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조선의 마지막 원당, 백운사(上)
* 원당(願堂) : 예전에, 죽은 사람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셔 놓고 명복을 비는 법당을 이르던 말
왕실불교의 마지막 등불, 순정효황후
데스크승인 2013.11.04 탁효정 |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망국 멍에 쓰고, 역사도 외면한 가련한 국모
기구한 일생 오직 불보살님께 의지하며 버텨
우리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조선이 외세에 멸망했다는 콤플렉스 때문에, 어쩌면 조선의 마지막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애써 밀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순종과 순종비에 대한 무관심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명성황후가 조선의 메타포인양 미화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선의 마지막 황후였던 순정효황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극히 미미하다.
명성황후에 대한 수백편의 논문과 저술이 쏟아져 나오는 것과는 달리 순정효황후는 일대기를 정리한 짧은 글조차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불교사의 입장에서 볼 때 순정효황후는 반드시 기억하고, 조명되어야 할 인물임에 분명하다. 조선불교의 마지막 등불을 끝끝내 놓지 않았던 그의 삶은 조선 500년간 이어져온 왕실불교의 저력을 보여주는 증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순정효황후는 1906년 황태자비로 간택되어, 20살 연상인 순종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한일합방 당시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듣고 있던 황후가 조약 체결을 막기 위해 치마 속에 옥쇄를 감추었다가 친일파이자 숙부인 윤덕영에게 빼앗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고 홀로 된 황후에게는 자식조차 하나 없었다. 해방 후 조국에는 봄이 찾아왔건만 황후에게는 더 추운 겨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경남도지사 관사에 들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곧이어 부산의 한 포교당에 방 1칸을 빌려 살았으나 이마저도 뒤따라 내려온 의친왕에게 내어주고, 묘지기 방을 전전해야 했다.
서울 수복 후 상경한 황후에게 이승만 정권은 “창덕궁이 국유재산으로 귀속되었으니 궁에서 나가라”고 통보했고, 결국 정릉의 수선제로 내쫓겼다. 1960년에 다시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왔지만, 망국의 죄를 뒤집어 쓴 채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순정효황후는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유명하다. 황후에게 대지월이라는 법명을 내려준 계사는 대각사의 용성스님이었다. 황후를 모시던 최상궁과 엄상궁이 대각사의 신도였는데, 이들을 통해 황후 또한 용성스님을 알게 된 것이다.
현재의 대각사는 최상궁이 사저(私邸)를 보시해 조성된 절로 알려져 있다. 용성스님의 한글역경사업 또한 왕실 여성들의 보시에 크게 힘을 입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순정효황후는 용성스님에게 법명과 계를 받은 후 거의 비구니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황후의 머리맡에는 용성스님이 한글로 번역한 <화엄경>이 항상 놓여져 있었으며,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하루종일 참선과 염불을 행했다고 한다.
순정효황후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남은 여생을 오직 불전에 귀의하여 세월을 보내던 중 뜻하지 않은 6.25 동란을 당하자 한층 더 세상이 허망함을 느꼈던 중 내 나이 70여 세 되오니 부처님 세계로 갈 것 밖에는 없다. (중략) 형편에 따라 장례일은 하되 염불소리 외는 조용히 하며 소리 내 우는 자는 내 뜻을 어기는 자이며 장례 후에는 유언대로 도인스님께 영가를 태우고 일주년에 마치게 하길 부탁한다.”
순정효황후가 유언을 남긴 시점은 을사조약이 맺어진 후 꼭 60년이 지난 1965년 을사년이었다. 황후가 남긴 유언에는 불보살에 의지하며 버텨온 고난의 세월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듯 하다.
[불교신문2959호/2013년11월6일자]
백운사 (白雲寺)
시대 : 고대/남북국 건립시기/연도 : 875년(헌강왕 연간)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유등리 434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유등리 만월산(滿月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875년(헌강왕 1)에 도운(道雲)이 창건하였으며,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현재의 사찰 주변에 산재되어 있는 초석과 축대 등의 유적과 이 절에서 공양미를 씻은 물이 연곡면의 행정천(杏亭川)을 부옇게 물들였다는 전설 등으로 미루어보아 그 규모가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폐사연도 또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545년(인종 1)을 전후하여 이이(李珥)와 최옥(崔沃) 등의 유생들이 이 절을 강례처(講禮處)로 이용하였음을 보아 임진왜란 전까지는 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45년에는 김용환(金龍煥)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 산신에게 천일기도를 올린 뒤 오대산 상원사에서 관음기도를 드리던 중, 다시 선인의 현몽으로 이 절터에 토굴을 짓고 기도하여 병이 낫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오대산 상원사에 있던 향봉(香峰)과 청월(淸月)이 1952년에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953년에 준공하였다. 그리고 1955년에는 영주 부석사에 있는 관세음보살상을 옮겨왔으며, 1959년 3월에는 윤비(尹妃)의 보시로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하였다.
현존하는 이 절의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1965년에 건립한 삼성각(三聖閣)·요사채 등이 있다.
[참고문헌] 『임영지(臨瀛誌)』(명주군,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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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여인들, 억불시대의 ‘바람막이’
〈56.끝〉 조선의 마지막 원당, 백운사(下)
데스크승인 2013.11.11 탁효정 |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윤황후, ‘송광사 도인’ 향봉스님에 의탁
강릉 백운사에서 황후 위패 지금도 보전
순정효황후의 유언에 적힌 도인 스님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지만, 송광사 향봉스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백운사 주지 법안스님에 의하면, 황후가 서거한 직후 국상 준비위원회에서는 향봉스님에게 염불과 천도재를 부탁했다고 한다. 평소 향봉스님을 깊이 존경했던 순정효황후는 스님을 ‘탈속도인(脫俗道人)’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그래서 향봉스님을 ‘도인 스님’이라 칭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다.
향봉스님은 1940~1950년경 선학원에 거하고 있었는데, 황후는 청정하고 엄격한 선기(禪氣)로 이름 높았던 향봉스님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향봉스님의 상좌인 송은스님에 따르면, 황후는 선학원으로 상궁들을 보내 향봉 스님의 법문을 받아 적어오게 한 다음 그것을 읽는 것을 큰 낙으로 여겼다.
또한 매년 봄가을 향봉스님에게 약을 지어 올렸는데, 한번은 대만의 장개석 총통이 황후에게 선물로 한약재를 보내자 이 약재로 스님의 약을 지어 보내기도 했다.
향봉스님이 정화개혁 당시 조계사에서 철야농성을 할 때에는 상궁들을 통해 담요를 보내 응원하기도 했다. 향봉스님은 강릉 백운사로 간 후에도 1년에 한두 번은 서울로 올라와 황후를 친견하곤 했다.
한번은 스님이 상좌를 보내 인사를 전하자, 황후가 낙선재에서 키우던 모란 한 그루를 보내 스님의 방 앞에 심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같은 인연으로 향봉스님은 1966년 순정효황후의 국상 때 만장 제작 등 장례의식을 상당부분 주관했고, 국상이 끝난 후에는 당시 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강릉 백운사로 황후의 위패를 모셔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후의 49재를 치렀다. 순정효황후의 위패는 지금도 백운사의 대웅전 경내에 모셔져 있다.
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모시던 상궁들은 모두 낙선재를 나왔다. 이 가운데 박상궁과 김상궁은 친척집으로 갔지만, 막내인 성옥염 상궁은 동대문 밖 보문사의 시자원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황후의 위패가 안치된 백운사로 가려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비구니절인 보문사로 들어간 것이었다. 살아생전 성상궁과 박상궁은 매년 백운사에 제사비용을 보내 황후의 기신재를 치러주길 부탁했다고 한다.
이들은 “죽어서도 황후 마마를 모실 수 있도록 내 위패를 강릉 백운사에 안치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지금도 백운사에서는 순정효황후와 성상궁, 박상궁의 제사가 매년 치러지고 있다.
조선의 마지막 황후로, 조선의 마지막 궁녀로 평생토록 고단한 삶을 감내했던 이들은, 백운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온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로부터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에 이르기까지, 왕실 내의 불교신앙은 단 한번도 꺼지지 않은 채 이어져왔다.
억불의 시대에 불교가 왕실에서 500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불교보다 더 커다란 귀의처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간 불교는, 권력이 필요한 왕실여성에게는 스스로를 컨트롤 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위로가 필요한 여성에게는 따뜻한 의지처를, 삶이 막막한 여성에게는 내세에 대한 약속을 선사해 주었다. 그리고 그 선물을 받은 여성들은 스스로 불법(佛法)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며, 억불시대에 커다란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다.
비록 그들이 남긴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지금도 불화나 불경의 한 귀퉁이에는 그네들의 흔적이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다.
[불교신문2961호/2013년11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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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효황후 (純貞孝皇后) 윤비(尹妃)
유형 : 인물 시대 : 근대 출생 - 사망 : 1894년 ~ 1966년 성격 : 왕비 본관 : 해평(海平) 윤씨(尹氏)
1894(고종 31)∼1966.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황후.
본관은 해평(海平).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딸이다. 황태자비 민씨가 1904년에 사망하자, 1906년 12월 13세에 황태자비로 택봉되었고, 이듬해 순종이 즉위하자 황후가 되었다. 당시의 자자한 소문에는 택영이 엄비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쳐서 간택되었다고 한다.
순종의 동생 영친왕(英親王)은 고종의 제7자로 황귀비엄씨(皇貴妃嚴氏)의 출생인데, 순종이 즉위하자 엄비와 이토(伊藤博文) 등의 중론에 따라 황태자로 책립하였는바 당시 세론은 형제로 계통(繼統)을 세움이 불가하다 하면서 황태제(皇太弟)라 하였다. 1907년에 여학(女學)에 입학하여 황후궁에 여시강(女侍講)을 두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므로, 황비가 이를 저지하고자 치마 속에 옥새(玉璽)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숙부인 윤덕영(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다.
만년에 고독과 비운을 달래기 위하여 불교에 귀의,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낙선재(樂善齋)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참고문헌『순종실록(純宗實錄)』 『매천야록(梅泉野錄)』 『경성부사(京城府史)』(경성부,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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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친왕, 순종황제,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
▲ 순정효황후와 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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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2월에 붕어하신 조선 마지막 황후 순종비 윤대비 국장 장례식 장면 사진입니다.
역사가 요구한 이 분의 정확한 이름은 순종효왕후이며, 교양없는 사람들은 윤비라고 말합니다.
영구를 싣은 차에 앞서 위패를 모신 차가 지나가고 그 옆을 여학생들이 검은교복을 입고 호위하고 있습니다.
그 너머에 시민들이 운집에 마지막 조선 마지막 윤황후 영구를 바라보며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이 찍힌 장소는 파고다공원 즉 탑골공원 근처로 보입니다.
윤황후의 장례행렬을 뒤에서 바라본 사진입니다.
순정효황후 (純貞孝皇后 1894∼1966)
조선 마지막 왕 순종의 비. 본관은 해평.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이다.
1910년 국권피탈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의 진행을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옥새(玉璽)를 치마 속에 감추고 내놓지 않았으나, 숙부인 윤덕영(尹德榮)에게 강제로 빼앗겼다.
국권피탈 후 일제에 의해 이왕비전하(李王妃殿下)로 강칭(降稱)되고, 1926년 순종이 후사없이 죽자 왕제(王弟) 영친왕(英親王)을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만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낙선재(樂善齋)에서 말년을 보냈다. 유릉(裕陵)에 순종과 합장되었다.
조선 말기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순종비(純宗妃)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아버지이다.
1899년 시강원시종관에 임명되고 1901년 비서원승을 거쳐 영친왕부령(英親王府令)이 되었다.
1902년 영친왕부총판과 혜민원 총무를 겸임하였다. 1906년 딸이 황태자비로 간택되어 1907년 지돈녕사사(知敦寧司事)로 칙임관 2등에 선임되고, 같은 해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을 받았다.
1908년 진종소황제옥보전문(眞宗昭皇帝玉寶篆文)의 서사관(書寫官)에 임명되었고 1909년 금척대수장(金尺大綬章)을 받았다. 일제에 의하여 후작에 임명되었다.
남산골 한옥마을_순정효황후(순종 윤황후) 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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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명효 황후(순종비)가 김상덕에게 보낸 편지
작년에 소식 들은 후 궁금하여 매양 얘기하고 있었는데, 설 쇠기를 태평히 하셨는가 싶으니 기뻐하옵니다. 여기서는 (옛날) 지내던 생각이 지난 때에 미치면 이 몸이 없어지고자 하는 말씀을 한 붓으로 다하기 어렵사옵니다. 요사이는 상감께서 두루 평안하시고, 세자도 걸음걸이는 끝내 불편하시나 그 외는 모두 평안하시니 축하드리옵니다. 나는 신병(身病)이 성한 날 없사오며 (병세가) 내내 (잘 낫지 않고) 오래 끌어 대강만 적사옵니다. 정월(正月) 이십삼일 해설 1904년 1월 순명효 황후(순종비)가 황태자비 시절, 위관(韋觀) 김상덕(金商悳, 1852~1924)에게 보낸 편지. 김상덕은 세자(나중의 순종)의 스승이었는데, 순명효 황후가 의지하는 바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는 안부와 황실의 근황, 그리고 자신의 신병을 토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꽃병 그림의 붉은 편지 봉투와 국화꽃이 인쇄된 화려한 시전지(詩箋紙)가 이채롭다. 궁체 흘림체의 세련된 글씨도 눈여겨볼 만하다. 순명효 황후는 병세가 더욱 깊어져 그해를 못 넘기고 3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②] |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負債) 수난기 |
‘순종 임금의 장인이 300만원을 떼먹고 북경으로 줄행랑을 놓는데…’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
서른둘의 나이에 ‘황제비의 아버지’인 부원군에 올라 권력과 명예를 한손에 거머쥔 인물. 그러나 그가 버리지 못한 것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수천억원의 돈을 빚지고 중국으로 도망쳐 끝내 타국에서 쓸쓸한 최후를 맞은 윤택영 일가의 수난기를 통해, 욕망과 허세, 비리와 친일행각이 빚은 구한말 최고지배층의 처참한 최후를 들여다본다. |
살다보면누구나 빚을 진다. 무심코 긁은 신용카드도 알고 보면 빚이고, 매달 갚아야 하는 자동차 할부금도, 은행에 집 잡히고 얻은 대출도 빚이다. 누구나 빚을 지고 살건만 빚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의 기질에 따라 확연히 다르다. 대부분의 소시민은 빚을 벗어나고픈 멍에로 여긴다.
허리띠 졸라매고 바동바동 벌어서 일단 빚부터 갚고 본다. 반면 배포 큰 사람은 빚을 즐긴다. 안 빌려줘서 못 쓰지, 빌려준다면 천금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한 배포는 아무리 큰 빚을 졌어도 있으면 갚는 것이요, 배를 갈라도 없으면 못 갚는다는 ‘불변의 진리’에서 나온다.
세상 이치가 이럴진대 빚내준 사람이 답답하지, 빚진 사람이 아쉬울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처럼 빚진 사람은 빚쟁이보다 월등히 높은 지위를 점하기 때문에 아무나 빚을 끌어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빚내는 것도 ‘능력’이요 ‘재능’이다.
돈이 필요한데 없으면 빌려야 한다. 고지식하게 빚내기를 주저하다간 평생 구멍가게 주인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기왕에 빚을 질 바에야 크게 지는 게 낫다. 1000만원 빌린 사람이 추가로 1억원 빌리기는 힘들어도, 1000억원 빌린 사람이 추가로 1억원 빌리기는 손바닥 뒤집기만큼이나 쉽다. 게다가 큰 빚을 지게 되면 ‘하늘 같은’ 빚쟁이에게 큰소리칠 수도 있다. 빚쟁이도 합리적인 경제인인지라, 잔챙이 채무자에게는 막 대할지라도 큰 채무자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자칫 거금을 떼여 알거지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됐건 ‘내 돈 아닌 내 돈’이라는 빚의 속성은 액수가 크나 작으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어서, 쓸 때는 좋지만 갚으려면 속이 여간 쓰라린 게 아니다. 또한 아무리 속이 쓰리다 해도 빚은 언젠가 갚아야 한다.
빚쟁이가 채무자를 막 대하지 못하는 것은 예뻐서가 아닐뿐더러, 빚쟁이의 인내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 다. 그러지 않으면 80년 전 윤택영 후작이 그랬던 것처럼, 제 나라 제 집에서 등 붙이고 살기 힘들어진다.
차금대왕 윤택영 후작
1926년 5월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국장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했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장은 순종이 타계한 4월25일부터 인산일(因山日)인 6월10일까지 46일간 이어졌다. 온 나라가 애도 분위기에 싸여 있을 때, 언론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엉뚱한 인물이 있었다. 다음은 ‘개벽’ ‘회고 조선 500년 특집호’에 ‘뜬금 없이’ 실린 기사다.
부채왕(負債王) 윤택영 후작은 국상 중에 귀국하면 아주 채귀(債鬼·빚귀신)의 독촉이 없을 줄로 안심하고 왔더니 각 채귀들이 사정도 보지않고 벌떼같이 나타나서 소송을 제기하므로 재판소 호출에 눈코 뜰 새가 없는 터인데, 일전에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그의 형 ‘대갈대감’과 대가리가 터지게 싸움까지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싸우지 말고 국상 핑계 삼아 아주 ‘자결’이나 하였으면 충신 칭호나 듣지. (‘개벽’ 1926년 6월호 ‘경성 잡담’)
후작이면 후작이지 ‘부채왕’은 무슨 말일까. 근신하고 삼가야 할 국상 중에 웬 빚받이 소송이란 말인가. 빚 떼먹고 해외로 도망간 사람이 ‘나 돌아왔소’ 소문내고 귀국한 이유는 무엇인가. 윤택영과 ‘대가리가 터지게’ 싸웠다는 ‘대갈대감’은 또 누구일까. 좀더 살펴보자. |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②] |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負債) 수난기 |
‘순종 임금의 장인이 300만원을 떼먹고 북경으로 줄행랑을 놓는데…’ |
차금대왕(借金大王)이라는 별명을 듣는 윤택영 후작은 지난 번 국상 때 귀국한 이후 100여 명 채권자의 기웃거리는 눈을 피하여 창덕궁 내전에서 일절 외부출입을 하지 않고 있으므로 각 채권자들은 다만 그 하회만 엿보 고 있던 중, 국장도 이미 끝나고 장차 졸곡(卒哭·곡을 그칠 때 지내는 제사, 망자가 죽은 지 석 달이 지나기 전에 지낸다-인용자)이 멀지 않았 으므로 졸곡이 지나면 곧 다시 중국으로 갈는지 모르는 고로 채권자들은 조급히 서두르는 모양이라는데, 우선 송달섭, 도변경조(渡邊慶造) 외 12명의 채권자가 파산선고를 신청하여 오는 16일에 경성지방법원 민사부 에서 공판이 개정될 터라 하더라. (‘조선일보’ 1926년 7월7일자)
이번엔 ‘왕’으로도 모자라 ‘대왕’이란다. 윤택영 후작이 빚을 무지막지 하게 많이 졌던 모양이다. 창덕궁 내전에 칩거했다면 황실과도 인연이 있는 인물 일 테고,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후작이라면 권세도 상당했을 텐데, 어쩌다 그처럼 많은 빚을 지고 중국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부터 ‘채무왕’ ‘부채왕’ ‘차금대왕’ ‘대채왕(大債王)’으로 불리며 ‘빚의 제왕’으로 일세를 풍미한 윤택영의 인생유전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자. 윤택영 후작이 ‘빚의 제왕’으로 군림한 것은 1906년 대한제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황태자이던 순종의 태자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여러 가문 에서 동궁계비(東宮繼妃) 책봉운동을 벌였다. 윤택영도 자기 딸을 태자비로 앉히기 위해 황실에 요샛말로 가열차게 ‘로비’를 했다. 50만원(오늘날로 치면 500억원)의 엄청난 ‘운동비(로비 자금)’를 쏟아부은 결과 윤택영의 열세 살 난 셋째딸이 동궁계비에 책봉된다.
당시 윤택영(1876년생)의 나이는 고작 서른하나였다. 시운(時運)이 따랐는지 윤택영이 황태자의 장인이 된 지 1년 만인 1907년 고종이 양위하고 순종이 황제로 등극한다. 윤택영은 불과 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황제의 장인 ‘해풍부원군’이 되어 권력과 명예를 동시에 움켜쥔다.
윤택영씨는 해풍부원군을 봉하시고 정일품상보국(正一品上輔國)을 제수하였다더라. (‘신한민보’ 1907년 7월 4일자)
권력도 얻고, 명예도 얻었지만 윤택영에게는 여전히 부족한 것이 있었다. 바로 돈이었다. 황실과 사돈을 맺기 위해 쏟아부은 50만원의 ‘운동비’ 태반이 빚이었던 탓이다. 어지간한 규모의 돈이었으면 참봉첩지라도 팔아 메울 수 있었겠지만, 워낙 큰 빚인 터라 100원씩 1000원씩 벌어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곤궁에 처한 윤택영은 여느 사람 같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놀라운 채무해결책을 생각해낸다.
해풍부원군 윤택영씨는 황후폐하 가례 시에 빚진 것이 50만~60만원에 달하여 곤란이 가볍지 않으므로 황실 에서 물어주기를 희망한다더라. (‘신한민보’ 1910년 2월16자)
윤택영은 다짜고짜 황제를 찾아가 “폐하, 장인 빚 좀 갚아주시옵소서” 하며 생떼를 부린 것이다. 거듭 요청 했는 데도 황실에서 들어주지 않자 윤택영은 눈을 해외로 돌렸다. ‘허울뿐인 대한제국 황실에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빚을 떠넘기려면 돈 있는 곳에 줄을 대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일본 정부에 손을 벌린다.
해풍부원군 윤택영씨는 황후폐하 가례시에 50만원 빚을 졌는데 황실에서 물어주기를 운동하다가 아니 되므로 장차 일본으로 건너가 운동코자 한다더라. (‘신한민보’ 1909년 9월1일자)
일본 정부가 무슨 자선단체도 아니고 사위도 안 갚아주는 빚을 대신 갚아줄 리 있겠는가. 일본 정부는 이웃 나라 황제 장인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단칼에 거부한다. 그러나 한 번의 실패로 물러설 윤택영이 아니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황실과 통감부에 자기 빚을 갚아달라고 거듭 요구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윤택영이 황실과 통감부를 상대로 채무해결 운동을 벌인 지 1년 만에 채무를 일거에 해결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호시탐탐 국권을 노리던 일본이 한일강제합방을 단행한 것이다.
윤택영은 황실의 외척으로 합방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후작에 봉작되고, 은사공채(恩賜公債·한일합방 유공자에게 총독부가 내린 사례금) 20만원을 받는다. 채무를 완전히 털어버릴 수는 없는 금액이었지만, 그럭 저럭 빚쟁이들을 무마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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