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황금 보검 발견 비하인드 스토리
도굴범은 고분의 위치를 어떻게 파악하나
풍수지리 모르면 (문화재)도굴은 엄두도 내지 말라.
경주지방검찰청에 구속된 한 골동품 장물아비는 "손꼽히는 도굴꾼들은 봉분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주변 산세만 보고도 고분이 있을만한 곳을 알아낸다"고 진술했다.
전문 도굴집단은 명문가의 족보에 나와 있는 묘산도를 가지고 도굴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각 문중의 모든 족보가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고 누구나 열람 복사가 가능하기에 자료수집을 막을 방법은 없다.
풍수 지리학에 도통한 자라면 문화재가 매장된 분묘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풍수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마 그렇겠지.’라고 추측한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 풍수적으로만 접근하여 본다면 분묘 찾기가 더욱 어려울 정도로 혈(穴)에 제대로 묘을 자리잡은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과연 몇 명이나 풍수적 명당에 자리를 잡았는지 그 숫자가 의문스러운데 왜 그런 얘기가 나도는 것일까?
이것은 족보에 밝은 사람이 패철을 약간만 볼 줄 알아도 충분한 일이기 때문이다. 족보에는 조상의 묘가 어떤 산에 어떤 좌향(坐向)으로 놓아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벼슬이 높아 매장 유물이 있을 법한 다른 조상의 이름을 족보에서 빼낸 다음, 그 분의 묘가 있다는 산을 찾는다고 한다.
그 다음엔 청룡과 백호가 잘 감싼 산 능선을 찾고, 이어서 족보에 기록된 좌향에 맞는 자리를 패철로 찾는다고 한다.
결국 도굴의 주범은 풍수학이 아니라 족보의 묘산도로 밝혀지는 셈이다.
이미 폐묘(廢墓)로 변해 초목으로 덮였더라도 패철만 이용하면 좌향을 기준으로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기본지식이 부족한
도굴범에게 가장 난감한 문제는 이미 산등성이로 변한 산 속인데, 어디에 보물급 문화재가 매장된 분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때에 풍수지리에 통달한 지관이 필요하다고 한다. 최근에 수배된 이 모씨 역시 문화재가 매장된 분묘를 찾는데 일인자로 손꼽히며, 많은 도굴범들까지 그에게서 분묘 감식을 전수 받았다고 한다. 동양의 지리관인 풍수 지리학이 도굴범의 앞잡이로 이용당하는 한심한 세상이다.
도굴꾼이 풍수지리를 정식으로 배운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풍수라도 명리학 책을 한 1년은 봐야 되고 어려운 한문을 익히면서 전문적인 이론과 간산(看山)을 거쳐야 하는 최소 몇년의 과정을 거치는 풍수지리의 기본과정을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분들은 '실전'의 경험이 풍수지리의 안목을 키운 실무형 반풍수 지관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도굴범들이 분묘를 도굴할 때면 언제나 특수 제작된 3m짜리 쇠꼬챙이를 이용하는데, 전문가라면 그것을 땅 속에 찔러 보기만 해도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귀신같이 알아맞힌다고 한다.
도자기가 들었다면 도자기 스치는 소리가 날 것이고, 금속 유물이 들었다면 쇠 긁는 소리가 날 것이다.
도굴하기도 전에 소중한 문화재의 훼손이 시작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다양한 금속탐지기를 사용하는 전문기술자도 있다고 하지만 탐지하는 깊이도 제한(1.5m이내, 최대 5m 신뢰도 떨어짐)이 있고 도자기 등 다른 부장품은 알 수 없어 금속유물에 관심있는 도굴범에 한정된다고 한다.
국내 최고의 도굴꾼에 대한 대표적인 예 하나.
경주발굴이 한창이던 70년대.
당시 최고 도굴 기술자으로 꼽히던 C씨가 경주사적관리사무소 임시직원에 채용됐다.
73년 경주 계림로 고분군을 발굴하면서 한 지역에서 자갈과 돌 등이 계속 나오자 발굴단의 한 관계자는 "유물이 없는 곳이므로 그만 파자"고 했다.
"1.5∼2m만 더 파보시지요." (C씨).
옥신각신 반내기까지 해가며 더 파자 훗날 보물 635호로 지정된 금과 보석 등을 장식한 보검 1점과 토기편, 말 장식품들이 나왔다. 이 보검의 가치를 일부에서 1,000조원이라고 한다.
그만큼 귀한 보물이며 세계에서 관심을 가지는 황금 보검이다.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가 최고의 도굴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경주에 전봇대를 묻는 일용직 근로자로 일할 때의 경험 때문이었다.
땅을 파면서 신라시대의 무덤을 숱하게 보았던 그는 누구보다 신라고분의 구조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 4∼5세기 적석분은 관 위에 돌이나 자갈 등을 층층이 깔았다. 왕릉으로 추정되는 천마총이나 황남대총이 다 이런 스타일인 적석목곽분으로, 도굴하기도 힘들다.
자갈층이 나오자 일부에서는 생토층(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없는 땅)으로 생각했지만 C씨는 그 아래에 무덤 내부가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조선 왕릉이나 왕족의 묘는 도굴범들에게 결코 속살을 드러내지 않았다.
과거 고려·신라시대 왕릉과 달리 값비싼 물건이 거의 없다. 있더라도 대부분 모조품이라는 점이다.
민본주의가 지배했던 조선 왕실은 소박한 부장품을 선택했다. 이 선택이 조선 왕릉의 도굴을 막는 데 한몫했다.
일제시대 당시 일본인들이나 이후의 도굴범들이 각종 문헌을 통해 조선 왕릉에 값비싼 부장품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조선 왕릉은 세조 이후 약간의 변화가 생긴다. 기본 구조는 같지만 재료가 바뀌게 된다. 조선초기, 석실로 된 왕릉을 만드는 것은 백성들에겐 큰 부담이었다.
이에 세조는 자신의 무덤은 석실로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후 조선 왕릉은 회격릉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회격은 석회·황토·모래를 섞어 만든다. 회격을 액체 형태로 만들어 모형 틀에 부은 뒤 단단하게 굳힌다. 이렇게 만들어진 회격은 시멘트보다 더 단단하다.
중종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를 처음에 묻었던 '옛 희릉(禧陵)'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 ~ 1515 )
조선 제11대 중종의 제1계비. 세자(후의 仁宗)를 낳은 후 산후병으로 사망
1973-74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주도한 발굴 성과를 토대로 문화재청이 조선 4대 세종이 처음 묻힌 초장지(初葬地)라 해서 2008년 대대적인 재발굴 조사까지 벌인 국가정보원 부지 안 이른바 '옛 영릉'(舊 英陵)은 중종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를 처음에 묻었던 '옛 희릉(舊 禧陵)'이 있던 곳으로 밝혀졌다.
1973년 '옛 영릉' 발굴 당시, 봉분 석실 동남쪽 16m 지점에서 출토된 유물로, 이곳에 묻힌 주인공이 세종이었음을 추정하는 데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한 묘지석(墓誌石) 파편이 실은 장경왕후의 무덤에 쓴 신도비문의 일부였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2008년 5월 재발굴했던 구희릉(장경왕후 윤씨)의 회격도 삽으로는 부수기 힘들어 포클레인이나 굴착기가 필요할 정도였다.
“탐침봉은 하나에 25㎝에 불과하지만 이를 연결하면 최대 7m까지 길이가 늘어난다. 이정도면 왕릉급 무덤에 사용한다.
“도굴 과정에서 탐침봉에 찔려 훼손(구멍)된 삼국시대 가야고분 토기”
도굴 ‘프로’가 ‘등산’할 때면 탐침봉을 들고 다닌다. 용도는 단 하나, 땅 속을 살피는 것인데 도굴범들에게 ‘등산간다’는 의미는 “도굴 간다”는 뜻이다.
도굴의 주 대상인 무덤이 산에 있기 때문이다.
생계를 걸고 수십년 도굴을 하다보니 전문가를 뺨치는 유물 감식안이 나온다.
도굴꾼들은 탐침봉을 흔히 군대에서 총기손질때 사용하는 ‘꼬질대’라고 부른다. 탐침봉은 가운데가 빈 강철인데, 보통 25∼30cm의 크기로 양끝에 암수나사가 있어 묘지 도굴 때에는 이들을 각기 잇대어 사용한다.
20∼30cm의 탐침봉을 여럿 연결해 보통 1.5m 정도의 크기로 만들어 사용하는데, 무덤이 클 때는 5m까지 늘려 사용하기도 한다.
영남지방 수천 고분들은 대부분 도굴 구멍이 뚫렸다고 하는데, 한번 도굴당한 고분도 다시금 도굴당하기 다반사다.
경주의 신라왕릉이 두 번, 세 번, 네 번까지 도굴된 것이 그 예이다. 한번 도굴로 모든 부장품을 가져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삽질 한번 않고도 부장품의 '부실' 여부를 아는 도굴꾼들은 땅속 도자기의 상태도 알 수 있다고 호언한다.
이들은 땅 속에 뭐가 있나 알아 보기 위해 끝이 뾰족한 철로 만든 '탐침봉'으로 땅을 이곳저곳 찌르고 다닌다.
“칼(창) 맞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탐침봉이 도자기에 닿았을 때 한바퀴 돌려 경쾌한 소리와 '손 맛' 이 느껴지면 좋은 흙과 유약으로 높은 온도에서 구운 상급 도자기라는 것. 탐침봉 자국이 난 도자기를 '칼 맞았다'고 표현한다.
옛 사람들은 고분을 만들 때 돌이나 나무로 관, 혹은 곽을 만들었다. 무덤이 아닌 곳이라면 탐침봉이 “쑥” 땅 속으로 들어가지만, 돌방무덤(석실·石室)은 탐침봉으로 돌의 감촉이 전해온다.
나무로만 관을 쓴 곳은 나무가 썩어 없어진 뒤 유물에 탐침봉이 직접 닿기 때문이다.
이때 ‘프로’들은 탐침봉을 쓱 돌려보며 그때 전해지는 ‘손맛’을 통해 유물의 재질을 파악한다.
탐침봉에 유물이 닿았을 때 ‘칼(창) 맞았다”고 하는 것이다. 유물이 ‘칼(창)에 맞았을 때’ 전해지는 소리나 감촉을 이들은 “운다” 고 표현한다.
‘창(칼) 맞은 유물’은 도굴을 통해 발굴된 것이므로 골동품시장에서 유통될 때 진품 취급을 받는다.
이를 역이용, 가짜를 만든 뒤 일부러 탐침봉 자국을 내는 경우도 있다.
'도굴꾼들을 문화재 발굴작업에 활용할 수는 없느냐'는 의문이 자연 스럽게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그건 좀 경우가 다르다고 고개를 젓는다.
도굴꾼들의 경우 '보물찾기'에만 관심이 있어서 유적을 심하게 훼손하고, 가능성만으로 무조건 파고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더라도 문화재 발굴작업에는 풍수지리에 통달한 지관(地官)과 전문 기술자(도굴) 그리고 유물발굴 관계자의 팀웍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이 분들의 기술력(?)을 고려해서 제도권으로 흡수하여 전문 발굴팀을 구성하고 이에 합당한 최고의 대우(지위)와 발굴 유물에 대한 금전적인 추가보상만 뒷받침해준다면 보물급 문화재의 추가 발굴은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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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달러" 가치의 신라 황금보검
http://blog.daum.net/yescheers/8598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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