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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달러" 가치의 신라 황금보검

by 연송 김환수 2013. 9. 3.

"1조달러" 가치의 신라 황금보검

 

보물 제635호로 지정된 주인공 황금보검의 정식 명칭은

금제감장보검(金製嵌裝寶劍)

 

 

1973년 경주의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황금보검(보물 제635)이 출토되었다.

 

5~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보검은 길이 36cm, 최대 폭 9.3cm로 그다지 크지 않다.

 

 

 

 

 

황금보검의 표면에 있는 무늬들은 그리스 소용돌이 무늬, 로만로렐, 파무늬, 메달무늬, 테두리선이다. 그리고 나선무늬를 이루는 각 부분의 전체 바깥둘레와 메달의 틀, 공백 부분에 금 알갱이가 장식되었다.

 

황금보검을 본 학자들이 놀란 것은 황금보검이 신라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 기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누금세공이란 금 입자와 금 세선을 사용하여 금제품의 표면을 장식하는 것이다.

 

황금보검 철검(윗쪽)과 검집(아래쪽)

 

1973년 미추왕릉지구(현 대릉원) 정화사업에 따라 경주 옛 시청과 계림을 연결하는 도로 공사를 하다 황남동 일대에서 돌무지덧널무덤과 독무덤 등 총 56기의 무덤이 발견됐고,

 

보검은 그중 14호 묘에서 나왔다 하여 일명 '경주 계림로 보검'이라 불린다.

 

문제의 보검은 14호 묘에서 나온 유물 295점 가운데 유일하게 신라에서 제작되지 않은 까닭에 비상한 관심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기법은 기원전 2500년경 우르 왕조에서 시작되어 그리스 등지에서 발달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한나라 시대에 성행했다.

 

나선무늬는 그리스 소용돌이 무늬라고 불리는 전형적인 그리스 로마 시대의 테두리 무늬로 그리스의 항아리 그림 등의 연속 번개무늬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번개무늬가 점점 간략해져서 나선무늬로 변했고 누금세공 등의 테두리 무늬로 사용되었다. 또한 로만로렐은 로마시대에 유행했던 무늬로 그리스 소용돌이 무늬와 함께 테두리 무늬의 기본적인 모티브다.

 

 

김영창 선생의 황금보검 복원 모습

 

신라 황금보검 - 김영창

 

누금세공(鏤金細工)기법이란 고대 금()장신구에서 발견되는 아주 오래된 표면장식기법으로 일반적인 금()땜을 사용하지 않고 금속선이나 금속알갱이를 얇은 금속판에 접착하여 장식효과를 높이는 귀금속 공예 기술이다.

 

칼날은 강철, 나무는 흑단을 사용하였으며, 자루 끝부분에 가넷(석류석), 칼집에 해당되는 부분에는 마노석, 투명마노, 자만옥, 터키석 등을 사용하여 장식하였으며, 없어진 부분과 장식등은 청동기시대의 유물을 참고하여 원형 크기의 약 70%로 축소 제작하였다.

(보물 제635호 경주 계림로 보검, 국립경주박물관소장

 


 


국립경주박물관은 1973년 경주시 황남동 계림로의 신라시대 14호묘에서 발굴된 황금보검’(黃金寶劍)에 대해 보존처리 작업 및 X선 조사 등을 실시한 결과, 칼집 장식(길이 36)에 숨어있던 철제 단검(전체 26.5, 날 길이 18)과 목제 칼집을 찾아내 복원했다.


 

 

201022일부터 44일까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황금보검을 해부하다'의 전시 모습이다. 검집, 손잡이, 철검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까지 붙여 황금보검을 해부하는 특별전을 개최 했다.

 

보검에 붙어 있던 의복 흔적과 부장품의 배치, 남아 있는 치아 등을 고려할 때 무덤 주인은 신라 진골(眞骨) 계층의 성인 남자 2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왼쪽에 묻힌 사람은 은제허리띠와 황금보검, 오른쪽 사람은 긴 칼을 각각 차고 있었고, 키는 150160로 추정됐다.

 

금제 칼집에 박혀 있는 붉은 색 보석도 그동안 마노(瑪瑙)로 알려졌으나 석류석(石榴石)으로 판명됐다.

 

 

 

황금보검의 제작지는 지금의 체코 폴란드 러시아 지방이다. 도나우강 유역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중심의 동부 유럽에는 켈트인이 주로 거주했다.

 

 

그런데 켈트 지역에서 제작된 이 보검이 정작 발견된 곳은 동부 유럽이 아니라 경주의 대릉원이다.

 

양 지역 사이의 거리는 약 8,000km로 오늘날의 교통수단을 경험한 현대인의 거리 감각으로도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거리다.

 

경주로부터 8,000km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유럽의 지배자가 황금보검을 계림로 14호분의 피장자에게 선물했다는 얘기인데,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보물을 선물했을까? 그리고 당시 동유럽과 한반도의 신라는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흉노라는 매개자를 통하면 신라와 훈족의 지배자와도 연계가 가능하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있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보이는 신라 사신의 모습은 과거의 문물 교류가 오늘날 우리가 선입견을 갖는 것처럼 좁은 범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북방 초원 지대에 인위적인 국경선이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 기마민족들은 오늘날의 우리보다도 훨씬 거칠 것 없는 거리 감각과 공간감을 가지고 자유로운 소통을 누렸을지 모른다.

 

트라키아 지역에 근거지를 둔 훈족과 신라의 친연성을 인식한다면 다음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중국과 혈투를 벌이던 흉노의 지배자가 중국과의 전투에서 궁지에 몰리자 일족을 이끌고 두 갈래로 분지된다.

 

한 갈래는 서쪽으로 달려 동유럽에 다다르고 다른 한 갈래는 동쪽인 신라(가야 포함)에 정착한다. 이들은 서로 떨어져 있어도 같은 혈족임을 잊지 않는다.

 

그 후 서쪽에 정착한 흉노의 한 갈래가 훈족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는데, 동쪽으로 간 다른 한 갈래가 신라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이 신라의 지배자에게 북방 초원길을 통해 트라키아의 보물인 황금보검을 전달한다. 물론 신라에서 훈족의 지배자로부터 황금보검을 선물받기 위해 신라의 사신들이 초원길을 통해 트라키아의 훈족 근거지를 방문하여 훈족의 지배자를 직접 만났을 가능성도 있다.

 

이들은 이후에도 기술자를 직접 파견하여 당대 최고의 기술을 주고받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신라와 트라키아의 훈족 간에 친연성이 있다는 대전제를 이해한다면 동유럽에서 훈족의 지배자가 어떤 경로든 어떤 명분이든 신라 왕가에게 선물을 전달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1973, 경주의 계림로 14호 고분에서는 출토된 유물은 전세계 사학계에서는 "경악""공포", "전율"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이 유물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

 

바로 이것. 황금보검이다. 이 보검이 만약 경매물건으로 나오게 되면 그 가치만 1조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전해진다.

 

이 황금보검이 가지는 역사적인 가치는 우리 돈으로 1,000조원의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1조 달러면 개인은 구입할 수도 없는 돈이고 G7국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가격이다.

 

그만큼 진귀한 보검이 경상도 경주시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황금보검을 국제 경매시장에 내어놓으면 우리나라 국민들이 몇년정도 생활할 수 자금에 해당된다

 

사실 이정도의 물건이면 아마 당시에는 신물로 불릴정도이고 권력의 상징이라고 봐야된다.

 

세상에 2~3점 밖에 없는 물건이니 거래가 되는 물건도 아니다.

 

국립경주박물관이 '경주 계림로 14호 묘 보고서' 에서 밝힌 결론은 이렇다.

 

"5세기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한 소그드나 박트리아, 에프탈 등의 유목민족 집단이 동로마제국 또는 동유럽의 이민족과 접촉해 이 지역의 장인에게 제작을 의뢰한 '황금보검'이 고구려 등의 북방 유목민이나 중국 중원(中原)을 거쳐 신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도굴범은 고분의 위치를 어떻게 파악하나

풍수지리 모르면 (문화재)도굴은 엄두도 내지 말라.

 

경주지방검찰청에 구속된 한 골동품 장물아비는 "손꼽히는 도굴꾼들은 봉분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주변 산세만 보고도 고분이 있을만한 곳을 알아낸다"고 진술했다.

 

전문 도굴집단은 명문가의 족보에 나와 있는 묘산도를 가지고

도굴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각 문중의 모든 족보가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고 누구나 열람 복사가 가능하기에 자료수집을 막을 방법은 없다.

 

풍수 지리학에 도통한 자라면 문화재가 매장된 분묘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풍수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마 그렇겠지.’라고 추측한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 풍수적으로만 접근하여 본다면 분묘 찾기가 더욱 어려울 정도로 혈()에 제대로 묘을 자리잡은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과연 몇 명이나 풍수적 명당에 자리를 잡았는지 그 숫자가 의문스러운데 왜 그런 얘기가 나도는 것일까?

 

이것은 족보에 밝은 사람이 패철을 약간만 볼 줄 알아도 충분한 일이기 때문이다. 족보에는 조상의 묘가 어떤 산에 어떤 좌향(坐向)으로 놓아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벼슬이 높아 매장 유물이 있을 법한 다른 조상의 이름을 족보에서 빼낸 다음, 그 분의 묘가 있다는 산을 찾는다고 한다.

 

그 다음엔 청룡과 백호가 잘 감싼 산 능선을 찾고, 이어서 족보에 기록된 좌향에 맞는 자리를 패철로 찾는다고 한다.

결국 도굴의 주범은 풍수학이 아니라 족보의 묘산도로 밝혀지는 셈이다.

 

이미 폐묘(廢墓)로 변해 초목으로 덮였더라도 패철만 이용하면 좌향을 기준으로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기본지식이 부족한

도굴범에게 가장 난감한 문제는 이미 산등성이로 변한 산 속인데, 어디에 보물급 문화재가 매장된 분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때에 풍수지리에 통달한 지관이 필요하다고 한다. 최근에 수배된 이 모씨 역시 문화재가 매장된 분묘를 찾는데 일인자로 손꼽히며, 많은 도굴범들까지 그에게서 분묘 감식을 전수 받았다고 한다. 동양의 지리관인 풍수 지리학이 도굴범의 앞잡이로 이용당하는 한심한 세상이다.

 

도굴꾼이 풍수지리를 정식으로 배운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풍수라도 명리학 책을 한 1년은 봐야 되고 어려운 한문을 익히면서 전문적인 이론과 간산(看山)을 거쳐야 하는 최소 몇년의 과정을 거치는 풍수지리의 기본과정을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

 

이분들은 '실전'의 경험이 풍수지리의 안목을 키운 실무형 반풍수 지관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도굴범들이 분묘를 도굴할 때면 언제나 특수 제작된 3m짜리 쇠꼬챙이를 이용하는데, 전문가라면 그것을 땅 속에 찔러 보기만 해도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귀신같이 알아맞힌다고 한다.

 

도자기가 들었다면 도자기 스치는 소리가 날 것이고, 금속 유물이 들었다면 쇠 긁는 소리가 날 것이다.

도굴하기도 전에 소중한 문화재의 훼손이 시작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금속탐지기를 사용하는 전문기술자도 있다고 하지만 탐지하는 깊이도 제한(1.5m이내, 최대 5m 신뢰도 떨어짐)이 있고 도자기 등 다른 부장품은 알 수 없어 금속유물에 관심있는 도굴범에 한정된다고 한다.

 

국내 최고의 도굴꾼에 대한 대표적인 예 하나.

경주발굴이 한창이던 70년대.

당시 최고 도굴 기술자으로 꼽히던 C씨가 경주사적관리사무소 임시직원에 채용됐다.

 

73년 경주 계림로 고분군을 발굴하면서 한 지역에서 자갈과 돌 등이 계속 나오자 발굴단의 한 관계자는 "유물이 없는 곳이므로 그만 파자"고 했다.

 

"1.5∼2m만 더 파보시지요."(C씨).

 

옥신각신 반내기까지 해가며 더 파자 훗날 보물 635호로 지정된 금과 보석 등을 장식한 보검 1점과 토기편, 말 장식품들이 나왔다. 이 보검의 가치를 일부에서 1,000조원이라고 한다.

그만큼 귀한 보물이며 세계에서 관심을 가지는 황금 보검이다.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가 최고의 도굴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경주에 전봇대를 묻는 일용직 근로자로 일할 때의 경험 때문이었다.

 

땅을 파면서 신라시대의 무덤을 숱하게 보았던 그는 누구보다 신라고분의 구조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 4∼5세기 적석분은 관 위에 돌이나 자갈 등을 층 층이 깔았다. 왕릉으로 추정되는 천마총이나 황남대총이 다 이런 스타일인 적석목곽분으로, 도굴하기도 힘들다.

 

자갈층이 나오자 일부에서는 생토층(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없는 땅)으로 생각했지만 C씨는 그 아래에 무덤 내부가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도굴꾼들을 문화재 발굴작업에 활용할 수는 없느냐'는 의문이 자연 스럽게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그건 좀 경우가 다르다고 고개를 젓는다.

 

도굴꾼들의 경우 '보물찾기'에만 관심이 있어서 유적을 심하게 훼손하고, 가능성만으로 무조건 파고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더라도  문화재 발굴작업에는 풍수지리에 통달한 지관과 전문 기술자(도굴) 그리고 유물발굴 관계자의 팀웍이 필요하다.

이 분들의 기술력(?)을 고려해서 제도권으로 흡수하여 합당한 최고의 대우(지위), 발굴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만 뒷받침해준다면 보물급 문화재의 추가 발굴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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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계림호 황금보검의 비밀

역사스페셜 계림호 14호분 황금보검의 비밀

 

국립경주박물관. 한 전시회를 앞두고 언론시사회가 열렸다. 국내 유수의 언론사가 모인 이 전시회의 주인공은 바로 신라의 황금보검이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이 이국적인 검이 어떻게 신라의 무덤에서 나온 것일까?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수많은 고분과 유물들이 잠들어 있는 역사의 박물관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실들이 밝혀져 왔지만 아직까지도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는 의문의 고리가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계림호 14호분에서 발견된 황금보검은 그 이국적인 형태라든지 당시 최고수준의 기술을 보여주는 세공기법 또 상감돼 있는 희귀한 보석들로 인해서 오래전부터 관심의 대상이 돼 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이 황금보검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과연 보검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이 보검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분명한 것은 이 보검은 신라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만들어서 신라로 들여온것이란 사실 한 가지뿐입니다.

 

역사스페셜 오늘은 이 황금보검에 얽힌 미스터리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신라의 대표적 고분들이 밀집해 있는 경주의 대릉원. 대릉원 바로 옆 계림로에서 우리의 추적이 시작됐다. 취재진은 경주박물관의 학예연구사들과 황금보검의 발굴지를 찾아 나섰다. 계림로 한구석에 선명이 남아 있는 표지석. 황금보검은 1973년 계림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됐다.

 

강우방 당시 경주박물관 학예사

“한 직원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이상한 것이 나왔다고 해서 제가 나갔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제가 여태까지 본 적이 없는 작품이 나왔습니다.”

 

 

계림호 14호분이라 명명된 비교적 작은 크기에 6세기 초 신라무덤. 하지만 그 속에서 발굴된 황금보검은 그전까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귀중한 유물이었다. 보물 635호로 지정된 황금보검. 길이 36cm의 단검이다. 붉은 보석과 유리가 상감된 이국적인 문양. 검 전체에 화려한 누금세공기법이 사용된 황금보검. 신라 자체의 생산품이 아니라 수입된 것으로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공기술이 집약돼 있다.

 

이송란 교수 덕성여대 미술사학과

“여러 종류의 그런 금구슬들을 표면에서 장식하는 누금세공기법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당시 최고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윤상덕 학예연구사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의 기술이라기보다는 어떤 전인류적인 그런 기술수준에 도달할 것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경주박물관에서는 황금보검에 대해 종합적인 재조사와 보존처리를 실시했다. 강력한 엑스선을 투과해 보검을 촬영한 결과 이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신용비 학예사 국립경주박물관

“이번에 엑스선 투과 촬영을 통해서 장식보검을 장식판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철검의 형태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이 철검의 형태가 천오백년이 지났지만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황금보검의 X선 사진엔 육안으로 관찰되지 않았던 철검의 양날이 생생히 드러나 보인다. 박물관측은 이 분석결과를 바탕으로 그 원형을 알기 힘들었던 철검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 황금보검에 감입된 붉은 보석은 무엇일까. 여태까지 막연히 홍만호로 추정되었을 뿐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분석으로는 홍만호와 다른 성분의 보석이란 결과 밖에 얻지 못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다 정밀한 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발굴 당시 보검에서 분리되어 나온 작은 보석편을 X선 회절분석기에 넣고 비파계 검사를 시작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유혜선 학예연구관 국립중앙박물관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도 지금까지 밝혀진 바가 없는 석류석, 아마 보석으로는 가네트라고 하는 것이라 말하면 조금 더 익숙하실 텐데 석류석이라는 그런 보석으로 밝혀졌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석류석 중에서도 석류석 종류가 굉장히 다양합니다. 전문적으로 따지면 그 중에 로덜라이트라는 특수한 광물이었구요. 그 로덜라이트라는 광물은 사실 3캐럿 이상 되는 큰 광물을 채취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황금보검의 소용돌이 문양에 감입된 작은 조각만도 2캐럿이 넘는다. 검 전체로 따지면 엄청난 양의 석류석이 상감돼 있는 셈이다. 서울 한 강남의 보석매장. 화려한 보석들 가운데 석류석으로 만든 제품이 진열돼 있다.

 

일월에 탄생석인 석류석은 옛날부터 각종 장신구를 만드는데 쓰여 왔다. 석류석 중 인도나 스리랑카산은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황금보검에 감입된 석류석은 동유럽 원산의 특별한 것이다.

 

김정주 M사 대표 주얼리 스페셜리스트

“4가지가 대표적이지만 루들라이트가 강하면서 희귀하고 굴절률도 좋아서 그런 왕관이나 어떤 황금보검 같은 물건이라든가 대작품에 세팅이 되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황금보검에 사용된 것과 같은 동유럽 원산의 석류석이 들어간 보석제품들. 선홍빛 아름다운 석류석이 황금보검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수수께끼로 가득찬 황금보검. 과연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세계적으로 황금보검과 유사한 유물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남쪽 실크로드 상의 위치한 키질석굴. 고대벽화들로 유명한 곳이다. 키질석굴 69호분 벽화에 신라 황금보검과 유사한 검을 차고 있는 인물의 모습이 보인다.

 

황금보검의 또 다른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실크로드를 따라 좀 더 서쪽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가야한다. 카자흐스탄 보로보에 단검은 검장식의 일부분만이 발견됐을 뿐이다. 세계적으로 신라 황금보검만이 실물완형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사용된 바가 없는 석류석. 그중에서도 동유럽이 주생산지인 희귀한 보석을 감입한 황금보검. 이 황금보검의 생산지는 동유럽일까요. 그렇다면 천오백년전 신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던 동유럽에서 만든 검이 신라로 들어왔다는 얘기일까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의문점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세계 여러 학자들도 이 황금보검의 유래에 대해 저마다의 이론을 갖고 있는데 일본의 한 고미술사학자는 이 황금보검을 만들어낸 주인공이 유럽의 켈트족이라는 아주 파격적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세계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황금보검. 취재진은 황금보검에 대해 색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한 일본학자를 만났다. 미술사학자 요시미츠 츠네오. 동유럽 체코에서 유학한 그는 직업적인 유리 공예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고전과 현대를 잘 조합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취재진을 별실로 안내했다.

 

“이것은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국의 경매에서 구입한 것인데요. 국외반출이 문제가 되어 특별허가를 얻어 일본으로 가져왔습니다. 이집트의 유리제품입니다.”

 

 

 

 

 

이집트 신왕조 시대의 유물은 경매가 2천만엔. 약 2억 6천만원에 낙찰 받은 것이다. 수장고에 가득한 수집품들. 유리제품에 관한한 그는 세계적인 수집가다. 또한 동유럽 유학을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유리를 통한 고대동서문화교류사를 연구했다.

 

신라시대의 로만글라스는 그의 특별한 관심사다. 경주고분군에서 발견된 로만글라스는 주로 흑해연안에서 제작됐을 것으로 보인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신라와 흑해. 고대에도 두 지역 간의 교류가 있었던 것일까. 황금보검의 출토지 계림로와 가까운 미추왕릉지구에서 발굴된 인면 모자이크 유리구슬. 그는 이 유리구슬이 황금보검의 비밀을 푸는 열쇠라고 주장한다. 높이 1.5cm에 불과한 이 유리구슬 안에 5명의 인물과 꽃, 새 등이 모자이크 기법으로 정교하게 표현돼 있다.

 

요시미츠 츠네오 미술사학자

“이것은 로마문화가 퍼져있던 곳에서만 제작이 가능 했습니다. 얼굴표현이 정교하다는 점이나 꽃과 새를 1.5cm의 구슬 안에 표현한다는 것은 일반 사람들은 도저히 가능한 특수한 기술입니다. 따라서 명백히 로마문화권 최고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런 근거로 신라가 로마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유리구슬 안에 표현된 코가 오뚝하고 파란 눈을 가진 인물이 황금보검을 만든 주인공이라고 말한다. 황금보검에 새겨진 독특한 문양으로 볼 때 로마문화권의 누군가가 제작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황금보검에는 특이한 소용돌이 무늬가 표현돼 있는데요, 소용돌이 무늬안에 꽃 봉우리가 들어있는 특수한 문양으로 이것은 켈트인 특유의 디자인입니다.”

 

로마문화권의 켈트족이 황금보검을 만들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있는 것일까.

 

“이것은 전형적인 켈트족의 문양으로 연속무늬죠. <켈트의 서(書)>라는 책의 이 부분에 무늬가 남아있습니다. 4, 5, 6세기 무렵 켈트의 유물에 이런 무늬가 많습니다.”

 

 

 

 

켈트인의 전통문양이 새겨진 책. 소용돌이 문양 안에 장식이 들어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확실히 황금보검의 소용돌이 문양과 흡사하다. 검 주위를 감싸고 있는 그리스 계통의 파도형 문양과 뼈대 부분에 장식된 월계수 잎 무늬 역시 로마문화의 영향이라고 한다.

 

“로마문화를 수용한 켈트인이 살았던 곳이 어디냐 하면 대체로 지중해의 이탈리아에는 살지 않았고 흑해의 서편 도나우 강 주변지역인데요, 현재의 불가리아나 루마니아 지역에 살던 켈트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과거 트라카아 지방입니다.”

 

 

로마문화를 수용했던 켈트인이 살던 곳은 고대 트라키아. 그러니까 현재 불가리아 지역이다. 인면 모자이크 구슬에 표현된 푸른 눈의 인물. 이것이 황금보검의 비밀을 풀어내는 단서가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트라키아라는 지명. 또 켈트족의 소용돌이 문양. 황금보검의 비밀을 좇는 여정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입니다. 인면 모자이크 구슬 속에 새겨져 있는 그 얼굴의 주인공들. 이들이 황금보검을 만든 바로 그 사람들이었던 것일까요. 우린 고대 트라키아라고 불렸던 동유럽의 불가리아로 직접 방문해서 확인해 보기로 했습니다.

 

황금보검의 비밀을 좇기 위한 여정은 이제 동유럽의 불가리아로 향했다. 한반도와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흑해 연안의 불가리아. 취재진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 도착했다. 고대엔 트라키아로 불렸던 곳. 신라 황금보검의 비밀을 불가리아에서 풀 수 있을까. 소피아에 위치한 트라키아 학 연구소. 취재진은 현지 학자에게 신라 황금보검을 보여주고 켈드족과의 연관성에 대해 질문했다.

 

발레리아 폴 사학자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것은 로마시대 물건이며 켈트족과의 관계라고 하기엔 더 늦은 시간인 4~6세기의 물건으로 보입니다.”

 

트라키아계의 권위자인 그는 켈트족이 기원전 트라키아에 잠시 머물다가 떠나갔을 뿐이어서 황금보검의 제작자로 보긴 어렵다고 했다. 오히려 신라의 황금유물이 고대 트라키아 인들과 연결되는 부분을 주목했다.

 

“트라키아 인은 가장 오래된 인도 유럽 민족입니다. 기원전 3천년 경에 트라키아 민족이 형성되어 불가리아 영토 내에서 급속하게 성장했습니다.”

 

트라키아는 기원전 3천년경부터 기원후 5세기경까지 흑해연안에서 번성했던 민족이다. 취재진은 신라와 트라키아 간 황금문화의 연관성을 추적해보기로 했다.

 

* 스베티차 무덤 발굴 2004년 8월 불가리아 카잔룩

 

 

 

 

 

 

 

2천 년대 중반 불가리아에서는 트라키아 시대의 황금유물이 엄청나게 발굴된다. 불가리아 판 골드러쉬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적인 화제였다. 황금을 중시해 다량의 황금유물을 남긴 신라인과 고대 트라키아인은 어떤 유사점을 갖고 있을까. 소피아에 위치한 불가리아 국립역사박물관. 수천 년 역사를 가진 불가리아의 찬란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것은 트라키아 시대의 황금보물들이다. 황금을 정교하게 타출해 동물과 사람의 얼굴을 예술적으로 표현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형상화 한 이 황금보물들은 사용된 황금의 무게만도 총 6kg이 넘을 정도로 화려함에 극치를 이르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라와의 유사성은 단지 황금을 사용했다는 것 뿐 별달리 연관 관계를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때 취재진을 안내하던 박물관의 직원이 한 유물을 소개했다.

 

그것은 놀랍게도 황금보검의 소용돌이 문양과 흡사한 황금장신구였다. 우연히 발견한 트라키아 시대의 소용돌이 문양. 이것이 신라 황금보검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동유럽의 흑해연안에 위치한 불가리아. 현재 EU에 가입한 유럽공동체 일환으로 우리와 특별한 공통점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고대에는 동서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트라키아 시대 왕족의 것으로 보이는 투구와 갑옷. 그와 함께 발견된 기원전 4세기경의 비단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먼저 동서간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발레리아 폴 사학자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이후 열렸다고 알려진 실크로드는 사실은 그의 죽음보다 훨씬 먼저 왕래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이렇듯 활발히 동서문화 교류를 했던 트라키아 인들은 어떤 존재였을까. 취재진은 불가이라 중부에 위치한 트라키아 시대의 한 고분을 찾았다. 기원전 4세기경으로 보이는 트라키아 시대의 무덤에 채색벽화다. 벽화의 인물들은 모두 말을 타고 있다.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모습의 트라키아인들. 그들은 기마유목민족이었던 것이다.

 

블라디미르 디미트로프 미술사학자

“트라키아 인들은 몽골인이나 원 불가리아인, 타타르 인들과 같습니다. 말을 훌륭하게 길러냈죠.”

 

 

 

 

 

 

 

유라시아 초원지대의 서쪽 끝 발칸반도에 위치한 불가리아. 이곳에 살던 고대 트라키아 인들은 말을 타고 자유롭게 초원을 질주했다. 그들의 문명은 유라시아 초원 유목민의 문화와 연결됐을 것이다. 트라키아 인들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불가리아 고고학박물관. 트라키아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역시 황금유물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전시관 한켠에서 동물의 뿔을 형상화 한 트라키아 시대의 뿔잔을 볼 수 있었다. 뿔잔은 초원에 살았던 유목민족들이 공통적으로 남긴 유물로 신라에서 역시 동일한 계통의 유물이 발견된다.

 

트라키아 시대의 또 다른 유물 청동솥. 이것 역시 신라와 가야에서 발견되는 동복과 형태상 거의 유사해 보였다. 말 뒤에 동복을 실고 있는 무사를 조각한 신라의 기마인물형 토기. 신라와 트라키아는 유라시아대륙 초원문화의 양쪽 끝이 아니었을까.

 

“트라키아는 동과 서를 포용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한 독일학자가 말했습니다. 트라키아 사람들은 아시아에서 얻은 것을 유럽에 전달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문화를 지킬 줄도 알았기 때문이죠.”

 

 

신라의 황금보검과 트라키아의 관계를 알아보러 왔다는 취재진의 설명에 박물관 측에서 특별히 한 유물을 소개해 주었다. 그것은 트라키아 시대의 황금보검이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칼집, 보석이 박혀 있었을 법한 작은 구멍들. 이 칼이 바로 신라 황금보검의 원형을 아닐까.

 

 

중앙아시아와 흑해의 초원지대를 누비던 유목민족에 의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고대부터 이루어졌던 동서간의 교류 그리고 드디어 찾아낸 트라키아 시대의 황금보검. 이 보검은 신라의 황금보검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고대 트라키아 인들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황금보검을 만들어낸 주인공일까요.

 

취재진은 신라와 트라키아 황금보검의 관계에 기대를 걸고 국립소피아 대학에 교수를 찾았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부정적이었다. 두 검의 연대가 너무 차이가 난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기원전 8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트라키아의 검과 기원후 6세기 신라의 황금보검이 연결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다른 연결고리를 제시했다. 고대 트라키아 인이 아니라 지금의 불가리아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했던 사람들이 신라의 황금보검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기원후 3세기부터 6세기까지 유럽은 동방에서 온 이민족의 침략으로 몸살을 앓았다. 3세기 이후 갑자기 말을 타고 등장한 훈족은 유럽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같은 시기 아시아에서도 북방의 유목민족이 중원을 압박해 5호 16국을 이룬다. 전세계적인 민족 대이동의 시기였다.

 

7세기 대불가리아를 세운 사람들은 분명히 민족의 대이동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딜랴나 보테바 교수 소피아 대학교

“원 불가리아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정확하게 설명드릴 수 없습니다. 제 동료들 중에는 몽골인의 형상을 하고 돌궐어를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인도유럽계 종족으로 인도이란어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현재 불가리아 사람들에게도 당시 민족 대이동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불가리아의 상징 요구르트를 즐겨 먹는 한 가정집. 우유를 발효시킨 요구르트와 치즈를 사용해 단백한 식사를 주로 하는 이들로부터 취재진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일리나

“저와 제 아이들에게는 없지만 몽골반점이 불가리아 인에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들끼리는 불가리아 인의 몽골반점은 우리의 먼 조상이 몽골에서 왔다는 증거라고 얘기합니다.”

 

 

몽골의 광활한 초원. 고대로부터 초원의 제국을 일으켰던 유목민들의 고향이다. 유럽에서 민족 대이동을 촉발시킨 훈족은 동양에선 흉노라 불렸다. 몽골 중부에 위치한 노인룰라 흉노 고분군은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흉노유적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아주 흥미로운 유물이 있다.

 

몽골 학예사

“여기 제일 재미있는 유물이 있습니다. 이 은장식품은 2006년 노인울라 고분군에서 몽골과 러시아 발굴팀이 공동 발굴조사를 하며 발굴했습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식입니다.”

 

 

 

 

초원의 유목민들에 의해서 동과 서는 만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불가리안 인들에게 몽골반점이 있다는 사실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발굴팀이 몽골에서 발굴한 기원전 1세기 무렵 흉노의 유물들이다.

 

신라황금보검에서 보이는 누금기법을 사용한 장신구다. 동복역시 발굴됐다. 이렇듯 흉노유물엔 초원유물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유사성이 잘 들어난다. 흉노는 하나의 민족이었을까.

 

 

 

 

몽골에서 출토되는 흉노시대의 다양한 인종의 두개골은 몽골인종과 유럽인종이 초원지대에서 공존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흉노는 민족이 아니라 제국의 개념이었으며 동서간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투멘교수 몽골국립대학교 고고학과

“흉노는 바이칼 호수부터 만리장성까지, 아랄해부터 만주까지 넓은 땅에 있었던 아주 큰 나라였기 때문에 서로 다른 문화, 기원을 가지고 있는 여러 민족을 결합하는 나라였습니다.”

 

황금보검의 생산자를 찾기 위한 여정은 마침내 흑해에 이르렀다. 흑해 연안의 대표적 해양도시 바르나. 3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민족이동시기에 유물이 보관된 바르나 박물관. 취재진은 드디어 황금보검과 가장 근접한 유물들을 만나게 됐다.

 

알렉산더 민체프 박사 바르나 박물관

“신라 황금보검은 세계적으로 3개 밖에 없는 것이며 매우 값진 것입니다. 특별히 주문한 물건으로 특별히 요구한 문양으로 보입니다. 황금보검에 표현된 장식과 여기 전시된 큰 팔찌의 장식이 유사합니다.”

 

 

 

당시 동로마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들이다. 황금보검과 똑같은 보석 감입 기법이 사용됐다. 대부분 석류석을 넣은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의 수도였으므로 330년 이후 이런 생산품의 중심이었습니다.”

 

신라의 황금보검은 동방에서 온 이민족의 요구로 동로마의 장인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민족 이동의 시기(3~6세기)에 이민족의 침입이나 그들의 주문에 따라 제작했을 수 있습니다. 동로마의 영향력이 미치던 곳에서 찾아낸 금 장신구들은 이민족의 방식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동로마의 장인들이 (동방에서 온) 이민족을 위해 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황금보검의 원산지가 동로마 지역이었음을 시사하는 또 다른 유물들이 있다. 흑해 연안에서 발견되는 다량의 로만글라스.

 

이 유리병은 신라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로만글라스와 거의 유사하다. 이것은 흑해와 신라가 고대 분명히 연결돼 있었음을 웅변한다.

 

경주 출토 로만글라스들이 흑해에서 신라로 올 수 있었다면 황금보검 역시 이곳에서 제작되어 신라로 유입된 것이란 가정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

 

동유럽산 석류석이 감입돼 있고 당시의 세공기법으로 만들어진 신라의 황금보검. 이것은 민족대이동의 시기에 동로마의 장인이 생산한 걸작품은 아니었을까.

 

3세기에서부터 6세기까지 이어진 거대한 민족이동의 시기. 동로마의 장인들은 동방으로부터 이주해온 이민족들의 주문에 따라서 다양한 공예품들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황금보검은 당대 최고의 기술을 갖고 있었던 흑해 연안 동로마 지역의 장인들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희귀한 황금보검을 갖고 무덤 속에 잠든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또 그리고 어떻게 천오백 년 전 동로마의 황금보검이 신라의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1500년 전 계림로 14호분에 묻힌 신라 황금보검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였을까. 여전히 의문부호를 남겨진 이 비밀을 풀기 위해 경주박물관에서는 몇 년 전부터 새로이 보존처리를 시작했다.

 

계림로 14호분인 비교적 작은 무덤이었지만 그 안의 유물은 대부분 최상급의 것이었다. 보존처리 결과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 단순히 철제 말안장으로 보였던 이 유물에 강한 X선을 투과시켜 봤다.

 

녹이 슬어 보이지 않았던 금 입사 용문양이 선명이 살아났다. 이것 역시 유래를 찾기 힘든 귀중한 유물이다.

 

이번 계림로 14호분 유물들의 보존처리는 한국고고학이 한 단계 발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화려한 유물들과 더불어 황금보검을 차고 무덤에 잠든 주인공은 높은 신분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최초발굴당시 한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 계림로 14호분의 피장자는 두 쌍의 귀고리와 다른 유물의 위치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 두 명이었음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들은 과연 신라 귀족이었을까? 아니면 황금보검을 신라에 가져온 외국인이었을까.

 

강우방 일향 한국미술사 연구소장

“제인상으로서는 바로 이 보검을 찬 서역인이 여기에 묻혔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황금보검의 주인공이 외국인이 아닐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황금보검을 제외한 대부분의 출토유물이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고 무덤 역시 당시의 신라 풍습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윤상덕 학예연구사 국립경주박물관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그 외국 수입품이 하나 있다고 그것으로 피장자가 외국사람이다 이렇게 얘기하기는 힘들지 않느냐......”

 

 

황금보검의 소유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유물이 있다. 예전엔 고고학적 증거로 간주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주목받는 유물이다. 바로 피장자의 인골과 치아다.

 

현대의 DNA분석 기술로 생물학적 분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황금보검의 주인공이 남긴 치아는 부식이 심해 분석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계림로 14호분과 동일한 시기에 조성된 신라의 무덤 중 인골이 남아 있는 고분이 있다. 강원도 동해시에 추암동 고분군. 6세기 초로 비정된 이 고분군에서는 예외적으로 신라시대의 고인골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관심을 끌었다.

 

이상수 학예연구실장 관동대 박물관

“부분적으로 여러 고분군 안에 매장돼 있는 인골들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지만은 이렇게 추암동 고분같이 다량으로 나와 있는 경우는 드문 예가 되겠습니다.”

 

 

추암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인골. 중앙대 의대에서 고인골의 DNA를 추출했다. 이곳에서는 아시아 각 지역의 고인골을 수집해 비교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고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상호이동 관계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시대 인골을 분석한 결과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도출됐다.

 

이광호 교수 중앙대 생명과학과

“처음에 이 결과를 보고 저희들도 상당히 좀 이상하다.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가 해서 여러 가지를 분석했습니다.”

 

 

놀랍게도 신라의 인골에서 나온 DNA와 몽골서부에서 발견된 북방유목민족의 DNA가 거의 일치하는 경우를 보여주었다.

 

“부계와 모계 DNA조사 결과 신라사람과 북방유목민의 유사성이 밝혀졌다. 인적교류의 가능성이 크다.”

 

 

 

신라유물들의 북방적 성격 그리고 유전자 정보로 확인되는 유목민과의 유사성. 이것은 신라인과 문화의 뿌리가 초원이었음을 말해주는 강력한 증거들이다.

 

1973년 계림로와 동시에 발굴이 진행됐던 경주 최대의 고분 황남대총. 황남대총에서도 금빛 찬란한 금관이 발견됐다.

 

신라 황금문화의 정수라고 일컬어지는 금관. 금관위로 솟아 있는 장식은 사슴뿔과 나무를 상징한다. 그런데 중앙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신라의 것과 흡사한 모양의 금관이 발견됐다.

 

기원후 1세기경의 것인 이 금관은 그 장식과 모양새가 신라 금관의 원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금관 역시 나무와 잎을 상징하는 장식이 달려 있다.

 

 

 

불가리아에도 이와 비슷한 유물이 있다. 기원전 4세기경 트라키아 시대에 황금면류관이다. 얇은 금판을 세공해 나뭇가지와 잎을 형상화 한 모양새는 아프가니스탄과 신라 금관을 연상시킨다.

 

강인욱 교수 부경대 사학과

“그땐 흉노의 어떠한 계통으로 강력한 무기를 발명해 무기를 쓰면서 그 주변지역들은 상당히 활발한 교류-문화적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그러한 와중에서 흉노계통의 황금 장식품들이 주변지역으로 자연히 퍼지게 되는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유라시아의 초원을 중심으로 동서양간 유물들이 유사한 이유를 문화의 교류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취재진은 고대 누금세공기법을 재현해 보기로 했다. 금구슬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가는 금살을 만들어 일정한 크기로 잘라 내야 한다. 그리고 작은 금조각에 강한 열을 가한다. 그러면 불에 녹은 황금이 표면장력에 의해 작은 크기의 금구슬로 변하게 된다.

 

 

 

신라의 장신구에서는 정교한 누금기법이 사용된 예를 흔히 찾을 수 있다. 초원유목민계통의 문화권에서 주로 사용된 누금세공은 만들어진 제품을 보고 눈으로 익힐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작은 금구슬들을 작품위에 붙이기 위해서는 땜질이 필요하다. 금구슬 하나하나마다 얇은 합금판을 올리고 마지막으로 강한 불을 가하면 땜 재료가 먼저 녹으면서 금구슬이 달라붙어 제품에 완전히 고정된다.

 

김진배 금속공예가

“어렵습니다. 기술이 데이터로 나와 있는 것도 없고 순간적으로 자기 눈으로 보면서 불 조절을 해야 하니까......”

 

 

각종 공구들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엔 훨씬 더 작업을 힘들게 해야 했다. 이런 기술을 익히거나 전파하려면 사람들의 직접적 이동이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누금세공을 사용한 유물들은 유라시아 초원을 중심으로 폭넓게 나타난다.

 

딜랴나 보테바 교수 국립소피아대학교

“고대에 이뤄졌던 교류를 지금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지금은 유럽인들은 아시아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예전에는 교류 자체가 훨씬 쉽게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국경이 정확하지 않았으니 좀 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을 가로질렀던 동서양의 고대인들. 그들은 당대의 방식으로 세계화를 이루었다. 한반도의 동단 경주에서 발견된 황금보검. 그것은 신라가 세상 끝에 작은 나라가 아니라 전세계와 소통하는 기상을 소유했던 강국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강인욱 교수

“신라는 이미 그 교류상은 단지 한국의 삼국시대를 벗어났습니다. 적석목곽분이 등장할 시기에는 이미 신라는 전 아시아 나아가서 초원지역과의 어떠한 다양한 교류를 했던 하나의 거점이었습니다. 유라시아 고고학자들은 자신들의 유물 연대를 신라에서 파악합니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시베리아 쪽은 유물들이 정확한 연대가 없기 때문에 반대로 신라고분에서 몇 세기인지를 보고 자신들의 유물을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라고고학은 이미 일정정도는 전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유라시아 고고학의 편입되었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천오백년 전 당대 최고의 기술과 동서양의 만남을 보여주는 시대의 아이콘 신라황금보검. 그 비밀을 좇는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이 황금보검의 주인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것은 아직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다 국제적인 연구와 조사가 이루어져야 전체적인 윤곽을 알 수 있게 되겠죠. 분명한 것은 신라의 유물은 신라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로만글라스와 황금보검으로 대표되는 신라의 유물은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지대를 자유롭게 오갔던 당시 사람들의 호방한 정신과 그 자취를 드러내는 인류 전체의 유산입니다. 경주 계림로 14호분에서 발견된 황금보검. 그것은 신라가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초원문화의 한 축이였음을 이야기해주는 단적인 증거일 것입니다.

 

※ 글 내용의 저작권은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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