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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연방/불교용어

초파일 연등(燃燈)의 유래

by 연송 김환수 2014. 5. 5.

초파일 연등(燃燈)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연등은 사월 초파일에 석가모니 탄신일을 경축하는 의미로 연꽃모양 등 다양한 형태로 제작하여 불을 밝히는 등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등불이다.

 

연등은 세상의 어둠과 고통을 걷어내며,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새 세상을 기원하는 불교의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는 상징으로 사용된다.

 

 

연등의 유래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하루의 일과가 끝난 저녁에 가난한 농부, 노예계급, 상인 등 여러 사람들을 위해 저녁에 설법을 했는데 날이 어두워서 사람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을 보면서 설법을 자세히 들으려는 이유로 횃불을 들고 온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유부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등불 유래를 살펴보면 부처님 당시 "아사세" 왕이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께 법문을 청해 들을 때, 동참한 모든 불제자들이 기름등불을 켜서 법회자리를 밝힌데서 유래된다.

 

이때 "난타"라는 한 가난한 여인이 많은 사람들이 기름등불 공양을 올려 공덕을 쌓는 것을 보고, 스스로도 복을 쌓고 싶었으나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복인연을 맺을 수가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기름 한 되를 구하여 불을 밝혔다.

 

아침이 되어 모든 불은 거의 꺼졌으나 이 난타의 불만은 꺼지지 않고 밝게 타고 있었다.

 

아난과 목견련 존자가 이를 보고 부처님께 여쭈니 부처님께서는

 

"이 등불은 지극한 성심과 큰 원력을 가진 사람이 밝힌 등불이기 때문에 꺼지지 않는다." 고 말씀 하셨다.

 

이때부터 큰 원력을 세운 사람은, 부처님전에 지극정성심으로 기원봉양하면 무량한 공덕을 입을 수 있음을 깨닫고, 부처님전에 등불을 밝혀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고, 자신의 지혜를 밝히게 되었다.

 

우리나라 연등행사는 신라에서는 정월에, 고려시대에서는 2월과 8월에 국가적인 연등행사를 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원래 등을 공양하는 것은 부처님 오신 날에 한정된 일은 아니지만, 사월초파일의 연등행사가 고유의 민속으로 정착된 것입니다.

 

삼광사 연등

 

 

연등은 처음 횃불에서 시작되어 기름등불, 촛불, 현재의 LED 전구의 연등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등을 총칭하여 법등이라고 표현합니다.

법등은 법(부처님의 가르침)을 등불처럼 세상을 훤하게 밝히는 빛으로 이 빛은 자비이고 사랑이며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에게 빛을 줍니다.

 

범어사 연등

범어사 내원암 법등

 

 

 

부처님께 등불(연등, 인등) 올리는 유래

 

연등(燃燈)은 부처님께 공양하는 방법의 하나로 번뇌와 무지로 가득 찬 어두운(無明) 세계를 부처님의 지혜로 밝게 비추는 것을 상징합니다.

 

불교에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등불을 켜는 것은 어둠과 번뇌를 물리치고 영원한 진리의 광명을 밝힌다는 뜻이었다. 무명으로 가득 찬 어두운 마음이 부처님의 지혜처럼 밝아지고 따뜻한 마음이 불빛처럼 퍼져나가 온 세상이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로 충만토록 하자는 것이다.

 

연등에 관한 이야기는 "빈자일등(貧者一燈)"이란 이야기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난타라고 하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을 위하여 등불공양을 올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었습니다.

 

종일토록 구걸을 하러 다녀 얻은 것은 것이라고는 겨우 동전 두 닢 뿐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동전 두 닢으로 등과 기름을 사고 부처님께서 지나가실 길목에다 작은 등불을 밝히고는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부처님, 저에게는 아무것도 공양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이렇게 보잘 것 없는 등불 하나를 밝혀 부처님의 크신 덕을 기리오니 이 등을 켠 공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도 다음 세상에 태어나 성불하게 해주십시오."

 

밤이 깊어가고 세찬 바람이 불어 사람들이 밝힌 등이 하나 둘 꺼져 버렸습니다. 왕과 귀족들이 밝힌 호화로운 등도 예외일 수 없이 꺼져 갔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등불만은 꺼질줄을 몰랐습니다.

 

밤이 이슥해지자 부처님의 제자 아난은 이 등불에 다가가 옷깃을 흔들어 불을 끄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등은 좀처럼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밝게 세상을 비추었습니다.

 

그 때 등뒤에서 바라보고 계시던 부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난아! 부질없이 애쓰지 마라. 그 등은 가난하지만 마음 착한 한 여인이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켠 등불이니 결코 꺼지지 않으리라.

 

그 여인은 이 공덕으로 앞으로 30겁 뒤에 반드시 성불하여 수미등광여래가 되리라." 또한 연등은 연등불부처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引燈(인등)은 불전에 등불을 켜는 것. 혹 장등이라고도 합니다. 예로부터 부처님 도량에 1년동안 인등을 밝힘으로써 모든 재앙과 일체 장애가 소멸되어 소원을 이룬다 하였습니다.

 

인등(引燈)은 부처님 전에 등불을 켜는 것으로 불교에서인등은 밝음과 지혜를 상징한다.

 

부처님전 인등을 밝히는 것은 마음이 밝아져서 지혜를 얻고, 모든일이 순조롭게 풀리어 장애가 없어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

 

 

 

범어사 내원암 인등

 

부처님전에 인등을 밝히면 첫째 성불의 씨앗이 되고 두 번째 지혜의 눈을 얻어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 여의게 되고 셋째 모든 재앙을 물리쳐 소원을 성취하게 된다고 합니다.

 

탐진치(貪瞋癡)는 욕계의 해로운 마음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이며 삼독심(三毒心)이란 세가지의 독(三毒)으로 마음의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 - 탐욕/희망, - 분노/두려움, - 무명/어리석음

 

불교에서 소원을 빌기 위해 접시 등에 불을 밝혀 이를 인등(引燈)이라 하여 티벳의 사찰에 가면 이 인등이 수백, 수천 개씩 밝혀져 있다.

 

 

무속신앙의 인등

 

불교에서 사용하는 부처 앞을 밝힌다는 용어인 인등은 무속에서 그대로 가지고 와서 신령님 앞에 인등을 밝힌다고 한다.

 

인등은 기름을 작은 그릇이나 종지에 담아 심지를 만들어서 기름을 담은 그릇 속에 널어 접시 위에 받쳐 놓고 불을 밝히는 것을 말하는데 신령님 앞에 기름인등으로 백일을 밝히면 다른 어느 유사 인등보다 효과는 훨씬 좋다고들 하지만 전안의 물건들은 인등 정성이 끝나면 대청소를 하거나 새로 마련해야 될 일이 생기게 된다.

 

전안의 벽, 천장 그 외의 물건들이 전부 그을려지거나 끈적거려서 만지기가 꺼려지고 잘 닦아지지도 않고 인등을 켜는 동안 불이 자주 꺼져서 계속 심지를 돋아 주어야 하고 정성이 이만저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름인등 값이 다른 인등에 비해 열 배 스무 배 이상 비싸게 받지만 그래도 기름인등을 안 받으려고 한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촛불로 인등을 대신하고 액체 파라핀 작은 전구 등으로 대체를 하지만 효과는 기름인등이 제일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성이 그만큼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탐진치(貪瞋癡)에 대한 분석

 

삼독(三毒) 탐진치(貪瞋癡)

 

불가(佛家)의 가르침 중에 삼독(三毒)이란 것이 있다.

 

이 세 가지 독이란 마음에 번뇌를 일으킨다하여 삼혹(三惑), 혹은 삼독심(三毒心)이라고 하는데, 탐욕(貪慾), 진에(瞋恚), 우치(愚癡)를 뜻하는 탐진치(貪瞋癡)가 바로 그것이다.

 

탐욕(貪慾)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갖고 싶어 하고 또 구하는 마음을 이른다.

 

돈이나 명예, 만수무강하는 것부터 미남미녀 이성을 원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세상에는 욕심나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천국이니 극락이니 가겠다며 종교에 목매는 것도 욕심에서 시작 된다.

 

이미 세상을 다 가진자라 할지라도 조금도 잃지 않으려 하니 욕심이요, 세상을 잃은 자는 다시 얻으려 발버둥치니 이 모든 굴레가 탐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한다.

 

종국(終局)에는 그 모든 욕심들이 한낱 일장춘몽(一場春夢)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진에(瞋恚)란 자기 뜻이 어그러지는 것에 노여워함을 이른다.

탐욕이 자신의 마음에 꼭 맞는 것을 갈구하는 것이라면, 진에는 이와 반대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참지 못하거나 분노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는 욕심나는 것들만큼 꼴 보기 싫은 것들도 넘쳐나기에 노승발검(怒蠅拔劍)도 서슴치 않게 되는 것이 이런 마음 때문이다.

 

우치(愚癡)는 사상에 의혹되어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매우 어리석고 못난 마음을 이른다.

사리분별 못하는 개독들이 그러하고 잘못된 지식으로 무장한 학자들이 그러하며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사리사욕(私利私慾)에만 급급한 정치꾼들이 그러하다.

 

이들의 공통점은 혹세무민(惑世誣民)하면서도 후안무치(厚顔無恥)하다는 것이다.

탐욕과 진에도 모두 우치(愚癡)에서 나오는 독()이다.

 

탐진치(貪瞋癡) 중 탐욕과 진에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십악(十惡)에도 모두 포함 된다.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기어(綺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탐욕(貪慾), 진에(?), 사견(邪見) 이렇게 열 가지 악행이 십악(十惡)이다.

 

탐욕과 진에를 뺀 나머지 여덟가지는 쉽게 다스릴 수 있는 행동에 관한 것이지만, 탐욕과 진에는 다스리기 지극히 어려운 마음인 것이라서 따로 빼 놓은 것 같다.

 

우치에서 비롯되는 탐욕과 진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 항시 붙어 다니게 된다.

 

이 탐진치(貪瞋癡)의 반대가 되는 것이 계정혜(戒定慧)라는 불가(佛家)의 삼학(三學)이다.

()는 악을 저지르지 않고 선을 닦는 계율(戒律)을 말하고,

()은 심신을 고요히 하고 정신통일을 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는 선정(禪定)이며,

()는 번뇌를 파하고 진리를 증득(證得)하는 지혜를 말한다.

 

탐진치(貪瞋癡)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해탈 할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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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치는 욕계의 해로운 마음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입니다. 탐진치는 마음의 작용으로 어리석음,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들뜸을 기본으로 하고, 탐욕, 사견, 자만이 있으면 탐심貪心이 되고, 성냄, 질투, 인색, 후회가 있으면 진심嗔心이 되고, 해태, 혼침, 의심이 있으면 치심痴心이 됩니다.

 

탐심, 진심, 치심은 모두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으로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수행자가 탐진치의 특성을 이해하여 빨리 알아차리면, 그 자리를 관용, 자애 지혜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1. 탐심貪心 : 로바Lobha, 탐욕, 집착, 욕심, 헐떡거림, 달라붙음

 

1) 탐심의 특성은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탐심은 마치 잘 달구어진 석쇠에 눌러 붙은 고기처럼, 대상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탐심은 즐길 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 멈추지 못하고 계속 커집니다.

 

2) 다섯 감각기관에 부딪친 대상이 유쾌하고, 즐겁고, 좋고, 유혹적이고, 매력적이면 그 대상을 원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입니다.

 

3) 탐심은 즐거운 느낌, 또는 덤덤한 느낌과 함께 일어납니다. 즐겁거나 덤덤한 느낌에서 알아차림이 없으면 즉시 갈애와 집착이 일어나고, 이어서 슬픔과 비탄으로 발전하여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탐심에는 거친 탐심, 중간 탐심, 미세한 탐심이 있습니다.

 

4) 욕계의 중생은 탐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수행자는 탐심이 일어날 때마다 그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것이 적절한 것인가, 필요 이상인가를 알아서 적당히 제어할 수가 있습니다.

 

5) 탐심은 어리석음,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들뜸과 함께 탐욕과 사견 또는 탐욕과 자만이 함께 있습니다.

 

탐욕은 끈끈이처럼 대상을 거머쥐는 특징이 있고, 사견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을 고집하는 특징이 있고, 자만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유신견이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견해라면, 자만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평가하는 마음입니다. 유신견有身見, 상견常見, 단견斷見, 무인견無因見, 비업견非業見이 사견에 해당합니다.

 

6) 관용과 보시는 탐심을 줄입니다. 보시를 행하는 것이 탐심을 줄이고, 관용과 자애의 마음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붓다와 아라한은 접촉하는 대상에서 무상無常한 성품을 통찰하였기 때문에, 탐심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붓다와 아라한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완전히 소멸한 분들입니다.

 

2. 진심(瞋心, 성냄) : 도사dosa, 진에, 화냄, 분노, 혐오, 질투, 후회, 인색함, 회피함, 없애려 함.

 

1) 성냄의 특성은 대상을 밀쳐내는 것입니다. 성냄으로 생긴 독은 성낸 사람이 가장 크게 받습니다.

 

2) 성냄의 뿌리는 혐오嫌惡이며, 원하는 대상을 얻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성냄의 바탕에는 탐심이 있습니다.

 

3) 성냄은 인과因果에 대한 무지로 일어납니다.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은 화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인데,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화가 납니다. 이미 화를 냈다면 그것을 알아차려서 분노의 감정을 소멸하고, 그 자리를 관용과 자애로 채워야합니다.

 

4) 진심瞋心에는 불선한 마음의 작용인 어리석음,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들뜸과 함께 성냄, 질투, 인색, 후회가 들어있습니다. 수행자가 성냄, 질투, 인색, 후회가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면, 그 자리에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 들어갑니다. 성냄을 극복한 사람에게서는 따뜻함과 부드러움의 향기가 느껴집니다.

 

3. 치심(癡心) : 모하moha, 어리석음, 무명, 무지, 미혹, 둔함, 망상, 현혹, 맹목성, 들뜸, 의심.

 

1) 어리석음의 특성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어리석음이 있는지 모릅니다. 무명은 모든 불선업의 뿌리입니다.

 

2) 무명無明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고, 무지無知는 관념과 실재를 모르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고, 그 다음 실재인 오온에서 무상, , 무아, 연기緣起를 통찰하고, 마지막 사성제를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은 무명을 소멸하는 지혜 수행입니다.

 

3) 무지는 맹목적인 믿음을 만듭니다. 부처님은 깔라마 경에서 법에 대한 탐구[담마위짜야 dhamma vicaya]를 말씀하셨습니다.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온다고 해서, ‘그렇다하더라고 해서,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고 하시고서, 스스로 법을 탐구해보고 그것이 옳을 때 믿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불교의 믿음은 법을 탐구해서 생긴 확신에 찬 믿음을 말합니다.

 

4) 무명의 계층은 다양해서 층층이 쌓여있습니다. 수행을 해서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고, 업의 원인과 결과를 알고, 오온의 무상, , 무아의 성품을 알고, 고집멸도 사성제를 알 때, 자신이 터득한 만큼의 무명이 벗겨집니다. 지혜는 들어서 아는 문혜聞慧, 사유해서 아는 사혜思慧, 수행을 해서 아는 수혜修慧가 있습니다. 문혜와 사혜는 번뇌를 끊지 못하지만 수혜는 번뇌를 끊어버립니다.

 

5) 치심의 느낌은 덤덤하지만, 치심이 들뜸, 흥분, 의심, 산만함을 일으킵니다. 도거悼擧는 들뜸, 흥분, 산만함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6) 치심癡心의 마음의 작용은 어리석음,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들뜸을 기본으로 해태. 혼침. 의심이 들어있습니다. 의심은 불법승 삼보와 계에 대한 의심으로, 이리저리 생각하며,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말룽끼아뿟다라는 비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의심을 하며, 부처님께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그 비구의 태도를 독화살을 맞은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은 자신이 수행을 해서 지혜가 났을 때 자연스럽게 없어집니다. 의심을 풀려고 이런저런 사유를 해서는 결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의심도 그 순간의 마음이 하는 것으로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수행자는 의심할 때 의심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다시 몸으로 돌아와 알아차림을 이어가는 것이 의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석가탄신일

 

이 날은 석가모니의 탄생일이라 하여 불탄일(佛誕日) 또는 욕불일(浴佛日)이라고도 하나, 민간 에서는 흔히 초파일이라고 한다.

 

석가의 탄생일이기 때문에 원래는 불가(佛家)에서 하던 축의행사 (祝儀行事)였으나 불교가 민중 속에 전파됨에 따라서 불교 의식도 차츰 민속화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신라는 여러 가지 불교 행사가 성했는데,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이 불교를 호국(護國)의 바탕으로 참여시키는 정책을 유지하면서 불교행사는 이전부터 전해오던 세시행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병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의 팔관회(八關會)는 불교행사가 신라의 세시풍속으로 승화된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사월 초파일은 불도의 행사가 신라의 호국불교로 승화된 이래 후삼국을 거쳐서 고려조에 이르는 동안 우리의 민속과 동화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백제와 고구려 본기에는 불도의 행사가 세시의 행사로 거행되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신라본기에서는 석가모니 탄생일을 팔관회로 거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왕성(王城)에서 시골 마을에 이르기까지 정월 대보름에는 14, 15일 이틀간 을 저녁에는 연등(燃燈)을 하던 풍속이 있었으나 최이(崔怡)48일로 옮겨서 하게 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사월 초파일은, 불교의 축의행사로 전래되었다가 민간의 세시풍속과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신라의 팔관회, 고려의 연등회 등을 거치면서 완전히 정착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러 나라의 부처님오신 날

 

대한민국, 중화민국, 마카오, 홍콩에서 공휴일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75년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일본에서는 공휴일은 아니나 양력 48, 음력 4월 초파일, 5월 어린이날 등 다양한 날짜에 지낸다.

 

()과 논()에 석가모니가 태어난 날을 28일 또는 48일로 적고 있으나, 자월(子月:지금의 음력 11)을 정월로 치던 때의 48일은 곧 인월(寅月:지금의 정월)을 정월로 치는 28일이므로 음력 28일이 맞는다고 하겠다.

 

그러나 불교의 종주국인 인도 등지에서는 예로부터 음력 48일을 석가의 탄일로 기념하여 왔다.한편 195611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서 양력 515일을 석가탄신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음력 4월 초파일을 석가탄신일로 보고 기념한다. UN에서는 1998년 스리랑카에서 개최된 세계불교도대회의 안건이 받아들여져, 양력 5월 중 보름달이 뜬 날을 석가탄신일로 정해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등불의 유래

 

우리나라는 매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형형색색의 등을 정성스럽게 제작하여 각 사찰 도량과 부처님 전 또 각 신도 가정에 밝히고 있다.

 

또한 각 사찰에서는 인등, 자명등 이라는 이름으로 법당 안 부처님 전에 불을 밝히고 있다. 설일체 유부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등불 유래를 살펴보면 부처님 당시 "아사세" 왕이 기원정사에서 부처님께 법문을 청해 들을 때 동참한 모든 불제자들이 기름 등불을 켜서 법회자리를 밝힌데 서 유래된다.

 

이때 난타라는 한 가난한 여인이 많은 사람들이 기름 등불공양을 올려 공득 쌓는 것을 보고, 스스로도 복을 쌓고 싶었으나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복 인연을 맺을 수가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기름 한 되를 구하여 불을 밝혔다.

 

아침이 되어 모든 불은 거의 꺼졌으나 이 난타의 불만은 꺼지지 않고 밝게 타고 있었다. 아난과 목건련 존자가 이를 보고 부처님께 여쭈니 부처님께서는 " 이 등불은 지극한 성심과 큰 원력을 가진 사람이 밝힌 등불이기 때문에 꺼지지 않는다."고 말씀 하셨다.

 

이때 난타여인이 부처님 전에 예배하자 부처님께서는 "네가 오는 세상에 이 아승지겁을 지나 부처가 되리니 이름을 동광여래라 할 것이다."고 수기를 내리셨다.

 

난타는 감시하며 출가하기를 청원하여 계를 받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때부터 큰 원력을 세운 사람은, 부처님 전에 지극 정성으로 기원봉양하면 무량한 공득을 입을 수 있음을 깨닫고 부처님 전에 등불을 밝혀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고 자신의 지혜를 밝히게 되었다.

 

 

등불 밝히는 뜻

 

화엄경에 "믿음을 심지삼고, 자비를 기름으로 삼으며 생각을 그릇으로 하고 공득을 빛으로 하여 삼독(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을 없앤다."고 말씀하셨고 열반경에는 "중생은 번뇌의 어두움 때문에 지혜를 잃는데 비해, 여래는 방편으로 지혜의 등을 켜니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중생의 번뇌와 삼독으로 인해 불성보배를 보지 못하고 있음을 표명한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곧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투시어 중생들이 지혜로서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그리하여 봉축등을 밝히는 불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며 봉축축제에 임해야 겠습니다.

 

 

등불을 밝히는 마음가짐

 

1. 부처님께서 오신 성탄절을 진심으로 봉축하며 불은에 감사드립니다.

2. 부처님의 진리의 빛에 귀의하고 정진하겠습니다.

3. 부처님의 밝은 해탈세계에 이르고자 중생의 어두운 무명번뇌를 맑히겠습니다.

4. 중생의 삼독심( 탐심, 진심, 치심)을 녹여 부처님 지혜 광명을 얻도록 노력하겠습니다.

5. 등불이 주위의 어두움을 밝히듯 친지와 이웃에게 이익 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6. 바르고 큰 원력을 세워서 부처님 큰 가피를 내리시길 기원드립니다.

 

 

제등행렬의 의의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은 국가적 경축일로 전 국민이 등불을 켜던 옛 풍속을 오늘에 되살리고, 사회의 어두움을 부처님 진리로 밝히려는 숭고한 의도를 선포하여 전 민족적 제전으로 거행될 수 있도록 하는데 그 뜻이 있고, 또한 불교도들이 일 년간 정진해온 내적 신심의 외양적 표출이기도 하며, 종교적 집단의 정성과 단합의 힘을 과시함으로서 비종교인의 불교에의 호감을 고취하여 교세 신장면에도 그 몫이 크다 하겠다.

 

이 제등행렬은 통일 화합 결속의 저력을 배양하여 전체적인 미래의 목적을 이루고자 거행하는 정성과 힘의 결정이며 불은에 감사하고 그 가피력을 기원하는 성스러운 법회다.

 

모든 불교도는 이 거룩한 제등행렬 법회에 동참하여 석가모니불 정근을 높이 합송하며, 행렬 가운데의 모든 등불의 빛이,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응집되어 그것이 불타의 자비광명 자체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자세로 임해야 겠습니다.

 

 

연등공양의 기원

 

()을 밝히는 것은 연등(燃燈)이라 하고, 그 밝힌 등을 보며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을 관등(觀燈)이라 하는데, 이는 부처님 당시부터 시작된 아주 중요한 불교의식의 하나입니다.

 

<아사세왕수기경>에 보면 연등(燃燈) 공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사세왕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권력이 탐나서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어 인도대륙을 통일하는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큰 업적이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어야 했습니다.

 

아사세왕은 자신의 죄를 조금씩 느껴가면서 마음이 괴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나라의 유명한 의사를 불러 와서 치료를 했지만 병은 점점 약화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찾아갔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버지를 해친 저의 참회를 받아 주소서, 저는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참회하나이다.” “지금이 바로 자신을 돌아보아 참회할 때이니라, 지금 이 순간 때를 놓치지 말고 참회하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허물이 있을지라도 바로 고치면 훌륭한 사람이니라.”

 

아사세왕은 이러한 진실한 참회를 통하여 흉하기만 하던 종기가 말끔히 낫게 되었습니다. 이제 아사세왕은 훌륭한 불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을 궁궐에 모시고 법문을 들으며 공양을 올렸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궁궐에서 기원정사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사세왕은 자신의 마음의 무명을 밝혀 주신 부처님께 연등(燃燈) 공양을 올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사세왕은 자신의 궁궐에서 시작하여 기원정사까지 수많은 연등(燃燈) 을 밝히게 되니 그야말로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불자들은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상징하는 연등(燃燈) 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부처님 오신 날 연등(燃燈) 에 관한 기록은 고려 의종 때 백선연(白善淵)48일에 점등한 것이 최초입니다.

 

그 후 궁중에서도 사월 초파일날 연등(燃燈) 이 밝혀졌다고 하며, 공민왕은 초파일날 직접 연등(燃燈) 을 밝혔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일반 서민층까지 연등(燃燈) 공양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수많은 연등회 행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안국선원 연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