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순조, 네가 일찍 태어났더라면…
■ 남양주 내원암 (下)
데스크승인 2013.10.02 14:20:49
탁효정 |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부처님 영험으로 뒤늦게 왕자 얻었으나
아들 복 없던 정조의 꿈, 끝내 미완으로
정조는 아들을 갖기를 누구보다 갈망했다. 세상의 모든 왕들이 그러했지만, 특히 정조에게는 아들이 절실히 필요했다.
정조가 밑그림을 그린 ‘화성 프로젝트’에는 반드시 친아들이 필요했다. 정조가 아들을 원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상왕으로 물러난 다음 자신의 아들이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주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정조가 현륭원을 화성으로 옮기고, 그 곁에 전 국민의 보시금으로 용주사를 세우고, 신도시 수원성을 건설해 개혁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것은 자신이 상왕이 되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 사업이었다. 정조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 자신은 화성경영에 매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아들이 태어나질 않았다. 정조는 1782년(정조 6) 의빈성씨가 아들을 낳자 3년 후 그를 세자로 삼았다. 세살배기 아이를 세자로 삼은 것만 보아도 정조가 얼마나 아들을 기다려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왕비의 아들이라 해도 세 살 짜리를 세자로 삼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문효세자는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요절했고, 세자의 어미 의빈성씨마저 다섯 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수년간 왕실에서는 단 1명의 아이도 태어나지 않았다. 정조의 왕비나 후궁 할 것 없이 전국 방방곡곡에 기도처를 세우고 왕자탄생을 발원했다.
정조비 효의왕후는 평생토록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얼마나 아이를 갖고 싶었던지 상상임신까지 했을 정도였다.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왕비에게 태기가 보였고, 실제로 배까지 불러왔다. 왕실에서는 산실청을 설치하고 왕비의 순산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는 나오지 않았고, 결국 상상으로 임신했음이 밝혀졌다.
정조가 서른아홉이 되던 1790년에 드디어 수빈박씨에게서 아들이 태어났으니, 그가 후일의 순조이다. 순조의 탄생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왕자 탄생을 학수고대하던 정조는 파계사에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용파라는 고승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스님에게 왕업을 계승할 후손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용파스님은 남양주 내원암에서 농산스님과 함께 300일간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날 수빈박씨는 노스님 한 명이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태기를 느끼고 순조를 낳았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내원암에 칠성각과 사성전을 짓고 어필을 하사하는 한편 토지를 하사해 불사에 충당케 하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왕자가 태어났지만, 정조는 그 아이가 장성하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이로 인해 보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뒤 상왕이 되겠다는 꿈도,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겠다는 꿈도, 화성 경영을 통해 ‘강력한 왕권, 찬란한 조선’을 재건하겠다는 꿈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정조가 죽을 당시 순조의 나이는 겨우 11살에 불과했고, 이후 4년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이어졌다. 노론 벽파인 정순왕후는 이 기간 동안 노론 시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천주교 금압령을 내려 정약용 등의 남인 학자들을 귀양 보내거나 사사하였다. 또한 ‘정조의 씽크탱크’ 규장각을 대폭 축소시키고, 친위부대 장용영을 해체했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난 후 정국의 주도권은 순조의 장인 김조순에게로 넘어갔다. 이른바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정조의 삶에서 가장 실패한 일은 아들을 너무 늦게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 문효세자가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순조가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어떠했을까. 아니, 정조가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만이라도 살았더라면 조선의 국운은 어떠했을까. 정조가 꿈꾸던 미완의 혁명은 후대인들에게 깊은 아쉬움을 남겼고, 이는 정조를 주인공으로 하는 수많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있다.
[불교신문2949호/2013년10월2일자]
남양주 내원암 (南楊州內院庵)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수락산(水落山)에 있는 사찰. 종 파 : 대한불교조계종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강원도 건봉사(乾鳳寺)의 스님이 묘향산(妙香山)에 있던 16나한(十六羅漢)을 옮겨 내원암에 봉안하여 ‘성사(聖寺)’라고도 불렸다.
《봉선사본말사지》에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나와 있지만, 사찰의 면모를 온전히 갖추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로 1794년(정조 18)부터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과 승려들의 노력으로 사세가 점차 번창하였다.
1794년 조정의 지원으로 내원암 서쪽에 칠성각(七星閣)을 지었으며, 1796년 사성전(四聖殿)을 건립하였고 1825년에 지족루(知足樓)를 새로 지었다. 이어 1880년(고종 17)에는 조정에서 내원암의 모든 전각을 중건하였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1955년부터 다시 옛 모습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비구니 성민(性敏)스님이 칠성각과 요사·대방(大房)을 신축하였으며, 1968년에는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였다. 그 후 영산각(靈山閣)과 요사 2동이 지어졌고 미륵전을 복원하였다.
남양주내원암괘불도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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