍ북방 변경에서 수자리하는 군사)에 편입되기도 하였다. 우왕 4년(1378년)에 낙성군(洛城君)에 봉해지고 추충보절찬화공신(推忠保節贊化功臣)이 되었으며, 1382년에 은퇴해 상주로 내려갔다


▲이성계를 도와 개국원종공신에 서훈된 김운보(金云寶)의 묘.

한편 원종(元宗)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충(忠)은 문하시중(門下寺中) 치원(致遠)의 손자로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충렬왕 7년(1281년) 일본(日本)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졌다.

충(忠)의 증손(曾孫) 운보(云寶)와 신보(臣寶) 형제는 공민왕2년(1353년) 왜적(倭賊)이 침입했을 때와 흥건적의 난(亂) 때 함께 공(功)을 세워 판전의시사(判典義寺事)와 봉순대부(奉順大夫)에 각각 올랐다.

특히 운보(云寶)는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서훈되고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겸 사복시(司僕寺)에 이르렀으나, 아우 신보(臣寶)는 벼슬을 버리고 전남 영광(靈光)으로 낙향하여 불사이군(不事二軍)의 충절을 지켰다.

▲ 묘가 실전된 통사공파(統使公派)의 파조 김신보(金臣寶)의 단소(壇所).

운보(金鏞)의 아들 덕생(德生)은 태조(太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우왕 6년(1380년) 전옥서영(典獄署令)이 되었다. 방원(芳遠ㆍ뒤에 태종)의 잠저(潛邸ㆍ왕이 임금으로 오르기 전의 위치를 호칭하는 말) 때 송거신(宋居信)과 함께 방원을 보좌하였으며, 특히 말을 잘 타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낭장(郎將)으로 재직시 방원(芳遠ㆍ후에 태종이 됨)이 사냥을 하다가 표범의 습격을 받아 신변이 위험했을 때 단 1대의 화살로 표범을 쏘아 죽이고 그를 구해내 그 공으로 말 1필을 하사(下賜)받았다. 정종 2년(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는 방원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이듬해 태종이 즉위하자 추충분의익대공신(樞忠奮義翊戴功臣)에 추봉되었다. 태종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사후인 세종 18년(1436년) 가정대부(嘉靖大夫)에, 1445년에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추증(追贈)되었다.

▲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추증된 김덕생(金德生)을 제향하는 전남 함평군 나산면 이문리 증산사(甑山祠).

우생(佑生ㆍ1372∼1457)은 자는 문숙(文淑), 호는 양산(楊山)으로 17세 때 최영(崔瑩)이 요동(遼東) 정벌을 강행하려 하자 이성계(李成桂)에게 글을 보내 그 불가함을 논하였다. 정몽주(鄭夢周)의 문하로 들어가 수학하였고, 사서구경(四書九經)에 통달하였다. 태조 1년(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었고, 태종 때 형 덕생(德生)이 억울하게 처형되자 사임하였다.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과 친분이 있었다. 단종 2년(1454년) 승지(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세조 2년(1456년) 사육신(死六臣) 사건 때는 정인지(鄭麟趾)의 도움으로 화를 면했다. 1457년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 양산(楊山) 김우생(金佑生)을 제향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 화암사(花巖祠).

사우(師禹ㆍ1415∼1464)는 자는 근보(勤父)로 무과에 급제하여 주로 육진(六鎭) 지방의 무관으로 지내다가 단종 2년(1454년) 첨지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세조 4년(1458년) 행회령진병마절제사(行會寧鎭兵馬節制使)로서 적진에 들어가 야인(野人) 20여 명을 혼자서 무찔렀다. 세조 6년(1460년)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있을 때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모련위(毛憐衛)의 야인을 토벌하고 돌아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었고, 이듬해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ㆍ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이때 처남인 이극배(李克培)가 이조판서가 됨으로서 함께 문무(文武)의 인사권을 장악하게 되자 조정 신하간에 물의가 일어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나간 뒤 병으로 물러났다. 시호는 장절(莊節).


귀영(貴榮ㆍ1519∼1593)은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으로 중종 때 진사를 거쳐 명종 2년(1547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홍문관ㆍ성균관의 요직을 두루 거쳐 1555년 김홍도(金弘度)ㆍ유순선(柳順善)과 사가독서하였고, 그 해 이조좌랑ㆍ정랑을 지낸 뒤 사헌부 집의ㆍ홍문관 전한ㆍ승정원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이어 우부승지ㆍ이조참의ㆍ한성부윤ㆍ춘천부사ㆍ대사간ㆍ대사헌ㆍ부제학 등을 지냈으며, 선조 14년(1581년) 우의정에 이르러 평난공신(平難功臣)의 호를 받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피난했다가, 뒤이어 피난온 순화군(順和君)ㆍ황정욱(黃廷彧)과 합류하여 회령(會寧)에 머물렀다. 그 때 민폐를 많이 끼쳐 인심을 잃은 회령아전 국경인(鞠景仁)의 반역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두 왕자 및 황정욱 등과 함께 넘겨졌다. 그는 적장 가토의 청으로 화의를 성립시키고자 선조가 있는 의주(義州)로 갔으나, 선조는 그가 죽지 않고 화의를 성립시켜 왔음에 노하여 고문하려 하였다. 다행히 유성룡(柳成龍)의 간청으로 고문은 받지 않았으나, 희천(熙川)으로 귀양가던 중에 죽었다.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에 자리한 충정공(忠貞公) 김덕함(金德?)의 신도비.

덕함(德?ㆍ1562∼1636)은 자는 경화(景和), 호는 성옹(醒翁)으로 선조 22년(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연안(延安)에서 초토사 이정암을 도왔으며, 1594년 군공청(軍攻廳)이 세워지자 도청(都廳)이 되어 공을 세웠다. 그 뒤에도 여러 내외관직을 거쳐 광해군 때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이르렀다. 그러나 광해군 9년(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이 일자 이항복(李恒福)ㆍ정홍익(鄭弘翼)의 의견을 좇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 1622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육조의 참의와 승지를 두루 지내고 부제학ㆍ대사성ㆍ대사간ㆍ여주목사(驪州牧使)ㆍ춘천부사(春川府使)를 거쳐 인조 14년(1636년) 대사헌에 이르렀다. 청백리(淸白吏)로 뽑혔으며,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사천(泗川)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배천(白川)의 문회서원(文會書院), 북청(北靑)의 노덕서원(老德書院), 안주(安州)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에 자리한 충정공(忠貞公) 김덕함(金德?)과 정부인 경주 이씨의 합장묘.

그밖의 인물로는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조좌랑(吏曹左郞)ㆍ좌부승지(左副承旨)ㆍ대사간(大司諫)ㆍ형조참의(刑曹參義) 등을 지내고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갔던 홍미(弘微)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덕겸(德謙)이 유명했으며, 첨절제사(僉節制使) 여기(礖器), 형조판서(刑曹判書) 우석(禹錫), 호조판서(戶曹判書) 연(演)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김홍미(金弘微)의 성극당문집(省克堂文集).

한말(韓末)에는 용구(容球)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향방(鄕坊) 사우(士友)들과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여 항거했으며, 기삼연(奇參衍)과 함께 수백명의 의사(義士)를 이끌고 수련산(秀蓮山)에서 혈맹(血盟)한 뒤 왜병(倭兵) 수백을 참살(斬殺)하고 전국 각처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비보를 듣고 음독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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