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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 - 위대한 문화유산

by 연송 김환수 2013. 10. 12.

 

 

 

 

[위대한 문화유산]

화려한 장식과 독특한 외관이 돋보이는 신라의 유산

금관

5세기부터 7세기까지 신라에서 발견되는 금관은

 정교한 세공기술, 독특한 외관과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예술품이자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선정 위대한 문화유산 100 - 금관(金冠)

 

 

                        ▲ 국보188호 천마총 금관

 

 한국의 문화유산 가운데에는 세계에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신라시대 황금보검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신라 금관은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 금관은 어떤 유물 전시회에 내놓아도 찬란하기 이를 데 없어 조명을 한몸에 받습니다.

 

 

 

보물 제635호 황금보검 정식 명칭은 금제감장보검(金製嵌裝寶劍)http://blog.daum.net/yescheers/8598466

 

지금은 신라 금관의 존재가 상식처럼 되어 있지만 1921년에 경주에서 금관이 우연히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런 엄청난 왕관이 있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금관이 발견된 곳은 경주의 대릉원 바로 옆(노서동)인데 주민이 집터를 파다가 우연히 발견한 금관을 비롯해 수많은 유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때 금관총은 4일 만에 발굴 작업을 끝냈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국보87,금관총 금관(金冠)

 

 

국보 87호 금관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금관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금관.

 

금관은 내관(內冠)과 외관(外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금관은 외관으로 신라금관의 전형이다. 1921년에 발견된 이 금관은 원형의 머리띠 정면에 3단으로 ()’자 모양의 대생지(對生枝: 마디마다 두개씩 마주 붙어서 나는 가지) 수목형(樹木形) 입식(立飾) 세 개와, 뒤쪽 좌우에 두개의 사슴뿔모양鹿角形장식이 세워져 있다. 높이는 44.4이고 국보 제87호이다.

 

대륜 상하와 입식 주위에는 점렬문(點列紋)이 찍혀 있고, 많은 비취색 곱은옥曲玉과 원형의 영락(瓔珞)이 규칙적으로 금실에 매달려 있다. 또한 양끝에는 가는 고리에 금사슬이 늘어진 두 줄의 수식(垂飾)이 달려 있는데, 일정한 간격으로 심엽형(心葉形)의 영락을 달았으며, 끝에는 금모(金帽)를 씌운 비취색의 곱은옥이 매달려 있다.

 

이와 같은 외관에 대하여 내관으로 생각되는 관모(冠帽)가 관 밖에서 발견되었다. 이와 비슷한 예가 경주시 천마총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내관은 삼각형·철형(凸形능형 등의 문양이 투각된 얇은 금판(金板)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에 역시 복잡한 투각문양(透刻文樣)과 많은 영락이 장식된 새 날개모양鳥翼形의 금판 관식을 앞에 꽂게 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새 날개 모양을 관모의 장식으로 꽂은 것은 삼국시대 사람들의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경주박물관 전시 금관총 금관(국보 87)금관총 덧널(시신)에서 출토된 유물 (금관, 금제허리띠, . 은 장신구 등)

 

 

 이 중요한 발굴을 어떻게 4일 만에 끝낼 생각을 했는지 기가 찰 노릇이지만, 어떻든 그 뒤로 이 무덤은 금관이 발견된 무덤이라고 해서 금관총이라 불리게 됩니다.

 

금관에서 발견되는 특이한 모양은(금관 오른쪽) 부분은 사슴 뿔을 이미지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서봉총 금관(瑞鳳塚 金冠)

 

 

신라에서만 5세기부터 7세기까지 나타나

 

금관총 금관 발굴 이후에 이처럼 화려한 금관들이 서봉총이나 천마총 등지에서 5개가 넘게 발굴됩니다. 그런데 이 신라 금관은 그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정밀한 세공 기술이나 숫자 면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실크로드 문명 교섭사의 권위인 정수일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인류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고대의 금관 가운데 반 이상이 신라 것이라고 합니다.

 

이 금관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표면에 때가 많았는데 그것을 닦아내자 곧 1,500년 전의 찬란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지금 우리가 현재 보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금관이 대단하고 금 자체도 대단한 것입니다. 이렇게 변하지 않으니 많은 사람들이 금을 좋아하는기 봅니다.

 

하지만 이 금관이 주목을 받은 것은 재료보다 그 화려한 모습과 세공 기술 때문이었는데 우리 금관은 전 세계 어떤 금관과 비교해보아도 그 화려함이나 기술에서 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금관이 지역적으로는 신라에만, 시기적으로는 5세기부터 7세기까지만 나타났다는 데 있습니다.

 

말할 수 없이 화려한 금관이 이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신라가 중국의 문물을 대거 받아들이는 7세기 중엽 이후로는 더 이상 이런 금관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물론 가야 같은 지역에서도 금관 혹은 금동관이 발견되지만 완성도 면에서 볼 때 이 금관들을 따라 오기는 힘듭니다.

 

금관은 외관과 내관으로 되어 있는데 그 자세한 양식은 복잡하니 생략하고 큰 줄기만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외관인데 외관의 정면에는 사진에서 보이는 대로 나무 가지처럼 생긴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자형 장식이라고도 하는데 이 나무 가지는 3단 혹은 4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옆면은 사슴의 뿔처럼 생긴 것으로 장식해 놓았습니다.

 

이 장식들 위에는 굽은 옥이나 둥근 금딱지를 붙여 놓았습니다. 아울러 둥근 머리띠 양쪽에는 금으로 만든 사슬 두 개가 달려 있습니다.

 

이 금관들이 그 화려함의 정도는 각각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 모습은 대체로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 외관 안에는 세모꼴로 된 모자가 있고 두 갈래로 되어 있는 새 날개 모양의 장식을 꼽기도 하는데 이것이 내관입니다.

 

이 정도면 어느정도 금관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 서봉총 금관(瑞鳳塚 金冠)

 

경주 노서동 신라 무덤인 서봉총에서 출토된 높이 30.7, 지름 18.4, 드리개(수식) 길이 24.7인 금관이다. 넓은 관 테 위에 5개의 가지를 세웠고, 상하에 점선으로 물결무늬를 찍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으로 장식했다.

 

관 테에 못으로 고정시켜서 세운 5개의 가지 중 중앙과 그 좌우의 3가지는 자형 장식을 3단으로 연결하고, 가지 끝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했다.

 

이 가지 주위에는 2줄씩 점선을 찍어 금판이 휘지 않도록 했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을 달았다. 자형 장식의 좌우에는 끝이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된 사슴뿔 장식을 세웠고, 이 곳에도 원판과 옥으로 장식했다.

 

내부의 골격은 2개의 금판대를 전후·좌우에서 관 테에 연결하여 반원을 그리면서 교차시켰고, 그 위에 3가닥이 난 나뭇가지를 붙이고 가지 끝에 새 모양을 하나씩 붙였다. 관 테 좌·우에 길게 굵은고리(태환식) 귀고리 드리개를 달아 늘어뜨렸다.

 

금관 양식의 기원, 두 가지의 설

 

문제는 이 양식의 기원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독특한 양식이 어디서 왔느냐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주류의 의견은 이 금관이 시베리아 샤먼(shaman)들의 관을 본떠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왕관에 있는 장식들을 듭니다.

 

우선 앞부분에 있는 나무 장식은 인간계와 신계를 연결하는 신목(神木)을 본뜬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목(神木): 특정한 나무를 신성시하여 숭배하는 일. 그러한 나무를 神木이라 하며 또한 그 나무에 깃들여 있다고 믿어지는 신이나 정령(精靈)을 수목신 또는 식물신이라고 한다.]

 

 

이 나무의 가지는 3단으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되면 가지가 7개가 됩니다.

 

이것은 당시 샤먼들이 생각하는 7층의 하늘을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하는데 같은 맥락에서 왕관의 옆 부분에 있는 장식은 사슴 뿔을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사슴 역시 하늘과 지상을 왕래할 수 있는 메신저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명한 루돌프를 생각하면 이해 될 수 있는데 루돌프는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산타의 썰매를 끌었습니다.  

 

 

천마총 내관의 새 날개모양장식.

    새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증거는 또 있는데 내관에 있는 새 날개 모양의 장식이 그것인데 새 역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존재입니다.

 

옛 기록을 보면 장례를 할 때 큰 새의 깃털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 깃털이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보내준다고 믿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의견에 반박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들의 주된 주장은 왜 엄연한 국가의 수장인 신라왕이 아직 유목 사회에 머물러 있는 시베리아 무당의 관을 쓰느냐는 것입니다.

 

아울러 시대적으로도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이왕 비교하려면 같은 시대 것으로 해야지 왜 5~6 세기의 신라 왕관과 18~19세기의 시베리아 샤먼의 관을 비교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럼 이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왕관의 장식들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우선 나무 장식은 시베리아의 신목이 아니라 자신들의 시조인 김알지가 내려온 나무의 가지를 형상화한 것이며, 같은 맥락에서 보면 관의 옆에 있는 장식도 사슴 뿔이 아니라 나무 가지가 됩니다.   그리고 금관에 붙어 있는 동그란 딱지들은 나뭇잎을 이미지화한 것이라는 것으로 이들의 주장은 공연히 시베리아로 가지 말고 신라 안에서 해석하자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설 가운데 아직 어떤 설이 맞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대세는 전자의 설에 기울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금관 내관의 세모꼴 모자로 금관에 덧붙여 장식하던 나비모양의

    금관장식품.(경주박물관)

 

금관, 실제로 머리에 썼을까?

 

이 금관을 둘러싸고 양분되는 설이 또 하나 있습니다. 금관을 실제로 썼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제 사용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단지 무덤의 부장품(副葬品)으로만 썼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로, 우선 금관에 걸려 있는 옥이나 금딱지가 무거워 왕관이 지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른 게 금인데 그것으로 만든 얇은 금판이 버티기에는 너무 무겁다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관을 직접 썼다면 머리가 닿는 부분에 비단이나 가죽 같은 것을 댄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다는 근거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천마총 금관 [天馬塚金冠]

높이 32.5cm, 지름 20cm이며 발굴조사 당시 시체의 머리에 착용된 채 발견되었다금관에 달린 장식은 금으로 만든 수많은 작은 달개[瓔珞]와 비취곱은옥[翡翠曲玉]을 금으로 만든 실로 매달아 호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이에 대해 또 다른 학자들은 왕들이 이 금관을 항상 썼던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이 금관에는 특수한 공법이 적용되었기 때문에 바로 서는 데에 문제가 없다고 하며, 금관에 있는 금판의 가장자리를 보면 작은 홈이 촘촘하게 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금판이 힘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기술이라고 합니다.

 

그 홈이 금판을 강하게 만든다고 하며 이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꽤 세련된 기술이라고 합니다.

 

어떻든 화려한 외관에 내관까지 쓰고 나면 그 모습은 대단히 장엄할 겁니다. 여기에 금제 허리띠까지 하면 왕으로서의 권위가 제대로 설 겁니다.

 

따라서 이 금관을 쓰고 바쁘게 돌아다니지는 않았을지라도 국왕의 권위를 크게 떨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관을 썼을 것이라는 것이 이들의 의견입니다.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금제 과대 및 요패)

 

과대(銙帶,허리띠)는 직물로 된 띠의 표면에 사각형의 금속판을 붙인 허리띠로서 길이 120, 띠드리개 길이 22.577.5이다. 28장의 판()으로 만들어진 이 허리띠는 주위에 있는 작은 구멍들로 미루어 가죽같은 것에 꿰매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허리띠 아래에 매달려 있는 13개의 띠드리개(요패)는 경첩으로 허리띠와 연결하였다. 이 허리띠와 띠드리개는 출토될 당시 상태가 아주 좋아서, 착용법과 띠드리개의 배치순서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어떤 의견이 맞던 신라 금관이 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왕관 중 하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금관을 버리고 7세기 이후에 한국 왕들은 중국식 면류관(冕旒冠)을 쓰게 되는데 이 면류관보다 우리의 금관이 미적으로나 디자인적으로 월등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면류관: 제왕(帝王)의 정복(正服)에 갖추어 쓰던 관

  

  

 

국보 제191'경주 황남대총 북분 금관'으로 신라 5세기의

    금관이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수하식 [皇南大塚北墳金冠垂下飾]

 

1978127일 국보 제191호로 지정되었다. 금관 높이 27.5cm, 지름 17cm, 무게 750g이며, 국립경주박물관 소장되어 있다.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금관이다.

 

북분의 나무널[木棺] 안 시신의 머리 부분에서 나왔으며, 금관에는 앞면 중앙과 좌우에 3개의 '' 자 모양의 장식이 세워져 있다. 이 장식은 나무를 단순한 의장으로 생각한 것 같고, 뒷면 좌우에 세운 2개의 의장은 사슴의 뿔을 간략화한 것이다.

 

대륜(臺輪) 위에 '' 자 모양을 3개 겹쳐놓은 것은 나무의 줄기와 옆가지를 뜻한 것 같다. 1가지에 곱은옥과 영락(瓔珞)5개씩 달았다. 대륜의 위아래에는 2줄의 점선무늬가 안에서 두드려 밖으로 도드라져있고, 여기에도 역시 곱은옥과 영락을 달았다.

 

금관에는 좌우에 각각 3개의 수하식(아래로 늘어뜨린 장식)이 있으며, 바깥의 것이 가장 길고, 안쪽으로 가면서 짧아진다. 이 수식 중 1쌍에는 끝에 청색 곱은옥이 달려 있고 다른 금관보다 수식 2쌍이 더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금관은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다른 금관보다도 굽은 옥을 많이 달아 화려함이 돋보이고 있다.

천마총 금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