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 신분사(身分史)관련(關聯) 자료조작(資料造作)
이수건(李樹健), 이수환저(李樹奐著)
일(一). 머리말
이(二). 성관(姓貫)의 유래와 조선후기 성관(姓貫)의식의 변화
삼(三). 성관(姓貫)·가계(家系)·인물(人物) 관련 자료의 위조와
위서(僞書)
사(四). 맺음말
일(一). 머리말
역사학은 첫째 사실(史實)에 입각해야 하며, 그 사실은 정확한 사료에 근거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이론과 방법을 구사했다 하더라도 그 근거자료가 거짓이거나 조작되었다면 그 주장이나 결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올바른 사론(史論)은 정확한 사실에서 도출되어야 하며, 정확한 사실은 또한 객관적이고 진실한 사료(史料)에 근거해야 한다.①) 「역사상 의문점은 더 고증을 위해 후세에 전해도 좋지만, 거짓이나 명백한 잘못은 전해져서는 안된다 『의고가전(疑固可傳), 와불가전(訛不可傳)』 라든지, 『진신서(盡信書), 불여무서(不如無書)』 라는 맹자(孟子)의 말과 같이 진위(眞僞)와 허실(虛實)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문헌(文獻) 자료란 위험하기 짝이 없다. 따라서 역사 연구에 있어서 사료(史料)조작에 대한 검증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된다.
사건 조작과 기록 조작은 경제사나 문화사 분야보다는 정치와 신분사 분야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적 의리(義理)와 명분(名分) 및 문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숭상했기 때문에 왕조 교체기와 왕위 쟁탈전 또는 정치세력간의 정권쟁탈전에 있어서 왕위(王位)의 정통성과 적서(嫡庶)·강상(綱常)·충역(忠逆)·명분(名分) 문제가 제기되었는가 하면, 씨족이나 문중 단위에서는 문벌의식과 숭조(崇祖)사상이 양반사회에 만연되면서 그러한 문제와 관련된 사건 또는 기록 조작의 사례가 자주 일어났다. 본고는 이와 관련된 조선시대 역사 속의 기록(문자, 문서) 조작의 사례를 신분사 문제와 관련하여 개관해 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지배계급인 양반은 성과 본관, 가계와 조상 및 족보에 대해서는 유난히 관심이 높았고 또 양반의 신분은 고귀한 혈통과 명조(名祖)·현조(顯祖)에 있다고 간주하였기 때문에 거기에 손색이 있는 자들은 그러한 자료를 자기들의 목적에 맞게 조작하거나 개변시켜 나갔다.
그 결과 양반이 되기 전의 자료, 즉 비양반(非兩班)시절의 자료는 없애거나 후세에 남기지 않고 양반으로 성장한 뒤의 자료만 후대에 전해졌던 것이다. 따라서 현재 역사가가 접할 수 있는 신분사 관련자료 가운데 십오(十五)세기 이전 자료는 극히 영성(零星)한 반면 십륙(十六)세기 이후의 자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입신·출세하여 부모를 현양하는 것을 자손의 도리로 간주한 조선시대 사대부(士大夫)들은 조상의 고귀한 혈통과 혼벌(婚閥), 조상의 벼슬과 학행(學行) 기타 유덕을 전기나 비문으로 남기고 그것을 다시 족보에 기재하는 것을 효도로 간주했기 때문에, 문집과 실기 또는 가승(家乘)과 족보가 편찬될 때 조상의 세계를 소급하고 관직을 과장하고 명조(名祖)를 내세우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조선후기 위보(僞譜)가 속출하고 조상의 업적을 현양하기 위한 위서(僞書)가 나오게 되는 것도 군역(軍役)을 면제받기 위해 양반이 되고자 한 의도에서 뿐만 아니라 양반들의 잘못된 문벌의식과 숭조사상에도 연유했던 것이다.
신분사 관련 자료의 비판에는 그 자료의 시대적 연변과정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성리학의 의리와 명분 및 출처(出處)와 절의(節義) 문제는 고려말기와 조선전기 및 조선후기에 따라 현저한 차이가 있다.
여말(麗末)에는 아직 불교 사회이기 때문에 신유학(新儒學)을 통치이념으로 확정한 조선전기와는 사정이 달랐고, 광해(光海) 정권의 패륜 행위와 중립적인 외교책을 구실로 인조반정을 단행한 십칠(十七)세기부터는 또한 조선전기와 사정이 달랐다. 즉 인조반정(仁祖反正)과 병자호란 이후의 시대적 분위기와 절의·출처·명분관념으로 고려말기를 보려는데서 두문동(杜門洞) 칠십이현(七十二賢) 문제와 같은 조작된 사실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二). 성관(姓貫)의 유래와 조선후기 성관(姓貫)의식의 변화
한국의 성(姓)과 본관(本貫)에 관한 가장 구체적인 모습은 『세종실록지리지』(이하『실지』라 함)의 각 읍(邑) 성씨조에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 자료는 한말까지 민간에 공개되지 않고 그 대신『실지』를 축략·혼효한『신증동국여지승람』이 조선시대 성관의 기본 자료로 인식되고, 성관의식과 보첩 편찬에 유일한 전거가 되었다.그 결과 한국성관의 원형이 상실되고 말았다.
중국식 성씨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왕실·귀족순으로 수용되어 왔지만 한국적 설관(設官)체제가 본격적으로 정착되는 시기는 고려초기였다. 후삼국시대의 격심한 사회적 변동에 따른 신분제의 재편성 과정에서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반도를 재통일한 다음, 당대의 실질적인 지배세력을 대표했던 전국의 호족을 각 출신지·거주지별로 역관계를 고려하여 지역적·신분적 재편성을 단행한 성관체계가 뒷날『실지』의 성씨조로 나타났던 것이다.②)
그『실지』의 각 읍 성씨조에 의거 십오(十五)세기 초에 존재했던 전국 성씨의 종류와 본관수의 성종별 통계자료를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관상으로는 성씨가 기재된 현(縣) 이상 주(州)·부(府)·군(郡)·현(縣)(속현(屬縣)·폐현(廢縣) 포함)은 모두 오사사(五四四)읍, 부곡은 일일영(一一○)개, 향(鄕) 사십팔(四十八)개, 소(所) 사십구(四十九)개, 장(莊) 구(九)개, 처(處) 오(五)개, 역(驛) 칠(七)개, 술(戌) 삼(三)개소로서 향·소·부곡 등은 벌써 고려후기이래 소멸의 과정을 밟아 십오(十五)세기 초에 와서는 거의 혁파되어 토착 성씨들이 유망(流亡)했기 때문에 기재된 성관이 얼마 되지 않았으나 임내(任內)로 존속했던 고려 말 이전에는 각기 토성리민(土姓吏民)'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실지』소재 성수(姓數)는 대략 이오영(二五○)성 안팎이며, 성관수는 토성(土姓)이 이(二), 영칠구(○七九), 망성(亡姓)이 오륙오(五六五), 내성(來姓)(망래성(亡來姓))이 삼팔일(三八一), 속성(續姓)이 오륙오(五六五), 촌성(村姓)(망촌성(亡村姓))이 일이이(一二二), 입진성(入鎭姓)이 사영사(四○四), 입성(入姓)(망입성(亡入姓))이 삼삼이(三三二), 사성(賜姓)·투화성(投化姓)이 이십구(二十九), 합계 사(四), 사칠칠(四七七) 성관이었다.『실지』소재 이러한 성종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본관에 의한 구분 : 주·부·군·현성, 진성(鎭姓), 촌성(村姓), 외촌성(外村姓), 향·소·부곡·처·장성, 역성(驛姓), 술성(戌姓)
성(㉡姓)의 출자(出自)에 의한 구분 : 천강성(天降姓), 토성(土姓)·차성(次姓)·인리성(人吏姓)·차리성(次吏姓)·백성성(百姓姓)·입주후성(立州後姓)·입현후성(立縣後姓)·가속성(加屬姓)
성(㉢姓)의 유망과 이동에 의한 구분 : 망성(亡姓)·망촌성(亡村姓)·경래성(京來姓)·내성(來姓)·입성(入姓)·입진성(入鎭姓)·망래성(亡來姓)·망입성(亡入姓)·속성(續姓)
사성(㉣賜姓)(사관(賜貫))과 귀화성에 의한 구분 : 사성(賜姓)(사관(賜貫)), 당래성(唐來姓)·향국입성(向國入姓)·투화성(投化姓)
『실지』소재 각 성이 딛고 선 본관은 어느 구획을 막론하고 기본적인 구성단위는 촌(村)이며, 그 촌은 다시 읍치(邑治)(치소(治所)·읍내)를 중심으로 내촌과 주위의 외곽촌 및 관내의 각종 임내로 구분되는 데서 성의 종류도 인리성·백성성·촌성·임내성 등으로 구분되었다.
이상과 같이 고려초기 이래 지역을 세분하여 파악했던 성관(姓貫) 체제는 여말선초의 시대적·사회적 변동에 따라 지역적인 편제와 신분구조에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즉 임내의 승격과 소속의 변동 및 소멸, 군현구획의 개편과 병합, 폐합 등 각 성(姓)이 딛고 선 본관의 개편과 변질이 획기적으로 가해지면서 십오(十五)세기 후반부터는 종래 세분된 본관이 점차 주읍(主邑) 중심으로 통합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속현과 촌 및 향·소·부곡성이 군현성에 흡수되거나 동화되어 갔고 속현·향소부곡과 독자적인 촌이 소멸되듯이, 그 곳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가 이제는 당초의 본관을 버리고 소속 군현성에 흡수되거나 그 주읍(州邑)을 그들의 새 본관으로 정했던 것이다.
그 결과 십오(十五)세기 초까지의 성관체제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반영했던 『실지』소재 속현·향·소·부곡·처·장·역·수·촌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 대부분이 그 소속 읍을 새 본관으로 하게 되자 십륙(十六)세기 이후는 십오(十五)세기까지 존속했던 각종 임내성이나 촌성이 거의 사문화되었다. 이러한 사문화는 본관의 개변으로 인한 것이지 그 성 자체가 소멸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양반사회의 발달에 따라 문벌의식이 고조되자 미처 명조(名祖)·현조(顯祖)를 받들지 못한 벽관(僻貫)들이 기성(旣成)의 명문거족에 동화되기 위하여 본관을 바꾸는 개관(改貫)·모관(冒貫) 행위를 자행한 데서 재래 성관의 대대적인 통폐합이 이루어졌다. ③) 그러나 덕수이(德水李), 반남박(潘南朴), 기계유(杞溪兪), 해평윤(海平尹), 풍산홍(豐山洪)·김(金)·류(柳)씨 등은 이미 조선초기에 명문사족(名門士族)으로 기반을 굳혔기 때문에 본관의 폐합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본관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속현 이상의 군현을 본관으로 하면서 이미 조선초기에 사족으로 성장했거나 또는 명조·현조를 확보한 가문은 본관을 바꾸지 않은 반면, 그렇지 못한 군현이나 종래 향·소·부곡 및 촌명을 본관으로 했던 성관들은 당초의 본관을 버리고 소속 주읍을 새 본관으로 정했던 것이다.
황주변씨(黃州邊氏), 연안차씨(延安車氏), 영덕정씨(盈德鄭氏), 여양진씨(驪陽陳氏), 충주지씨(忠州池氏), 아산장씨(牙山蔣氏) 등은 본래 그 본관 군현의 관내 모촌성(某村姓)으로서 『실지』의 각 읍 성씨조에 기재되었던 것이 나중에 주읍을 새 본관으로 한 예이다.
이와 함께 천인층(賤人層)의 양인화(良人化)에 따라 유성층(有姓層)이 격증하게 되었는가 하면, 일반 서민층은 각기 거주지에서 편호(編戶)됨으로써 『실지』에 없던 새로운 본관이④) 각 읍마다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나 그러한 본관들은 현조(顯祖)가 없기 때문에 끝내 유명 본관으로 존속하지 못하였다.
십칠(十七)세기 이후부터 양반사회에서 희성(稀姓)과 벽관(僻貫)을 멸시하는 관념이 만연되어 갔지만 조선전기까지는 성보다는 본관에 따라 성망의 우열과 가격의 차등이 정해진다는 의식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개성(改姓)보다는 본관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경우가 많았다.
십륙(十六)세기 이래 사족(士族)들은 본관이 다르다 해도 동성(同姓)은 동출어일조(同出於一祖)(동조(同祖), 동근(同根)의식)란 관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벽관의 명관(名貫)으로의 개관은 매우 자연스럽게 진행되었고, 그러한 후대적인 개관(改貫)행위는 분관전(分貫前)의 원본관으로 회복한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에 처벌의 대상은 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성은 부계 혈통을 의미하기 때문에 개성(改姓)은 곧 환부(換父)·역조(易祖) 행위로 간주하여 죄악시 함으로써 극히 드물었다고 생각된다. 조선후기 각읍 호적대장상에 나타났던 무명의 본관들은 주로 현거주지와 일치하는 본관으로서 이들 본관은 십구(十九)세기 이래 그들의 양반화에 따라 개관(改貫)을 자행한 결과 자연히 소멸되어 갔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무명의 토성(土姓)들이 기존의 대성·명문으로 개관했던 사례를 토착성이 가장 강인했던 경상도와 성씨의 대종이 거의 '입진성'으로 구성된 평안도의 예를 들어 살펴보면, 십오(十五)세기와 십칠(十七)세기 이후 성관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다.『실지』에 의거하면 경상도의 각 읍 토성 가운데 조씨(曺氏)는 십오(十五)개본, 전씨(全氏)는 십칠(十七)개본, 윤씨(尹氏)는 십륙(十六)개본, 오씨(吳氏)와 백씨(白氏)는 각 십일(十一)개본, 황씨(黃氏)는 구(九)개본, 송씨(宋氏)와 문씨(文氏)는 각 팔(八)개본으로 나타나지만 십칠(十七)세기 이후의 사족(士族)층에는 조(曺)씨는 창녕(昌寧), 전(全)씨는 천안(天安)· 옥천(沃川), 윤(尹)씨는 파평(坡平) ·해평(海平), 오(吳)씨는 해주(海州)· 고창(高敞), 백(白)씨는 수원(水原), 황(黃)씨는 장수(長水)·창원(昌原)·평해(平海), 송(宋)씨는 은진(恩津)·야성(冶城), 문(文)씨는 남평(南平) 등으로 본관의 개변이 만연되어 갔다.
평안도를 비롯한 양계(兩界) 지방은 고려이래 조선전기까지 남부지방의 주민을 사민입거(徙民入居)시켜 각기 거주지 주진(州鎭) 별로 편호, 새 본관을 주었지만, 역시 후기에 와서 문벌의식의 고조로 인해 거주지 본관을 쓰지 않고 원 출신지본관(기성의 대성(大姓)·명문(名門)) 또는 다른 유명본관을 모칭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한편 개성(改姓)의 예를 살펴보면, 고려시대에는 왕(王)이 공신(功臣)·총신(寵臣)에게 왕성(王姓)을 하사(下賜)하기도 하고 왕명(王名)을 피해 순씨(荀氏)가 손씨(孫氏)(일직손씨(一直孫氏))로, 흔씨(昕氏)가 권씨(權氏)(예천권씨(醴泉權氏))로 개성한 바 있으나 조선시대는 그러한 예가 없었다.
단 개국 초에 고려 종성(宗姓)인 왕씨를 개성(改姓)케 한다든지, 수구씨(水丘氏)(평해군(平海郡) 토성)가 구씨(丘氏)로, 의창현(義昌縣) 촌성(村姓)인 구씨(仇氏)가 창원구씨(昌原具氏)로 개성하는 등 그 예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에 반해 개관의 경우는 앞에서 열거한 사례 외에 조선후기 모화사상의 심화로 인해 의창(義昌)(창원(昌原))공씨(孔氏)가'곡부(曲阜)'로, 웅신(熊神)(웅천(熊川))주씨(朱氏) 등이 '신안(新安)'으로 개관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절대다수의 벽관(僻貫)·희관(稀貫)들이 십륙(十六)세기 이래 개관과 모관을 자행한 데서 시간이 흐를수록 명조를 확보한 가계가 증가하는 반면 명조가 없는 성관은 격감해 갔다. 다시 말하면 벽관·희관들의 개관·모관이 결국 양반의 수적 증가를 가져오게 되었고 그것은 또한 족보편찬을 더욱 조장시키게 되었다.
삼(三). 성관(姓貫)·가계(家系)·인물(人物)관련 자료의 위조와
위서(僞書)
조선시대 신분사 연구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먼저 관련 자료에 대한 치밀한 고증과 비판이 전제되어야 한다.
같은 중세사회라 하더라도 고려·조선초기 및 조선중기로 삼(三)등분해서 각 시기의 문헌자료의 특징을 살펴보면 문(文)과 질(質)에 있어 현저한 차이가 있다. 대체로 십오(十五)세기 이전의 신라 및 고려시대는 질에 비해 문이 부족하며 고려말기에는 문과 질이 점차 균형을 유지하는 감이 있었으나 십오(十五)세기 세종조를 중심으로 유교교육이 숭상되고 민족문화를 적극 개발하자 문질(文質)이 빈빈(彬彬)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사림(士林) 세력이 정계와 학계를 장악하는 십륙(十六)세기 이후부터는 문이 질을 능가하는 추세였으며, 십칠(十七)세기 이후로 내려올수록 『문승(文勝)』의 폐단이 더욱 심해 갔다.
십팔(十八)세기 중반을 살았던 이(李) 익(瀷)은 문벌 숭상과 과거제도의 폐해와 함께 당시 사회적 큰 병폐의 대표적예로 『문승(文勝)』을 거론한 바 있고⑤) 방대한 저술을 남긴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도 당시 국가적인 포충(褒忠)·창절책(彰節策)에 편승한 문승(文勝)의 폐해를 지적하였다.⑥)
십륙(十六)세기 이후부터 십오(十五)세기 이전의 질박했던 문헌 자료?nbsp; 붙차(劄)·통문(通文) 등도 질보다는 양과 형식에 치중되었다. 십팔(十八)·십구(十九)세기 이후로 내려올수록 윤색되고 미화된 문헌자료가 마구 쏟아져 나왔고 거기에 더하여 위조(僞造)된 자료와 위서(僞書)까지 속출하게 되었다.
십륙(十六)세기 이래 사림(士林)세계는 지나친 모화사상(慕華思想)과 자국의 기존 사서(史書) 부정 태도로 인해 『삼국사기』·『고려사』·『동국통감』등이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 특히 정도전(鄭道傳)·하(河) 윤(崙)·정인지(鄭麟趾) 등 조선왕조의 개국 세력과 세조(世祖) 공신들에 의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여말수절자(麗末守節者)의 사적과 단종(端宗) 충신들에 대한 기사가 누락되거나 무망(誣罔)되었다고 간주하는 여론이 만연되어 갔다.
십륙(十六)세기 중엽 『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寃記)』가 편찬, 유포되고 여말의 김(金) 주(澍)의 절의 사실이 조작된다든지, 십팔(十八)세기 이래 영조(英祖)의 개성행차와 함께 '부조현(不朝峴)'입비(立碑)와 두문동(杜門洞) 칠십이현(七十二賢) 문제가 대두된다든지, 또 신현(申賢)·범세동(范世東)의「화해사전(華海師全)」과 「화동인물총기(華東人物叢記)」와 같은 위서(僞書)들이 속출하는 것도 위와 같은 사림(士林)의 역사의식 속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말의 수절인사(守節人士)에 관한 이야기를 기술한「김주전」과『차원부설원기』가 선산(善山)을 중심으로 한 십륙(十六)세기 영남사림에 의해 널리 소개되고 읽혀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김종직(金宗直)을 영수로 한 영남사림파의 계보는 여말의 왕조교체기에 '불사이조(不事二朝)'의 절의를 지켜 국초에는 재야세력으로 밀려났던 사학파(私學派)와 십오(十五)세기 중엽 세조(世祖)의 왕위찬탈을 불의로 간주했던 낙향의 재지사족 또는 신진사류가 주축이 되었다.
김종직 부자는 포은(圃隱)·야은(冶隱)의 학통을 직접 전승했을 뿐만 아니라 왕조교체기에 절의를 지켰던 인사들의 사적에 대해서도 부조(父祖)와 향로(鄕老)들로부터 익히 듣고 있었다.
김종직(金宗直)은 뒷날 아버지의 권고로 세조조(世祖朝)에 출사했지만 그와 그 문인(門人)들은 일찍이 이맹전(李孟專)·원(元) 호(昊)·성담수(成聃壽) 등 단종(端宗)을 위해 충절을 지키고 있던 절의파 명사(名士)들을 역방(歷訪)하면서 세조(世祖)의 찬탈경위와 단종(端宗)의 죽음, 소릉(昭陵)의 폐위에 대하여 전후 사정을 전문(傳聞)하게 되었다.
그는 「조의제문(弔義帝文)」과「술주시병서(述酒詩幷序)」를 지으면서 대의명분을 강조하였다. 그의 역사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충절을 강조하는 사관은 그의 제자 김일손·권오복·정여창·이목 등에 영향을 주어 세조의 찬탈과정에서 저질러졌던 각종 궁중비사와 세조의 의롭지 못한 조치 및 훈구세력들의 비리가 그들의 사초(史草)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러한 사초가 결국 무오사화 (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이러한 김일손 등의 사초들은 주인공의 죽음과 함께 소각 당했지만, 그 사초에 담긴 내용들은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편찬한『연산군일기』에 실리는 한편, 무오사림의 의식을 계승한 십륙(十六)세기 사림파에 의하여 야사(野史)로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다.⑦)
조선왕조는 전기와 후기를 막론하고 역사가 편찬될 때 편찬 당시 어느 세력이 집권했느냐에 따라 내용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동서분당 이래 역대『실록』은 당시 집권당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사필(史筆)의 공정성 문제가 야기되어 정권이 교체될 때 수정 또는 개수하는 경우가 있게 되었다.
조선전기도 이(二)대 정치 세력인 훈구(勳舊)파와 사림(士林)파가 대치하였으니 역시 공정성이 문제되었다. 조선 건국 후 편찬에 착수한『고려사』가 오십(五十)여년이 지난 뒤에 간반(刊頒)되었지만 그것을 보는 시각은 왕조 교체기에 집권사대부냐 불사이군의 재야사대부냐에 따라 다르며 세조의 찬탈에 대한 시각도 훈구파와 사림파에 따라 판이하였다.
왕조 교체기와 세조의 찬탈과정을 편찬한 주체는 훈구파이지만 십륙(十六)세기 중반 이후부터 사림파가 대세를 주도하는 입장에 서게 되자, 훈구세력에 의해 편찬되고 정리된 기존의 역사를 새로 인식하고 재평가하려는 데서 그 정도가 지나쳐 위서와 조작된 사실이 나오게 되었다.
또한 왕조교체기와 세조 찬탈기도 시기상 약 육십(六十)여 년의 간격이 있지만 유교적인 의리·명분론으로 두 시기를 대비해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유불(儒佛) 교체기로서 충절 의식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는데 반해 후자는 태종(太宗)·세종(世宗)·문종조(文宗朝)의 숭유주의와 충효(忠孝)·강상(綱常)의 관념의 심화로 인해 세조의 찬탈을 쉽게 용인하려 하지 않은데서 생(生)·사육신(死六臣)과 같은 많은 충절인사가 나오게 되었다.
사림파의 이러한 역사의식은 마침내 여말의 왕조 교체기에도 세조의 찬탈 때와 같이 불사이군의 충절인사가 수없이 많았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차원부설원기』와 두문동 칠십이(七十二)현 문제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寃記)』에 의하면 차(車)·류(柳) 양 성관(姓貫)은 고려 태조(太祖)의 공신인 차달(車達)의 두 아들에서 갈린 같은 뿌리로서 장자 효전계(孝全系)가 차씨성(車氏姓)을, 차자 효금계(孝金系)가 류씨성(柳氏姓)을 각각 취하였다.
그리고 차원부의 선대세계(先代世系)가 기자(箕子)시대까지 소급, 기재되어 있다. 이『차원부설원기』는 편찬 내지 간행·반포된 뒤에 조선후기 각 문중들이 그 기재 내용을 당시의 역사사실로 확신하고 조상유래와 족보편찬에 중요한 사실로 전재, 인용한데서 한국의 성관(姓貫) 의식과 족보 편찬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조선후기 조상들의 전기(傳記)·장갈문(狀碣文) 작성과 족보편찬에 있어 온갖 조작과 협잡이 동원된 것도 그 연원을 추적해보면『차원부설원기』와 관련있는 것들이 많다.⑧)
이 책은 차식(車軾)·차천로(車天輅)·차운로(車雲輅) 삼부자(三父子) 또는 그 삼인(三人) 가운데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의 위작(僞作)이라고 하는 남극관(南克寬)·황윤석(黃胤錫) 등 십팔(十八)세기의 일부 선각자의 지적과 같이, 이 책은 단언하기 어려우나 그 삼부자(三父子)에 의해 조작된 위서(僞書)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이 책에 대해 십륙(十六)세기 후반 이래 최근까지 극소수의 몇몇 학자에 의해 위작(僞作)이란 언급이 있었을 뿐 삼영영(三○○)여년 동안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위서(僞書)라는 판정을 내리지 못했다.
더구나 이 책이 십륙(十六)세기말 이래 일부 영남사림에 의해 입수, 읽히게 되면서 권문해(權文海)의『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과 최(崔) 현(晛)의『문집(文集)』『일선지(一善志)』 권별(權龞)의 『해동잡록(海東雜錄)』 김휴(金烋)의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일륙삼칠(一六三七)) 등에 기재 유포되어 마침내 십팔(十八)세기말 박종악(朴宗岳)(충청관찰사)의 서문(序文)과 홍량호(洪良浩)(이조판서)의 발문(跋文) 기타 당대의 명공 석학들의 추술서(追述書)를 받아 활자본 또는 목판본으로 인반(印頒)되면서 관련 제성관(諸姓貫)의 족보편찬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고 문화류씨(文化柳氏) 쪽에서도 차류동조론(車柳同祖論)에 서서 차류대동보(車柳大同譜)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차원부설원기』의 위작 동기와 위작시기, 위작자, 위작 경위 및 유포과정에 대하여 간단히 논술해 보기로 한다.
첫째, 위작자와 위작시기: 이 책 서명(書名)과 그 내용 일부가 기재된 최초의 도서가 선조(宣祖) 이십이(二十二)년(일오팔구(一五八九))에 편찬된 『대동운부군옥』이라는 데서 십륙(十六)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남극관(南克寬)·황윤석(黃胤錫) 등에 의해 저자들로 추정되는 차(車) 식(軾)·차천로(車天輅)·차운로(車雲輅) 삼부자(三父子)의 활동시기가 십륙(十六)세기 후반에서 십칠(十七)세기 초기까지라는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십륙(十六)세기 후반 차씨(車氏) 삼부자(三父子)에 의해 위작(僞作)되었다고 짐작된다.
둘째, 위작(僞作)동기와 내용: 자신들의 한미(寒微)한 가계(家系)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상 심리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선조실록(宣祖實錄)』등에 나타나는 차씨(車氏) 삼부자(三父子)의 사람됨과 행적을 추적해 보면 삼부자(三父子)가 모두 문재(文才)는 탁월하여 시서(詩書)·문장(文章)으로 일대를 풍미할 수 있었지만, 명조(名祖)가 없고 가계(家系)가 한미하여 사대부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차천로(車天輅) 형제는 이른바 재승덕박(才勝德薄)하여 경박한 언행이 많았고 특히 차천로(車天輅)는 거자(擧子)의 시권(試券)을 차술(借述)해 주고 장원급제했다가 탄로되어 그 거자(擧子)는 삭과(削科)를 당하고 자신은 원지에 유배를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당해 대명(對明)외교에서 막중한 외교문서 처리와 관련하여 차천로(車天輅)와 같은 인재가 필요하여 다시 등용했으나 고관 요직은 끝내 맡지 못하였다.
이러한 차천로(車天輅)의 사람됨과 문장력을 미루어 보아 차씨(車氏) 삼부자(三父子) 가운데 그가 주역을 맡아 위작(僞作)했다고 짐작된다. 위작(僞作)된 내용을 추론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①『차류동조론(車柳同祖論)』에 입각해서 차씨의 선대세계를 정리함에 있어 문화류씨(文化柳氏)가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에 걸친 대벌족이라는 점에서 그 시조격인 류차달(柳車達)의 『차(車)』자와 차씨와의 관계를 설정해 놓고, 십삼(十三)∼십사(十四)세기 『고려사』에 등장하는 차성인물(車姓人物)을 시대순으로 적당히 계보화하고 십삼(十三)세기 이전의 선대세계는 현존 『고려사』에는 없으므로 이를 보충하기 위해 사실이 아닌 서(徐) 희(熙)의 『찬집여사(撰集餘史)』, 정지상(鄭知常)의 『서경야사(西京野史)』, 김방경(金方慶)의 『초당일기(草堂日記)』라는 허구된 위서(僞書)를 거론하였다.
②차원부(車原頫)의 선대가계를 고려후기 이영영(二○○)여년 동안 고관에다 당대 명공·거족의 사위였다는 것으로 위조하였는데, 이것은 완전히 조작된 것이다.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위조해도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③차원부 일가에 대한 가해자로서 이른 바 차문(車門)의 외예사얼(外裔四孼)로 정도전(鄭道傳)·조영규(趙英珪)·함부림(咸傅霖)·하(河) 윤(崙)을 거명한 것은,『고려사』에 기재되어 있는 정도전의 외가천계(外家賤系)와 그것으로 인한 정도전의 우현보(禹玄寶) 가문 모함사건⑨)에 시사를 받아 그와 비슷한 내용으로 사건을 조작한 것 같다.
가해자로 거론한 사(四)인의 후예는 십륙(十六)세기에 와서는 세대가 단절되었거나 미약해서 그러한 사실이 세상에 공개되더라도 대응하지 못할 것을 예측했던 것이다.
또 이 책의 서문과 기문(記文) 찬자를 비롯한 편찬을 주관한 인물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을 제시한 것은 이 책이 편찬된 직후 이들이 모두 단종복위(端宗復位)사건으로 처형됨으로써 이 책이 세상에 공개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④이른바 차문(車門)의 외예사얼(外裔四孼) 문제는, 여말선초의 권문세족 가운데는 내외조상의 세계에 서얼로 간주되는 인물이 많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십륙(十六)세기중엽 이후의 시대적관념으로 여말선초를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내용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태종(太宗) 십삼(十三)년(일사일삼(一四一三)) 처첩분간(妻妾分揀)과 서얼차대법이 제정되기 전까지의 고려후기 내지 선초에는 서얼의 혐의를 받는 자가 많았다. 황(黃) 희(喜)의 모계(母系)⑩)를 비롯한 명공·거족에도 천계(賤系)가 섞여 있었다.⑪)
⑤차원부 일가가 죽음을 당할 때 가해자들이 서얼계란 사실이 기재된 차류동보(車柳同譜)가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서 소각되고 말았다는 내용도 한국 족보사에서 본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국 최초의 편간(編刊) 족보가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일사칠륙(一四七六)년)이므로 그 보다 칠영(七○)여년 전인 태조(太祖) 칠(七)년에 차류족보(車柳族譜)가 판각될 리 없으며 또 차씨와 류씨가 동조(同祖)(동원(同源))라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⑫)
셋째, 위작 및 유포 경위:이『설원기』소재 차원부(車原頫)의 선대세계와 차원부 피살경위가 광해군초 찬술된 차식(車軾)의 신도비명병서(神道碑銘幷序)에 전재되어 있다. 이는 차천로(車天輅) 형제가 선고(先考)의 비문을 류몽인(柳夢寅)에게 청탁할 때 가장(家狀) 또는 행장(行狀)을 제시하였고, 유몽인은 천로형제가 제시해 준 가장 또는 행장을 참고하고 다시 요약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이 책은 편찬체제, 내용서술, 등장 인물들의 행적이나 서(序)·기문(記文), 사십팔인(四十八人)의 응제시(應製詩) 등 어느 것을 막론하고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도 최근까지 이 책을 위서로 단정하지 못한 것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문헌 고증 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반면 선현·선조들의 의리와 충절에 대해서는 무조건 찬양 일변도였기 때문이다.
의리와 명분을 강조했던 성리학의 보급과 사림세력의 성장에 따라 여말의 수절인사(守節人士)와 단종(端宗) 충신들이 십륙(十六)세기 이래 후대로 내려올수록 숭앙되고 반대로 정도전·권근 등 개국파와 정인지·신숙주 등 훈구파는 폄론(貶論)되어 갔다.
이러한 양대 세력에 대한 포폄(褒貶)은 곧 자료상에도 그대로 나타나게 되었다.⑬)
십칠(十七)세기를 기준, 그 이전과 이후는 유교의식·국가․사회적 법제와 관습 및 사림 세력의 소장(消長) 등 사회적 기반과 의례·의식이 현저히 상이(相異)하였다.
조선전기 실록 및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고문서·일기·문집초본과 십칠(十七)세기 이후에 발간된 문집·전기(傳記)·장갈문(狀碣文)을 서로 대비시켜 보면 자료의 연변(沿變)관계를 엿볼 수 있다. 여말의 수절인사(守節人士)와 세조찬탈 때 생존했던 인사 및 역대 사화에 희생된 인사들의 문집·전기·장갈문이 십칠(十七)세기 이후에 편간되거나 찬술될 때 십오(十五)·십륙(十六)세기의 시대상이나 의식보다는 당시의 분위기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차이점을 염두해 두고 관련 자료를 비판해야 한다.
십륙(十六)세기 이래 자료의 변질과정을 추적해 보면, ① 김(金) 주(澍)⑭)·김자수(金自粹)·이행(李行)등의 수절 문제,② 기타 여말 인사들에 대해 실제 그렇지 않은데도 이른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사실을 강조하는 사례,③시문·사장에 시종한 인사를 도학(道學)에 조예가 있는 양으로 서술한 경우, ④문집 초고와 간행된 문집의 다른 점, ⑤문집 편간과정에서 주인공에게 선비 또는 학자·관인으로서 누(累)가 될 만한 것의 삭제, ⑥문집 편찬과정에서 이두(吏讀) 사용문자의 이두(吏讀) 삭제, ⑦세계와 관직의 과장된 기술 등이 있었다.
고려·조선시대로 내려올수록 성관유래와 조상세계에 관한 갖가지 부회(傅會)와 두찬적(杜撰的)인 기술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를 몇 개의 유형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기로 한다.
십사(㉠十四)세기 이래 지방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성장한 성관이나 한미한 가계에서 권문세족으로 성장한 가문들은 그들 나름대로 각기 선조의 유래와 득성(得姓) 사실을 조작하거나 부회하는 예가 많았다.
가령 문화류씨(文化柳氏)·안동권씨(安東權氏)·전의이씨(全義李氏)·선산김씨(善山金氏) 등의 시조 성명이 류차달(柳車達)·권행(權幸)·이(李) ?nbsp; ㅡ나(邏)암?이라는 자의(字義)를 두고 각기 그럴듯한 해석을 가하여 개성(改姓)·개명(改名)사실을 부회(傅會)하고 있는데 이러한 서술은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하겠다.
고려왕조의 진전에 따라 개국공신을 비롯하여 역대 여러 공신을 배출하게 되었고 국가에서 그들의 후손까지 우대하여 여러 가지 특혜를 주었기 때문에 중기 이후에는 실제 공신의 후예가 아닌 가계(家系)가 조상세계(祖上世系)를 조작하는 예가 많아졌다.
특히 고려중기 또는 후기에 군현이족(郡縣吏族)에서 성장한 가문들이 그 시조를 여초(麗初)의 개국(開國) 또는 삼한공신(三韓功臣)에서 찾아 조상세계를 연결하려는 데서 중간에 공백이 생기거나 대수(代數)가 맞지 않은 예가 많았다⑮).
또한 십팔(十八)세기 이래 각 씨족들의 족보 범례를 살펴보면 어느 씨족이나 가문을 막론하고 족보가 속간될 때마다 기존 파계(派系) 외에 새로 첨입(添入)되는 파계가 증가해 갔다.
새로 첨입되거나 연접(連接)되는 파계의 경우를 분석해 보면
①『무후(無后)』난(欄)에 연접시키거나, 형제수를 늘려 끼우는 경우├),
②동명이인(同名異人)의 선조명을 갖고 연접시키는 경우,
③빈한한 양반 가계에 접근하여 재력으로 회유하여 합작, 편보하는 경우
④명조가 없는 기성사족이나 신흥세력이 명조를 확보한 파계와 연합하여 공동의 조상으로 받들기 위해 한 세대를 새로 끼우거나,기존의 형제수를 늘려 끼우는 경우가 있었다.
(㉡)어느 씨족이나 가문을 막론하고 직계 조상과 자손이 누대에 걸쳐 고관 요직을 세습한 예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조선중기 이후에 편찬된 족보 가운데는 고려시대 시중(侍中)· 평장사(平章事)·상서(尙書)·시랑(侍郞)과 같은 고관을 여러 대(代) 세습한 양 기재되어 있다.
비록 같은 시조나 원조(遠祖)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대수(代數)를 거듭함에 따라 여러 파계로 분기되면서 각 파계에 따라 성쇠(盛衰)·소장(消長)이 되풀이 되었다.
특히 조선초기까지는 양자(養子)제도가 확립되지 않아 무자(無子)로 인해 세대(世代)가 단절된 가계(家系)가 많았다. 고려초기 이래 십칠(十七)세기까지 각 시기를 대표했던 명문·거족들의 가계내력을 추적해 보면 직계조상과 자손 범위에서 족세(族勢)·가세(家勢)가 영속(永續)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성과 본관 및 조상에 관한 자료는 대개 후대에서 소급, 기술되며, 특히 신흥세력의 경우 성장되기 전의 한미한 가계나 미천한 조상의 사적은 담겨지지 않은 채 조작되고 수식된 성장후의 자료만이 후대에 남게 된다.
선세(㉢先世) 조상의 유래를 실제는 토성이족인데도 이를 은폐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시대 금석문(金石文)이나 세계도(世系圖)·족도(族圖)·호구단자(戶口單子)와 같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고문서(古文書) 및 조선전기 호적단간(戶籍斷簡)과 초보류(草譜類)에는 향리(鄕吏) 가계로 기술되어 있던 것이 조선중기 이후에는 그러한 선대(先代)의 향리 관계 자료가 개변되거나 삭제되는 등 온통 변질되고 조작되어 갔다.
여말이래 사족(士族)의 선대 향리 관련 자료의 연변과정을 살펴보면 ①선대의 세계(世系)를 소급하다가 향리 직함( 호장(戶長)·부호장(副戶長)·기관(記官) 등)이 나올 때 이를 버리고 그 후손 중에 관인(官人)을 택해 시조로 하는 경우, ②조선 후기 족보처럼 선조(先祖)의 향리직함 대신에 아예 고귀한 관직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③나말여초나 여말선초의 왕조 교체기에 不服臣(妄亻業 )罰定으로 인해 향리로 전락했다느니, 혹은 본래는 사족이었는데 어떤 연유로 인해 본의 아니게 향리로 격하되고 말았다는『사족강리(士族降吏)』라는 그럴듯한 구실을 내세우고 있다.┝) 향리의 후예로 사족이 된 성관의 족보와『연조귀감(掾曹龜鑑)』의 편저자들은 바로 그러한 의도로 기술했지만, 그것은 결코 사실일 수 없다.
예컨대 ①조선시대 명문으로 성장한 압해정씨(押海丁氏) 세계도(世系圖)에서 부계(父系)와 연접된 모계(母系)는 온통 이족(吏族)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②십오(十五)세기초 사족으로 성장한 경주(慶州)의 양좌동손씨(良佐洞孫氏) 세계에서도 부계(父系)는 사족(士族)으로, 그 처부(妻父)는 현직 호장(戶長)으로 기재되어 있다.
③여말이래 대성명문으로 성장한 광주김씨선세(光州金氏先世)도 부계와 연접된 모계에서 이족(吏族)이 나타나며, ④연일정씨선세(延日鄭氏先世)도 부계의 처계가 이족(吏族)으로 나타나고 있다.
⑤의성김씨(義城金氏)의 중시조격인 김룡비(金龍庇)는 이족(吏族)의 흔적이 없으나 그 사위 가운데 김성단(金城丹)이 의성현 호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존 보첩자료 가운데 부변(父邊)직속은 후손의 조작으로 이족의 직역이 개변(改變)되었으나 그 직계의 처변(妻邊)·외변(外邊)에서 이족이 있는 것은 부계도 당시까지는 아직 이족이었다는 반증이다. 왜냐하면 당시의 혼인(婚姻)은 계급내혼제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족이 현직 향리와 혼인한다는 것은 적어도 고려말기부터는 없었던 것이다.
라말려초(㉣羅末麗初)의 최치원(崔致遠)·최언위(崔彦撝) 등을 비롯하여 김부식(金富軾)·이규보(李奎報) 및 여말(麗末)·조선시대 문사(文士)들이 찬술한 인물(人物)들의 장갈문(狀碣文)이나 족보서문(族譜序文) 등에서 해성관(該姓貫)의 시조 유래를 중국에서 찾고 있는데 이러한 의식은 주로 모화사상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십칠(十七)세기 이래 문벌을 숭상하는 풍조가 더욱 고조되자 왕실·외척·부마(駙馬)·삼한(三韓)(태조(太祖))공신(功臣) 등과 같은 국내 고귀한 기성(旣成) 벌족(閥族)과 연결시키기가 어려운 성관(姓貫)들은 그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서 구하는 풍조가 후기로 올수록 더욱 심해 갔다. 그러나 그 성관이『실지』소재 군현토성으로 나타나는 한 그러한 시조의 동래설(東來說)은 후대에 와서 조작·윤색된 것으로 설득력이 없다.
한편 사족들은 십칠(十七)세기 인조반정(仁祖反正)과 병자호란 이후 대의(大義) 명분과 숭명배청(崇明排淸) 사상이 고조되면서 나타난 국가적인 표충장절(表忠奬節) 정책에 편승하여 자기 선조들의 증직(贈職)·증시(贈諡) 운동을 전개한다든지, 국가의 이러한 정책을 십분 이용하여 심지어 역사 사실을 조작하여 충신·효자·열녀를 만들고, 그렇게 조작된 선조를 봉향하기 위한 사묘(祠廟)나 서원(書院)을 건립하여 향중사림(鄕中士林)에 공인(公認)을 받기도 하였다.
또 임진왜란·병자호란·이괄란(李适亂)·이인좌란(李麟佐亂) 등 전란과 반란 때 순절·창의자(倡義者)에 대한 국가의 포창조치에 편승하여 영남·호남·관서 등 지역별·군현별로 창의록(倡義錄)·회맹록(會盟錄)·동고록(同苦錄)·절의록(節義錄) 등이 쏟아져 나왔다.
영조(英祖) 팔(八)년(일칠삼이(一七三二))과 동왕 십(十)년에 각각 찬(撰)한 경상감사 조현명(趙顯命)의 서문과 김시형(金始炯)의 발문을 받아 간행한『창의록(倡義錄)』은 곽재우(郭再祐)의 현손 곽원갑(郭元甲)과 박윤광(朴胤光) 등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여기에는 화왕수성도(火旺守城圖), 범례,「용사응모록(龍蛇應募錄)」과 「화왕입성동고록(火旺入城同苦錄)」이 수록되어 있는데,「화왕입성동고록」소재 인원을 통계해 보면 곽재우를 중심으로 한 이십(二十)명 외에육십칠(六十七)읍에 육칠영(六七○)여 명으로 경상우도가 십구(十九)읍에 구십칠(九十七)명(일사(一四)%), 경상좌도가 삼영(三○)읍에 사팔구(四八九)명(칠삼(七三)%), 타도가 십팔(十八)읍에 팔십일(八十一)명(일이(一二)%), 미상이 일일(一一)명(일(一)%)이다. 화왕산성 주위에 있는 창녕·현풍·영산 삼(三)읍 출신은 모두 십칠(十七)명인데 반해 격원(隔遠)해 있는 지역인 안동은 일영륙(一○六)명, 예안 삼십륙(三十六)명, 상주 삼십삼(三十三)명, 예천 이십팔(二十八)명, 경주 육십사(六十四)명, 영해 사십일(四十一)명으로 각각 기재되어 있다는 데서 우선 사료적인 문제가 있다.┞) 입성할 수 없었던 인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 지방 유림사회에서는 국가적인 표충창절책(表忠彰節策)과 후손들이 적극 추진했던 조선현양사업(祖先顯揚事業)의 영향으로, 임란 당시의 자기 선조들은 모두 창의(倡義)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하여「화왕입성동고록」, 「팔공산회맹록(八公山會盟錄)」과 같은 각종 창의록, 절의록, 인물의 실기, 전기류 등의 편찬 사업이 만연되고 있었다.
특히 십칠(十七)세기 이래 영남의 유림 사회에서는 자기 선조가 문사(文士), 학자라면 으레 퇴계(退溪)의 학통과 연결시키려고 했던 풍조가 만연되었듯이, 임란을 겪은 뒤 임란 의병장의 후예들이나 신흥양반들은 자기들의 조선(祖先)을 곽재우와 관련시키려고 했던 관념에서 『창의록』과 같은 자료가 나왔다고 본다.
사(四). 맺음말
한국의 성관·조상에 관한 자료는 거기에 대한 의식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변질되어 왔다. 따라서 관련 자료의 시대적·사회적 변화에 따른 연변된 사정을 무시하고 현재 전승되고 있는 자료에 의거한다면 역사적 진실을 제대로 구명할 수 없다.
한국의 중세사회 신분사 관련 자료가 조선후기에 이르러 획기적으로 변질된 요소 가운데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①고려시대까지 역대의 지배세력을 공급했던 향리(鄕吏)를 사족(士族)과 차별하는 중인층(中人層)으로 신분적 격하를 하게 되자 가계·세계·족보 등 신분사관련 자료에서 향리 관련 자료가 삭제되거나 개변되었다는 사실과,
②양반의 요건으로 명조가 필요하게 되자 벽관(僻貫)·희관(稀貫)들의 개관(改貫)·환본(換本)·모관(冒貫)의 협잡이 널리 작용하였다.
③신라 하대이래 조선시대까지 학자·문사들의 유교적인 모화사상의 영향으로 시조 동래설(東來說)이 만연되어 갔다.
④사림정치의 개혁방향 가운데『계절(繼絶), 흥망(興亡)』 사상과 성리학적 수족(收族)과 친목윤리를 권장한 결과 성관의식과 조상세계가 십륙(十六)세기 이래 한말에 내려올수록 종적으로는 조상의 세계가 자꾸 위로 소급되면서 선대세계의 조작이 더욱 심해 갔고, 횡적으로 종족을 수합한다는 의미에서 동성이본들의 합보와 대동보적성격의 보첩류가 쏟아져 나왔다.
한편 십오(十五)세기 사림파에 의해 고조되었던 절의와 명분론은 십칠(十七)세기 인조반정(仁祖反正)과 호란을 계기로 서인(西人)이 집권하면서부터 더욱 숭상되었고, 김상헌(金尙憲)·김장생(金長生)·송시렬(宋時烈) 등이 사상계를 영도하여 숭명배청(崇明排淸)을 고취하고 강상과 명분을 지나치게 강조하자 여말의 개국세력과 십오(十五)세기의 훈구파에 대한 비판이 가해졌다.
그 대신 왕조 교체기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파와 세조(世祖) 등극을 반대했던 인사가 숭앙의 대상이 되자 십칠(十七)세기 이후 사족들은 자기 선조를 그러한 충절과 결부시켜 국가적 포창을 받고자 하였다.
다시 말하면 벌열정권은 그들의 정권유지를 위하여 숭명벽이사상(崇明闢異思想)과 명분절의를 숭상하였고 정권에서 소외된 향반(鄕班)이나 왜란·호란 이후 대두한 신흥양반들은 그러한 정국의 추세에 편승하여 가승(家乘)과 족보(族譜)를 편찬하고 선조(先祖)의 전기와 문집(文集)을 출간한 데서, 조잡하고 과장된 보첩류가 십팔(十八)·십구(十九)세기 이래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조작되고 개변된 조선후기에 편찬된 전기·보첩관계 자료는 그 연변과정을 치밀히 분석 비판한 토대 위에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수건(李樹健) : 작고, 전 영남대 명예교수, 이수환(李樹奐):영남대 국사학과
※본 논문은 원래 이수건 선생님께서 〈조선시대 역사속의 사건조작과 기록조작〉이란 제목으로 발표하기로 기획된 것이다. 선생님께서 계획하신 주요 내용은 (일(一)) 왕조교체와 왕위찬탈 때 조작된 사건과 사료,(이(二)) 정치세력과 당파간의 정권쟁탈과정에서 야기된 사건조작, (삼(三)) 붕당시기 서(西)·남인(南人) 또는 노(老)·소론(少論)간의 환국(換局)을 위한 사건조작(추안(推案) 및 국안(鞫案)자료), (사(四)) 신분사 관련 가계(家系)·조상(祖上)에 대한 기록(문자·문서)조작 : 위보(僞譜), 위서(僞書), 가지석(假誌石) 등이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지난 구(九)월에 갑자기 타계하시는 바람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대구사학회에서는 이번 기획발표의 성격상 이수건 선생님의 논문이 꼭 필요하고, 또 선생님께서 기존에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조작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신 바가 있고 하니, 이수환이 이를 정리하여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였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수환이 이 주제와 관련된 선생님의 글들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①) 이 글은 이수건의 「조선후기(朝鮮後期) 성관의식(姓貫意識)과 편보체제(編譜體制)의 변화」 『황종동(黃鍾東)정년기념 사학론총(史學論叢)』(일구구사(一九九四)), 「조선시대 신분사(身分史) 관련 자료의 비판」 『고문서연구』십사(十四)(고문서학회, 일구구팔(一九九八)), 「족보와 양반의식」 『한국사시민강좌』이십사(二十四)(일구구구(一九九九)), 『한국의 성씨와 족보』(서울대학교출판부,이영영삼(二○○三)) 등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
②) 이수건,『한국의 성씨와 족보』(서울대출판부, 이영영삼(二○○三)) 소재 Ⅳ. 고려시대 성씨(토성)의 내부구조와 분화(分化) 참조.
③) 이수건,「조선후기(朝鮮後期) 성관의식(姓貫意識)과 편보체제(編譜體制)의 변화」『황종동(黃鍾東)정년기념 사학론총(史學論叢)』(일구구사(一九九四)),pp삼구팔(三九八)-사영구(四○九) 참조.
④) 그러한 예는 십칠(十七)세기 이후에 작성된 울산(蔚山)·단성(丹城)·대구(大邱) 등지의 호적대장에서 찾아진다. 경상도 울산부의 경우,『실지』의 해읍(該邑) 성씨조(姓氏條)에는「토성(土姓) 구(九) : 박(朴)·김(金)·이(李)·육(陸)·전(全)·오(吳)·윤(尹)·문(文)·임(林), 경래성이(京來姓二) : 황(黃)·허(許)」인데 반해 광해군 원년(일륙영구(一六○九)) 「울산부호적대장(蔚山府戶籍大帳)」에는 그 곳을 본관으로 한 성관(姓貫)에 『실지』 소재 성(姓) 외에 「신(申)·황보(皇甫)·고(高)·장(張)·지(池)·강(姜)·하(河)·변(卞)·백(白)·양(梁)·태(太)·한(韓)·안(安)·전(田)·서(徐)·배(裵)·방(方)·조(曺)·진(陳)·석(石)·손(孫)·유(劉)·천(千)·송(宋)·유(兪)·구(仇)·곽(郭)·제(諸)·심(沈)·정(丁)·도(都)·성(成)·공씨(孔氏)」등 사영(四○)여 성이나 되었다. 그렇게 많은 성이 울산을 본관으로 호적에 기재했지만 끝내 울산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것은 울산박(蔚山朴)·이(李)·김(金)·오씨(吳氏) 등 몇 성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성관의 변화는 거의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⑤) 『성호집(星湖集)』권삼십(三十), 답권철신조(答權哲身條).
⑥) 황윤석(黃胤錫), 『이재란고(頤齋亂藁)』삼책(三册)(한국학중앙연구원,일구구칠(一九九七)) 권십팔(十八), 신묘(辛卯) 사(四)월 십륙(十六)일조,pp.육륙이(六六二)-육륙삼(六六三)
⑦) 이수건,「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정?nbsp; ㅋ영(英)말영차(瀯箚)?개혁안」 『탁영 김일손의 문학과 사상』(영남대출판부,일구구팔(一九九八)).
⑧) 여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수건,「조선시대 신분사(身分史) 관련 자료의 비판」 『고문서연구』십사(十四)(고문서학회,일구구팔(一九九八)),p.일오(一五)-이오(二五) 참조.
⑨) 『고려사』권일일구(一一九),정도전전(鄭道傳傳)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십이장(十二章)
⑩) 황(黃) 희(喜)의 출신성분은 『세종실록』권사십(四十), 십(十)년 육(六)월 병오(丙午) 및 『단종실록』권이(二), 즉위년 칠(七)월 을미조(乙未條) 참조.
⑪) 이의민(李義旼)·신(辛) 돈(旽)·정도전(鄭道傳) 등의 모계(母系)가 천계(賤系)란 이유를 들어 곧 일반천계 출신과 동일 선상에서 논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의하면 의당 그 소생들은 천례(賤隷)가 되기 마련이나 부(父)쪽의 신분적 배경과 권력으로 얼마든지 면천(免賤)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계(父系)의 위세와 본인의 능력으로 출세하는 자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무신집권(武臣執權) 이래 조선초기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며, 권귀가문에서 많은 처첩을 거느린 결과 비첩소생(婢妾所生)으로 고관요직에 오른 자가 많았다.
⑫) 세종(世宗) 십사(十四)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의 성씨조에 의거 차씨(車氏)의 본관을 조사해 보면 첫째 토성(土姓)으로는 용성(龍城)(수원현의 속현)·봉산(鳳山)·성주(星州)·해남(海南)·안로(安路)(나주목의 속현), 양일(兩日)·율촌부곡(栗村部曲)·석천(石淺)·본정향(本井鄕) 등 구(九)본과 망성(亡姓)으로는 행주(幸州)·송림(松林)·마전(麻田)·무장(茂長)과 아마대부곡(阿磨代部曲), 계석향(桂石鄕), 덕림소(德林所)·처곡처(處谷處)·애수진(隘守鎭) 등 구(九)본, 촌성(村姓)으로는 봉성(峰城)·연안(延安)·강음(江陰) 등 삼(三)본 및 속성으로는 유제처(楡梯處), 종덕장(宗德莊), 도안(道安)·골약소(骨若所) 등 사(四)본이 있다. 차성(車姓) 인물로 고려후기에서 조선초기에 나타나는 본관은 연안차씨(延安車氏)를 비롯하여 용성(龍城)·해남차씨(海南車氏)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차성인물로서 『고려사』에 관인으로 기재된 자는 차거수(車擧首)·약춘(若椿)·약송(若松) 삼(三)부자를 비롯하여 차(車) 척(倜)·차송우(車松祐)·차포온(車蒲溫) 등 주로 십이(十二)세기 말에서 십사(十四)세기에 걸쳐 나오는데 본관이 명시된 것은 연안과 용성 뿐이지만 상기 『세종실록지리지』가 편찬되던 십오(十五)세기 초에는 그 본관이 말해 주듯 여러 이본(異本)이 각처에 산재하였다. 그리고 십오(十五)세기에는 차성인물이 약간명 나타나다가 십륙(十六)세기 후반 차(車) 식(軾)·천로(天輅)·운로(雲輅) 삼(三)부자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면서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⑬) 신흠(申欽), 『상촌고(象村稿)』권오오(五五), 만고제륙(漫稿第六), 춘성록(春城錄).
⑭) 김시양(金時讓),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대동야승(大東野乘)』Ⅳ, 경희출판사, 일구륙구(一九六九)), 윤근수(尹根壽)의 『농암김주전(籠巖金澍傳)』을 전제한 다음, 김(金) 주(澍)의 압록강변 도착시기와 그 외예(外裔)라는 허유성(許惟誠)의 도조선(到朝鮮) 시기를 두고 사실과 다름을 지적하고 「십여년지사(十餘年之事) 호란실실여차(胡亂失實如此) 수백년전사(數百年前事) 언유독득기실(焉有獨得其實) 미지(未知)(김(金))유엽시하여자(有曄是何如者) 독월정제공위기소기이(獨月汀諸公爲其所欺爾)」라 하였다. 김(金) 주(澍)의 사적은 그 후손인 김유엽(金有曄)·김진종(金振宗) 등에 의해 윤근수(尹根壽)와 오운(吳澐) 및 최(崔) 현(晛)·정경세(鄭經世)·이(李) 준(埈) 등에 전설(傳說)되어 윤(尹)은 김주전(金澍傳)을 짓고, 오(吳)는 『동사찬요(東史纂要)』에 실었고, 최(崔)는 『일선지(一善志)』에 실었고, 정(鄭)은 삼인묘(三仁廟)의 김주상향축문(金澍常享祝文)을 지었던 것이다.
⑮) 고려초기 삼한(三韓)(태조(太祖))공신(功臣)인 안동부(安東府)의 권행(權幸)·김선평(金宣平)·장길(張吉)과 그 삼성(三姓)의 선대세계(先代世系)를 비롯하여 김선궁(金宣弓)과 선산김씨(善山金氏), 이도(李棹)와 전의이씨(全義李氏), 손극훈(孫剋訓)과 밀양손씨(密陽孫氏) 등 대개 여초공신(麗初功臣)과 그 후예라는 제가족보(諸家族譜)의 선대조상계보(先代祖上系譜)가 사실에 부합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특히 권행(權幸)과 권수평(權守平)의 연결이 그 예이다.
16) 광해군(光海君) 원년(일륙영구(一六○九))에 작성된 『울산부호적대장(蔚山府戶籍大帳)』소재 울산지방 사족(士族)의 가계와 조선후기에 편간된 해사족(該士族)의 족보를 대조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즉 동(同) 호적(戶籍)의 동면류등포리호이경묵(東面柳等浦里戶李景墨)·경연형제세계(景淵兄弟世系)에 「종실(宗實)↓세형(世衡)↓학(鶴)↓경묵(景墨)·경연(景淵)」으로 기재된 것이, 현종(顯宗) 구(九)년(일륙륙팔(一六六八)) 울산에서 개간(開刊)된 『울산이씨무신보(蔚山李氏戊申譜)』에는 「시조이예(始祖李藝)↓종실(宗實)↓직유(直柔)↓세형(世衡)↓학(鶴)↓경묵(景墨)·경연(景淵) 등」으로 되어 『직유(直柔)』대(代)가 삽입되었다. 특히 호적상의 종실(宗實)과 세형(世衡) 사이에 직유(直柔)의 칠(七)형제가 후기의 족보에 개재(介在)되어 사대파(四大派)를 형성하였다.
17) 토성리족(土姓吏族)에서 여말(麗末)에 벌족(閥族)으로 성장한 성주이씨(星州李氏)·광주이씨(廣州李氏)·기계유씨(杞溪兪氏) 등의 족보(族譜) 및 『연조귀감(掾曹龜鑑)』권일(一), 불복신벌정록(不服臣罰定錄)·사족강리록(士族降吏錄) 참조
18) 이수건, 「『곽망우당문집(郭忘憂堂文集)』의 편간경위(編刊經緯)와 관계자료(關係資料)의 성격(性格)」 『망우당곽재우연구(忘憂堂郭再祐研究)』(I)(일구팔팔(一九八八)).
붙임파일 : 차원부설원기 (한글파일 hwp)
------------------------------------------------------------
'역 사 방 > 역사 조선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조, 네가 일찍 태어났더라면 /남양주 내원암(下) (0) | 2013.10.18 |
---|---|
득남, 왕실여인들의 ‘로또’ / 남양주 내원암 (上) (0) | 2013.10.18 |
조선시대 옥새(玉璽), 어보(御寶) (0) | 2013.08.17 |
왕의 도장 옥새와 보인 (0) | 2013.08.17 |
조선시대에도 만연했던 병역비리, 병역면제 (0) | 2013.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