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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조선오백년 야담

조선 오백년 야담 제16화 / 斬首된 별아기 - 愛情悲譚

by 연송 김환수 2013. 8. 30.

朝鮮(李朝) 五百年 野談

 

차 례

 

第 一 話 - 寶娘靑湖 - 血痕奇譚

第 二 話 - 樂浪好童 - 悲戀哀史

第 三 話 - 楊書房致富 - 抱腹絶倒

第 四 話 - 風流監司 - 節佳妓話

第 五 話 - 哀戀話 - 靑春悲戀

第 六 話 - 異花 雪竹梅 - 復讐奇譚

第 七 話 - 將軍義盜 - 名將逸話

第 八 話 - 煩惱僧 - 佛力奇譚

第 九 話 - 悲愴- 百濟哀話

第 十 話 - 金議官 叔侄 - 韓末逸話

第十一話 - 李星信最後 - 海戰悲話

第十二話 - 阿非知九層塔 - 望鄕哀話

第十三話 - 可憐杜十娘 - 名妓哀話

第十四話 - 公主神尺 - 怪夢奇譚

第十五話 - 餘愁 - 落照悲話

第十六話 - 斬首된 별아기 - 愛情悲譚

第十七話 - 千里遠情 - 義俠美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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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화>

愛情悲譚(애정비담)

斬首(참수)된 별아기

 

 

신라 제 이십육대 진평왕(眞平王)이, 새로 쌓은 남산성(南山城).

성문은 굳게 닫히우고, 성벽도 높으니 불의의 외적에 의한 야중 피습의

염려는 거의 없었으나, 그 거의 라는 것이, 전연 과 달라 번도는 군사의

수고로움만은 애끼지 않았다.

반달 빛이 푸른 으스름 밤이었다.

성곽이 그림 같은데, 그 속에 움직이는 두 그림자가, 동쪽 담밑에서

나타났다.

여보게, 대야성(大耶城)에, 있을 때보다 외로워 못견디겠네

새로 축성(築城)한 곳이고 성주(城主)도 어리니 그런 마음이 드는거지

그들은 번(을)도는 두 군사였다. 얼마전까지, 대야성에 있다가, 신축된

남산성으로 떨어져 온 오백 군졸중에 끼워진 사람들이다.

인젠, 변경(邊境)살이 좀 그만 시켰으면 좋겠어--- 계집, 자식, 떨어져

세해가 됐네 그래---

허--- 이사람, 세터로 온지 반년도 못 되어 어느덧 실증이 나면

어쩌나, 변경살이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저 꾹--- 참아야지

그런데 여보게, 우리 성주는 변경살이가 좋은가부지?

아-니, 우리처럼 말단 졸개들도 지긋지긋한데, 성주가 귀양살이나 진배

없는걸 좋아 할리가 있나, 서울에 있어도 떳떳한 자리 하나는 차지

할걸---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만, 사실은 그렇지 않단 말일세, 지금 성주는

스스로 병부령(兵部令)께 품해서 떨어져 나왔다네

어---, 별일도 다 있군, 그거 왜 그럴까?

하여튼, 이상한 일이야, 내막은 전연 모르겠지만, 북으로는 고구려가

가깝고 서에는 백제의 땅이 바로 눈 앞에 있는 곳을 자원하다니, --- 언제

백제군의 말 발굽소리가 들릴지 모르는 곳을. 더구나 어린 나이로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한 점도 한 두가지 생각나네 그려, 어떤

때는 성문위에 올라 서서, 퍼렇게 떠 오른 백제의 산봉우리를,

언제까지나 건너다 보고 계시던 것이라든지, 남산성에 오신 뒤 단 한번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든지

두 군사는 창을 어깨에 멘채 사방을 살필 염도 내지 않고, 알 수없는

성주의 비밀을 지껄이며 걸었다.

그들의 대화가 잠간 그쳤을 때다.

오른 편으로 걷고 있던 군사가 별안간 멈춰서며, 옆에 있는 군사의

소매를 웅켜(움켜?) 쥐었다.

저기 저기---

나직한 소리였다.

그러나 오른 편 군사가 가리킨 것을 왼편 군사는 벌써 보았다.

성주의 처소 앞에 어렴푸시(어렴풋이?) 떠 오른 흰 그림자. 그것은 좀

움직이는듯도 하고, 돌 부처처럼 서 있는 것도 같았다. 분명히

사람이었다. 그러면 성주를 해하려는 자객일까!

두 군사는 창을 바로 잡았다. 그리곤 상당히 떨어져 발소리를 죽이어

다가갔다.

누구요!

오른 편에 서 있던 군사가, 어둠을 타고 오다 푸른 달빛 속으로

내달으며 쏘았다. 동시에 왼편에 걷던 군사도 맞은 편으로 내달았다. 두

군사의 창이 달빛을 받아 개똥불처럼 푸르게 번쩍이었다.

성주 가선랑(加仙郞)

두 군사는 주춤했다. 그제서야 그들은 그분(그사람)이 바로 좀 전까지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나이어린 성주임을 알았다.

황송합니다

밤중에 수고들 하네, 괜히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군사들은 다시 성벽을 끼고 돌기 시작했다.

성주 가선랑.

그는 미남자였다. 지금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김유신, 관창,

사다함, 검군똥이(?), 모두 국선도(國仙道) 출신의 미남 무사이 듯이,

그도 화랑도를 거쳐 나온 미남 무사였다.

올해 나이 스물 하나.

그런데 그는 어찌하여 귀양살이나 다름 없는, 변경 성주를 자원했으며,

남들이 잠든 밤에도, 이처럼 잠 못이루고 처소 밖을 거닐고 있을까?

또, 때로는 진흥왕이래 실환하여 서로 침공의 기회만 노려보는 적국

백제를 다정한 눈매로 건너다 보고, 한없이 넋을 뺏기기도 할까?

 

* * *

 

진평왕(眞平王)은, 신라를 흥륭케한 원동력이 된 진흥대왕의 손자

되시는 분이다. 왕께서는 제위 오십사년간, 문물 제도를 고치고 또,

불법을 숭상하여 멀리 황해 건너까지 구법승을 보내시기도 하였지만, 그런

무엇보다도 변경 수비의 업적이 컸다. 거반 퇴폐하여 가는 여러 성을

개축했고, 이름있는 장군을 뽑아서 변경 성주로 임명했다.

그러나 왕께서는 이런 소극적인 정책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나아가,

이웃나라를 넘겨다 보시기까지 하였다.

고구려는 워낙 크나큰 나라래서, 지금의 국력으로 어찌할 수없는 것을

잘 아셨지만 백제는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맨먼저 착수하신 계략이 염탐군(꾼?) 파견이었던 것이다. 장래

백제를 무찌를 때, 각각 군사 이천이상을 거느릴만한 인재를 열명 선발할

것을 병부령에 이르시고, 그들로 하여금 백제 전역을 십등분하여 한

구역에 한명씩 보내되, 도랑하나 언덕 하나까지, 샅샅이 탐사할 것을 분부

하셨다.

그때, 뽑힌 열명이 한결같이 낭도들 뿐이었다. 무사도(武士道)를 익히

닦고, 세속 오계(世俗五戒)를 범할줄 모르는 씩씩한 낭도들이라면, 능히

중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을 상하가 모두 믿었다.

낭도 가선랑도 이 열명틈에 끼일 영광을 부여 받았다. 그것이 두해전

그러니까 가선랑의 나이 열 아홉 때다.

고구려와 흡사한 백제의 의복으로 변장한 염탄군 열명은 국경에서부터

각기 맡은 구역을 향하여 헤어졌다.

가선랑! 염탐이나 잘 하게, 괜히 백제 계집한테 혹하지 말구

남 걱정 말고, 자기나 튼튼히 하라구

그들이 헤여지는(헤어지는?) 자리에서 춘욱랑(春郁郞)과 가선랑은

이렇게 농치며, 잠시간의 이별이나마 퍽으로 애석해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한갖 농담이 아니었음을, 그들은 나중에야 알았다.

 

* * *

 

가선랑에게 맡겨진 구역은 지금의 경기도 일대였다. 고국을 떠나 어언

한삭반, 옥같이 하얀 발이 부르트고, 터져 망칙하게 되었지만, 그는

그것이 지금도 고달프질 않았다. 아니, 그의 젊은 피는 굳굳한

가슴속에서 들끓기까지 하였다. 얼마 후에 신라의 준비가 갖추어지기만

하면, 자기 스스로 질풍같은 군사를 이끌고 이땅을 휘몰아칠 것을

그려보니 꿈 많은 가슴이 잔잔할 리 없었다.

그때의 그 통쾌 무비할 감격!

그는 마상에 높이 앉아, 번개처럼 내달린다. 그의 칼날이 번득이는

곳에 백제군은 초개같이 쓰러지고, 그는 이지방에 웅거한다. 그렇게되면

그동안 자기를 거처시켜준 사람들은 얼마나 놀랄까?

그의 상상은 이국의 붉게 물든 노을 속으로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퍼져

올라 가는 것이었다.

여보, 젊으신네

가선랑은 누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비로소 제 정신을 돌이켰다.

뒤에는 오십이 조이(적히?) 되었을듯한 노인이 초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벌써 해가 떨어졌는데, 무슨 연유로 인가가 아득한 고개 밑에서

쉬시오?

그는 그제서야, 동네를 빠져 아득히 걸어 왔으며 그 쉬고 있는 곳이

운봉재 밑턱의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임을 깨달았다. 걷던 발이 쓰라려

잠간 쉬려던 것이 이토록 늦은 것이었다.

길 떠난지 오래되어 발은 부르트고, 몸은 피곤하여 잠간 쉰다는 것이

그만!

그럼 젊으신네는 고개를 넘어 가오?

글쎄요, 아무곳이나 인가 있는데로 가야 합지요

허- 마침 잘 되었군, 우리집이 바로 고개 넘어요, 나는 꼭 이밤으로

집에 들어 가야만 할일이 있는데 어두운 고개를 혼자 넘을 생각을 하고 퍽

근심을 했더니 이렇게 만나 다행이군. 동행하자구!

가선랑은 쓰라린 발을 꾹 참고 노인을 따라 일어 서면서 오늘 밤은 이

노인 집에서 신세를 져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고개를 잡아 들어 몇걸음 올라 갔을 때는 어둠의 장막이 온

누리를 덮어 버렸다. 운봉재는 승강로가 십리는 훨씬 넘는 커다란

고개였다.

사방은 온갖 잡목으로 이루어진 숲이 연달아 드어차고 고갯길은

논두렁처럼 좁았다. 어둠은 각 일각 짙어오고, 어둠이 짙어 올 때마다 두

사람의 마음은 점점 무시무시해졌다.

가선랑의 담대한 마음도, 금방 숲속에서 호랑이라도 뛰어 나올듯하여

움찔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노인이 무서워지기도 하였다. 엄연히 밤중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동행하여 고개를 넘자던 노인이 이상해졌다. 그는

애써 자기의 약하게 되는 마음을 가누려 했다.

(너는 화랑이 아니냐 ! 세상에 두려움이 없는 낭도! 이제 백제의

커다란 강토를 휘감으려는 장부가 요까짓 고개길에 가슴을 조이다니 ! )

제가 저를 격려하고 보니 어느 정도 마음이 침착해지는 듯도 하였다.

그들이 고개 마루턱에 올라섰을 때 활대같은 반달이 하늘에 떴다.

그때까지는 무사하였음에 안도의 긴숨을 내뿜고 막 내리막을 잡아 들었을

때다. 갑자기 노인은 해지며 가선랑의 오른 팔에 매달렸다.

가선랑도 처음에는 눈이 아찔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화랑의

아랫배에서는 하늘이라도 뚫을듯한 용기가 무럭 무럭 피어 올랐다. 그는

벌써 수백만의 적군을 앞에 놓은 용감한 무장이었다. 우선 침착하게

노인의 손아귀를 풀고 허리속에 감춘 칼 주머니에서 번쩍이는 칼을

빼었다.

그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한 이십보 앞에 도사리고 앉은채, 눈에서

불꽃을 튀기고 있는 호랑이 한마리를 봤던 것이다.

그의 단도는 공중에서 두어번 그네를 타더니 달빛을 가르고 유성처럼

흘렀다. 가선랑의 재주는 무서웠다. 칼은 호랑이의 콧등 한복판에 꽂혀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단도 하나가 거대한 동물을 즉사시키기에는

너무도 약하였다. 운봉재가 흔들릴듯한 비명이 무섭더니 호랑이는 몸을

솟구치려 했다. 단지 솟구치려 했을 뿐이다. 어느덧 두번째 칼이

정수리에 백여 주춤 물러 앉고 말았다.

두군데나 급소를 얻어 맞은 호랑이는 잠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선랑이 세번째 칼을 빼들고 겨우 한숨을 돌릴 때--- 그것은 정말

번개와 같았다. 찬 바람이 휙--- 일더니 호랑이는 마지막 정력을 다하여

그에게 덥쳤던 것이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가선랑은 밑에 깔리고

말았다.

호랑이의 날카로운 앞 발톱은 그의 옷을 찢고 어깨에서 배까지 깊숙한

상처를 파고야 말았다. 만일 이때 호랑이에게 손톱끝만한 힘이라도

남았었다면 가선랑은 영원히 못 일어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호랑이는 마지막 발악을 남겨두고 그대로 굴러 떨어져 뻗었다.

가선랑은 온몸에 피칠을 한채 노인에게 부축되어 삼경이 넘어서야

노인집에 이르러 아픔과 긴장 끝에 마친 피로로 인하여 잠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상처가 쓰라려 오고 갈증이 생겨 어렴푸시 의식을 회복한 그는 누가

자기의 상처에 가루를 뿌리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가선랑은 실날같이 눈을 떴다.

눈을 뜨자, 그는 천근같은 고개를 부루 잡으려 했다. 바로 자기 옆에

앉은 낭자(娘子).

몽롱한 시야 속에도 꽃송이 같이 예쁜 낭자의 자태가 비쳤던 것이다.

움직이시면 안 되어요!

가선랑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자 낭자는 급히 말했다.

지금 막 칡 가루를 뿌렸으니 괴로우시지만 한참만 그대로 계셔요

낙랑한 음성. 속이 후련히 터질듯이 시원한 성대였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히 노인 집일텐데, 노인은

보이지 않고 아름다운 처녀만이--- )

가선랑은 아직까지 젊은 낭자를 가까이 해 본일이 없었다. 낭도들을

일명 풍류도(風流道)라 부르고 무술을 익히는 반면 자연에 조화할 수

있도록 정서적인 심정도 만들어 줌이 도의 방침이었지만 여자만은 가까이

못하도록 했다.

샛별같은 처녀의 향기는 그를 어지럽게 했다.

노장은 안계시오?

아버님 말씀이어요?

그분이 아버님이 되시던가?

가선랑은 낭자한테서 그 노인이, 호랑이를 지고 오도록 동네 젊은이에게

이르시고, 새벽을 타서 도루 고개너머로 가셨다는 것을 들었다.

아침 햇살이 눈 부시게 문풍지를 물들였다.

무슨 바쁜 일이기에 새벽에 도루 가셔야 되오?

오늘까지 군덕솔(德率-군을 다스리는 관리) 사품(四品)께 헌신해야,

한다 하여요. 무슨 관직을 얻으실듯 하다고 하시며, 그 기쁜 소식을

이몸에게 이르시러 밤길을 타 오시다 그런 변을 당할뻔 하셨다고 해요.

이 젊은이 아니면 목숨을 잃을번(뻔?) 하였다고 정성껏 보살피라고 이르고

가셨어요

가선랑은 그 낭자가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상처가

자꾸 쑤셔 왔다.

 

* * *

 

낭자의 이름은 별애기라고 했다.

가선랑의 상처는 두 부녀의 정성어린 간호에 나날이 괘차하여 갔다.

상처가 아물어 가면 갈수록 가선랑과 병애기 사이의 요화같은 사랑은

점점 짙어갔다.

생전 처음 대하는 따뜻한 여자의 정성과 아리따운 용모는 가선랑의 젊은

피를 끓일대로 끓여 놓았고, 별애기의 수줍은 마음속엔 어엿하고 용감하고

잘 생긴 가선랑의 영상이 시각마다 자리를 넓히고 있었다.

별애기!

예?

아버지가 혹시 그말을 입 밖에 내시지나 않을까?

아이, 서방님도 별 생각을 다 하시네요. 이몸의 아버지도 서방님의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몰라 가슴 조리고 계시온데 서방님의 몸에

해가 미치도록 하실라구요. 어서 몸이 쾌차하셔서 하루속히 신라로

가셔야---

별애기의 말끝은 흐려갔다. 가선랑이, 자기를 떨어져 신라로 간다는

생각만 하여도 간장이 녹아 흐르는 것만 같았다.

(낭도들은 신라에서도 으뜸되는 분들 뿐이라는데, ---그리고 신라에는

선녀같은 여자가 많고 그들은 한결같이 낭도들만 사모한다는데---)

이런 생각이 잠시도 별애기의 가슴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신라여자에 대한 질투가 횃불같이 일어났다.

별애기, 내가 어서 신라로 돌아가야 별애기 속이 편하겠소?

아유 어쩌면 그런 말씀을 하셔요, 이곳에 오래 머물러 계실수록 이몸은

기뻐요. 언제까지든지 언제까지든지, 계시오면 이몸은 더 바랄것이

없어요. 그러나 서방님은 가셔야할 몸, 한개의 계집때문에 나라 일을

그르칠 수도 없는 귀하신 몸, 단지 어서 속히 가셔서 이땅에 서방님의

우렁찬 호령소리가 들릴 때만 기다리겠어요

별애긴 나라도 생각지 않고---

서방님, 계집에겐 나라 보다 지아비가 얼마나 소중한지 아셔요?

나라걱정은 사내들이 할일이요, 계집은 지아비만 성심 성의 섬기면 될줄

알아요

별애기는 자기가 백제의 핏줄을 이어받은 것을 까맣게 잊어 버렸다.

나라는 백제면 어떻고 신라면 어떠리. 자기에겐 가선랑의 믿음직스러운

품만이 안식처가 아니냐!

그럼 별애기도 이번에 나따라 신라로 갈까?

서방님 그런 말씀이 어떻게 나옵니까? 나도 그런 마음을 서방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면서부터 몇백번 먹어 왔어요. 그러나 안될 일.

만일 이몸이 서방님을 따라 신라로 가 보아요, 문무백관이 모-두 서방님을

비웃으실 뿐 아니라 이몸으로 인하여 어떤 화가 미칠지도 모를 일이

아니어요? 단지 한가지 길은 좀 전의 말처럼 어서 이땅에 신라군의

승전고가 울릴 때만 기다리는 것 뿐이에요

어째 별애기로서도 가선랑을 따라 가고 싶은 마음이 없으랴! 그러나

그가 자기가 딴 나라 무사를 따라 감으로써 생길 일을 등불보듯 환히 알

수 있었다.

별애기, 내 이런말 한다고 너무 섭섭해 마오

?

별애기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며 초조하게 쳐다 본다.

신라를 떠나 벌써 석달. 우리들에게 주어진 기한도 이달 그믐으로

마지막이요. 별애기를 생각하면 단 한발도 이곳을 떠나긴 싫지만---

별애기 말처럼 사내에겐 나라가 중한것! 내일 아침에 이곳을 떠날까 하오

 

별애기는 이어코 오고야 말 때가 왔다고 생각하니 의외로 마음은 잔

물결처럼 가라 앉는것이었다.

가셔야 하지요. 아직 기한을 넘기지 않으셨다니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름다운 신라여인네에게 묻혀서 이몸을 잊으시기나

하면---

별애기는 그 다음을 어떻게 말하여야 할지를 몰랐다.

(이몸을 잊으시면 난 죽고 말테야요)

할까? 그러나 그것은 너무 요사스러운 말이라고 느껴져 꿀꺽 삼키고

말았다.

별애기, 별애긴 아직도 내 마음을 몰라, 저 하늘에서 별빛이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만다면 모르거니와 그전에 내 별애길 잊을듯 싶소? 이제

신라로 가거던 상부에 소청해서 별애기가 살고 있는 이땅이 보이는 곳에

성을 하나 신축하고 그곳 성주로 도임해 나오겠소. 그리곤 매일처럼

백제를 건너다 보며, 별애기의 안부를 묻겠소. 밤이면 하늘에 뜬 별을

헤며 별애기를 지긋이 이품에 안아 보겠소. 그리다가 상감마마의 명령이

떨어지는날 바람처럼 이땅에 쳐 들어 오겠소.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오

우정 귀하신 자리를 내놓고 국경으로 오신다는 말씀. 정말이에요?---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서방님이 이몸을 잊으실 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믿을 테야요

화랑은 약속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것. 내 말에 거짓이 있다면

천지신명께 죄 받을 것이요

서방님!

별애기는 가선랑의 품에 쓰러졌다.

아아! 뼈에 저리도록 고마우신 이 말씀! 가선랑이 그토록이나 자기를

사랑해 주고 계셨던가! 그는 가선랑이 이땅에 쳐 들어오는 날이 백년

뒤라도, 그리고 자기가 홀 몸므로, 흰머리를 뒤집어 쓰는 한이 있어도

가선랑을 위해서 이 집터에 기다리고 있을 것을 굳게 다짐했다.

우연한 인연으로 만난 두사람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은 이다지 영글게

익어 버렸던 것이다.

 

* * *

 

염탐군(꾼) 열명이 모두 무사히 귀국했다.

진평왕은 만조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일일히 그들을 위무하시고서

정세를 하문하시었다.

사비성 일대를 맡았던 춘욱랑은 백제에서도 굉장한 군비를 갖추고

있더라고 정세의 녹녹치 않음을 아뢰었다.

가선랑은 이 기회에 자기의 결심한 바를 아뢰고저 어전에 부복했다.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고?

상감마마 우리나라의 수비의 허술함을 보았읍니다. 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음을 보았읍니다

가선랑은 남산성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그것은 왕명으로

하달되었다.

물론 가선랑은 남들이 달갑게 생각지 않는 성주 자리를 자원했고

병부령은 그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즉석에서 허락되었다.

가선랑은 그날부터 석공, 목공, 잡역부를 격려하면서 축성에 착수했고,

그것이 준공되던 날은 상감마마이하 집사성시중(執事省侍中)등 백관이

모-두 먼길을 행차하셨다.

가선랑은 이런 중에도, 별애기를 끊임없이 그리었다.

신변에 무슨 일이나 없을까? 그 동네로부터 자기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퍼지지나 않을까?

성이 준공되는 날은 성문위에 올라서서 온 천지가 깜짝 놀랠듯이 외치고

싶었다.

별애기. 나는 지금 훌륭히 그대와의 언약을 실행 했소 ---라고.

성에 틀어 백이던 날부터 그는 단 십리도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매일처럼 성문위에 올라 서서는 백제 땅을 건너다 보며 자기 생각을 하고

있을 별애기를 그리워 했다.

별애기---

정말 별애기의 골수에 사모치는 간호가 없었다한들 자기가 그렇게 속히

완쾌되지는 않았으리라.

엄연히 적국의 염탐군인줄을 알면서도 사랑을 송두리채 바쳐주던

별애기.

그들의 사랑은 단순히 아버지의 은인이라는 것하고 간호를 전담해

줬다는 이유로써만 싹튼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도 더욱 거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끓는 피의 혼류였다.

 

* * *

 

별애기는 가선랑이 떠나가던 날, 종일을 울음으로 흘렸다. 아직도 집안

구석구석마다 남아 있는 가선랑의 향기!

별애기는 그 향기를 맡으며 한없이 가선랑의 이름을 외웠다. 그는

어쩐지 이번의 헤어짐이 영원의 헤어짐인 것만 같았다. 다시는 가선랑의

얼굴도 못 보고 말소리도 못들을 것만 같았다.

왜 이런 불길한 생각이 들까?

그러나 그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것이었다.

별애기는 매일처럼 동녘하늘만 우러러 보며 안타까웠던 두 해를 억지로

넘겼다.

그때 그에게 무서운 운명이 닥쳐오고야 말았다.

백제 무왕(武王)이 운봉산에 사냥 나오셨다가 그의 아리따운 자태를 본

것이다.

아름다운 꽃은 누구의 눈에나 아름다운 법이다. 이천을 넘는 궁녀를

발밑에 둔 무왕도 일개 촌처녀의 선녀같은 자태에는 가슴이 설레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오! 아리따운 여인인지고---

무왕은 자기의 신하 한사람에게 환궁하실 때 같이 입궐하게 하라는

분부를 내리시고야 말았다. 덧붙여 천한 궁녀처럼 허술히 대하지 말고

왕비의 예로 받들라고 이르시었다. 신하들이 혹시 어떻게 할까 함이다.

이 기쁜 소식은(?) 그 즉시 별애기 부녀에게 전해졌다. 이 소문을 들은

동네처녀와 처녀를 가진 부모들은 부러워 마지 않았다. 그집안의 영귀는

무엇보다도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애기 부녀에겐 청천벽력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가선랑과 딸의 사이를 잘 이해했고, 그로 인하여 그냥

딸을 늙어 죽이는 한이 있다 하드래도, 자기 생전에는 결코 출가시키지

않으려 마음 먹었던 ㅌ였다.

허지만 왕명임에랴!

별애기는 연약한 여자의 마음을 조일대로 조였다.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어가를 따라 입궐할 마음속은 터럭끝만치도

없었다.

무서운 악마처럼 환궁의 날은 가까워온다.

(차라리 죽어 버릴까?) 이런 모진 마음을 몇번이나 먹어 봤다.

그렇지만 죽으면 안된다. 만일 자기가 없어진 후 가선랑이 이 땅에 쳐

들어오면 그 얼마나 애통해 하랴! 그는 전설로 들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를 생각했다. 어떠한 일이 있드래도 가선랑에게 호동왕자가 맛

본 슬픔을 주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연약한

계집의 몸으로 너무나 벅찬 난관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가!

별애기가 고민끝에 한가지 길이 있음을 찾았다.

(그렇다. 오늘 밤으로 이곳을 빠져 신라로 가자! 분명히 가선랑은

이곳이 보이는 땅에 성을 지어 놓고, 자기를 생각해 주고 있을 것이다.

그리로 찾아가자)

이렇게 결심하고 나니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 졌다. 그의 아버지도

자기에게 돌아 올 화는 생각지 않고 딸의 갸륵한 심정을 어루 만졌다.

별애기는 그 밤으로 여로의 근심을 없애기 위하여 남장을 하고 국경을

향하여 낯선 밤길을 더듬었다. 그는 가선랑을 위하여 그 밑에 종노릇도

달가웁게 받을 각오가 섰다. 남의 나라에 들어가 버젓한 무관의 정부인이

될것은 아예 마음부터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그는 잘 알았다.

 

* * *

 

그때는 봄이었다.

아지랑이 속에 남산성도 하늘하늘 나부꼈다. 노고지리 소리가 유달리

가선랑의 외로움에 겨운 마음을 흔들어 주는 날이었다.

노고지리 소리도 귀찮았다. 마음만 흔들어 주는 노고지리임에--- 기화

요초도 다 싫었다.

별애기! 몽매에도 잊을 수 없는 별애기가 그 옆에 없는 한 온화한 봄의

정기도 그의 마음을 아득하게 하여 주질 못했다. 그의 마음은 엷게

퍼지는 백운과도 같았다.

그때다.

백제놈인듯한 염탐군을 하나 붙들었읍니다

무장 유백(兪伯)이 그에게 고했다.

염탐군?

그러하오, 어느덧 새성이 구축되었다는 정보가 들어간 모양이요.

스물도 넘지 못한 듯한 젊은 놈입니다. 이곳에 성이 언제 구축되었으며,

성주가 누구냐고 묻더라 하오. 우리 군졸중에 그런 비밀을 함부로 가르쳐

줄 놈은 하나도 없지만 염탐군인 것을 눈치채고 잡을 놈은 얼마든지

있소이다. 허허허허---

가선랑은 모-든 것이 귀찮았다. 두해 동안에 더욱 피어 났을 별애기를

머리속에 꽉 채우고 있는데 그까짓 염탐군 한놈쯤--- .

염탄군 붙들은 것까지 뭐 일일히 말씀하오. 그대가 잘 알아

처참(處斬)해 버릴 것이지---

염탐군 같으면 즉석에 목을 짜를 것이지 보고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냐는 것이다. 그는 이다지 군무를 호홀히 할 정도로 별래기를

흠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염탐군이라는게 별애기의 변장한

모습이라는 것을, 그가 알리가 없었다. 몰랐기 때문에 유백에게 목을

짜르라고 하명해 버린 것이었다.

살생유택이라 하지만 염탐군은 살려서 소득이라곤 하나도 없지 않느냐.

그에게는 마땅히 살을 택해야 할 것이었다.

우장 유백이 성주에게 보고할 그 임시 별애기는 성문앞에 꼭꼭 묶여

있었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 나라를 버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왕명을

어기고 자기 몸에 부어질 영광을 박차고 수백리를 왔다가 염탐군으로 몰려

잡힌 것이었다.

남산성 군졸들은 그를 염탐꾼으로 밖엔 볼 수없었다. 성이 언제

구축되었느냐? 성주가 누구냐? 그런 질문을 듣고, 염탐군이 아니라고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너 백제 놈이구나!

별애기는 물론 백제 백성이 아니라고 부인할 이유가 없었다.

못된놈! 염탐군 짓을 할 테면 똑똑히 할 것이지, 죽는 것도 모르고

범의 굴에 뛰어 들어!

별애기는 깜짝 놀랬다. 너무나 뜻밖이었다.

염탐군? 그런것은 당초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청천의

벽력같은 이 말에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망서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신라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부딪친 성이 이곳이긴

하였다.

그러나 염탐군으로 묶이게 된 별애기!

(적국의 염탐군이라면 죽이는 것일까? 차라리 모든것을 실토해 버릴까?

나는 여자라는 것. 그리고 가선랑을 찾아 왔다는 것을)

그렇게 되면 이 소문이 온 신라에 퍼질 것이다.

가선랑은 백제에 갔다가 염탐은 제쳐놓고 계집에게 혹해 있었다고

백성이 비웃을 뿐 아니라 조정의 신임까지 저버리지나 않을까?

그렇게 되면 가선랑은 신라에서 매장되어 버리고 자기는?---

자기는, ---혹은 동정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르나 나라와 육친을

버리고 남의 나라 무장을 홀린 여우같은 계집이라고 무섭게 비난하는

사람이 한층 많을 것이다.

(만일 이대로 입을 다물어 처형되고 말면?)

가선랑이 나의 죽음을 알면 미친듯 애태울 것이다. 그리고 신라까지

찾아온 나의 순정을 알면 그것에 어떤 위안을 느끼고 명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공명을 드날릴 것이다.

오히려 입을 다무는 것이 가선랑을 위한 것이나 아닐까?

별애기는 작정했다. 어떤 일이 닥치드라도 결코 가선랑을 입밖에

내서는 안된다고. 만일 가선랑을 입밖에 내가지고 자기가 그의 성을

찾아온 연유를 밝히게 될 때는 그가 새로 축성한 참뜻이 나라를

위함보다도 하나의 여자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대로 가선랑이 있는 신라에 들어선 것만도 그에게 출가한 것이나

다름없이 생각해야 한다.

별애기의 마음이 차디 차졌을 때 무장 유백이 성문으로 왔다. 별다른

심문도 없었다. 있어도 함구할 별애기였고.

성주께서 목을 베이란다!

별애기는 움찔했다. 마음은 작정되었다 해도 진작 무서운 선고를 듣고

보니 눈앞이 아찔했다.

혹은 가선랑의 동관일지도 모를 성주가--- (지금까진 유백을 성주로

알았다)

군졸은 그를 끌어 냈다.

별애기는 그대로 아무말이든 해선 안된다고 혀를 깨물었다. 그이를

위해서- 가선랑을 위해서-

시퍼런 칼이 공중에 번쩍했다. 그 칼이 막 내려치려 할때 유백이

큰소리로 외쳤다.

죽기전에 그렇게 알고 싶던 성주의 이름이나 알고 가거라! 가선랑!

가선랑이란 이름이 별애기의 귀에 들렸을 때 그리고 그가 입을 움찔하며

할때는 미처 숨쉴 겨를도 없이 차디 찬 칼날이 그의 목에 꽂혔다.

그밤도 가선랑은 별을 헤며 별애기를 지긋이 품에 안아 보았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던 하나의 별빛이 영원히 꺼져 버린 것도 모르고.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