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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명 호우 (호우총)

by 연송 김환수 2013. 10. 13.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광개토대왕명호우

 

1946년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발굴된 경주 돌무지덧널무덤 140호분.

흥미롭게도 신라의 고분에서 고구려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 호우총 (壺杅塚)

사적 제39호로 지정되어 있는 경주 노서리 고분군(慶州路西里古墳群)에 속하는 무덤으로, 1946년 발굴되었다. 발굴 전에 봉토는 이미 많이 파괴되어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하여 행해진 당시의 조사는 8·15광복 후 이루어진 한국 최초의 유적발굴 작업으로서,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교섭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19465월 국립박물관은 우리 손으로 첫 발굴조사를 시작하였다. 대상은 경주 시내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인 노서동 140호분이었다.

 

당시 발굴조사 대상지의 선정에는 여러 가지 의견이 대두되었다. 신라 최대 고분이었던 봉황대를 발굴하자는 일부 의견이 있었으나, 첫 발굴은 파괴가 많이 되어 머지않아 사라질 위기에 있는 무덤을 조사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140호분을 선정하였다.

 

140호분은 경주 시내 고분군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노서동 고분군에 위치한다. 1930년대 경주 시내 고분 중 봉분이 남아 있던 고분을 대상으로 일련번호가 부여되었는데, 그 때에 지표에서 확인된 고분이 모두 155기였다. 우리가 잘 아는 천마총이 마지막 번호인 155호이고, 황남대총이 98호이다.

 

경주 돌무지덧널무덤 전경. 1946년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발굴조사를 했던 한국 고고학계의 기념비적인 곳이다.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광개토대왕 관련 유물

 

140호분은 고분의 번호가 부여될 때 이미 봉분이 결실되어 지표로부터 약 2m 내외로 남아있었고, 그 위로 2채의 민가가 들어선 상태였다. 때문에 하나의 고분으로 인지된 것 같다.

 

1946년의 발굴 결과 두 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잇대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남쪽의 고분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청동호우가 출토되어 호우총()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고, 북쪽의 고분에서 은방울이 출토되어 은령총(銀鈴塚)’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호우총 봉분의 지름은 16m, 높이는 4m 내외로 추정되는데, 다행히 목곽(木槨)을 포함한 매장주체부는 전혀 교란되지 않았다.

 

이중곽식인 목곽은 내곽이 경우 시신을 안치한 주검칸과 부장품을 넣은 부장칸을 칸막이로 나누었다. 장신구는 대부분 피장자에게 착장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환두대도와 청동호우 등이 목관의 내부에 부장되었으며, 기타 금속용기와 토기류는 부장칸에 부장되었다.

 

신라의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금속 용기류는 피장자의 머리쪽에 따로 마련된 부장칸에서 발견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청동호우는 목관 내부 피장자의 머리 오른쪽 편에 뚜껑이 덮인 채 바르게 놓여져 있어 이채롭다.

 

 

 호우총 유물 출토

 

호우는 반구형의 몸체에 납작한 모양을 한 편반구형의 뚜껑으로 이루어졌다. 몸체는 높이 10.3, 입지름 22.9, 바닥지름 15, 몸체 최대 지름 23.8이고, 뚜껑은 높이 9.1, 입지름 22.8, 꼭지 높이 3로서, 지금까지 발견된 합() 모양의 청동용기 가운데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고 돋을새김한 4행 16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 을묘년(乙卯年)은 광개토대왕이 죽은 후 3년째가 되는 415년(장수왕 3)이며, 이 글귀는 '국강(國岡) 위에 있는 광개토대왕릉용호우'라는 뜻이다. 

 

굽이 있는 바닥에는 글자가 돋을새김 되어있는데, 그릇을 만드는 용범 자체에 포함되어 함께 주조된 것이다. 44자씩 이루어진 16

 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와 상부 중앙에 가 있다. 서체는 광개토대왕릉비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데, 비문과 호우에서 모두 , , , , 등에 간략한 글자가 사용되고 있다.

 

글자의 내용은 의미를 기준으로 나누면, 乙卯年 / 國罡上 廣開土地 好太王 / / 시기 / 왕명 / 그릇이름 / 숫자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國罡上 廣開土地 好太王(국강상 광개토지 호태왕)’은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의 시호이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광개토대왕의 시호를 전하는 금석문은 더 있다. 집안의 광개토대왕릉비에는 國罡上 廣開土境 平安 好太王으로 되어 있고, 집안의 모두루총의 묵서에는 國罡上 大開土地 好太聖王으로 되어 있다.

 

국강상(國罡)’은 왕의 무덤이 위치한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당시까지 고구려 왕호를 짓는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광개토지(廣開土地)’는 영토를 널리 개척한 업적을 강조한 명칭이며, ‘호태왕(好太王)’은 그런 위대한 업적을 쌓은 왕에 대한 최대한의 존칭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國罡上 廣開土地 好太王이란 호칭은 광개토대왕 사후에 올린 시호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호우 바닥의 명문은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 만든 호우라고 풀이할 수 없으며,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기념 혹은 추모하기 위한) 호우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을묘년(乙卯年)’은 광개토대왕이 서거하신 412년 이후가 되어야 한다. 청동호우 자체의 양식편년을 통하여 을묘년을 475년으로 비정하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415(고구려 장수왕 3)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호우와 바닥에 쓰여진 명문. 명문을 풀이하면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기념 혹은 추모하기 위한) 호우이다.

 

출토 유물로 살펴보는 고구려-신라의 관계

 

한편 이 호우를 통해 고구려에서 이와 같은 형태의 그릇을 호우()’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일 끝에 나오는 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별 의미가 없는,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 집기(什器)자의 약자 불교사상의 원만, 끝없음을 나타냄 종지부 길상구 열 개 혹 열 번째를 의미, 이는 곧 같은 그릇을 적어도 10개를 만들었음을 의미 호우 제작에 사용된 청동의 중량 등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각각의 논의는 어떠한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며, 일종의 추정에 속한다.

 

상부 중앙의 에 관해서도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우물 정()무엇인가 주술적 기호 제작자와 관련된 표식

벽사(辟邪)나 제마(除魔)의 기호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우물 정자로 보기에는 다른 글자들과 달리 중심축이 오른쪽으로 45도 가량 기울어져 있다는 문제가 있다. 백제나 신라, 가야 토기들에서 종종 이와 같은 표식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 만든 그릇이 어떻게 신라 무덤에 묻히게 된 걸까? 호우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415년은 신라 18대 실성왕 14년으로, 왕 자신도 내물왕 37(392)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내물왕 46(401)에 신라로 돌아와 다음해 왕위에 올랐고, 실성왕 11(412)에는 내물왕의 아들 복호가 고구려에 볼모로 갔다가 눌지왕 2(418)에 돌아왔다.

 

이와 같은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로 볼 때 고구려의 영주인 광개토대왕을 기념하기 위한 물건이 신라에 보내질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하겠다.

 

다만, 호우총에서 출토된 여타 유물들이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이 소멸되기 직전쯤인 6세기 전반에 해당되는 것으로 판단되어, 호우총은 6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청동호우는 5세기 초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이후 제작시기와 가까운 시점에 경주로 반입되었고, 100여년의 전세(傳世) 기간을 거쳐 무덤에 묻히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광개토대왕을 장사지낸 일년 뒤인 415년에 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고, 그 기념으로 호우를 만들었고, 그 때 제사에 참가하였던 신라인을 통해 경주에 반입되었던 것이 아닐까?

 

호우총의 발굴은 우리 손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발굴조사로서 우리나라 고고학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국립박물관과 우리나라 고고학의 오늘이 있게 한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신라의 다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 비해 빈약하지만, 청동호우, 청동이형동기, 목심칠면(화살통), 물고기와 용이 상감된 고리자루칼 등은 신라의 다른 고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 조사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주목 받고 있다.

 

 

                                      ▲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호우

 

                                        ▲ 청동호우 바닥에 쓰여진 명문(銘文)

 

▲ 광개토대왕릉비 글씨체

비문에는 "土地"를 "土境"이라 하고, "好太王"을 "平安好太王"이라 했다.  '乙卯年'은 비문 안의 다른 곳에서 '乙'자, '卯'자, '年'자를 각각 따와 합성한 것이다.

 

          ▲ 광개토대왕릉비문(위)과 청동호우(아래)의 글씨체 비교

 

                                    발굴당시 실측도면

 

호우총 발굴 당시 도면을 전담한 임천(林泉)선생이 제작한 도면으로 현장에서 작성한 실측도를 기본으로보고서 발간을 위해 만든 도면이다. 이는 해방이후 우리 손으로 작성된 첫 도면으로 그 상징성이 크다.

 

출토 유물로 살펴보는 고구려-신라의 관계

 

한편 이 호우를 통해 고구려에서 이와 같은 형태의 그릇을 호우()’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호우 뚜껑의 글자를 탁본한 내용 

 

제일 끝에 나오는 ' 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별 의미가 없는,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

집기(什器)자의 약자

불교사상의 원만, 끝없음을 나타냄

종지부(마침표)

길상구 (吉祥句)

     견해와 덕이 높아지고 모든것이 잘되기를 바라는 문구

열 개 혹 열 번째를 의미

     이는 곧 같은 그릇을 적어도 10개를 만들었음을 의미

호우 제작에 사용된 청동의 중량 등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각각의 논의는 어떠한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며, 일종의 추정에 속한다.

                               

 

 

                         발굴당시의 호우

 

호우총은 경주시 노서동(路西洞)에 있는 신라시대의 고분으로 1946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 조사했다.

 

동시에 발굴된 북쪽 분()의 은령총과 짝을 이룬 쌍원분(雙圓墳)으로 수갱(竪抗)내에 마련된 목곽실 속에 목관을 넣고 적석(積石)으로 덮은 위에 성토하고 있다.

 

호우총에서는 금동관 파편과 금은상감 환두대도를 비롯하여 수백여 점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금동제 보관, 식리(飾履), 금제귀걸이, 팔찌, 반지, 목걸이 등의 장신구가 착장(着裝) 위치에서 발견되었고 5세기 초 신라의 왕릉으로 추정된다.

 

 

청동 그릇, 6세기, 경주 호우총 출토

 

부장품은 신라 도기가 많고 출토품 중 동합(銅盒)에 있는 을묘년(415)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의 명문에 의해 대개의 조영시기가 추정되며, 고구려 세력의 신라에 대한 침투가 명확해졌다. 필체도 광개토왕비의 것과 같다.

 

은령총도 같은 구조의 고분으로 금동제 보관, 식리, 금제귀걸이, 호박옥, 글라스옥의 목걸이, 은제의 빗,  반지, 요패장도(腰佩裝刀) 등이 착장 위치에서 출토되고 부장품은 금속용기, 칠기, 토기 외에 물레 등도 포함되어 피장자는 왕비로 추측된다.

 

은령총 출토 유물

은령총 출토 유물

 

방상씨탈로 알려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유물 원판사진과 국립중앙박물관이 사실에 근거하여 복원한 유물

 

호우총에서 나온 칠면(漆面)을 방상씨(方相氏)의 면()이라 하였는데 주례(周禮)에 곰()의 가죽을 쓰고 장례(葬禮) 때 묘광(墓壙)에 들어가서 귀신을 몰아낸다는 기록(記錄)이 있는데 그 면()은 황금목(黃金目) 즉 금()으로 된 눈(())을 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눈이 넷이면 방상(方相)이라고 하고 둘이면 기라고 부른다.

 

호우총의 경우는 물론 황금(黃金) 눈이 두개()만 있으니, 기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목심칠면(木心漆面)이라고 하였으나 목심(木心)은 부패(腐敗)되어 없어졌고 표면(表面)의 칠()만이 남아 있었으나 심()이 없는 칠면(漆面)은 보관(保管)되기 어려웠으므로 지금은 형편없는 상태(狀態)로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재원)

 

                                ▲ 1946년 5월 발굴모습

   

                                 호우총(壺杅) 발굴 청동호우

 

광개토대왕릉의 사당에서 쓰던 제기(祭器)로 높이 19.4cm, 몸통 지름 24cm, 깊이 10cm

 

다만, 호우총에서 출토된 여타 유물들이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이 소멸되기 직전쯤인 6세기 전반에 해당되는 것으로 판단되어, 호우총은 6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청동호우는 5세기 초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이후 제작시기와 가까운 시점에 경주로 반입되었고, 100여년의 전세(傳世) 기간을 거쳐 무덤에 묻히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광개토대왕을 장사지낸 일년 뒤인 415년에 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올리고, 그 기념으로 호우를 만들었고, 그 때 제사에 참가하였던 신라인을 통해 경주에 반입되었던 것이 아닐까?

         

 

호우총의 발굴은 우리 손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발굴조사로서 우리나라 고고학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국립박물관과 우리나라 고고학의 오늘이 있게 한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신라의 다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 비해 빈약하지만, 청동호우, 청동이형동기(異形銅器), 목심칠면(木心漆面,화살통), 물고기와 용이 상감된 고리자루칼 등은 신라의 다른 고분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것으로 조사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주목 받고 있다.

 

 

경주 노서리 215번지 고분 

 

경주 노서리 215번지 고분은 호우총(140호분)의 서남쪽에 위치한 고분으로 1933년 한 농부가 호박씨를 뿌리기 위해 땅을 갈다가 곡옥 1점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

 

경주 노서리 215번지 배치도

 

당시에는 우리 힘으로 조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터라 일본 조선총독부 사무국의 총독부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던 아리미츠 선생에 의해 조사되었다.

 

경주 노서리 215번지 고분에서 출토된 금목걸이[金製頸飾]

신라 6세기, 길이 30.3, 보물 456

노서리 215번지 금제경식세부

금귀걸이

노는 고리와 샛장식

중심고리

경주 노서리 215번지 출토 금팔찌, 보물 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