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알아보기]
왕의 도장 옥새와 보인
정조의 금보 : 어보(御寶) 란 왕가에서 쓰던 도장
조선 왕의 정통성과 왕권을 상징하는 옥새
조선시대 왕의 도장을 대표하는 것은 옥새였다. 옥새란 옥으로 만든 도장이란 뜻인데, 중국의 진시황 때부터 황제를 상징하는 도장으로 이용되었다. 당나라 때부터는 ‘새’의 발음이 죽을 ‘사’와 비슷하다고 하여 보(寶)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왕의 옥새는 중국 황제로부터 조선국왕에 책봉 받을 때 받은 것이었다. 이에 옥새는 조선 왕의 정통성과 왕권을 상징하기도 했다. 옥새는 왕의 도장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대한 도장이라는 의미의 대보(大寶)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인문(印文)은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한문이었다.
조선시대 후계 왕은 즉위할 때, 선왕의 찬궁(欑宮) 앞에서 유언장과 함께 옥새를 받음으로써 후계 왕으로 공인될 수 있었다. 또한 중국에 외교문서를 보낼 때, 이 옥새가 사용되었으며, 주요 통치의례에서도 이 옥새가 이용되었다. 조선시대 왕의 옥새 사용은 태조 이성계의 건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가 공양왕을 뒤이어 왕이 되었을 때에는 공식적으로 감록국사(監錄國事)의 자격이었다. 또한 신왕조의 국명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 공식적인 국가 명칭은 여전히 고려였다. 이에 따라 태조 이성계가 즉위한 1392년 7월 17일부터 조선이라는 국호가 확정된 1393년 2월 15일까지 태조 이성계의 신왕조는 여전히 고려였다.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 자신을 권서국사로 자칭하였으며 당시의 외교문서에는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 새겨진 옥새가 찍혔다. 이 옥새는 공민왕 때 명나라에서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옥새는 태조 2년(1393) 3월 9일자로 명나라에 반환되었다. 이후 태종 1년(1401)에 ‘조선국왕지인’이라 새겨진 옥새를 받았는데, 이 옥새는 병자호란 전까지 조선 왕의 도장을 대표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은 인조에게서 항복을 받기 전에 몇 가지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그 중에는 명나라와 단교할 것, 왕의 큰아들과 둘째아들 그리고 대신들의 아들들을 인질로 보낼 것, 청이 명나라를 공격할 때 군대를 파견해 도울 것, 명나라에 사대하던 예법으로 청나라를 사대할 것 등이 포함되었다.
인조는 항복 직후 항복조건에 따라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는데, 그 증거로 명나라에서 받은 옥새를 청나라에 바쳤다. 청나라는 인조 15년(1637) 겨울에 사신을 파견해 새로 만든 옥새를 전달했다.
이 옥새에는 명나라에서 준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국왕지인’이라는 인문이 새겨져 있었다. 다만 청나라에서 받은 옥새에는 한문과 함께 여진문자가 새겨졌다는 점이 달랐다. 이 옥새가 조선후기 왕의 도장을 대표하였다.
청나라에서 받은 조선 왕의 옥새 그림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청나라에서 받은 조선 왕의 옥새 인문(印文)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실무용과 의례용 도장 따로 있어
한편 즉위 전후에 태조 이성계는 국내의 각종 공문서에 ‘권서국사지보(權署國事之寶)’라는 도장을 사용했다. 이 도장은 태조 이성계가 감록국사에 임명된 1392년 7월 13일 직후에 제조되었다.
즉위 후, 태조 이성계는 고려 때부터 사용되던 국왕신보(國王信寶)와 국왕행보(國王行寶)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한편 조선왕보(朝鮮王寶)를 새로 만들어 썼다. 국왕신보는 관료를 임명할 때, 국왕행보는 여진족 추장 등을 임명할 때 사용되었다.
하지만 조선 건국 이후에도 계속해서 고려 국왕의 도장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었기에 조선왕보를 또 제작하게 되었다. 이 결과 조선 건국 직후에는 권서국사지보, 국왕신보, 국왕행보, 조선왕보 등이 있었으며 이들 도장들이 특별한 기준 없이 혼용되었다.
이후 왕의 도장 종류 및 쓰임은 세종 대의 정비과정을 거쳐 법제화 되었다.
[대전회통]의 규정에 의하면, 왕의 도장에는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되는 대보(大寶), 관료 임명장 또는 국왕 명령서에 사용되는 시명지보(施命之寶), 일본과의 외교문서에 사용되는 이덕보(以德寶), 국왕의 유서(諭書)에 사용되는 유서지보(諭書之寶), 과거 합격증에 사용되는 과거지보(科擧之寶), 국왕이 서적을 하사할 때 사용되는 동문지보(同文之寶), 국왕의 어제에 사용하는 규장지보(奎章之寶), 규장각 각신들의 임명장에 사용되는 준철지보(濬哲之寶) 등이 있었다.
이 도장들은 모두 실무용이기에 궁궐 안에서 보관했다.
과거지보 그림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그런데 왕의 도장에는 실무용 이외에 의례용도 있었다. 왕이 살아생전 신하들이 존호를 올렸을 경우나 돌아가신 왕에게 후계 왕이 시호, 묘호를 올리는 등의 일이 있을 때 존호, 시호, 묘호 등을 새긴 도장을 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 도장들은 의례용이기에 종묘에 모셔졌다.
실무용이든 의례용이든 왕의 도장은 기본적으로 신용 또는 믿음과 관련이 있었다. 이에 따라 왕의 도장을 인신(印信)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므로 왕이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왕의 믿음 또는 신용을 담보한다는 뜻을 함축했다.
조선의 왕은 도장을 이용해 나라 안의 사람들은 물론 주변의 외국인들 그리고 하늘의 조상들에게 자신의 믿음과 신용을 담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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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영조가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에게 내린 은제 어보.
영조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가로 10.2 세로 10.2 높이 9.5cm 5.8kg.
사진 제공 국립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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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보 (御寶) : 왕가에서 쓰던 도장
[내용]
보물 제1618호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는 전체높이4.8㎝, 가로 5.3㎝, 세로 5.3㎝, 무게 794g의 크기로 금, 은 합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손잡이〔인뉴(印?)]는 거북이 형태이고 인면(印面)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 4자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제국의 황제가 사용한 어새로서의 기품을 지니고 있다.
또한, 어새와 함께 보물이 된 내함(內函: 어새를 넣어 둔 함)은 황동으로 만들어졌으며 특이하게 내부에 인주함(印朱函)이 들어 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는 조선시대 어보 제작의 일반적인 방식인 합금으로 만들어졌으며, 인면을 깎아 글자를 새겨 넣은 기법〔착인법(鑿印法)〕역시 조선시대 어보 제작에 쓰이던 기법으로 그 제작 형태가 조선시대 어보제작의 전통방식을 따랐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 어새가 찍혀 있는 서신(‘1909년 1월 1일에 고종황제가 호머 헐버트에게 미국에 유학 간 조카(조남복)를 잘돌보아달라고 요청하는 서신’) 진본(眞本)이 발견되어 황제어새가 당시에 사용된 실물이었음이 확인됐다.
이와 함께 ‘1903년 11월 23일 이태리 군주에게 보낸 친서’ 등 이 어새의 특별한 사용례들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가 고종황제가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지키기 위해 비밀리에 제작, 휴대하며 사용한 어새였음을 알려주며 황제위(皇帝位)에서 물러난 후에도 개인적인 사신(私信)에 계속 사용하였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들은 이 어새가 다른 어새류에 비하여 작은 크기로 만들어졌고,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수록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
고종황제는 일본의 국권침탈을 막기 위해 비밀 외교활동을 펼치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어새를 새로 만들 필요성을 가지게 되고, 기밀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당시 국새, 어새를 관장한 내대신(內大臣)의 직제를 통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관장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휴대 비장(秘藏:남이 모르게 소중히 간직함)하기에 적합한 크기로 제작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비밀리에 사용된 어새가 대한제국황실 공용(公用)의 보인(寶印)과 부신(符信)을 수록한『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에 실릴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이며, 같은 이유로 고종황제는 퇴위 후에도 이 어새를 간직하며 개인적인 용도로 계속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의 보물 지정은 고종황제가 일본의 국권침탈 위협에 대항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펼친 주권수호운동의 중대한 역사를 증명하고, 이 시기 우리 역사의 실체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데서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 사용례>
(1) 1903년 11월 23일 이탈리아(義國) 君主에게 보낸 親書
(2) 1904년 7월 1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3) 1904년 9월 6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4) 1904년 11월 20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5) 1905년 1월 10일 러시아 황제에게 비밀리에 보낸 친서
(6) 1905년 4월 3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7) 1905년 11월 18일 이후 알렌 주한 공사에게 보낸 백지 친서
(8) 1906년 1월 독일 황제에게 보낸 친서
(9)1906년 6월 22일 호머 헐버트를 친서 전달 특별위원으로 임명
하는 위임장
(10) 1906년 6월 22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5개국 국가원수들
(러시아, 이태리,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에게 보낸
친서(5점)
(11) 1906년 11월 1일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
(12) 1907넌 4월 20일 러시아 황제에게 비밀리에 보낸 친서
(13) 1909년 1월 1일 호머 헐버트에게 미국에 유학 간 조카(조남복)를
잘 돌보아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
(14) 1909년 10월 20일 상하이 독일계 은행에 예치한 재산을 찾기
위해 호머 헐버트에게 준 친서 위임장
ㅇ 규격(세로x가로)
- 전체높이 : 4.8cm
- 세로x가로 : 5.3cm × 5.3cm
- 무게 : 794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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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인종비 인성왕후 은인 / 仁宗妃 仁聖王后 銀印
[유물번호] 어보 148-1
[분류] 어보
[재질] 구리, 은 등
[크기] 전체높이 : 9.3㎝/인뉴印鈕 : 1.9×6.8×5.8㎝
인신印身 : 8.7×8.6×3.5㎝ (2단)/인수印綬길이 : 71㎝
[지정일]
[내용]
인문내용 │ 王世子嬪之印
중종 19년(1524) 3월 5일 인종비 인성왕후가 왕세자빈에 책봉되면서 받은 은인이다. 소현세자빈 은인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소현세자빈이 인조 24년(1646) 폐출되어 사사되면서 그가 받았던 교명, 죽책, 어보 등은 모두 불태워졌으므로 현존할 수 없다.
또한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이왕직에서 제작한 『宗廟 永寧殿 冊寶錄』 등에 인성왕후의 은인이 존재한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 은인이 인성왕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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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숙종비 인경왕후 옥인 / 肅宗妃 仁敬王后 玉印
[유물번호] 어보 158-1
[분류] 어보
[재질] 옥석(사문석serpentine)
[크기] 전체높이 : 8.1㎝/인뉴印鈕 : 8.5×12.3×5.5㎝
인신印身 : 10.1×10.1×2.6㎝/인수印綬길이 : 49.8㎝
[지정일]
[내용]
인문내용 │ 王世子嬪之印
현종 12년(1671)에 숙종이 세자로 있을 때 인경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되면서 만들어진 어보이다. 인경왕후(1661~1680)는 숙종의 비로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로 현종 12년(1671)에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행하고, 1674년 숙종 즉위로 왕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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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寶身 : 9.8×9.7×2.9㎝/보수寶綬길이 : 86.5㎝
보문내용 │ 體健繼極 中正光大 至聖廣德 弘運章化 經文緯武 明仁哲孝 大王之寶
고종 3년(1866) 헌종에게 ‘지성광덕 홍운장화至聖廣德 弘運章化’란 존호를 가상하면서 만든 어보이다. 헌종(1827~1849)은 순조 30년(1830)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冊封되어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8세로 제 24대 왕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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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고종비 명성황후 금보 / 高宗妃 明成皇后 金寶
[유물번호] 어보 300-1
[분류] 어보
[재질] 금속(금, 수은, 구리, 은 등)
[크기]
전체높이 : 9.0㎝/보뉴寶鈕 : 7.3×13.4×6.0㎝
보신寶身 : 9.9×9.8×3.0㎝/보수印綬길이 : 80.2㎝
[지정일]
[내용]
보문내용 │ 王妃之寶
고종 3년(1866)에 고종의 비로 명성황후를 책봉한 후 만든 어보이다. 보문에는 ‘왕비지보王妃之寶’라고 새겼다. 명성황후(1851~1895)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민치록閔致祿의 딸이다. 여주驪州에서 출생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천거로 고종 3년(1866) 왕비로 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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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영친왕 금보 / 英親王 金寶
[유물번호] 어보 310-1
[분류] 어보
[재질] 금속(금, 수은, 구리, 은 등)
[크기]
전체높이 : 9.3㎝/보뉴寶鈕 : 3.6×9.9×6.5㎝
보신寶身 : 10.7×10.8×2.8㎝/보수寶綬길이 : 46.7㎝
[지정일]
[내용]
보문내용 │ 皇太子寶
광무 11년(1907)에 영친왕이었던 이은李垠이 황태자로 책봉될 때 만든 ‘황태자보’이다. 황태자로 책봉될 때 만들어진 어보는 2과 밖에 없다. 순종과 의민황태자가 책봉될 때인데 『보인부신총수』에 그려진 순종의 ‘황태자보’는 1897년 『동궁책보문東宮冊寶文』에서의 인영印影과 같고, 현 실물의 인영은 1907년의 『황태자금책문皇太子金冊文』에서의 인영과 같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어보는 의민황태자의 책봉 어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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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철종 금보 / 哲宗 金寶
[유물번호] 어보 95-1
[분류] 어보
[재질] 금속(금, 수은, 구리, 은 등)
[크기]
전체높이 : 9.3㎝/보뉴寶鈕 : 8.4×12.1×6.3㎝
보신寶身 : 9.7×9.8×3.0㎝/보수寶綬길이 : 87.8㎝
[지정일]
[내용]
보문내용 │ 熙倫正極 粹德純聖 欽命光道 敦元彰化 文顯武成 獻仁英孝
大王之寶
고종 3년(1866)에 철종에게 ‘흠명광도 돈원창화欽命光道 敦元彰化’란 존호를 추상하면서 만든 어보이다. 보문에 보이는 ‘희륜정극 수덕순성熙倫正極 粹德純聖’은 철종 14년에 올린 시호이고, ‘문현무성 헌보영효文顯武成 獻仁英孝’는 고종 1년에 올린 시호이다. 철종에게는 모두 8과의 어보를 올렸으나 현재 남아있는 어보는 5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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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문종비 현덕왕후 금인 / 文宗妃 顯德王后 金印
[유물번호] 어보 113-1
[분류] 어보
[재질] 금속(금, 수은, 구리, 은 등)
[크기]
전체높이 : 8.7㎝/인뉴印鈕 : 2.2×3.9×5.9㎝
인신印身 : 8.7×8.7×2.8㎝/인수印綬길이 : 71.8㎝
[지정일]
[내용]
인문내용 │ 顯德 嬪印
세종 23년(1441)에 문종의 세자빈이 승하한후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받으면서 만들어진 어보이다. 현덕세자빈(1418~1441)은 단종의 어머니이다.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로 세종 13년(1431) 세자궁에 궁녀로 들어가 승휘承徽에 이어 양원良媛으로 진봉되고, 세종 19년(1437) 순빈純嬪 봉씨奉氏가 폐위되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가례를 행하지 못하고 4년만에 승하하였다. 시호는 현덕顯德이며 문종이 즉위한 후 왕후에 추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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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세종금보 / 世宗金寶
[유물번호] sea00008
[분류] 어보
[재질] 금속
[크기]
높이 : 7.0cm 가로 : 10.1 세로 : 10.1 인판높이 : 2.6 무게 : 3.3kg
[지정일]
[내용] 「英文睿武 仁聖明孝 大王之寶」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50에 만들어진 세종의 어보이다. 조선 4대 임금인 세종(1397~1450)의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으로 재위기간은 1418~1450년이다. 태종의 세째 아들로,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이며 비(妃)는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1418년 6월 형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세자의 자리에서 폐위되자 세자로 책봉되어 그해 8월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과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국가의 전반적 기틀을 잡아나갔다. 정치적으로는 법전과 예악을 정비하였고, 경제적으로는 수취체제의 개편과 『농사직설(農事直說)』의 편찬·보급을 통해 농업생산을 발전시켰다.
또한 자격루·측우기 등의 제작과 『칠정산(七政算)』의 정리와 같은 과학기술의 발전은 농업국가로서의 기반을 뒷받침하는 역할도 하였다. 의학에서도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을 편찬하여 15세기까지의 우리나라와 중국의 의학기술을 총괄하였다.
문화적으로는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각 부문의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방대한 편찬사업을 벌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이 편찬되었다.
이에 따라 활자 인쇄술의 개량도 이루어졌으며 한글 활자도 널리 사용되었다. 시호는 장헌(莊憲), 능호는 영릉(英陵)으로 현재 경기도 여주군에 있다. 손잡이는 거북모양으로 장식하였으며, 퇴색된 붉은색 봉술끈을 부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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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문종비금보 / (文宗妃金寶)
[유물번호] sea00112
[분류] 어보
[재질] 금속
[크기]
높이 : 6.7cm 가로 : 10.1 세로 : 10.1 인판높이 : 2.6 무게 : 3.1kg
[지정일]
[내용] 「仁孝順惠 顯德 王后之寶」 1441년(세종 23)에 제작된 문종비 현덕왕후의 어보이다. 현덕왕후(1418~1441)는 조선 단종의 어머니이다.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권전(權專)의 딸로 1431년(세종 13) 세자궁에 궁녀로 들어가 승휘(承徽)에 이어 양원(良媛)으로 진봉되고, 1437년(세종 19) 순빈(純嬪) 봉씨(奉氏)가 폐위되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가례를 행하지 못하고 4년만에 죽었다.
시호는 현덕(顯德)이며 문종이 즉위한 후 왕후에 추봉하였다. 1454년(단종 2) 휘호가 인효순혜(仁孝順惠)라 추상되었으며 능은 현릉(顯陵:楊州)이다.
원래 능은 소릉(昭陵:安山)이었으나, 단종이 죽은 후 세조(世祖)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단종을 죽인 일을 책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그 능을 파헤쳐 물가로 이장하였다.
이후 1513년(중종 8)에 소세양(蘇世讓)에 의한 복릉 건의가 조정에서 채택되어 다음에 문종의 묘인 현릉으로 이장되었다. 손잡이는 앞뒤 각각 5개와 4개의 발톱을 가진 거북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적갈색 방망이 술끈을 부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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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정조옥보 / (正祖玉寶)
[유물번호] sea00054
[분류] 어보
[재질] 옥, 석石
[크기]
높이 : 9.0cm 가로 : 10.2 세로 : 10.2 인판높이 : 2.7 무게 : 1.15kg
[지정일]
[내용] 「正祖 宣皇帝寶」 어보의 손잡이 형태는 해태나 그냥 네모난 손잡이 모양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거북, 용모양이 많다. 재질로는 드물게 은제나 목제로 된 것도 있으나 금보나 옥보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금보인 경우 보통 10cm안팎의 크기에 1관(3.75kg) 정도의 무게를 지니며 옥보는 이보다 조금 가볍다.
육중하며 위엄을 보이는 정교한 거북상은 조선시대 전기간에 거쳐 계속적으로 제작되었으나 고종의 황제국 선포로부터는 용조각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에 태조와 그 비를 고황제, 후로 추존하고 세자, 빈을 황태자 비로 고쳤을 뿐만 아니라 이미 돌아간 명성황후와 더불어 장조, 정조, 순조, 문조, 진종, 헌종, 철종과 그들의 비들을 차례로 황제와 황후로 올리고 용조각 옥보를 새겼다.
이 정조옥보는 이무렵인 1899년에 제작된 것이다. 이 무렵 제작된 용조각은 긴 쌍뿔에 톱니갈기가 돋아난 등을 세워 웅크려 으르렁대는듯 힘찬 모습으로 황제나 황후의 위엄을 나타내 보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옥보에 보이는 용조각은 금보에 비해 거칠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이 옥보 역시 이빨을 드러낸 큰 머리는 위엄을 보이고 있지만 비늘을 비롯한 전체의 조각이 매우 거칠고 단순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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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새와 전각
전각이 먼저냐 인장이 먼저냐? 전각은 예술이고, 인장은 기능에 불과한가? 현재 국내 서예․전각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논란 가운데 하나다.
먼저 전각은 ‘한자(漢字)의 서체인 전서(篆書)로 인장(印章)이나 목판 등을 각인(刻印)하거나 각인한 것’을 말한다.
장서용 도장 등의 각인에 많이 쓰이나, 서예가들이 취미나 예술로서도 이러한 각인을 많이 한다. 이 때문에 전각은 예술 장르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인장 역시 사전적 정의로 볼 때 전각과의 차이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나무·돌·고무·수정·금·뿔·상아 등의 인재(印材)에 글자·무늬·기장(記章)·그림 등을 조각하여 인주 등을 발라 개인·관직·단체·장서(藏書) 등의 표지로 문서 ·서화에 찍어 증명으로 삼는 것.’
전각과 인장 사이의 엄격한 구별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각이나 인장 모두 옥새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다만 후대로 오면서 기능성이 강조된 것이 인장이라면 예술성이 강조된 것이 전각이라는 인식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옥새에 있어서만큼은 기능성과 예술성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전각은 옥새전각에서 출발
전각이란 용어도 ‘옥새를 전각한다’는 말에서 출발했다. ‘옥새전각’은 ‘옥새 뉴를 제작하고 인문을 전각한다’는 옥새 제작의 뜻이다. 이 기록은 태조 이성계의 <묘호시호도감의궤(廟號諡號都監儀軌)>에서 옥새(보인)의 전각 제작을 ‘보전각(寶篆刻)’ 또는 ‘옥보전각(玉寶篆刻)’ 등으로 쓰여진 것을 비롯하여, 옥새보인나 어보를 제작한 모든 왕조의 의궤에 전해온다. 고종의 대한제국 이후부터는 보전각 옥보전각을 ‘옥새전각’이라 하고 있다. 보(寶)를 옥새로 품계를 올린 것이다.
‘옥새전각’은 철학을 담은 옥새의 제작을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옥새나 금장, 관인이나 동장, 옥인 등을 포함한다. 즉 왕과 국가의 상징성에 드높은 사상을 담고 있는 상태가 곧 ‘옥새전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옥새는 동양의 사상 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자연섭리를 따르는 표현의도로 전수자를 통해 계승되어 오고 있다. 반면 전각은 서예의 한 분야로서 예술적 측면이 강조되어 제작된 것이다. 전각가의 개성이나 품격을 표현하는 형식이며, 작가의 표현형식만을 위주로 하는 차이가 있다.
조선시대 의궤에 기록된 ‘전각’ 역시 옥새의 제작을 말한다. 이 용어는 조선 전반에 걸쳐 모두 약 150개 의궤에 수록되어 있다. <인선왕후의궤>(효종) 등에 옥새보인를 ‘전각(篆刻)’한 기록을 비롯하여 각 왕조 의궤에는 ‘전각’이라는 용어가 발견된다.
중국의 경우 전각이 문헌상 처음 나온 것은 <명사(明史)> 문원전(文苑傳)에 “문팽(文彭)이 문가병을 전각했다(文嘉並工篆刻)”고 쓰면서부터다. 본격적으로 전각가라는 말이 나타난 것은 중국 명나라 말에서 청나라 초의 인물인 주량공(周亮工, 1612~1672년)의 <인인전(印人傳)>에서 인을 다루는 사람을 ‘전각가’라고 이름붙이면서 시작되었다.
<중국전각가 인명사전>에 따르면 <인인전>은 주량공의 말년에 집필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조선 효종의 <인선왕후의궤>가 1651년에 제작되고 옥새제작장인을 ‘전각장’이라고 기록한 것과 비교해 본다면 비슷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전각 역사는 곧 옥새보인의 역사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옥새의 ‘전각’ 기록은 한국 전각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옥새를 제작해온 ‘옥새전각장’에 대한 실체를 보게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가 되면 옥새전각과 일반 전각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근대사까지 추사, 오규일, 허유, 이정은, 민태호, 오세창, 김태석 등의 전각가가 있었으나 이들은 전통 전각의 종합 예술적 장법을 피하고 전각 인장면의 글자만 가볍게 파내는 소위 판화적 전각 기법만으로 예술화를 꾀하고 있다. 즉 일반 전각가는 손잡이 뉴나 주물, 금장이나 동장을 직접 새기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인장에서 시작된 전각
하지만 옥새전각장의 경우 일반 전각가들이 돌에 전각을 하는 석인(石印)전각은 물론 주물을 통한 금장, 동장, 옥새, 그리고 목전각, 도인, 옥인, 목인 등 다양한 전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둘 사이를 구분하고 있다. 즉 전통 옥새전각은 종합 예술성에 있는 것이다.
오창석으로 풍미되던 현대의 전각 시대에 한국은 석불 선생이 동장 및 옥새를 황소산 문하에서 전수한다. 그는 근대 인장전각사에 ‘옥새, 동장’의 새인예술, ‘석인의 전각예술적 전통계율’을 잇는 독자적 법통을 세웠다. 동양 삼국에서 유일하게 주조법 외에 ‘각작법’의 ‘새인예술’, 즉 동이나 옥을 칼로 직접 새기는 옥새동장예술의 비전을 계승하였다. 또한 석인전각에서도 고졸(古拙)하며 힘이 응축되어 있는 고도의 창일성을 남겼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전각 역사는 근대 서화가나 사대부의 석인전각예술부터 전각사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전각의 역사는 옥새 보인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초중기부터 조선의궤에 옥새 인면의 새김 작업을 ‘전각’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근대 중국의 전각학자 등산목은 “인장은 동인(鋼印)과 전각(篆刻)이 있다. 동이나 옥에 새기는 것은 오로지 장인(匠人)만이 할 수 있었다. 인장에서 시작된 전각은 명나라 때부터 문인들이 돌에 새기면서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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