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는 왜 뒤주 속에서 죽은 것일까
〈46〉 용주사-상
데스크승인 2013.08.26 16:07:47 탁효정
제목의 ‘국민성금’으로 용주사 세운 뜻은? 아래에 이어 집니다.
(시간내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광기 때문이었나, 정치적 모함 때문인가
죽은 이유 놓고 부인과 아들 엇갈린 증언
사도세자는 왜 뒤주에 갇혀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이 문제는 수백년간 한국사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이 미궁에 빠진 가장 큰 이유는, 혜경궁홍씨와 정조의 증언이 극명하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도세자는 심각한 정신병을 앓았고 그로 인해 영조의 미움을 받아 죽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통설이었다. 이는 혜경궁이 남긴 생생한 증언에 근거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19살 무렵부터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영조까지 죽이려 할 정도로 광기를 드러냈다. 이를 보다 못한 영빈이씨가 아들의 상태를 영조에게 숨김없이 전하면서 세자가 죽게 되었다는 것이 <한중록>의 설명이다.
하지만 정조가 남긴 <현륭원기>에 등장하는 사도세자는 무예에 뛰어나고 매우 명석한 인물이었으며, 요순(堯舜)에 버금갈 정도로 제왕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노론 벽파들의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 정조의 증언이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과 그의 아들 정조의 증언이 왜 이처럼 극과 극을 달리게 된 것일까. 정조는 자신의 왕위계승을 반대하고 동궁시절 침실에 자객까지 보낸 벽파 세력을 반드시 숙청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사도세자의 죽음은 반드시 억울한 죽음이 되어야만 했다.
혜경궁은 아들 정조에 의해 친정 집안이 멸문되다시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난 후 혜경궁은 손자인 순조에게 임오사변의 진실은 이러했다는 신세한탄을 하면서 친정의 명예를 되찾아주기를 호소했다. 그 기록이 바로 <한중록>이다.
정조가 <현륭원기>를 쓴 것도,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쓴 것도 각자의 정치적 목적이 담긴 행위였기 때문에 진실 여부를 가리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사도세자가 경계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었으며, 이는 영조의 빗나간 부성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평생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콤플렉스에서, 경종을 죽였다는 누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영조는 아들만큼은 후궁의 아들이 아닌 제왕의 후예로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100일이 갓 된 아이를 어미에게서 떨어뜨려 세자궁에서 홀로 크도록 했다.
영조는 아들을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 손에 크게 함으로써 경종 독살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또한 아들이 만백성의 스승(君師)으로 성장하여 왕권강화의 기틀이 되어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유교적 덕치를 강조했던 영조와 달리 사도세자는 무예와 잡문, 도교서적을 더 좋아했다.
이런 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영조는 아들만 보면 화를 내고, 꾸지람을 퍼부었다. 그럴수록 세자는 궁궐 구석진 곳을 찾았고 점점 분노를 다스릴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세자의 대리청정 시기에 폭발했다. 영조는 노론들과 손을 잡고 왕위에 오른 임금이었다. 그런데 세자는 노론들과 사사건건 반목했고 오히려 소론들과 정치적 견해를 같이 했다.
이에 노론 대신들은 세자가 궁에서 저지른 문제, 저자거리에서 일으킨 사건들에다, 떠도는 소문까지 보태서 영조에게 고해바쳤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영조는 아들을 불러 자결을 명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죽으면 300년 종묘사직이 망한다. 네가 죽으면 종묘사직은 보존할 수 있다. 그러니 마땅히 네가 죽어야 한다.”
어린 세손이 아비를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영조는 아들을 뒤주에 가둔 채 8일간 방치했다. 외조부를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이 침묵을 지켰고, 심지어 친할머니 영빈이씨와, 어머니 혜경궁홍씨조차 죽어가는 세자를 외면했다.
[불교신문2940호/2013년8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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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성금’으로 용주사 세운 뜻은?
〈47〉 용주사-하
데스크승인 2013.09.03 탁효정 |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정조, 범국민 참여 유도해 아버지 억울함 알리려
유교식 추존 한계…불교식 추숭으로 승화 시키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당시 정조의 나이는 11살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 아이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신하들의 예상을 깨고 영조는 손자를 다시 불러들여 동궁으로 삼았다.
단,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붙었다. 첫째는 영조가 죽은 뒤에도 아비의 일을 들추지 않겠다는 것, 둘째로 죽은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어 대통을 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후궁 정빈이씨의 소생으로, 사도세자의 배다른 형이었다.
아비의 죽음, 그를 둘러싼 모든 사건을 목도한 정조는 그 기억들을 꽁꽁 묶어 마음 저편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15년간 그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은 채 할아버지와 노론의 안심을 얻는데 성공했다.
1776년 3월 10일 영조가 세상을 떠난 지 6일 뒤,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치른 정조는 대신들과 첫 대면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온갖 음모와 살해위협을 감내하며 15년을 기다려온 정조는 드디어 가슴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들었다. 가장 먼저 자신의 외가이자 노론의 핵심세력인 풍산홍씨 가문에 대한 복수가 시작됐다.
아비를 죽이자고 주청을 올린 외조부 홍봉한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어 자신의 아비에 대해 온갖 소문들을 전해 바친 노론 대신들과 동궁시절 침실에 자객까지 보낸 벽파들에 대한 숙청이 줄줄이 이어졌다.
이로써 아비의 복수는 일단락되었지만, 그럼에도 정조는 아버지를 부왕(父王)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정조는 영조의 명을 받들어 효장세자의 뒤를 잇는 형식으로 왕위에 즉위했고,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여 그의 위패를 종묘에 배향했다.
이와 함께 사도세자에 대한 추존도 진행시켰는데, 장헌세자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사당을 경모궁으로 추존시켰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한다면 이는 자신의 종통을 부정하는 행위이자, 영조에 대한 배반이었기 때문이다.
유교식으로는 더 이상 생부에 대한 추숭을 할 수 없었던 정조가 선택한 방법은 불교식 추숭, 즉 원당의 설치였다. 정조는 1789년 현륭원을 화성으로 이전하고, 현륭원 바로 곁에 용주사를 세웠다. 정조는 이미 동궁 시절부터 의왕 청계사, 금강산 신계사 등을 아버지의 원당으로 삼았는데, 용주사의 창건은 그와는 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정조는 용주사 창건을 위해 대국민 모금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장흥 보림사의 보경스님에게 대화주승이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보경 스님은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고위관료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들로부터 보시를 받아 용주사 창건기금을 마련했다.
보경스님의 지휘 아래 전국 팔도의 승려들이 화주승으로 참여했고, 96명에 달하는 관료들이 물자조달에 동참했으며, 8만7000냥에 달하는 보시금이 모아졌다. 용주사 불화는 당대 최고의 화가 김홍도가 감독했고, 용주사 경내에는 <부모은중경>을 판화로 새긴 그림들이 안치되었다.
정조가 왕실의 내탕금 대신 국민성금을 통해 용주사를 조성한 것은 신료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려는 정치적 의도 또한 강하게 내포돼 있었다.
생부의 원당을 짓는 일에 범국민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떳떳한’ 아버지의 존재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는 “내 아버지는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무고하게 죽었다, 나는 죄인의 아들도, 정신병자의 아들도 아니다”라는 의미 또한 담겨 있었다.
세상사람 모두가 미치광이라 손가락질 한 아버지, 하지만 정조에게 사도세자는 평생토록 안타깝고 그립기만 한 아버지였다. 왕이 된 아들이 그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 국민들이 아비의 억울한 죽음을 알아주고 함께 안타까워 해주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불교신문2942호/2013년9월4일자]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습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습니다. 전국 5규정소(糾正所: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했으며,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했습니다.
또한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현재 절의 신도는 약 7천여 세대에 달하며 정기, 비정기적으로 많은 법회가 이루어지고 또 법회를 통해 교화활동을 행하고 있습니다.
용주사는 이와 같은 수행자들이 모여 면벽참선하면서 진리를 찾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대중포교 활동을 통해 부처님의 지혜를 전하며, 또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효행교육원을 설립, 운영을 통해 불자교육을 서원으로 일반인도 누구든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효행교육으로 불교신행관과 인성교육을 사회로 회향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왕실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었던 만큼, 용주사는 여타의 사찰과는 다른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었고, 정조가 죽은 뒤에는 정조와 비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었다. 또한, 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전국5규정소(全國五糾正所)와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는 전국5규정소(全國五糾正所)이 설치되어 절의 위세를 크게 떨칠 수 있었다.
또, 전체 가람배치는 일반 절들과 크게 다른 점은 없으나, 사찰의 영건부터 국가가 관여한 만큼 전각의 구성방식에 있어서는 궁궐이나 관아 같은 형상을 보여준다. 천보루를 받치고 있는 반듯반듯한 장초석이나 판벽으로 마감된 천보루 좌우 승방의 입면, 그리고 대웅전의 기단과 지붕 장식 등이 그 예이다.
또, 용주사 대웅보전에는 예사롭지 않은 탱화가 걸려있다. 당대의 탱화들이 일반적으로 평면적이고 선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음에 반해, 용주사 탱화에서는 서양풍의 명암법과 다양한 색채가 혼합되어 있어 훨씬 화려하고 사실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기록상에는 김홍도를 비롯한 당대의 신진 화가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어 서양화풍을 익힌 화가들의 솜씨임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이 외에도 용주사에는 정조가 용주사 부처님을 받들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쓴 봉불기복게와 부모의 열 가지 은혜를 찬양한 부모은중경이 제작, 보관되어 있어 부친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느껴 볼 수 있다.
주소 :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188 / 전화번호 : 031-234-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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