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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역사 조선시대

조선시대 옥새(玉璽), 어보(御寶)

by 연송 김환수 2013. 8. 17.

옥새 (玉璽)

 

제왕의 인장으로서 옥으로 제작한 것을 옥새, 금으로 제작한 것을 금보(金寶) 혹은 금인(金印)이라 하였으나, 금보도 옥새로 통칭

 

*** 어보 (御寶) :  왕가에서 쓰던 도장

 

옥새 (玉璽)

우리 나라 고대부터 대한제국기까지의 국왕 인장.

유형 : 유물

시대 : 조선

성격 : 인장

소장처 : 규장각, 서울 종묘

재질 : ,

관리자 : 규장각, 서울 종묘

 

제왕의 인장으로서 옥으로 제작한 것을 옥새, 금으로 제작한 것을 금보(金寶) 혹은 금인(金印)이라 하였으나, 금보도 옥새로 통칭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 중국의 왕들은 권위의 상징으로 금인을 사용하였으나, 진시황제(秦始皇帝) 화씨옥和氏璧을 얻어 천자의 인장을 제작한 뒤부터 역대의 황제들이 옥새를 사용하였다.

 

금인은 제후나 친왕들에게 사용되었고, 부여 이래 중국에서 우리나라 왕들에게 준 것도 금인이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옥새로 불렀다.

 

여기에는 濊王之印(예왕지인)’高麗國王之印(고려국왕지인)’ 혹은 朝鮮國王之印(조선국왕지인)’ 등의 인문을 새겼다. 1897(광무 1)에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옥새를 제작, 사용하였는데 그 인문에는 大韓國璽(대한국새)’皇帝之璽(황제지새)’의 두 가지가 있었다.

 

옥새는 왕조시대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대교린의 외교문서 및 왕명으로 행하여지는 국내문서에 사용되었고, 왕위계승시에는 전국(傳國)의 징표로 전수되었다.

 

또한, 국왕의 행차시에는 그 위의를 과시하기 위하여 행렬의 앞에서 봉송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옥새는 상서원(尙瑞院)에서 도승지의 책임 아래 관리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는 옥새의 개념이 폐지되고 새로운 국가의 상징으로 국새(國璽)제도가 마련되어 19495大韓民國之璽(대한민국지새)’가 제작되었고, 19703월 인문을 한글 전서체(篆書體) ‘대한민국으로 고쳤다. 국새

 

참고문헌고려사(高麗史)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대한민국법령집(大韓民國法令集)

사기(史記)

삼국지(三國志)

 

 

[유물명]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 / 皇帝御璽 
[유물번호] 보물 제1618호 
[분류] 어보 
[재질] 금, 은 합금 
[크기] 전체높이4.8㎝, 가로 5.3㎝, 세로 5.3㎝, 무게 794g 
[지정일] 2009년 09월 01일

[내용] 보물 제1618호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는 전체높이4.8㎝, 가로 5.3㎝, 세로 5.3㎝, 무게 794g의 크기로 금, 은 합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손잡이〔인뉴(印?)]는 거북이 형태이고 인면(印面)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 4자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제국의 황제가 사용한 어새로서의 기품을 지니고 있다.

 

또한, 어새와 함께 보물이 된 내함(內函: 어새를 넣어 둔 함)은 황동으로 만들어졌으며 특이하게 내부에 인주함(印朱函)이 들어 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는 조선시대 어보 제작의 일반적인 방식인 합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인면을 깎아 글자를 새겨 넣은 기법〔착인법(鑿印法)〕역시 조선시대 어보 제작에 쓰이던 기법으로 그 제작 형태가 조선시대 어보제작의 전통방식을 따랐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 어새가 찍혀 있는 서신(‘1909년 1월 1일에 고종황제가 호머 헐버트에게 미국에 유학 간 조카(조남복)를 잘돌보아달라고 요청하는 서신’) 진본(眞本)이 발견되어 황제어새가 당시에 사용된 실물이었음이 확인됐다.


이와 함께 ‘1903년 11월 23일 이태리 군주에게 보낸 친서’ 등 이 어새의 특별한 사용례들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가 고종황제가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지키기 위해 비밀리에 제작, 휴대하며 사용한 어새였음을 알려주며 황제위(皇帝位)에서 물러난 후에도 개인적인 사신(私信)에 계속 사용하였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어새가 다른 어새류에 비하여 작은 크기로 만들어졌고,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수록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

 

고종황제는 일본의 국권침탈을 막기 위해 비밀 외교활동을 펼치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어새를 새로 만들 필요성을 가지게 되고, 기밀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당시 국새, 어새를 관장한 내대신(內大臣)의 직제를 통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관장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휴대 비장(秘藏:남이 모르게 소중히 간직함)하기에 적합한 크기로 제작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비밀리에 사용된 어새가 대한제국황실 공용(公用)의 보인(寶印)과 부신(符信)을 수록한『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실릴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이며, 같은 이유로 고종황제는 퇴위 후에도 이 어새를 간직하며 개인적인 용도로 계속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의 보물 지정은 고종황제가 일본의 국권침탈 위협에 대항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펼친 주권수호운동의 중대한 역사를 증명하고, 이 시기 우리 역사의 실체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데서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 사용례>
(1) 1903년 11월 23일 이탈리아(義國) 君主에게 보낸 親書
(2) 1904년 7월 1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3) 1904년 9월 6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4) 1904년 11월 20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5) 1905년 1월 10일 러시아 황제에게 비밀리에 보낸 친서
(6) 1905년 4월 3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7) 1905년 11월 18일 이후 알렌 주한 공사에게 보낸 백지 친서
(8) 1906년 1월 독일 황제에게 보낸 친서
(9)1906년 6월 22일 호머 헐버트를 친서 전달 특별위원으로 임명

    하는 위임장
(10) 1906년 6월 22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5개국 국가원수들

     (러시아, 이태리,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에게 보낸

     친서(5점)
(11) 1906년 11월 1일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2) 1907넌 4월 20일 러시아 황제에게 비밀리에 보낸 친서
(13) 1909년 1월 1일 호머 헐버트에게 미국에 유학 간 조카(조남복)를

      잘 돌보아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
(14) 1909년 10월 20일 상하이 독일계 은행에 예치한 재산을 찾기

      위해 호머 헐버트에게 준 친서 위임장

 

ㅇ 규격(세로x가로)
  - 전체높이 : 4.8cm
  - 세로x가로 : 5.3cm × 5.3cm
  - 무게 : 794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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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인종비 인성왕후 은인 / 仁宗妃 仁聖王后 銀印

[유물번호] 어보 148-1

[분류] 어보

[재질] 구리, 은 등

[크기]

전체높이 : 9.3/인뉴印鈕 : 1.9×6.8×5.8

인신印身 : 8.7×8.6×3.5(2)/인수印綬길이 : 71

[지정일]

[내용]

인문내용 王世子嬪之印


중종 19년(1524) 3월 5일 인종비 인성왕후가 왕세자빈에 책봉되면서 받은 은인이다. 소현세자빈 은인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소현세자빈이 인조 24년(1646) 폐출되어 사사되면서 그가 받았던 교명, 죽책, 어보 등은 모두 불태워졌으므로 현존할 수 없다.

 

또한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이왕직에서 제작한 『宗廟 永寧殿 冊寶錄』 등에 인성왕후의 은인이 존재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 은인이 인성왕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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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숙종비 인경왕후 옥인 / 肅宗妃 仁敬王后 玉印

[유물번호] 어보 158-1

[분류] 어보

[재질] 옥석(사문석serpentine)

[크기]

전체높이 : 8.1/인뉴印鈕 : 8.5×12.3×5.5

인신印身 : 10.1×10.1×2.6/인수印綬길이 : 49.8

[지정일]

[내용]

인문내용 王世子嬪之印


현종 12년(1671)에 숙종이 세자로 있을 때 인경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되면서 만들어진 어보이다. 인경왕후(1661~1680)는 숙종의 비로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로 현종 12년(1671)에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고, 1674년 숙종 즉위로 왕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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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헌종 금보 / 憲宗 金寶

[유물번호] 어보 90-1

[분류] 어보

[재질] 금속(, 수은, 구리, 은 등)

[크기]

전체높이 : 8.8/보뉴寶鈕 : 7.4×13.5×5.9

보신寶身 : 9.8×9.7×2.9/보수寶綬길이 : 86.5

[지정일] 19700101

[내용]

보문내용 體健繼極 中正光大 至聖廣德 弘運章化 經文緯武 明仁哲孝 大王之寶

 

 

고종 3년(1866) 헌종에게 ‘지성광덕 홍운장화至聖廣德 弘運章化’란 존호를 가상하면서 만든 어보이다. 헌종(1827~1849)은 순조 30년(1830)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冊封되어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8세로 제 24대 왕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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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고종비 명성황후 금보 / 高宗妃 明成皇后 金寶

[유물번호] 어보 300-1

[분류] 어보

[재질] 금속(, 수은, 구리, 은 등)

[크기]

전체높이 : 9.0/보뉴寶鈕 : 7.3×13.4×6.0

보신寶身 : 9.9×9.8×3.0/보수印綬길이 : 80.2

[지정일]

[내용]

 

보문내용 王妃之寶

 

고종 3(1866)에 고종의 비로 명성황후를 책봉한 후 만든 어보이다. 보문에는 왕비지보王妃之寶라고 새겼다. 명성황후(1851~1895)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민치록閔致祿의 딸이다. 여주驪州에서 출생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천거로 고종 3(1866) 왕비로 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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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영친왕 금보 / 英親王 金寶

[유물번호] 어보 310-1

[분류] 어보

[재질] 금속(, 수은, 구리, 은 등)

[크기]

전체높이 : 9.3/보뉴寶鈕 : 3.6×9.9×6.5

보신寶身 : 10.7×10.8×2.8/보수寶綬길이 : 46.7

[지정일]

[내용]

보문내용 皇太子寶

 

광무 11(1907)에 영친왕이었던 이은李垠이 황태자로 책봉될 때 만든 황태자보이다. 황태자로 책봉될 때 만들어진 어보는 2과 밖에 없다. 순종과 의민황태자가 책봉될 때인데 보인부신총수에 그려진 순종의 황태자보1897동궁책보문東宮冊寶文에서의 인영印影과 같고, 현 실물의 인영은 1907년의 황태자금책문皇太子金冊文에서의 인영과 같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어보는 의민황태자의 책봉 어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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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철종 금보 / 哲宗 金寶

[유물번호] 어보 95-1

[분류] 어보

[재질] 금속(, 수은, 구리, 은 등)

[크기]

전체높이 : 9.3/보뉴寶鈕 : 8.4×12.1×6.3

보신寶身 : 9.7×9.8×3.0/보수寶綬길이 : 87.8

[지정일]

[내용]

보문내용 熙倫正極 粹德純聖 欽命光道 敦元彰化 文顯武成 獻仁英孝 大王之寶

 

고종 3(1866)에 철종에게 흠명광도 돈원창화欽命光道 敦元彰化란 존호를 추상하면서 만든 어보이다. 보문에 보이는 희륜정극 수덕순성熙倫正極 粹德純聖은 철종 14년에 올린 시호이고, ‘문현무성 헌보영효文顯武成 獻仁英孝는 고종 1년에 올린 시호이다. 철종에게는 모두 8과의 어보를 올렸으나 현재 남아있는 어보는 5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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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문종비 현덕왕후 금인 / 文宗妃 顯德王后 金印

[유물번호] 어보 113-1

[분류] 어보

[재질] 금속(, 수은, 구리, 은 등)

[크기]

전체높이 : 8.7/인뉴印鈕 : 2.2×3.9×5.9

인신印身 : 8.7×8.7×2.8/인수印綬길이 : 71.8

[지정일]

[내용]

인문내용 顯德 嬪印

 

세종 23(1441)에 문종의 세자빈이 승하한후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받으면서 만들어진 어보이다. 현덕세자빈(1418~1441)은 단종의 어머니이다.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로 세종 13(1431) 세자궁에 궁녀로 들어가 승휘承徽에 이어 양원良媛으로 진봉되고, 세종 19(1437) 순빈純嬪 봉씨奉氏가 폐위되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가례를 행하지 못하고 4년만에 승하하였다. 시호는 현덕顯德이며 문종이 즉위한 후 왕후에 추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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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세종금보 / 世宗金寶

[유물번호] sea00008

[분류] 어보

[재질] 금속

[크기]

높이 : 7.0cm 가로 : 10.1 세로 : 10.1 인판높이 : 2.6 무게 : 3.3kg

[지정일]

[내용] 英文睿武 仁聖明孝 大王之寶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50에 만들어진 세종의 어보이다. 조선 4대 임금인 세종(13971450)의 이름은 도(), 자는 원정(元正)으로 재위기간은 14181450년이다. 태종의 세째 아들로,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이며 비()는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186월 형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되자 세자로 책봉되어 그해 8월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과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국가의 전반적 기틀을 잡아나갔다. 정치적으로는 법전과 예악을 정비하였고, 경제적으로는 수취체제의 개편과 농사직설(農事直說)의 편찬·보급을 통해 농업생산을 발전시켰다.

 

또한 자격루·측우기 등의 제작과 칠정산(七政算)의 정리와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은 농업국가로서의 기반을 뒷받침하는 역할도 하였다. 의학에서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방유취(醫方類聚)등을 편찬하여 15세기까지의 우리나라와 중국의 의학기술을 총괄하였다.

 

문화적으로는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각 부문의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방대한 편찬사업을 벌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등이 편찬되었다.

 

이에 따라 활자 인쇄술의 개량도 이루어졌으며 한글 활자도 널리 사용되었다. 시호는 장헌(莊憲), 능호는 영릉(英陵)으로 현재 경기도 여주군에 있다. 손잡이는 거북모양으로 장식하였으며, 퇴색된 붉은색 봉술끈을 부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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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문종비금보 / (文宗妃金寶)

[유물번호] sea00112

[분류] 어보

[재질] 금속

[크기]

높이 : 6.7cm 가로 : 10.1 세로 : 10.1 인판높이 : 2.6 무게 : 3.1kg

[지정일]

[내용] 仁孝順惠 顯德 王后之寶1441(세종 23)에 제작된 문종비 현덕왕후의 어보이다. 현덕왕후(14181441)는 조선 단종의 어머니이다.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로 1431(세종 13) 세자궁에 궁녀로 들어가 승휘(承徽)에 이어 양원(良媛)으로 진봉되고, 1437(세종 19) 순빈(純嬪) 봉씨(奉氏)가 폐위되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가례를 행하지 못하고 4년만에 죽었다.

 

시호는 현덕(顯德)이며 문종이 즉위한 후 왕후에 추봉하였다. 1454(단종 2) 휘호가 인효순혜(仁孝順惠)라 추상되었으며 능은 현릉(顯陵:楊州)이다.

 

원래 능은 소릉(昭陵:安山)이었으나, 단종이 죽은 후 세조(世祖)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단종을 죽인 일을 책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그 능을 파헤쳐 물가로 이장하였다.

 

이후 1513(중종 8)에 소세양(蘇世讓)에 의한 복릉 건의가 조정에서 채택되어 다음에 문종의 묘인 현릉으로 이장되었다. 손잡이는 앞뒤 각각 5개와 4개의 발톱을 가진 거북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적갈색 방망이 술끈을 부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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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정조옥보 / (正祖玉寶)

[유물번호] sea00054

[분류] 어보

[재질] ,

[크기]

높이 : 9.0cm 가로 : 10.2 세로 : 10.2 인판높이 : 2.7 무게 : 1.15kg

[지정일]

[내용] 正祖 宣皇帝寶어보의 손잡이 형태는 해태나 그냥 네모난 손잡이 모양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거북, 용모양이 많다. 재질로는 드물게 은제나 목제로 된 것도 있으나 금보나 옥보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금보인 경우 보통 10cm안팎의 크기에 1(3.75kg) 정도의 무게를 지니며 옥보는 이보다 조금 가볍다.

 

육중하며 위엄을 보이는 정교한 거북상은 조선시대 전기간에 거쳐 계속적으로 제작되었으나 고종의 황제국 선포로부터는 용조각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에 태조와 그 비를 고황제, 후로 추존하고 세자, 빈을 황태자 비로 고쳤을 뿐만 아니라 이미 돌아간 명성황후와 더불어 장조, 정조, 순조, 문조, 진종, 헌종, 철종과 그들의 비들을 차례로 황제와 황후로 올리고 용조각 옥보를 새겼다.

 

이 정조옥보는 이무렵인 1899년에 제작된 것이다. 이 무렵 제작된 용조각은 긴 쌍뿔에 톱니갈기가 돋아난 등을 세워 웅크려 으르렁대는듯 힘찬 모습으로 황제나 황후의 위엄을 나타내 보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옥보에 보이는 용조각은 금보에 비해 거칠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이 옥보 역시 이빨을 드러낸 큰 머리는 위엄을 보이고 있지만 비늘을 비롯한 전체의 조각이 매우 거칠고 단순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