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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조선시대

득남, 왕실여인들의 ‘로또’ / 남양주 내원암 (上)

by 연송 김환수 2013. 10. 18.

득남, 왕실여인들의 로또

 

49남양주 내원암 - ()

 

 

데스크승인 2013.09.17 13:52:28

탁효정 |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왕자만 낳아라, 세상을 얻을 것이니

손 귀해진 조선후기 왕자발원 원당 급증

 

딸을 낳으면 여자들은 운다. 니 팔자도 나처럼 이렇게 고되겠구나 싶어서 울고, 시어머니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서러워서 또 운다. 요즘에는 딸 낳은 여자가 대접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지만, 필자의 친구들 중에 딸 낳았다고 칭찬받은 경우는 아직까지 단 한 명도 없다.

 

현대사회에서 아들은 시월드(‘자가 들어간 사람들의 세상)로부터 며느리를 보호하는 방패막 정도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 있어서 아들은 한 여자가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이자 존재의 이유였다. 다시말해 아들을 낳은 그때부터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들=의 등식이 성립하던 조선후기 왕실의 상황은 더더욱 그러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왕실의 손이 매우 귀해졌는데, 선조부터 순종까지 14명의 왕들 가운데 왕비의 소생은 효종, 현종, 숙종, 헌종, 순종 등 5명에 불과했다. 후궁의 소생 또한 매우 적고 대부분 요절해서, 2명 이상의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나중에는 강화도에서 농사짓고 살던 무지렁이 도령을 데려와 왕으로 삼거나(철종), 왕실과 촌수가 수십촌 떨어진 왕친을 양자로 삼아 왕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고종).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왕의 후궁들은 대부분 명문집안의 여식들 중에 간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친정집안의 가격(家格)이 후궁의 지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면 왕자를 낳은 궁녀가 가장 높은 첩지를 받았다. 출신이 무수리든, 나인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왕자를 배출하기만 하면 그는 단번에 내명부의 정1품 빈()의 품계를 받았다.

 

조선후기에는 왕의 승은을 입은 여자들 중에도 후궁이 되지 못하는 여자가 허다했다. 나인 출신이 딸만 낳은 경우에는 첩지를 아예 못 받거나, 후궁이 된다고 해도 높은 첩지를 받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왕자를 낳는 경우에는 왕비나 대비에 버금가는 권력과 경제적 보상이 주어졌다.

 

이같은 남아선호 현상은 왕실불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조선후기에 들어 왕실원당에서 발견되는 커다란 변화상 중 하나는 왕자탄생을 발원하기 위한 원당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왕실에서 원당을 짓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은 부모나 남편, 요절한 자식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아들 낳기를 발원하는 왕비나 후궁들의 기도처가 훨씬 더 많이 설치되었다. 이는 조선전기 구도적(求道的) 성향의 왕실불교가 후기에 이르러 기복적(祈福的)으로 변화되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왕비가 버젓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후궁이 왕자탄생 발원 기도처를 설치하는 것은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할 참람한 행위였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러 왕실의 손이 워낙 귀해지다 보니, 아이를 낳지 못하는 왕비는 왕비대로, 후궁은 후궁대로 왕자 발원 기도처를 곳곳에 설치했다. 또한 왕자를 배출하지 못한 왕비의 발언권은 매우 미약했기 때문에, 왕자탄생 기도처에 대한 보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왕비나 후궁이 아들을 낳기 위해 기도를 올리던 즈음 왕자가 탄생하기라도 하면 그 기도처는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았다. 사찰 인근의 경작지와 산림이 하사됐고, 절 주변에는 금표가 쳐져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금됐으며, 지방관아에 바치던 엄청난 세금이 모조리 면제되었다. 게다가 그 왕자가 왕위에 오르기라도 하면 그 절은 왕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성역화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찰이 영조 탄생 기도처인 파계사와 화엄사, 그리고 순조 탄생 기도처인 남양주 내원암, 순종의 탄생 기도처 화계사이다.

 

[불교신문2946/2013918일자]

 

 

 

 

 

 

남양주 내원암 (南楊州內院庵)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수락산(水落山)에 있는 사찰.

종 파 : 대한불교조계종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강원도 건봉사(乾鳳寺)의 스님이 묘향산(妙香山)에 있던 16나한(十六羅漢)을 옮겨 내원암에 봉안하여 성사(聖寺)’라고도 불렸다.

 

봉선사본말사지에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사찰의 면모를 온전히 갖추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로 1794(정조 18)부터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과 승려들의 노력으로 사세가 점차 번창하였다.

 

1794년 조정의 지원으로 내원암 서쪽에 칠성각(七星閣)을 지었으며, 1796년 사성전(四聖殿)을 건립하였고 1825년에 지족루(知足樓)를 새로 지었다. 이어 1880(고종 17)에는 조정에서 내원암의 모든 전각을 중건하였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1955년부터 다시 옛 모습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비구니 성민(性敏)스님이 칠성각과 요사·대방(大房)을 신축하였으며, 1968년에는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였다. 그 후 영산각(靈山閣)과 요사 2동이 지어졌고 미륵전을 복원하였다.

 

 

 남양주내원암괘불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