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미륵님전 치성 공덕 왕비를 낳다
■ 대법사 (上)
데스크승인 2013.10.21 탁효정 |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민씨, 특유의 결단력.슬기로 대원군 축출
친인척들 요직에 기용해 세도정치 ‘급급’
명성황후 민씨는 매우 한미한 집안의 고아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외척들의 세도정치에 진절머리가 난 흥선대원군이 고아 처녀를 데려다 며느리로 삼았다는 것인데, 하지만 이는 상당부분 틀린 이야기이다.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 가문은 한미하다고 말하기에 너무 쟁쟁한 집안이었다. 비록 세도정치기에 중앙정계에서 물러나 있기는 했지만, 이 집안은 숙종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조선후기 노론의 핵심세력이었다.
이후 경종이 즉위하고 신임사화가 발발하면서 여흥민씨 집안은 정치적 표적이 되었다. 이에 명성황후의 4대조인 민익수는 가솔들을 모두 데리고 민유중(인현왕후의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여주의 선산으로 낙향했다. 명성황후의 생가가 여주군에 위치한 것은 이 때문이다.
명성황후는 고아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왕비로 간택될 당시 어머니는 살아있었고 양오라비인 민승호도 있었다. 하지만 친형제가 한 명도 없는데다 아비인 민치록은 민씨가 9살 때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여흥민씨 집안은 안동김씨가 득세하던 100여 년 간 중앙정계에 발을 붙이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 또한 미미했다.
이는 흥선대원군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돈의 조건이었다. 노론 핵심에다 왕비까지 배출한 명문가이지만, 외척정치를 할 만한 형제나 아비가 없는 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원군의 기대와 달리, 민씨는 매우 야심만만했고, 고종을 쥐락펴락 할 정도로 총명했다. 그녀가 처음 궁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고종은 이씨라는 궁녀에게 빠져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새에 민씨는 고종의 마음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고종이 직접 쓴 <행록>에는 명성황후를 일컬어 “착하고 간사한 것을 판별하고, 옳고 그른 것을 밝혀내는 데는 과단성이 있어서 마치 못과 쇠를 쪼개는 듯이 하였고, 슬기로운 지혜를 타고나서 기틀을 아는 것이 귀신 같았다”고 전한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던 고종이 민씨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것은 바로 그녀 특유의 결단력과 총명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이 성인이 될 무렵 민씨는 고종을 부추겨 운현궁에 집중돼 있던 권력기구들을 모두 와해시키고 대원군을 하야시키는 한편 고종의 친정(親政)을 이끌어냈다.
여흥민씨의 집성촌, 여주군 가남면 안금리에 위치한 대법사는 명성황후의 원당으로 전해진다. 안금리에는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후와 그의 후손들의 묘가 있으며,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묘소 또한 이곳에 위치해 있다.
대법사
필자는 수년전 여주 명성황후 생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민씨의 원당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대법사와 여주문화원을 찾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법사에 관한 문헌 기록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대법사 주지 대원스님과 마을 사람들의 구술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구전에 의하면, 원래 이곳은 절이 아니라 안금리 마을을 수호하는 미륵이 서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어머니 이씨는 여러 자식들이 모두 요절하자, 집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미륵당에서 매일 기도를 올리며 아들 낳기를 발원했다. 하지만 결국 딸을 낳고 말았는데, 그 막내딸이 바로 명성황후이다.
1866년 민씨가 왕비로 간택되자, 어머니 이씨는 “미륵당에서 100일 기도를 올려 부처님께서 너를 내려 주셨으니 그곳에 절을 지으라”고 청했다. 명성황후는 그 미륵당을 절로 조성하고, 절 이름을 원당사(願堂寺)라 칭했다. 이후 1970년대에 들어 비구니 대원스님이 원당사를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현재의 이름인 대법사로 개칭했다.
[불교신문2955호/2013년10월23일자]
----------------------------------------------------
대법사 바로가기 : http://www.dbst.or.kr/
====================================================
명성황후, 누가 그녀를 조선의 표상이라 하랴
〈54〉대법사 (下)
데스크승인 2013.10.28 탁효정 |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참혹한 최후, 조선의 운명과 비슷하지만
친족 등용한 정치.부패의 한계 못 벗어나
명성황후 민씨, 최근 10여 년 간 브라운관을 휩쓸고 다니는 그녀의 명대사는 “나는 조선의 국모”이다. 그런데 정말 명성황후는 조선의 국모로 살다가, 조선의 국모로 죽어갔을까.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의 칼에 맞아 죽은데다, 시신 또한 불태워지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민씨의 마지막 순간이 마치 조선이라는 나라의 최후와 너무도 비슷해, 영화나 TV에서는 마치 그녀를 민족의 고통과 슬픔을 담고 있는 아이콘인양 묘사해 왔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지극히 비극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나머지 모든 삶이 조선에 대한 희생인양 비춰지는 것에 대해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명성황후는 조선시대, 아니 한국 전역사를 통틀어 그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권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녀만큼 왕을 완벽히 손아귀에 넣었던 여성도, 시아버지와 싸워서 이길 정도로 힘이 있었던 여성도, 외세를 저울질 할 정도로 정사에 깊숙이 관여한 여성도 없었다. 장녹수, 조귀인, 장희빈 등 한때 조선을 치마폭에 담았던 여성들도 그 중 한두 가지만 가졌을 뿐 모든 것을 송두리째 가진 여자는 없었다.
반면 명성황후는 왕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여자였을 뿐만 아니라, 여흥민씨라는 대단한 집안 출신이었고,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였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경국지색’이라는 시시껄렁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대원군을 몰아내고 민씨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자신의 친혈족들을 앞세워 조정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민씨는 자신의 양오라비인 민승호를 절대적으로 신임했는데, 민승호가 반대파의 폭탄테러로 사망하자 그 다음에는 민씨 집안의 봉사손으로 들어온 민영익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쏟았다.
또한 민규호, 민태호, 민영휘 등 민씨 척족들이 조정의 요직이란 요직은 모조리 독점했다. 이들의 집 앞에는 관직을 사고자 하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민씨 척족의 부정부패는 적자에 허덕이던 국가 재정을 더욱더 악화시켰다.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 프랑스, 미국, 영국, 러시아가 차례차례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바람 앞에 등불 신세가 되었음에도 민씨 일족들은 호시절인양 계속 제 배를 불려 나갔다. 이들 중 일부는 일제강점기에 귀족 작위까지 받아가며 호의호식하였다. 1930년대 조선 최고의 부자로 꼽히던 민영휘는 ‘민씨 척족’의 수장으로 꼽히던 인물이다. 이 모든 것들이 민씨가 살아생전 만들어둔 ‘여흥민씨 독재체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은 스스로 최고의 권력이 되고 싶어 하고, 그 권력을 혼자서만 독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힘의 향방에 따라 성군이 되기도, 나라를 말아먹은 폭군이 되기도 한다. 을미사변 당시 민씨가 고종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종묘사직을 보전하시라”였다고 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종묘사직이란 무엇이었을까.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명성황후처럼 명석하고 뛰어났던 여자가 왜 ‘이씨’ 왕조와 여흥민씨만을 위해 살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녀는 역사속의 팜프파탈들과 달리, 보다 큰 꿈을 꿀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모든 이들이 우러러 보는 국모의 자리에서, 그녀의 꿈은 왜 만백성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닌, 시아버지를 몰아내고 친정의 척족들을 심고 자신의 부귀영화를 키우는 데만 그치고 있었을까.
명성황후가 조선이라는 나라의 표상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신문2957호/2013년10월30일자]
'역 사 방 > 역사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한제국 국새·고종 어보 등 인장 9점 美서 압수 (0) | 2013.11.21 |
---|---|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負債) 수난기 (0) | 2013.11.10 |
순조, 네가 일찍 태어났더라면 /남양주 내원암(下) (0) | 2013.10.18 |
득남, 왕실여인들의 ‘로또’ / 남양주 내원암 (上) (0) | 2013.10.18 |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 - 이수건 (0) | 2013.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