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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연방/불교용어

불교 교리용어(敎理用語)

by 연송 김환수 2014. 5. 4.

불교 교리용어(敎理用語)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衆生)이 저마다의 능력과 타고난 성품(性品)에 차이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 각자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모두 함께 성불(成佛)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다양한 수행법(修行法)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부처님께서 제시한던 깨달음의 가르침도 그 뜻이 방대(尨大)하고 심오(深奧)하지만 그 근본은 진리(眞理)를 깨달아 이를 믿고 행함으로써 고통을 여의고 자유롭고 편안한 삶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교리(敎理)는 복잡하고 난해(難解)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종교로서의 불교가 지니고 있는 가치와 불교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불교에서 쓰고 있는 용어(用語)가 주로 한자(漢字)로 표기되고 있는데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에서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佛經)을 한자(漢字)로 음역(音譯)하거나 의역(意譯)하고 이것이 우리 나라에 불교와 함께 들어와 현재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요즈음 일반인들은 어려운 한자를 잘 사용하지 않고 있으나 성직자로서 특수한 집단인 승가(僧伽)에서는 불교가 전래될 때의 용어나 한자를 그대로 쓰고 있을 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말과 다른 말들을 사용하므로 교리 용어가 어렵게 보이고 교리 용어가 어려우므로 불교 또한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 용어는 주로 한자(漢字)로 되어 있어 한자를 알면 교리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우리가 불교를 제대로 알고 교리(敎理)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에서 쓰고 있는 용어들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데 교리 용어(用語)의 설명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 진리(眞理)를 깨닫고 정진(精進)해 나가면 참된 삶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 진여(眞如)

 

사물(事物)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사물의 본체로서 진실로 영원 불변한 것이란 의미에서 진여라 지칭하고 여여(如如), 여실(如實), ()라 하여 대승에서는 만유의 본체를 말하며 근본불교(根本佛敎)에서는 연기(緣起)의 이법(理法)이 영원 불변의 진리이므로 진여(眞如)라고 한다.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 의하면 화지부(化地部)에서는 구무위(九無爲)를 설하는 중에 진여를 설하고 있는데 선(), (), 무기(無記)의 삼성(三性)이나 팔정도(八正道), 연기의 이법이 진실로 영원 불변하다는 뜻에서 진여라 하고 대승(大乘)에서는 모든 존재의 본성이 인무아(印無我), 법무아(法無我)이며 일체의 차별상을 초월해서 절대의 하나()인 것을 진여라 하고 이것을 여래법신의 자성(自性)으로 삼는다고 한다.

 

불지경론 권 7에서는 진여란 모든 현상의 실성(實性)이며 그 본체는 일미(一味)이지만 상에 따라 다양한 구별이 있다고 하여 일체법(一切法)과 불일불이(不一不異)로서 본체의 입장에서는 사고나 언어를 초월한 경지이지만 모든 거짓이나 그릇된 견해를 여의고 있다는 점에서 구태여 진여라 하며 또한 일체의 선이 의지하므로 법계(法界), 손감(損減)의 비방을 여의었으므로 실유(實有), 증익(增益)의 비방을 벗어났으므로 공무(空無)이나 다만 이것만이 진실이므로 실제(實際), 무분별지의 깨달음이므로 승의(勝義)라고 한다.

 

성유식론(成唯識論) 9에서는 진여란 허망한 분별법(分別法)을 여읜 인무아(印無我), 법무아(法無我)의 본성으로 삼성(三性) 중에서 원성실성(圓成實性)에 해당되며 모든 현상은 아뢰야식에서 생겨난 것이므로 진여는 현상을 초월한 절대의 정적(靜寂)함을 말한다고 한다. 또 지론종(地論宗)의 제8아뢰야식과 섭론종(攝論宗)의 제9아마라식은 그 자체가 자성청정심이지만 무명의 훈습(薰習)을 받아 여러 현상을 드러낸다고 한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를 중생심(衆生心)의 본체로 파악하고 언어나 사유(思惟)를 초월하여 존재하므로 이언진여(離言眞如)라 하고 구태여 언어로 표현한 것을 의언진여(依言眞如)라고 한다.

 

한편 화엄종(華嚴宗)에서는 본체가 바로 현상이라는 성기설(性起設)에 입각해서 진여 그대로가 만법, 만법 그대로가 진여라고 하고 천태종(天台宗)에서는 성구설(性具設)에 입각하여 진여도 본래부터 물듦, 맑음, 착함, 악함을 구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

세우(世友) 보살이 짓고 현장(玄裝) 스님이 번역한 것으로 소승교(小乘敎) 20부의 분파(分派) 상태와 교리의 요지(要旨)를 기록한 책이다.

 

 

2. 반야(般若)

 

반야(般若)는 바야(波若), 발야(鉢若), 반야(斑若), 반라야(般羅若) 등으로 음역하고 혜(), 지혜(智慧), (), 혜명(慧明), 승혜(勝慧), 극지(極智) 등으로 의역하며 모든 사물의 도리를 분명히 꿰뚫어 보는 깊은 지혜를 말한다.

 

해탈도론(解脫道論) 9에서는 반야는 지혜로서 요달(了達)을 특성으로 삼고 사제(四諦)의 경계를 간택하여 중악(衆惡)과 생사를 분명히 없애 준다하고 섭대승론(攝大乘論) 중권에서는 능히 일체의 견행(見行)을 없애고 삿된 지혜를 없애기 때문에 반야라 칭한다. 능히 진상(眞相)을 연으로 삼아 그 품류에 따라 일체법을 알기 때문에 반야라 칭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반야의 종류는 2종반야, 3종반야, 5종반야가 있는데 이종반야(二種般若)는 반야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나누는 것으로

 

성문, 연각, 보살을 위해 공통으로 설한 반야인 공반야(共般若)와 단지 보살만을 위해 설해진 반야인 불공반야(不共般若),

반야지에 의해 관조된 대경(對境)으로서 일체법의 진실하고 절대적인 모습으로 이것은 반야가 아니지만 반야를 일으키는 근원으므로 반야라 부르는 실상반야(實相般若)와 일체법의 진실하고 절대적인 모습(實相)을 관조하여 알아내는 지혜인 관조반야(觀照般若),

세속적이고 상대적인 반야인 세간반야(世間般若)와 초세적이고 절대적인 반야인 출세간반야(出世間般若) 등이 있다.

 

한편 위에서 기술한 실상반야와 관조반야에 추리와 판단을 작용시켜 제법의 차별을 깨닫는 상대지(相對智)인 방편반야(方便般若)를 더하거나 실상과 관조의 반야를 서술하고 있는 반야경전류(般若經典類)인 문자반야(文字般若)를 더하여 3반야라고 한다.

 

또 실상, 관조, 문자(또는 방편)반야에 반야지혜의 대상으로서 객관의 일체의 인식대상인 경계반야(境界般若)와 모든 인식의 대상이 지닌 실상(實相)을 아는 관희지(觀熙智)로서의 반야에 수반하여 이것을 돕는 육바라밀 등의 각종 수행인 권속반야(眷屬般若)의 두 가지를 더하여 5종반야라고 한다.

 

 

3. 보리(菩提)

 

범어 Bodhi의 음역으로 각(), (), (), ()라 번역하며 부처, 성문(聲聞), 연각(緣覺)이 각각 수행의 결과 얻게 되는 깨달음의 지혜를 말한다. 이 세 가지 보리(菩提) 가운데 부처님의 보리가 비할 바 없는 최상 최고의 궁극적인 것이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多羅三三菩提)’라 하고 의역(意譯)하여 무상정등각(無上正等正覺 :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침)’, ‘무상보리(無上菩提 : 위없는 깨침)’이라고 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 53에는 부처님의 보리(菩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보살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발심하는 것이야말로 보리의 결과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란 의미의 발심보리(發心菩提)

번뇌를 항복시켜 일체의 바라밀을 수행하는 복심보리(伏審菩提)

제법의 실상을 깨우친 반야바라밀의 모습을 명심보리(明心菩提)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에 의해 방편력을 얻었지만 반야바라밀에 사로잡히지 않고 번뇌를 끊어 일체지(一切智)에 이르는 출도보리(出到菩提)

불과(佛果)의 각지(覺智)인 무상보리(無上菩提)

 

법화경론(法華經論) 권하(卷下)에서는 부처님의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의 삼신에 대해 법불보리(法佛菩提 : 법신보리), 보불보리(報佛菩提 : 보신보리), 응불보리(應佛菩提 : 응신보리)를 주장하며 대승의장(大乘義章) 18에서는 무상보리에는 방편보리(方便菩提)와 성정보리(性淨菩提)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다음과 같은 보리가 있다고 하며 이것은 반야(般若), 법신(法身), 해탈(解脫)과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상의 이법을 깨닫는 진성보리(眞性菩提 : 실상보리, 무상보리)

이법에 계합(契合)하는 지혜의 깨침을 실지보리(實智菩提 : 청정보리)

자유자재로 중생교화의 방편을 깨치는 방편보리(方便菩提 : 구경보리)

 

한편 정토론(淨土論)에서는 자아에 집착하고, 일체 중생을 편안하게 해 주지 않으며, 오직 자신만 이롭게 하는 것을 멀리 여의어야 하는데 이것을 삼원리심(三遠離心), 삼종리보리장(三種離菩提障)이라 한다. 또한 자신만을 위해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중생의 고()를 없애 안온하게 하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해 영원한 즐거움을 준다고 하는 세 가지 청정심(淸淨心)을 말하며 이것은 지혜, 자비, 방편에 의해 생멸이 반복되는데 무상보리를 구하는 중생을 보살이라 하고 그런 마음을 무상보리심이라고 한다.

 

 

4. 중도(中道)

 

양극단(兩極端)에 치우치지 않는 중정(中正)의 도라는 뜻으로 중도는 불교의 근본 입장을 말하고 있어 대승과 소승에 걸쳐 중요시되고 있으며 종파마다 뜻하는 바에 깊고 얕음이 있지만 중도(中道)를 교리의 핵심으로 나타내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중도의 의의를 중도의(中道義), 중도의 진리를 중도리(中道理), 중도의 교설을 중도교(中道敎), 중도를 종지로 삼는 종단을 중도종(中道宗 : 법상종(法相宗)이 유식중도(唯識中道)를 설하므로 중도종(中道宗)이라 자칭함), 중도에 대한 관법을 중도관(中道觀 : 中道第一義蹄見)이라 하며 중도는 우주만유의 진실상을 나타내므로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고 한다.

 

중아함(中阿含) 56에서는 팔정도(八正道)의 실천이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에 치우친 생활 태도를 버리고 중도(中道)에 의해 지혜를 완성하고 열반(涅槃)을 증득(證得)하는 길이므로 중도라 하며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49, 성실론(成實論) 11 등에서는 중도는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떠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잡아함(雜阿含) 12에서는 12연기의 진리를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견(常見 : 중생의 생명의 주체인 는 영원히 존속한다는 생각)과 단견(斷見 : 사후엔 완전히 減無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생각) 혹은 유견(有見 : 자연적인 입장, 세간의 상식)과 무견(無見 : 허무주의) 등과 치우친 견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십이연기를 옳게 관하는 것이 중도(中道)의 정견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하며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 설해진 것으로 팔정도의 실천은 실천(實踐)상의 중도이고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체득(體得)은 사상(思想)상의 중도라고 한다.

 

중관파(中觀派)에서는 모든 집착이나 분별을 초월한 무소득(無所得)의 상태를 중도라고 하는데 이것의 이론적 근거가 팔부중도설(八不中道說)이다. 그리고 유식파(唯識派)에서는 유(), (), ()의 삼시교판(三時敎判)을 수립하여 유식중도(唯識中道)를 주장하며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모든 존재를 일면으로만 생각하는 공(), ()를 초월한 절대적 본체를 중도라고 한다.

한편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의 승랑대사는 중론(中論)의 팔부중도설을 응용, 발전시켜 이제합명중도를 주장했고 신라의 원효대사는 일체법에 무애자재한 이론으로 일관중도(一貫中道)’를 설하였다.

 

단견(斷見)

만유(萬有)는 무상(無常)한 것이어서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과 같이 사람도 죽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없어져서 공무(空無)로 돌아간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소견(所見)을 말한다.

상견(常見)

사람은 죽지만 자아(自我)는 없어지지 않으며 5()은 과거나 미래에 상주(常住) 불변하여 간단(間斷)하는 일이 없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견해(見解)를 말한다.

 

 

5. ()

 

공사상(空思想)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근본교리로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생멸하는 존재이며 고정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고 사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힌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고 무아이기 때문에 공()이라 하는데 이때의 공은 고락(苦樂)과 유무(有無)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이며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다.

 

공사상(空思想)은 인간의 그릇된 입장을 파사(破邪)하여 현정(顯正)하는 데 있으므로 어떤 사람이 현상계에 집착하면 그것이 공이라는 것을 가르치며 또 열반에 집착하면 열반 또한 공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집착하는 여러 가지 대상이 본질적으로는 공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에서 설한 18공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것으로 우선 사물을 감각하고 지각하는 인간의 육근(六根)이 공하고(內空) 육근의 대상이 되는 육경(六境)이 공하며(外空) 이렇게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관념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온갖 집착의 대상이 공함을 밝히고 마침내는 그 공도 또한 공임(空空)을 설하고 있는 바 이는 모든 사물이 공하다고 하는 관념에 집착하여 허무주의적인 경향에 빠져버리는 공병(空病)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설이며 더 나아가서 부정하는 실체로서의 공조차도 부정하는데 이는 또 다른 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설(敎說)은 대립적인 상대의식이 공하다는 것일 뿐 아니라 상대를 넘어선 절대 또한 공한 것임을 가르치는 것으로 공()은 가설적인 이름을 붙여 공이라고 한 것일 따름이며 공 자체는 진리가 아니고 진리를 밝히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공은 객관적 세계를 부정하는 절대무(絶對無)를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특히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공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떠날 수 없는 상관관계로써 이루어져 있음을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사물의 본질이 공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공은 그 파악되는 사물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가 공이라고 관하는 것을 공관(空觀)이라고 하며 공은 허무가 아니고 공을 관하는 것은 진실한 가치의 발견이므로 진공(眞空) 그대로가 묘유(妙有)라는 것으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고 이에 반하여 공을 허무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악취공(惡取空)이라고 한다.

 

진공묘유(眞空妙有)

원성실성(圓成實性)인 진여는 소승(小乘)에서 말하는 유()에 대한 상대적인 공()이 아니고 아집(我執), 법집(法執)을 여윈 곳에 나타나는 묘리(妙理)이므로 진공(眞空)이라고 하며 그 체()는 생멸 변화가 없는 항상 불변하는 실재이므로 묘유(妙有)라고 한다.

악취공(惡取空)

벽취공(僻取空)이라고도 하며 만유가 실재하다는 상상을 고집하는 사람에게 그 잘못된 소견을 없애기 위하여 공()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것을 공무(空無)하다는 듯으로 잘못 해석하여 불교의 본 뜻에 맞지 않는 것을 말한다.

 

 

6. 일심(一心)

 

일심은 불교에서 만유(萬有)의 실체(實體)라고 보는 참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우주만법의 수용처이며 크다거나 작다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빠르다거나 늦다고 할 성질의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동적(動的)인 것이라거나 정적(靜的)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량(數量)으로 말하여 하나라거나 많다고 할 성질의 것도 아니고, 무엇이라고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냥 마음이라는 단어로써 표현되어 있다. 또 일심의 ()’은 수적 또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고 개체가 일심으로 어느 하나 속에 전체가 살아 있으며 그 전체 속에 하나가 살아 있다.

 

이 일심 사상을 우리나라 불교 속에 정착시키고 독특한 사상으로 발전시킨 고승(高僧)은 신라의 원효(元曉) 스님이다. 원효대사는 대표적인 저서인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일심(一心)을 보다 체계적으로 전개시켰는데 그 가운데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심진여문(心眞如門)은 일심을 본질적인 면에서 관찰하여 언제나 참되고 한결같은 본성이 있음을 나타낸 것으로 이 심진여문이야말로 제법(諸法)의 유일한 근거로서 지극히 고요하여 모든 더러움이 사라진 중생심(衆生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심생멸문(心生滅門)에서는 참되고 한결같은 진여한 일심이 어떻게 흘러가서 불각(不覺)의 상태에까지 이르렀으며 어떻게 하면 다시 일심의 원천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진여(眞如)한 일심은 어느덧 생겨난 충동력인 무명(無明)의 바람에 의해서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스스로 진여한 일심을 가리게 되고 차츰 주객의 분별과 이기적인 생각들을 일으켜서 마침내는 지옥, 아귀, 축생 등의 육도(六道)를 윤회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일심에는 언제나 스스로는 맑게 정화하고 밝음으로 이끌어 가려는 훈습력(薰習力)이 있기 때문에 그 훈습하는 힘이 좋은 계기를 만나면 끊임없이 작용하여 마침내는 본래의 깨달은 상태인 진여로 나아가게 한다는 등의 내용이 밝혀져 있다.

 

이 일심은 온전하고 참될 수 있는 씨앗인 여래장(如來藏)으로 무한한 진실성과 덕성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속성이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일심의 덕성은 큰 지혜요 광명이며 세상의 모든 대상계를 두루 남김없이 비춰주듯이 환하게 모든 것을 다 알게 하는 것으로 있는 그대로 참되게 아는 힘을 간직하고 있으며 영원하고 자유자재하고 번뇌가 없으며 어떤 인과의 법칙에 따라 변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7. 일념(一念)

 

일념은 흔히 한결같은 마음 또는 깊이 생각에 잠긴다는 뜻으로 쓰고 있으나 불교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의 단위로 마음의 작용인 한 생각이라는 뜻으로 쓰고 있다. 일념을 시간의 단위로 말할 때는 일찰나(一刹那)라고 하는데 손가락 한 번 튀기는 시간의 60분의 1이라고 하여 순간의 현재, 전후가 없는 동시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이와 같은 짧은 사이에도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 생각하는 한 생각여하에 따라 고통과 편안하고 즐거움의 세계, 극락과 지옥의 세계, 또는 암흑세계의 인간과 광명세계의 성인의 경계를 판가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생은 이 한 생각 한 생각이 쌓이고 쌓여서 다음의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 한 생각을 더욱 귀중하게 여겨 현실에서 인생의 고통을 완전히 뛰어넘어 크고 넓은 자유의 즐거움에 노니는 사람을 가리켜 한 생각을 얻은 사람, 또는 한 생각을 쉰 사람이라 하여 가장 높은 가치를 일념(一念)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극락세계(極樂世界)에 나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이 일념의 한 소리로 아미타불을 마음으로 외워야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하였으며 이와 같이 믿는 한 생각에 의해서 극락정토(極樂淨土)에 다시 태어남이 결정되고 자기가 지은 모든 죄가 사라진다고 하였다.

 

여러 불교경전을 살펴보면 일념으로 믿는 마음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교법을 듣고 의심 없이 마음이 열려 밝아지는 것을 능히 한 가지 마음으로 믿음을 알면 공덕(功德)은 무량(無量)이다하였고 천태종(天台宗)에서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 하여 우리가 일상에서 일으키는 어두운 한 생각 중에도 우주의 모든 사물이 완전히 갖추어져 있어 상대가 곧 절대이며 절대가 곧 상대이기 때문에 제법실상(諸法實相)은 현상이 곧 현재라 하여 한 생각의 넓고 끝이 없는 성격을 밝혔다.

 

그리고 대반야경(大般若經)에서는 찰나(刹那)의 일념과 상응하는 혜()에 의하여 돈오(頓悟)를 얻는 것을 일념상응(一念相應)이라고 하였고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이 상응하여 이()와 지()가 병합하는 무념(無念)의 념을 일념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일념은 불교의 교리와 수행의 중심 문제로 범부(凡夫)란 스스로 착각에 갇혀 참된 자기를 망각하고 있는 상태이며 착각(錯覺)은 착각인줄 알았을 때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즉 부처님과 중생의 차이는 한 생각의 깨닫고 깨닫지 못함에 있으며 착각에서 깨어났을 때 본래 완성되어 있는 진리(眞理)의 실상이 발견되는 것이다.

 

 

8. 일념삼천(一念三千)

 

일념삼천(一念三千)이란 우리의 일념(一念) 가운데 삼천(三千)의 세계가 갖춰진다는 천태사상(天台思想)의 세계론(世界論)으로 삼천이 되는 까닭을 알아보면 삼천은 십계(十界), 십계호구(十界互具), 십여시(十如是), 삼세간(三世間)으로 구성되어 있다.

 

십계(十界)란 세계를 가치질서에 따라 열 가지 종류로 총괄하여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 하늘[],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 불승(佛乘)의 깨달음의 세계로 나눈 것이다.

 

십계호구(十界互具)란 십계(十界) 속에 또 각각 십계가 갖춰져 있다는 사상으로 말하자면 인간계 가운데에도 지옥계에서 부처님의 세계까지 내재해 있다는 것인데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도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내재해 있고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악한 마음과 동시에 착한 마음이 있다는 뜻으로 가능성으로서 모든 세계는 그 내면에 모든 다른 세계를 갖추고 있으며 다만 그 많은 세계 가운데 인간 혹은 다른 한 세계가 현실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십여시(十如是)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세계에서 지옥까지의 열 가지 세계가 각기 그 독자적인 십여시를 갖는다는 것으로 다음과 같다.

여시상(如是相) : 표면에 나타난 모양

여시성(如是性) : 변함 없는 내면의 바탕

여시체(如是體) : 바탕과 모양이 일체가 된 구체적인 물체

여시력(如是力) : 내면에 잠재한 힘

여시작(如是作) : 내면적 힘이 밖으로 나타난 작용이나 동작

여시인(如是因) : 작용에 필요한 직접적인 첫째 원인

여시연(如是緣) : ()을 도와 과()를 낳게 하는 간접적인 보조원인

여시과(如是果) : 인연으로 말미암아 맺어진 결과

여시보(如是報) : ()에 의해 일어나는 갚음

여시본말구경등(如是本末究竟等) : ()부터 보()까지의 9여시(九如是)가 일관되고 평등한 진리의 열 가지

 

모든 법은 지옥에서 부처님의 세계까지 열 가지로 구분되고 이 10계는 10계가 상호간 갖추어지므로 100계가 되며 여기에 10여시의 범주(範疇)가 덧붙여져서 천의 세계가 된다.

 

여기에 각각 세 가지 세간(世間)이 있게 되는데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인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세간(五蘊世間), 우리가 살고 있는 국토인 국토세간(國土世間), 거기에 거주하는 주체적인 중생세간(衆生世間)을 말하며 이 삼세간을 일천의 세계에 곱하므로 삼천의 세계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이 없다면 모르되 티끌만큼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순간의 일념(一念)에도 반드시 삼천의 진리를 나타내며 그 3,000의 세계가 그대로 미혹(迷惑)한 세계도 되고 깨달음의 세계도 된다는 것이 곧 일념삼천설(一念三千說)이다.

 

 

9. 일불승(一佛乘)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이 이루신 깨달음이 너무나 깊고 깊어서 탐욕에 가린 중생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으로 여겨 과거에 여러 부처님께서 쓰신 방편대로 삼승(三乘)으로 나누어 설하셨다.

 

()이란 타고 가는 것을 의미하며 삼승으로 설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길을 셋으로 분별하여 설하는 것으로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를 닦아 열반을 증득하는 길인 성문승(聲聞乘), 십이연기(十二緣起)를 닦아 모든 법의 인연을 잘 아는 길인 벽지불승(支佛乘, 緣覺乘),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닦아 깨달음을 구하는 길인 보살승(菩薩乘)이다.

 

삼승 중에서 성문승과 벽지불승(연각승)은 소승에 해당되고 보살승은 대승에 해당되며 이 두 승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고 있는데 소승(小乘)은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으며 대승은 생사와 열반을 분별해서는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반야사상(大乘般若思想)은 바로 아함(阿含)의 인연(因緣), 연기설(緣起說)에 입각하여 교리체계가 심화된 것일 따름으로 아함의 입장에서는 생사(生死)와 열반(涅槃), 저 언덕과 이 언덕이 뚜렷하게 분별되어야만 하나 그 두 법을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보면 그들은 서로 연()이 되는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독자적 존재성은 부정되어야 하므로 아함의 가르침은 대승의 반야교설로 필연적으로 심화(深化),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아라한(阿羅漢)이나 벽지불(支佛)임을 자처하면서 모든 부처님이 오로지 보살(菩薩)만을 교화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는 불자가 아니며 또 스스로 이르기를 구경열반(究竟涅槃)을 얻었다고 하면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다시 구하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설하셨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이렇게 열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상정등각의 획득 즉 성불(成佛)에 있다면 모든 불자는 마땅히 그러한 뜻을 향해 발심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불자가 가야 하는 보살의 길이 궁극적으로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는 여래십호(如來十號) 맨 앞의 여래(如來) 그렇게 온 자라는 개념에서 명백히 알 수 있는데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 아직도 피안적(彼岸的)인 색채를 띠고 있는 데에 대하여 여래는 이 언덕에 회향(回向)하는 방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화경(法華經)은 반야경(般若經)이 제법개공(諸法皆空)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과는 달리 불국토(佛國土) 건설과 중생교화(衆生敎化)2대 주제로 삼고 있는데 결론적으로 말해 삼승을 행할 때 이미 일불승(一佛乘)에 들어서 있는 것이며 삼승(三乘)은 한결같이 성불(成佛)에 이르는 보살(菩薩)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10. 이제(二諦)

 

불교는 모든 것이 일어나는 원인을 아는 것과 그 결과로 나타난 모양을 아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있으며 그 아는 방법을 두 가지로 나누어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라고 부르고 있다. 진제는 여러 경전에서 승의제(勝義諦), 최승의제(最勝義諦) 또는 제일의제(第一義諦)라 하여 세속(世俗)을 초월한 세계의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며 속제는 세속제(世俗諦) 또는 세제(世諦)라고도 하여 세간적인 진리를 말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에 무슨 세간적이나 출세간적인 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을 할 수도 있으나 속제(俗諦)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진리 즉 모든 것은 인()과 연()으로 이루어진 과()이고 이것은 생멸의 원리로 되어 있으며 생멸은 공의 신진대사의 원칙에 따르고 있다는 등의 비교적 초보적인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진제(眞諦)는 이와 같은 원칙을 기준으로 하여 점차로 고차적인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일체를 부정하고 언어를 초월하며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비인비과(非因非果)인 것을 말하는 것이나 경전과 각 종파에서는 그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원시경전(原始經典)인 중아함부(中阿含部) 경전에는 진제라는 말을 쓰기는 하였으나 명확한 설명을 볼 수 없으며 구사론(俱舍論)에는 병()과 의복 등의 예를 들어서 진제와 속제를 설명하였다.

 

()이나 옷 같은 것은 그 모양이 깨지거나 찢어지면 없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속 사람들이 병이 있다, 옷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일반상식에 어긋나지 않는 거짓없는 진실을 세속제라 하였으며 75법의 존재 구성요소의 법을 출세간법(出世間法)들이 바로 알고 있는 것을 속제라 하고 불교의 진리에 눈뜬 출세간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진제라 하였다.

 

이외에도 중론(中論)에서뿐만 아니라 법상종계(法相宗系), 천태종계(天台宗系) 등의 종파에서도 자기 종파의 독특한 견해로써 이제(二諦)를 설명하고 있는데 삼론종(三論宗)에서는 대품경(大品經), 중론(中論) 등을 의지하여 종()의 교리를 설명할 때에 어교이제(於敎二諦), 개합이문(開合二門), 사중이제(四重二諦)를 말하여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이치를 보이려 하고 있다.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진제를 제1의제(義諦) 또는 승의제(勝義諦)라 하여 유식(唯識)의 실성은 진여를 말하고 변계(遍計)의 제법을 속제라 하여 사중이제(四重二諦)를 세운다. 그리고 천태종(天台宗)에서는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의 화법사교(化法四敎)에 의하여 사중이제를 말하고 다시 그 발전하는 관계를 밝히기 위하여 칠중이제(七重二諦)를 말한다.

 

사중이제(四重二諦)

법상종(法相宗)에서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에 각각 세간(世間), 도리(道理), 증득(證得), 승의(勝義)4()을 세우는 것을 말하며 이를 다시 사종승의제(四種勝義諦)와 사종세속제(四種世俗諦)로 나눈다.

화법사교(化法四敎)

천태종(天台宗)에서 부처님 일대의 교설(敎說)을 교화하는 법으로 교리(敎理)의 내용에 따라 장통별원(藏通別圓)의 네 가지로 분류한 것을 말하며 장교(藏敎)는 경율논(經律論) 3장으로 말한 소승교(小乘敎), 통교(通敎)는 앞뒤에 통하는 교로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이 함께 받는 교, 별교(別敎)는 성문, 연각의 교와는 다르고 원교(圓敎)와도 다른 교, 원교(圓敎)는 완전 원만한 교를 일컫는다.

칠중이제(七重二諦)

천태종(天台宗)에서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일곱가지로 나눈 것으로 칠종이제(七種二諦)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