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 사 방/조선오백년 야담

조선 오백년 야담 제11화 / 李星信의 最後 - 海戰悲話

by 연송 김환수 2013. 8. 30.

朝鮮(李朝) 五百年 野談

 

차 례

 

第 一 話 - 寶娘靑湖 - 血痕奇譚

第 二 話 - 樂浪好童 - 悲戀哀史

第 三 話 - 楊書房致富 - 抱腹絶倒

第 四 話 - 風流監司 - 節佳妓話

第 五 話 - 哀戀話 - 靑春悲戀

第 六 話 - 異花 雪竹梅 - 復讐奇譚

第 七 話 - 將軍義盜 - 名將逸話

第 八 話 - 煩惱僧 - 佛力奇譚

第 九 話 - 悲愴- 百濟哀話

第 十 話 - 金議官 叔侄 - 韓末逸話

第十一話 - 李星信最後 - 海戰悲話

第十二話 - 阿非知九層塔 - 望鄕哀話

第十三話 - 可憐杜十娘 - 名妓哀話

第十四話 - 公主神尺 - 怪夢奇譚

第十五話 - 餘愁 - 落照悲話

第十六話 - 斬首된 별아기 - 愛情悲譚

第十七話 - 千里遠情 - 義俠美譚

 

------------------------------------------------------------

 

<제 11 화>

海戰悲話(해전비화)

李星信의 最後 (이성신의 최후)

 

 

산, 산, 또, 산---

산은 지금 향연이라도 벌리듯, 등어리가 으쓱하도록 단풍이 요란게게 타

오르고 있었다. 군봉(群峰)이 아득히 흐려간 너머 하늘로는 때마침

현란한 황혼이 무르익어 삼라(森羅)는 붉은 일색으로 휩싸인 채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눈을 부비고 보아야 간신히 뜨이는 오솔길 옆, 보드랍게 마른 잔디위에

마치 돌인 양, 움직일 줄 모르는 채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체구가

날렵하게 크고 건장하면서도 안색이 매우 초췌한 그 청년은 초점을 잃은

시선을 들어 산, 아니 그 위 석양의 하늘, 보다도 그 너머 어떤 뼈저린

슬픔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청년은 천천히 둘레를 살피더니, 무겁게 몸을 일으키었다. 잠시

더 주위를 둘러 보다가 청년은 무릎을 간지럽히는 마른 풀을 헤치면서

골짜기로 내려 섰다. 잠시후 그에게 시원한 물소리가 들렸다. 반기듯

청년은 그 곳으로 가더니 덤썩 엎드린 채 벌컥거리며 물을 마시는 품이

몹시도 시장한 눈치였다. 입언저리를 닦으며 일어선 청년은 다시 산길로

되돌아 와서는 이번에는 좀 걸음을 빨리 하였다. 둘레거리는 품이 마을을

찾는 눈치였다. 길섶에, 바위틈에 철늦은 머루따위가 지척으로 뜨이건만

청년은 통이 모르는 눈치인 것이 우선 그의 복장, 여느 귀족으로서도 입지

못할 호화스러운 당사(唐絲?)였다. 문득 청년은 깨달은 듯 허리를

굽혔으나 손에 주어 든 것은 머루가 아닌 도토리 몇톨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개를 입에 넣는다. 씹는가 싶더니 이내 그는 뱉아

버린다.

손에 있던 것조차 힘없이 풀섶에 던져버린다.

청년의 안면에는 어떤 적막한 설움과 함께 비로소 초조이 기색이 짙어

왔다. 고개마루를 돌았을 때 그러니까 그가 멀잖은 곳에인가 무엇을

발견했을 때는 창을 통해 흐르는 불빛을 보아야 했을만치 사위가 어둡고

있었다.

청년은 얼굴에 밝은 환희를 보이며 달리듯 가물거리는 불빛있는 곳을

향했다. 불빛이 새어 흐르는 한 집앞에 당도하자 청년은

여보시오, 여보시오!

자못 다급하게 부르며 문고리를 흔들고 나서야 흠칫 자신의 음성이

지나치게 격했음을 깨닫는다. 방안에서는 의연히 기척이 없다.

여보시오, 계십니까?

그는 음성을 부드럽게 하여 나즈막히 다시 불러본다.

누구요?

그제야 방안에서 기척이 일며 이어 문이 열린다. 청년은 빠르게 방안을

어 보았다. 놀란 눈으로 내다 보는 노인과 방안에는 역시 시선을

밖으로 준 채 쪼그리고 앉은 노인의 아내인 듯한 노파--- 방안에는 두

사람 뿐이었다.

뉘시오?

저 지나가던 사람인데 밤이 되고 해서---

아 그러시오, 들어오우

청년은 성큼 방안에 들어섰다. 메주 냄새가 역하게, 그의 코를 찔렀다.

청년이 좀 가라앉은 심정으로 다시 시장끼를 느끼려는 때, 밖으로 나갔던

노파가 바가지에 감자를 소복히 담아서 가져왔다.

원, 산중이라 드릴게 있어야지---

연상 청년의 비록 때가 묻었으나 윤이 흐르는 비단옷에 시선을 주면서

노파는 변명하듯이 말을 되풀이 하였다.

고맙습니다

근 반 바가지를 비우고 나서야 청년은 감자가 매우 아리다는 것을

느끼며 물그릇을 들었다.

자 이젠 이리 편히 앉으시지

고맙습니다. 잘 먹었읍니다

청년이 노인의 말대로 한 곁으로 물러 앉자 이어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와 전신을 휘감아 올렸다. 청년의 고개가 자꾸 앞으로 수그러짐을

보다가 노인 내외는 그를 조심히 눕혀 주었다.

깊은 잠에 빠졌던 청년은 선뜩 불길한 예감에 눈을 떳다. 문쪽에

인기척이 일었다. 매우도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이내 무언지 스며드는

영자가 뜨였다.

(아?)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터질번(터칠뻔?) 했다.

(공주다, 분명 공주가--- )

청년이 마비된 듯 온 몸을 주체 못할 때 잠시 방안을 둘러 보던 여인---

온 몸을, 그리고 머리 위까지 두터운 천으로 가리운 여인의 시선이 몸에

미치자

아!

역시 낮으나 매우 격한 감탄성이 터질 듯이 빨간 입술을 들쳤다.

태자마마!

수잇!

그는 일번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한손으로 달려 들려는 공주의 몸을

막아 밀쳤다.

태자마마!

공주는 아랑곳 없다는 듯이 전신을 그에게로 던지며 쌔근히 숨이 찼다.

소녀는, 소녀는 기어코 찾고 말았군요. 이제 그러니 얼마만이던가,

태자마마께서 울며 불며 놓지 않는 소녀를 차디차게 뿌리치고 떠나신 이래

두삭--- 소녀가 얼마나 찾아 헤매었던지 아실는지---

청년은 경황중에도 방안을 둘러 보았다. 다행히 노인 내외는 어디로

갔는지 방안에는 둘 뿐이다.

비로소 그의 가슴에, 전신에 누를 수 없는 정열이 화끈히 달아 오른다.

그는 두팔을 들어 힘차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 안는다--- 아니 순간 그의

전신에 어떤 전률이 찌르르 역류함을 느끼며 허리를 움켜 안으려던 팔은

거칠게 공주의 몸을 밀어내고 말았다. 청년은 어떻다 지향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키었다.

아아, 태자마마

공주는 놀람으로 전신을 떨며 마치 두달전 그가 떠나 올 때처럼 달려

들어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는다.

이제 갈려면 날 죽여 주어요

그때의 말고 똑 같은 말.

공주--- 왜 이러오, 놓으시오

안되어요. 차라리 죽이시든지---

-----

사뭇 거세게 등이 떨며 발앞에 쓰러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청년의 가슴에

어떤 벅찬, 뼈아픈 애욕과 함께 뜨겁게 밀려드는 회상이 있었다.

저물어 가는 신라국(新羅國)의 태자 김충(金忠)과 그리고 동녘을

불사르며 용용히 피어 오르는 신흥 고려(高麗)의 낙랑공주(樂浪公主)가

그처럼도 애틋하게 달깃하게 빠져들었던 언젠가 흘러 가버린 먼 장면들---

공주는 어여뻤다. 부드러웠다. 그는 공주를 결연히 밀치고 나선 이래

그처럼도 오랫동안 겪어 보았던 가슴이 뚫여버린 듯한 공허감과 적막감

그리고 아픈 고독감을, 그 참을 수 없던 애욕의 번민을 문득 기억한다.

청년은 기어이 참지 못하고 공주에게로 몸을 쓰러뜨리고 만다. 그는

공주의 전신이 찌릿이 피가 끓어 오르매 점점 고운 허리를 끌어 안는다.

그러다가 청년은 문득 문밖으로 귀를 모았다. 분명 어떤 기척이,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인으로서의 체험이 그에게 그의 전신을 휩싸 오는

어떤 살기를 번개같이 계시해 주었다. 순간 그의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굳어 왔다.

(속았구나 공주의 간계에)

그는 재빨리 공주의 몸을 밀치며 일어섰다.

아, 왜 이리?

놔라, 요망한 것!

노기 찬 호령이 터지는 순간, 그의 발길이 문을 박찼다.

와아---

기다렸다는 듯이, 마당으로 내려 선 그의 주위에서 함성이 일었다.

음---

그의 손이 날렵히 허리의 칼에 닿았다.

음?

웬 일인가. 그는 전신이 얼어드는듯 함을 느끼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부림치는 그의 머리위로 아찔히 바람을 끊으며 흐르는 섬광---

악---

눈을 부릅뜬 채, 청년--- 아니, 가버린 신라의 태자 김충은 혼곤히 땀에

젖어버린 상반신을 벌떡 일으키며 눈을 떴다. 충은 잠시 아리숭한 의식의

분기점에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고요하다. 함성도 가라 앉았다. 아픈

곳이 없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쓰러져 있어야 할 곳은 찬 마당이어야

할터인데 이곳은 분명 아까 누웠던 방 한구석이다.

응---?

비로소 한겹 의식의 <베일>이 벗겨지며 그는 좀 더 선명한 시선을

돌린다. 고즈넉한 적요--- 밤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요란한 밖과 달라

아늑히 다사로운 방에는 아무도 없고 다만 아까 그대로 그 노인 내외의

순박하고 따스한 그리고 놀람에 찬 시선 넷이 그의 행동거지가 매우도

이상하고, 두려운 듯이 지켜 보고 있을 뿐이다.

충의 입에서 기약없이 한숨이 새어 흐른다.

제가 무어 잠꼬대라도 했는가요?

웬 일이시오?

분명 무슨, 잠꼬대속에 실언(失言)이라도 있었던가? 순간 충의 가슴이

섬뜩히 내려 앉는다.

제가 무어라고 했읍니까?

아니, 알아 듣질 통 못했구려----- 자꾸 소리를 지릅데다---

충이 점차 마음의 안정을 가져오자 노인은 몇번을 주저하던 질문을

했다.

대체, 젊은 분이, 아마도 귀하신 신분인 모양인데. 도둑이 들끓는 이

산중엘 뭘하러 가시우?

충은 저도 모르게 고소를 지었다.

노인께선 어떻게 이 산중에 사십니까?

의외로, 그 말에 노인내외는 어떤 충격을 받는 듯했다.

젊은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오만--- 이 곳도 얼마전까진 그래두

이십여호가 어울린, 제법 마을다운 마을이었다우. 그런 것이 도둑들의

본거지가 이곳에 생기면서 동넨 망해 버렸구---

참, 노인께선 장하십니다. 이렇게 남아 계시니---

아니오---

노인은 잠시를 더 주저하더니

놀라지 마오. 우리 역시 말하자면 도둑의 무리인 것이라오. 아들놈

둘이 모두 산으로 가 버렸구려--- 우린 그 서슬에 떠나지도 못하고,

이꼴이구려

충이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말 저말이 오가는 사이에 어느덧 깊은 산중에도 여명이 걷혀오고

있었다. 노인은 무언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문득

생각컨대 젊은이는 신라의 귀족이 아닐까 보는데--- 고민이 많아서

가는 길이라면 바로 집 뒤로 솟은 흰눈 고개 너머에 계신

백로선사(白老禪師)를 찾아 보심이 어떻소?

네 그 백로선사께서 이곳 가까이 계십니까?

그렇지요, 아시오?

(아아--- )

충은 눈을 감은 채, 환희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신음을 씹었다.

그실 충이 이처럼 고생스리 찾는 것이 바로 백로선사가 아니던가? 그느

ㄴ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듯 어느덧 시한(時限)을 건너 뛰어 과거의

사람이 되고 있었다.

저 곳이 백로선사께서 산다는 집인가?

예, 그러 하옵니다

 

* * *

 

저 곳이 백로선사께서 산다는 집인가?

예, 그러 하옵니다

충은 천천히 발을 들어 백로선사가 산다는 초막으로 다가 갔다. 그것은

몇개의 기둥과 가마니로 엮어진 지극히도 엉성스런 초막이었다.

계십니까

그는 흔들면 쓰러질까 보아 조심히 싸리담을 두드렸다. 응답이 없다.

(아무도 없는겐가)

그는 기웃이 봉당을 넘겨다 본다. 그곳에는 낡은 미투리

한켜레(켤레?)가 놓여 있다.

(있나 본데-)

계십니까?--- 여보시오

역시 부답.

여보시오!

거 뉘시오?

스며드는 듯한 음성이 의외로 충의 등 뒤에서 났다. 충은 당황히

고개를 돌렸다. 백발이 윤기있게 길고 키가 짧달막한 도사 하나이

동자에게 짐을 들린 채, 충의 뒤에 서 있었다.

백로선생이시오니까?

충이 황망히 허리를 굽히자 도사는 빙긋이 웃음을 띄웠다.

아니오, 선사께선 지금 안에 계시오

예에?---

충은 도사를 따라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외양보다 달리 깨끗하게

밝았고 무엇보다 의외로 느낀 것은 백로선사의 풍채였다. 윤기가 흐르는

긴 백발은 도사와 별 다름이 없었으나 그 체격이 장대한게 어느 모로나

천군만마를 능히 호령할 장수의 상모였다.

충은 무언지 눌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며 공손히 앉았다. 백로선사는

잠시 충을 건너 보다가 다시금 눈을 감아 버렸다.

이처럼 찾아 뵙는 까닭은 이몸이 고민이 있어 꼭 여쭈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옵니다

-----

부디 높으신 말씀을 내려 주십옵시오

그대는 뉘시오?

묻는 건 선사가 아닌 도사였다.

예, 신라의 한 청년일 뿐이옵니다

결국 물으실 말이 뭔데---

역시 도사의 말이었다.

실은--- 내외로 변란이 많고 상하군민의 기강이 해이하여 신라의

장래가 보기 자못 흉흉하옵기 좀, 시원하게 알고라도 싶은 초조감과

울분심에서---

잠간 침묵이 왔다. 충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백로선사의 마치 장님이

되어버린 듯이 잠겨진 채 뜨일줄 모르는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침묵을 깬 것은 도사였다.

아마 선사님의 말씀을 듣기는 어려울거요. 내 일상 선사님의 말씀을

들은바 있는데이거라도 들어 주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대화는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선사님 말씀이 신라는 비유컨대 <사위는 달>이라고 몇번 말씀이

계셨지요

그것은 오랫동안 체념되어 왔던 충으로서의 체관(諦觀)이기도 했으면서

그러나 그의 가슴에 쿵하고 떨어지는 거석처럼 전신이 아뜩했다. 충은

잠시 입을 벌리지 못했다.

그러 하오면---

결국, 문제는 젊은이의 의문이란, 뒤를 이을 천하가 무엇이냐는 것이

아니겠소?

도사는 냉소하는 기색으로 충을 건너다 본다.

아니오, 아니오!

충은 어떤 분노와 모독감에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악

문을 박차려는 순간이었다. 비로소 백로선사의 눈과 입이 열린 것은.

태자, 그대는 오느 후일 다시 나를 찾을 날이 있을 것이요---

그러나 그 말은 충이 먼 후일 간신히 기억해 낸 구절이었다.

백로선사의 초막을 나왔을 때는 알 수 없는 울분으로 산길을

들짐승처럼굴르듯 내려 왔을 뿐이었다.

그후 얼마 안 있어, 충은 고려의 왕과 함께 신라 땅을 밟은 왕의 장녀

낙랑공주를 만났고, 그런 후 얼마되지 못하여 다시금 그 백로선사의

초막을 찾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저물어가는 조락의 조국--- 보다도 충 개인에게 밀려드는 고뇌의 싹들.

그러니까 충이 다시금 초막을 찾은 것은 마침내 충이 불나비처럼 달려드는

공주를 안아 버린 환희와 회한의 밤을 보낸 다음날이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초막은 빈 집이 되어 있었다.

원래 백로선사의 거처가 봉래산(蓬萊山)이라는 말이 있다는

초동(草童)의 믿기 어려운 말을 들었을 뿐 실망과 공허를 안은 채 밤길을

달려 궁으로 돌아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충이 동궁(東宮)에 이른 것은

이미 그믐달이 돋아 올 무렵이었다.

피곤한 심신을 이끌고 중문으로 들어서자 그는 훤한 초롱불이 마당

한쪽에 있음을 보았다. 찌르르 어떤 환희와 그리고 번민이 휩쓸어

올랐다.

(공주가 또 왔구나)

순간 전신을 엄습하는 어떤 거센 분노와 함께 말방울 소리에 황급히

다가오는 초롱을 뒤로 한채 말을 몰아 되돌아 서고 만 것이었다. 막연히

북을 바란 채(북을 향하여) 그는 말을 몰았다. 언뜻 봉래산은 이미

궁예의 땅이라는 깨달음에서 발길을 다시 돌려 궁으로 돌아 왔을 때는

이튿날도 밤이 이슥해서였다.

 

* * *

 

흰눈고개는 강파르고도 높았다. 고개를 다 기어 올랐을때는 이미 한

낮이 기운 때였다. 충은 땀이 배인 몸뚱이를 길섶 바위에 던진 채, 붉게

타오르는 눈아래 군봉의 절묘한 자태들을 멍하니 굽어 보았다. 어떻게

보면 아드윽히 멀고, 또 어찌보면 다가 들듯 가까운 봉우리들- 그것은

어느덧 몇몇 그리운 영자로 변한 채 군봉을 따라 눈앞에 부침명멸하는

것이었다.

서라벌을 나선 이래 들어 보았던 그 수다한 자신에의 소문들--- 그리고

자기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맨다던 공주의 이야기, 또 고려왕이 남몰래

사람을 퍼뜨려 자기의 행방을 찾는다는 것--- 자기가 떠난 이래,

찾아나섰다던 지기(知己) 김승규(金昇奎)와 석영재(惜榮宰)와 또, 누구의

소식들---

공주, 공주 공주, 고려왕, 자기를 찾아 필시 해를 가하려 헤매일 왕건의

부하들, 그리고 보고픈 승규 무리들.

(왕건 제가 내 재주와 공주를 사랑함에서 날 찾는다지만, 제 필시 내가

구국운동의 유일한 지도자가 될까 해서 두려워서겠지---)

이윽고 충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험한 산길을 헤매기 다시 한식경이

돼서야 충은, 백로선사의 거처라는 초막을 찾을 수 있었다. 전에,

서라벌에서 보던 그 초막과 별 다름이 없는 초막이었다. 충이 뛰노는

가슴을 붙안은채 울타리 근처로 접근했을 때, 마당에 멍석을 깔고 따스한

양지에서 졸고 있는 낯익은 노인이 있었다.

백로선사였다.

충은 우선 반가웠다. 백로선사만 찾으면 뭔지 구국의 비방을, 그 힘을

얻을 수가 있을 듯만 싶은 심정이었다.

잠시 충은 깨우기가 송구해서 백로선사의 그 힘과 어떤 위엄이 흐르는

모습을 건너 보고 있었다.

왜, 안들어 오는 건가?

조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백로선사는 눈을 여전 감은 채 손을 들어

충을 가리켰다.

안주무셨읍니까?

백로선사의 오만한(태자에 대한 전에도 그랬지만) 태도에 비하여 충은

한층 겸손해 가는 자신을 어쩌지 못했다.

비로소 백로선사는 눈을 떴다.

결국은 왔군

백로선사는 빙긋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인다.

선사님, 저는---

아, 자네, 자네 심정--- 허나 너무 어려, 어려---

백로선사는 고개를 흔든다. 충은 말없이 그를 건너다 보는 수 밖엔

없었다.

자넨, 지금 무지개같은 꿈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네. 꿈, 저 산을

태우는 (그는 그때 속으로 아래를 가리키며)단풍과도 같은 정열일세.

그러나 이걸 알게

백로선사는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찌르듯 충을 건너보며

신라가 망한 것이 무어 고구려나 백제의 고사(古事)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해. 말하자면 신라를 망하게 한 것은 어느 외적이 아닌, 순연한

신라자신이란 말일세, 모두가 제 모가지를 잘랐지--- 흐---

백로선사는 잠간 웃는 듯 했다.

신라의 백성들이 신라를 버렸고, 신라의 왕과 대신들이 신라를

꺾었네--- 알았나? 자네의 그 심정, 고구려, 백제의 왕성한 기운으로도

광복운동은 실패로 돌아 갔었네. 항차 이 신라야--- 이걸 알게, 신라는

이미 사위는 달이 아닐세. 이미, 서산을 넘어 선, 이미 이젠 신라는 없네

 

선사님!

아니야, 안된다니깐. 이제 신라는 존재치 않네. 태자, 아니 이젠

김충이지, 자네에게는 이제 또 다른 삶이 오는거야. 그걸 가르쳐 줌세.

나는 자네같은 사람이 고민을 안고 날 찾아 올 날을 기다린지 오래네

선사님

자, 이젠 더 입을 벌리지 말게. 자넨 이제부터 한낱 금강산의 춘, 하,

추, 동--- 이 무궁한 진리속에 파묻힌 미물이야 알겠나?

충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백로선사의 지팡이가 그의 어깨를 세게

때리고 있었다. 눈에는 화끈 빛이 일었다.

에익!

분노와 절망에 뻐개지는 가슴을 안은 채 충은 분연히 되돌아 서고

말았다. 눈물--- 왈칵, 까닭 모를 더운 눈물이 순간 태자의 볼로

줄기지어 타내렸다.

뒤에서 백로선사의 꼬장꼬장한 음성이 귀를 쑤시고 들었다.

흠, 너는 더 고초를 맛보아야겠다. 좋다, 좀 더 고생을 겪어라.

마침내 느끼는 때거 오거든 너는 다시 내게로 오리라. 그 간지러운 옷도

벗을게고. 낙엽이 지고, 흰눈이 고요히 온 산과 산을 덮느니라

 

* * *

 

배가 아파서 눈이 뜨였다. 해가 미처 자태를 내밀지 못한 사위는 이미

산새들의 뭔지 비창한 울음으로 향연을 이루었다.

충은 힘없이 일어나 앉아, 잠시 배를 주무르다가 세수를 하러 냇가로

내려갔다. 세수를 하려다가 그는 잠시 맑고 잔잔한 물을 들여다 보았다.

말할 수 없이 초췌한 얼굴, 더럽히고 여기 저기 비참히도 찢기운 옷매,

희망도 없고, 힘도 없고, 그렇다고 어쩌자는 자세도 없는 이 꼴--- 패배자

패배자.

왈칵 눈시울을 뜨겁히는 충격을 간신히 누르며 충은 몸을 일으키었다.

(나는 죽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죽을 결단조차 없는가---)

잘 보지도 못하던 이름모를 산열매로 배를 채우면서 어언 이렌가

여드렌가. 충은 어떤 의식의 혼미속에서 끝모를 수풀을 걷고 있었다.

멀리서 가까이서 애틋하게 또는 영롱하게 울려오는 산새들의 협주곡을

벗삼으며 걷다가 문득 좀더 이채로운 산새소리를 듣는다.

(저건 좀 못듣던 소린데---?)

왠지 한층 처량한 소리라고 느끼며 찰나, 그는 허리를 스치는 마른

풀사이로 몸을 던져 눕혔다. 엎드린 위로 시윗소리가 흐르며, 머리에서

두어간 떨어진 나무에 쩡, 화살이 박힌다. 충은 풀사이로 기어 재빨리

나무뒤로 몸을 숨기며 어느덧 손이 품속에 간직해 오는 단검(短劍)으로

간다.

그럴 필요 없어, 이눔아, 으하하하

그 소리는 충의 등 바로 뒤에서 났다. 그는 순간 자신이 여러 수상한

적에게 포위를 입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떤 공포와 그리고 증오감이

경황의 폭풍속에 피어 오른다. 풀포기를 헤치며 그에게로 접근해 오는

무리들은 때가 찌든 두툼한 누비옷을 입었고 길고 날카로운 칼들을 제가끔

사려들었다. 간 간 활을 멘 놈도 뜨인다. 머리는 모두 검은 두건으로

질끈히 동이었다.

맥이 풀린다. 충은 반항을 버렸다.

(내 필시 자객들에게 잡혔구나)

어떤 괴로운 체념이 왔다. 두건들은 저희끼리 잠시 무어라 수군대더니

그래, 끌고 가지

그의 차림을 새삼 어보면서 상의가 끝났는가 싶더니 칼끝으로 충을

앞세운 채, 숲을 더듬기 시작했다.

(날 어쩌려는 걸까? 왕건에게로 끌고 가려는 것이나 아닐까?)

어느덧 그들은 강파른 벼랑을 낀 산협 소로를 지나고 있었다. 벼랑

아래로는 아뜩, 깊은 골짜기로 자욱한 안개가 감도는 밑에서 물소리가

가늘게 들려 왔다.

(떨어지면 죽는다. 발만 삐긋하면---)

두건들은 충의 차림이며 안색이 몹시도 초췌하고 피로해 있음을 보아

별로이 경계하는 기색이 없이, 저희끼리 농을 지껄이며 산모퉁이를

돌았다. 그때 바로 그때였다. 앞서 걷던 충이 문득 몸을 돌리는가 싶은

순간, 이어 벼랑밑으로 비명이 짜릿하게 멀어가며, 어느덧 충의 손에 칼이

잡혀 있었다. 잠시는 어수선한 긴장이 흘렀다. 비로소 자기들패의

하나이 죽었음을 깨달은 두건들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몸을 도사려 충을

에워싸는 한편 예의 산새소리를 쳤다. 메아리가 아닌 응답이 왔다. 충은

빠르게 몸을 날려 앞길을 막아 선 놈을 찌르는 듯, 놈이 놀라 몸을 비키는

순간 몸을 빼쳐 산길을 달렸다. 어느덧 다시금 잔풀이 무성한 오솔길이

드러났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신호의 산새소리가 요란히 들려왔다. 충은

순간 돌뿌리에 채이듯 앞으로 넘어졌다. 일어 서려는 때 그는 자신이

올개미에 얽혀 있음을 알았다. 다시금 그는 끌려가는 몸이 되었다.

그들이 충을 끌고 이른 곳은 예상과는 달리 도적들의 산채였다.

충이 선 주위에 이,삼십명 험상궂은 두건들이 둘러 섰고 통나무에 걸터

앉은 몸집이 장대한 꼿꼿한 수염이 검고 짧다란 사내는 바로 도적의

괴수인 듯했다. 그의 살기찬 눈초리는 어떤 분노에 타오르고 있었다.

네 놈이 내 부하를 죽였다지?

-----

넌 뭣하는 놈이지?

-----

뭣하는 놈이냐? 보아하니 농민은 아니구나

충은 여전 입을 열 줄 몰랐다.

넌 뭐냐 말이다. 말 못하느냐?

괴수는 낯빛이 붉어 오며 주먹을 들어 충을 가리켰다.

너는 이 무리의 괴수냐?

어? 이놈, 이놈 말버릇 봐라

죽이려면, 무사답게 죽여라

무어? 이놈, 못할 말이 없구나. 너--- 이놈, 관군의 밀정이지?

-----?

충에게는 뜻밖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를 살리는 건가? 비밀을 캐려구?

어서 대지 못할까?

그래도 충은 좀처럼 무어라 상념의 갈피가 떠오르지 않았다. 괴수의

옆에 섰던 키가 크고, 복장도 좀 말쑥한 놈이 그의 귀에 무어라 말을

흘려넣자 괴수의 표정은 잠시 누그러지는 듯 했다.

이거 봐라. 바른대로 말하면 네 목숨을 붙여주마. 넌, 관군의

밀정이지?

귀에 한 말이 이 말인 듯 했다.

아니다

그럼 뭐냐 말이다

충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문득 가슴에 치미는 일생을 통해 처음

겪는 모욕감을 느낀 것이었다.

정-말 않겠느냐?

-----

음 그럼 소원대로 죽여 주마

괴수는 눈짓으로 한 놈을 불렀다. 잽싸게 생긴 두건 하나이(가) 긴

칼을 빼어 사리며 충의 앞으로 다가 나섰다. 둥그렇게 섰던 패들은

재미있는 구경이 났다는 듯이 이 모양을 바라 보았다. 어디선지 칼

한자루가 충의 앞에 던져졌다. 충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칼을

겨눈채 다가드는 놈을 바라보았다. 칼을 들 필요가 없을 듯 했다. 놈은

꽤 칼을 써 본 놈인 듯 했으나 정도(正道)를 닦지 못한 듯했다. 놈은

가만히 서서 칼을 들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충이 칼을 집어 들자 주위는

의연히 고요가 흘렀다.

야---압

놈이 달려 드는 순간 충은 가볍게 몸을 틀며 칼을 휘둘러 손쉽게 놈의

칼을 멀리 휘날려 버렸다. 순간 주위에서 어떤 긴장된 경악의 신음이

흘러 나왔다.

옛다

충은 들고 있던 제칼을 던져 주었다. 두 눈에 살기가 돋은 채 몸을

일으킨 놈은 충에게서 받은 칼을 겨누며 거세게 다가 들었다. 충은 빈

손.

어, 멈추어라

괴수의 소리와, 놈이 번개같이 달려든 것은 그리고 충의 몸이 약간 뒤로

젖혀지며, 놈이 배를 움켜 잡은 채 피를 물며 꼬꾸라진 것까지도 거의

동시였다.

와---아

경악에 찬 감탄성이 적개심이 흐르는 주위를 휩쓸었다. 괴수도, 그리고

아까 괴수의 귀에 입을 갖다 대군(대곤)하던 키가 크고 눈이 감때 사납게

찢어진 놈(부괴수인 듯 한)도 놀라는 기색이었다.

나와 겨뤄보자

입에 냉소를 담은 채 걸어 나온 것은 예의 키가 큰 놈이었다. 충도

주위의 격동에서 받은 자극과 내부에서 끓어 오르는 어떤 참을 수 없는

흥분을 전신에 느끼며 칼을 잡았다. 둘은 칼을 겨눈채 마주 섰다.

서로는, 서로의 실력을 느끼었다. 칼이 부딪쳤다. 그런가 하면 떨어지며

다시 부딪쳤다. 빨랐다. 눈부신 묘기.

막상막하--- 그러나 충은 당대 신라 수위의 검사임은 우선 신라전국이

알고 있는 터였다. 얼마 안 있어 양자의 차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여엇

한 소리에 상대는 칼을 떨어뜨리며 비틀거렸다. 상처는 없었다. 충은

뒤돌아 보지도 않은 채 눌린듯 고즈넉한 속을 돌아 섰다. 순간, 그는

몸을 비켜피했고 가슴을 바라고 날아 온 칼은 어깨를 뚫고 박혔다.

부괴수의 짓이었다. 모르는 결에 충의 손에서도 칼이 날랐다. 귀를

찢는, 전신에 소름을 일쿼주는 비명이 울려 왔다. 그 비명이 아련히

흐려가며 충은 의식을 잃었다---

 

* * *

 

집채만한 보다도 큰 산더미 같은, 보다도 무거운 무엇이 목덜미를 타

누르는 압박에 괴롭게, 어느덧 태자는 의식이 아련히 돌아 오고 있었다.

으--- 으음

자신의 신음에 아리숭하던 의식이 언듯 선명해 왔다.

(나는 살아 있구나---)

우선 그의 뇌리를 긋고 달리는 상념이 이것이었다. 그러면서 충은

자신의 주위에 누군지 인기척을, 아니 그들의 대화를 언제부터인가 듣고

있었다. 눈은 감은 채---

이놈, 참 가엾긴 해. 젊은 놈이 똑똑하게 생겼군

정신이 좀 드나 본데---

살아 나긴 하겠어--- 살아 났자 또 별 수 없는거지만

근데 왜 죽여 없애지 않구 살려 내지

이놈은 필경 관군의 첩자야. 허니까 살려 내서 오히려 그 내막을

알려는거지

허, 고문깨나 당하겠군---

이어 죽는 거지

대화들은 마치 남의 얘기처럼 들어가며 혼몽한 의식의 미로에서

헤매더니 문소리가 나며 놈들의 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동안 마련한

의식상태가 지속되었다. 꿈처럼, 잠드는 것처럼--- 그때 또 문소리가

났다. 누군지 들어서는 기척이 왠지 좀 조심스러운 태도라는 것을

느낄만치 그때 충의 의식은 명료해 왔으나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무관심하려 했다. 들어 온 사람은 선채 잠시 소리가 없더니 이윽고 예의

조심스럽고 조용히 앉는 눈치였다. 머리에 손이 왔다. 충이 놀란 것은

그 손이 움찔 소름을 느낄만치 차게 느껴지도록 제 몸이 끓고 있는 사실이

아니고 보다 그 감촉이 놀랍게 보드랍다는 점이었다.

(여자가 아닌가?)

험궂은 산적굴에 이처럼 보드라운 손을 가진 여인이 산다는 것은 매우도

놀라운 일이었다.

(괴수놈의 첩?--- 딸?)

그런데 말소리가 들려 왔다. 낮고 산사람(山民)답게 거칠었으나

틀림없는 여자소리였다. 처음에는 잘 들을 수 없었으나 이내 음성은 커

왔다.

---첩자는 아닌 것 같에--- 어느 귀족이 아닐까--- 어차피 죽일

놈이로군--- 죽이기는 아까운 걸---

이윽고 여인이 일어서는 기척이었고 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시 적요---

충은 멀쩡한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여인이 나가고도 얼마를 있다가

그는 눈을 떴다. 빙그르히 천정이 돌며 다가 드는 듯하여 그는 이내 눈을

감아 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천정이 좀 아물거렸을 뿐 그다지

어지럽지는 않았다. 그는 누운채 고개만 돌려 주위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매우 더럽고 누추한 방이었다. 자신의 몸에 덮여 있는 이불깃이

새까만 때에 찌들어 있었다. 그리고보니 냄새도 여간 역한게 아니었다.

그는 미간을 누비며 일어서려 상반신을 들며 팔에 힘을 주었다.

아---

어깨죽지가 불붙는 듯 뜨겁게 아파옴을 느끼며 다시 몸을 더러운 자리로

떨구었다. 그러는데 다시 문께에 인기척이 일었다. 충은 무심코 문쪽에

시선이 갔다. 문이 열리며 들어서는 사람.

아, 그 여자

순간,

어마

그녀쪽에서 한층 놀람과 당황을, 그리고 시원스러운 눈동자 위로 환한

빛을 드러낸다.

깨어났군

충은 그 서늘한 눈매며 곧은 콧날, 보다도 오려붙인 듯한 입술에서 문득

낙랑공주의 자태를 느끼며 잠시 뇌리가 혼란했다.

(정말 산사람 치곤 이쁘구나)

둘은 시선을 마주 한 채, 잠시 굳어 버린 듯 서 있었다. 이윽고 여인은

가가와 앉으며 충의 이마를 짚어 본다.

인젠 됐군---

그녀는 누구에게라 할것없이 낮게 중얼거리며 미소를 짓는다. 충은

말없이 그녀의 거동만 보고 있고.

그녀는 어디라 없이 촛점을 잃었던 시선을 들어 충을 바라 보았다.

충은 순간 전신이 아뜩했다.

(저건, 바로 낙랑공주의 눈빛이다)

언젠가 후원을 산책하는 충에게로 다가들던 공주의 애절한 눈매가

서언히 나타나며 지금 눈앞을 가려 선 그녀와 자꾸 겹쳐진다.

당신은 첩자는 아니지요?

-----

귀족이시구려

-----

귀족이라도 괴수는 죽일거요

충은 갸우뚱히 그녀를 치켜보았다.

(왜 이 여자는 내게 이런 이야길 하는 걸까?)

도둑이 되세요. 그러찮음 죽어요

그녀는 일어날 듯 잠시 몸을 일으키다가, 그러다가 충을 한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다가, 번개같이 몸을 들어 충을 끌어 안으며 쓰러졌다.

충이 놀랄 새도 없이 그녀는 얼굴을 맞부비다가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얼마를 충은 상념의 갈피를 찾지 못한 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산여자답다---)

언뜻, 자기도 모를 어떤 정열이, 삶에의 약동하는 의욕이 분수처럼

가슴으로 몰려 들었다.

(그렇다, 나는 살아야 한다. 이것뿐이다. 살자 살자)

충이 괴수앞으로 끌려 간 것은 이튿날 저녁 무렵이었다. 어제의 상처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쏟아질 듯 아팠으나 그뿐 그외의 상처는 없었다.

괴수는 아직 노기등등한 기색이었고, 그의 주위로 병장기와 그리고

형구(刑具)들이 즐비했다.

너, 바른대로 묻는 말에 대답해야 한다. 그렇잖음 죽을 뿐이니라

-----

충은 체념의 빛이 짙은 안색이 안온한 채 어떤 결의가 드러나고 있었다.

너는 관군의 첩자지?

아니요

아니라?

첩자라면 이런 눈에 뜨이는 귀족의 복색을 했겠소?

음---

괴수는 잠시 그 새카만 턱수염을 문지르다가,

그럼 넌 뭔가? 뭣하러 이 산중엘 왔는가?

태자는 잠시 주저했다.

넌 고구려국의 귀족이냐?

아니, 난 신라의 한 말단 귀족이었소. 그러나 지금은 이미 한 생령일

뿐--- 날 무리에 끼워주오. 원수를 갚고 싶소

충은 지금 자신이 하는 말을 통 깨닫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별로이

생각해 둔 말은 더욱 아니었다. 어떤 삶에의 의욕만이 횃불처럼 그의

가슴에 이글거릴 뿐이었다.

음---

의외로 괴수는 만족한 듯 했다. 그날부터 충은 무리에 끼워졌다. 그때

충은 스스로 반지러운 비단옷을 벗어 버렸다. 그리고 억센 베옷을 몸에

감았다. 상처도 거의 아물었을 무렵 충은 무리를 따라 첫 작업에 나섰다.

오늘은 충의 수완을 시험하는 날이었다.

동해의 검푸른 해변으로 빠지는 좁은 고갯길 머리에 충은 앉아 있었다.

양 산비탈에는 지금 무리들이 숨어서 충의 거동만 바라 볼 뿐이었다.

온다!

충은 용수철처럼 뛰어 일어나 고개를 아래를 굽어 보았다. 까마득히

움직이는 띠끌(티끌)이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일곱개의 점이

고개를 오르느라고 움직거리고 있었다.

충은 약간 가슴이 울렁거렸으나 상상외로 태연히 왔다. 이윽고

일곱개의 물건이 점점 다가오며 자태가 분명해 오자 그는 몸을 풀 사이로

숨기었다. 일행 일곱중 하나는 말을 타고 옷에 윤이 흐르는 것으로

상전인 듯 했고 네 사람은 큼직한 짐을 지고 있다. 나머지 건장한 체구에

가벼운 갑주까지 걸친 둘은 각각 환도를 잡은 채 각각 앞뒤로 호위를

한다. 큰 행렬이다.

일행이 고개 모퉁이를 돌 즈음, 풀속에 엎디었던 충은 칼을 비껴 잡은

채 천천히 길가운데로 나섰다. 그리고 놀람에 낯빛이 질려오는 일행을

손을 들어 세웠다.

무거운데 그 짐은 놓고 가거라

그러나 그 말이 멎기도 전에, 재빨리 주위를 둘러 보고 교교히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두 무사는 제각기 환도를 춤추며 충에게로 다가 오고

있었다.

검술들이 괜찮았다. 충은 약간 뒤로 물러 섰다. 그 서슬에 힘을 얻은

둘이 와락 달려든 것이 실책이었다. 충이 저모를 어떤 전지(戰地)의

흥분으로 칼을 휘두르자, 동시에 둘의 허리가 꺾이며 피가 분수가 되어

비릿내를 풍기어 솟구쳤다. 그제야 말위의 상전이 오던 길을 되돌아 말을

모는 소리가 나며 짐군들이 짐을 버린채 목숨을 얻어 달아나기에 바빳다.

그제야 산위에서 환호성이 일며 우루루 무리들이 나타났다. 순간 충은

아프게 가슴을 후비는 어떤 가책을 느끼며 눈앞이 아뜩했다.

(내가 사람을 이유없이 죽였구나)

밤이 이슥토록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옆에 곯아 떨어진 놈의

코고는 소리에 졸리다 못하여 밖으로 나섰다. 바람이 소슬했다. 달빛은

푸르게 밝고도 몸서리치게 찼다. 그는 벌레의 울음에 끌리듯 산길로 들어

섰다.

벌레 울음, 서라벌의 가을, 아까 죽은 사람, 공주, 도둑, 지우(知友),

그리운 어머니, 아버지, 공주---

문득 인기척에 고개를 돌릴 즈음 무언지 목을 조르며 매달리는 게

있었다.

그 여자였다. 괴수의 첩이라는 여인. 그는 사뭇 아프게 목을 조르며,

얼굴이며 입술을 마구 부비며 풀숲으로 쓰러졌다. 얼결에,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해서 화끈히 솟구치는 욕정을 깨달으며 충도 풀로 쓰러져

버렸다. 계집은 쌔근히 가쁜 숨으로 한참을 홀로, 어쩔줄 모르고

당황하는 충의 몸을 애무했다. 계집은 몸을 꼬며, 가슴을 헤치며 충에게

눈짓으로 팔굽으로, 몸짓으로, 몽실히 부드러운 젖가슴과 두 다리로

그에게 요구했다. 격렬한 그리고 애절한 요구--- 충은 저모르게 빨려

들고 있었다. 자신을 포기하는 아련한 유열속에서 둘은 죽음처럼 취한

채, 숨이 가빠 왔다. 격랑(激浪)이 우뢰처럼 급박하다가 아득히 스쳐

갔다. 둘은 피로한 몸을 풀 속에 던진 채 그냥 마치 모든것이 끝난 듯이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이름이 뭔고?

버들아기

버들아기라---

당신은 어떤 사람이유 도대체---? 이름은 뭐유?

이름--- 이미 말했잖아? 야기랑(郞)이라구

피! 그건 가명이지요?

글쎄---

이튿날도 충의 칼은 몇번의 피를 보았다.

(조국을 버린 사람같지 않은 사람--- 죽여두, 죽여두 그래 어쨌단

말이냐)

충은 한번 눈을 흡떠 본다.

두개의 싸움과 그리고 이어오는 야수같은 칼부림과 버들아기의

정염과--- 이렇게 열흘--- 보름--- 어느덧 한삭이 흘렀다. 어느 밤 충은

괴수의 방으로 불리웠다.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버들아기가 괴수옆에

앉아 있었다.

---자네를 한달간 봐 왔네--- 놀라운 무옐세 놀라운 무예야---

괴수는 이미 벌겋게 핏기가 오른 취안을 들어 충을 건너 보다가

오늘 이처럼 부른 까닭은--- 좀 은밀히 상의할게 있어서이네---

괴수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술을 한주발 목마른 듯 마시고는

금시 눈에 눈물을 담는 것이었다. 수년전 그의 아비가 죄없이 그 고을

군수에게 죽음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복수를 맹세하고 입산을 했고, 그

군수는 고려에 항복하고 여태 그 고을에서 군수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을이 예서 근 백리 남짓일세--- 내일이 바로 아버지께서 돌아 가신

날이야. 그래서, 나는 늘 벼루어 온 것일세, 언제구 내, 애비가 죽은 날

그 군수놈을 이 내 칼로 목을 쳐 주겠다구--- 그러나 알다시피 내

주위에는 사람이 귀했네--- 자네를 만나 그 얼마나 기쁜 줄 아나?

밤이 깊도록 숙의가 있었다.

이튿날 밤. 어둠을 타고 충과 괴수를 선두로 열명남짓이 뽑아낸 무리는

산을 내려왔다. 밤길을 달리기 한식경해서 그들은 커다란 담앞에

멈춰섰다.

여길세

괴수가 눈에 불을 일쿠며 말했다.

그 옆에는 버들아기가 남장으로 말위에 앉았다. 부하 두엇이

쪽제비처럼 담을 타 넘어 섰고 대문께가 잠시 어수선하더니 이내 소리없이

문이 열리었다. 소리없이 십여 무리가 마당으로 들어 섰다.

어느덧 충과 괴수와 그리고 버들아기는 군수의 방앞에 있었다.

버들아기의 손에는 횃불이 그리고 충과 괴수의 손에는 환도가 잡혀

있었다. 괴수가 문을 열어 젖혔다. 그 서슬에 먼저 기척이 인 것은

건너편 방이었다.

여, 누구냐?

그 방문이 열리며 어느새 칼을 잡은 두어 군졸이 뛰어 나왔다. 그러자

괴수가 먼저 칼을 번뜩였고 두 토막이 된 시체 둘이 충의 발앞에 쓰러지며

피를 뿜어 그의 옷을 적셨다.

누구냐?

비로소 군수가 잠을 깨어 소리를 치며 일어났다.

쉬---

방안이 일시에 밝아 왔다.

으아?

발가벗은 채 돼지같은 군수가 몸을 뒤치며 눈을 치떴다. 그러자 역시

알몸뚱이인 계집이 겁에 질린 낯빛으로 방구석에 가 섰다. 괴수가

나섰다. 버들아기도 따랐다.

너 날 모르겠니?

나를 모르겠니?

누구---?

흥, 죽일 놈, 이 찢어 먹을 놈, 내가 바로 이향춘대감의 아들이다.

알겠니? 이 여잔 돌아간 김춘의 딸이야---

누, 누구?---

더 말 말아라. 오늘이 우리 부친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날--- 조용히

칼을 받아라

그 다음은 간단했다. 괴수가 칼을 날렸고 어깨죽지에 피를 뿜으며

쓰러진 몸에 버들아기의 비수가 꽂혔다.

와!

밖이 소란해 왔다. 셋은 한번 시선을 모았다가 밖으로 나섰다.

칼소리---

셋은 시체를 뒤로 하며 대문을 향했다. 부하들의 한 짓으로 이미 집은

불꽃에 싸이고 있었다. 한떼의 군졸이 꺾이고 잠시 고요한 새 그들은

부하를 앞세우고 이미 대문 근처에 이르렀다. 함성이 일며 뒤에 다시

한떼의 군졸이 달려 나왔다. 그때 충은 멈칫 말을 세웠다. 삽시에

괴수가 앞으로 지나치고 충만이 남았다.

왜 이래요?

멈칫 같이 말을 멈추는 건 버들아기였다.

저 봐, 저 소리--- 아 저기야

아, 저 애기말에요?

그래, 타 죽겠어---

충은 말을 내리려 했다.

저 뒤를 봐요. 빨리!

버들아기가 채찍으로 충의 말을 때렸고 순간 말은 펄쩍 뛰며 대문을

나서 버렸다.

아, 저 애기---

외치면서도 어느새 충은 밤길을 달리고 있었다.

몇년전 괴수나 제 가족들은 모두 굶어 죽었어요---

말등에서 버들아기가 한 말이었다.

왜, 산채로 데려오지---

아니, 우릴 잡으려구, 감옥에서 굶겨 죽였어요

충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충은 그 울음소리--- 깨는 듯한

아기의 울음소리를 귀에서 머리에서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가슴을 찢는 듯한 울음소리--- 충은 밤을 새웠다. 이튿날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열이 사뭇 무섭게 올랐다. 헛소리가 나왔다.

버들아기의 간호가 극진했어도 열흘을 앓고야 미음을 들 수가 있었다.

충은 지긋이 눈을 감은 채 머리로는 그 밤의 그 모습을 그리며 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그때였다. 다급한 발소리가 일며 들어 선 것은

버들아기였다. 몹시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 봐요, 큰일 났어요. 저 아래서 큰 싸움이---

아니 관군이야?

아니에요, 헌데 장사들인가 봐요. 우리편두 위태해요--- 괴수와

두엇밖엔 안 남았어요---

무어?

오늘 아침 무리의 대부분을 먼 곳에 보내고 산채에 사람이 적던 것을

깨닫자 충은 칼을 쥐며 문을 박찼다.

충이 버들아기의 손을 끌며 싸움터에 이르렀을 때는 괴수와 또한

부하만이 남아서 한명 남은 적과 마주 서 있었다. 충은 더욱 걸음을

날리어 싸움중에 들어 섰다. 그 순간---

아아, 태자님!

아, 승규!

놀람도 찰나, 괴수의 칼이 섬광을 그었고

아악---

   

* * *

<<< 이 하 없 음 (편집오류로 추정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