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 사 방/조선오백년 야담

조선 오백년 야담 제12화 / 阿非知의 九層塔 - 望鄕哀話

by 연송 김환수 2013. 8. 30.

朝鮮(李朝) 五百年 野談

 

차 례

 

第 一 話 - 寶娘靑湖 - 血痕奇譚

第 二 話 - 樂浪好童 - 悲戀哀史

第 三 話 - 楊書房致富 - 抱腹絶倒

第 四 話 - 風流監司 - 節佳妓話

第 五 話 - 哀戀話 - 靑春悲戀

第 六 話 - 異花 雪竹梅 - 復讐奇譚

第 七 話 - 將軍義盜 - 名將逸話

第 八 話 - 煩惱僧 - 佛力奇譚

第 九 話 - 悲愴- 百濟哀話

第 十 話 - 金議官 叔侄 - 韓末逸話

第十一話 - 李星信最後 - 海戰悲話

第十二話 - 阿非知九層塔 - 望鄕哀話

第十三話 - 可憐杜十娘 - 名妓哀話

第十四話 - 公主神尺 - 怪夢奇譚

第十五話 - 餘愁 - 落照悲話

第十六話 - 斬首된 별아기 - 愛情悲譚

第十七話 - 千里遠情 - 義俠美譚

 

-------------------------------------------------------------

 

<제 12 화>

望鄕哀話(망향애화)

阿非知의 九層塔 (아비지의 구층탑)

 

 

하나, 둘, 셋, 넷---

분명히 느껴지는 살기(殺氣)가 넷이다.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왔다가 다시 멀어진다.

(쳇! 오늘만은 편히 쉴랬더니 또 귀찮아지겠군)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소리없이 자리를 일어선 시커먼 그림자 하나.

밤.

온 누리는 칠흑속에 잠겨버린 三경이다.

이슬을 받으며 노숙(露宿)하던 그림자는 살기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넷을 따른다.

그림자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앞길을 더듬고 있었다.

마치 맹인(盲人)들이 나아갈 길 앞의 상대를 피하려고 더듬는 것처럼---

그렇다.

그림자는 바로 맹인인 것이다.

(네놈중의 두놈은 장한(壯漢)이군. 그리고 두놈은 좀팽이다. 그중

한놈의 손엔 오랏줄이 들려있단 말이다. 병장기는 칼이다)

맹인은 앞에 가는 살기 넷의 정체를 속으로 진맥해 보았다.

육중하게 놓여지는 발소리와 잽싸게 움직여지는 발소리로 장한과

좀팽이는 구별이 갔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물건들이 옷깃을 스치는 소리를 듣고 오랏줄과

칼을 식별할 수가 있었다.

(누구를 생포(生捕)하러 가는 모양이군)

맹인은 여전히 뒤를 따르면서 생각한다.

그렇다면 뒤 따라갈 필요는 없다.

돌아오는 길목을 기다리자.

우뚝 걸음을 멈춘 맹인---

그가 바로 운월(雲月)이다.

맹인 운월(盲人雲月).

어디서 떠나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해가 있는 한, 보통 사람들도 따르기 힘든 속보(速步)로써 길을

걷고 해가 떨어지면 아무 곳에서나 노숙하는 걸객에 불과한 것이다.

운월의 주위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운월은 반드시 참견한다.

운월의 전신은 무엇일까.

어제 밤도 그제 밤도, 잡초속에 몸을 누인 운월의 주변에선 사건이

있었다.

그제다.

어둠이 쫙 깔린 초저녁의 칠흑속에 운월은 하루의 보행으로 인하여 좀

피곤해진 몸을 눕혔다.

고개 밑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 했으나 운월은 별을 보는지 못보는지 그저 반뜻하게

고개를 가누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의 시각이 지난 후.

그렇다.

발소리가 들린 것이다.

사뿐 사뿐 놓이는 가벼운 발소리와 육중하게 놓이는 두개의 발소리가.

(흠, 여인과 사내군. 어떤 사이일까)

운월은 속으로 빙긋이 웃음을 머금었다.

마을에서 좀 떨어진 호젓한 고개밑에도 찾아 든 초저녁의 어둠--- 그

속에서 이제 속삭여질 달콤한 사랑을 시울속에서 그려 보며---

두개의 발자국 소리가 뚜렷이 들려올 즈음---

보아라!

어지럽게 다가오는 서너개의 발자국소리를---

(잠을 또 설치게 됐군)

속으로 중얼거린 운월은 풀섶에 누운채 지팡이를 단단히 거머 쥐었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으나 지팡이 끝은 날카로운 송곳 끝 같다.

그러자---

뛰어 오는 기척.

여인과 사내가 뛰어 오는 모양이다.

그들이 바로 머리맡을 지났을 때---

우뚝 자리를 차고 일어선 운월.

(셋이다!)

운월은 상대의 수를 헤아렸다.

멈춰라! 도망 가면 어디까지 갈테냐!

굵직한 말소리가 어지러운 발자국소리 틈에서 흘러 나온다.

이어서

헤헤헤, 오늘이야 내 수중에 들었지

하는 소리.

그 비열한 말투에 운월은 잠시 몸을 흔들었다.

보화(寶花)! 제발 헛수고 시키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서라. 너에겐

해를 끼치지 않으리라

말씨와 말투로 인하여 쫓기는 사람은 죄없는 자요, 쫓는 놈들은 음흉한

놈들이란걸 운월은 알았다.

번개같은 동작으로 남녀와 추적자(追跡者) 사이를 뚫고 들어 간 운월.

누구냐!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들이 우뚝 멈췄다.

소경!

길을 비켜라. 앞이 바쁘다

이 길목은 아무도 못 지나간다

무뢰한!

칼을 뽑는 소리.

이어서 두개의 똑 같은 소리가 밤 바람 속에 퍼져 간다.

운월은 여전히 땅을 짚고 있는 지팡이 뿐!

이 놈은 내가 맡을테니 너는 어서 연놈을 붙들어라!

한 사내가 운월의 곁을 스쳐 빠져나가려 할 때.

그때다.

땅 끝에 꽂혀 있던 지팡이가 조금 움직였다.

순간,

앗!

하는 부르짖음과 함께 사내의 육중한 몸뚱아리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쨍그렁

칼이 제 멋대로 딩구는 소리가 났다.

놈이!

쓰러진 입에서 저주의 찬 소리가 흐른다.

하늘이 높은 줄 모르는 무뢰한! 베어 버릴테다!

소원이다!

우렁찬 소리와 싸늘하나 천근 무게를 가진 소리가 엇갈린다.

저승에 가서 후회 마라. 네가 저지른 업보(業報)이니---

이 몸이 할 말---

그 뿐.

잠시 죽은듯한 정적---

그리고 찰나의 뒤.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매서운 바람 소리.

그러나,

앗!

비명을 지른 것은 싸늘한 소리가 아니라 우렁찬 소리였다.

쨍그렁

칼이 땅에 떨어졌다.

어느새.

운월의 지팡이는 놈의 손목을 호되게 치고 있었던 것이다.

필경, 손목뼈는 부러지고 손은 팔뚝에 매달린듯 덜렁 덜렁 하리라.

다신 못 쓰게 된 오른 손이다.

쓰러졌던 놈과 남아 있던 놈이 좌우에서 한꺼번에 칼날을 휘두르며 달려

들었다.

그러나 미처 칼을 내려치려고도 하기 전에 두놈은

악!

윽!

하는 처절한 비명을 남기고 쓰러졌다.

지팡이는 땅에 꽂힌채 잠시도 움직이지 않는 듯 하였으나 어느결에 두

놈의 목덜미에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이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나마 이 방해자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읽은 장한은

그대로 땅에 부복했다.

우둔하와 몰라 뵈었으니 천한 목숨 한번만 살려 주옵소서

그 때 발자국 두쌍이 등 뒤로 다가왔다.

어느 분이시온지?

아직도 놀램이 가시지 않는듯 떨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묻는다.

당신네는?

운월의 목소리는 부드러울대로 부드러웠다.

그 보단 먼저 존함을 알려 주옵소서

집도 절도 없이 떠다니는 사람, 이름도 없소. 모두들 나를 보고

운월이라 부르오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사오리까?

그 보다도 오늘 밤 이 소란은?

말씀드리오리다. 소인의 옆에 있는 여인은 보화라 부르는 양가집

처자입니다. 보화의 부모와 소인의 부모는 우리들을 짝 지워주고 평생을

즐거이 살라 하셨읍니다. 한데 이 고을 병방(兵房)이 보화의 아리따움에

취해서 탐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고을 원님의 그늘 밑에서 세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변방은 보화의 아버지를 온갖 힘을 다 기울여서 못 살게

굴었습니다. 보화의 아버지가 관가에 끌려가서 얼마나 호된 변을

만났던지 모르옵니다. 지금 저희들을 쫓아 온 놈들은 병방의

졸개들입니다. 보화를 강제 납치하려고 무척 벼루었사옵니다. 집밖에

나오는 짬을 노렸지요

운월은 앞뒤를 알았다.

아무 것도 아닌---

그저 한 낱 계집에게 대한 야욕 때문에 피비린내를 풍기려는 사내,

병방에 대한 미움이 불끈 치솟았다.

자기가 나타나지만 않았던들, 이 사내의 목은 이미 떨어져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그리고 보화는 개 끌리듯 놈들에게 끌려가서 병방에게 곤욕을

당했으리라.

그 다음은 보화 스스로 목숨을 끊든지 하지않으면 암살될 것이리라.

그리고 피살자를 잡으려는 소동이 일어날 것이고 억울한 누명을 쓴 또

하나의 사람이 잡혀와서 처형 되리라.

운월의 가슴속에는 병방에 대한 미움이 불끈 치솟았다.

(고연놈!)

다음날, 칠산 고을의 야산 밑에는 흑장(黑裝)의 장한 셋의 시체가

발견되었고, 고을은 발칵 뒤집혔다.

병방은 속으로 참으로 괴이하게 여겼다.

제 부하중에서도 칼 잘 쓰고 몸 날래기로 유명한 놈만 셋을 골라

보냈는데 그 누가 그들을 초개같이 쓰러 뜨렸을까.

이 고을에는 그들을 대적할 자가 없다.

더구나 칼을 가지고서는---

그런데 셋의 시체에는 칼자국이 없고 한결 같이 목덜미에 구멍이 뻥

뚫여(뚫려) 있었다.

상대의 흉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여간 무예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살해 방법!

고을에 수색망이 깔렸다.

그러나 용의자는 잡히지 않았다.

보화의 배필인 사내가 일단 붙잡혀 갔으나, 곧 풀려 나왔다.

그로서는 흉기도 없을 뿐 칼에 능한 셋을 죽일 수 있는 무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수선한 하루가 지난 다음.

다시 밤이 왔다.

병방은 안개속에 숨어 있는 무서운 사내를 머리속에서 더듬어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불안이, 알지 못할 불안이 엄습해 왔다.

자정이 되었으리라.

어느새 병방이 하루의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들어 갔다.

날이 샜다.

동녘에 해가 솟아 오를 무렵.

고을 안은 다시금 발끈 뒤집혔다.

병방이 하룻밤 새에 누구에겐가 또 피살된 것이다.

아무도 어떻게 그가 살해 되었는지를 모른다.

다만 가슴 한복판에 비수자국이 있다는 것만을 감정했을 뿐이다.

큰 일이었다.

한 고을의 병방이 살해 되었다는 것은---

그 범인을 잡지 못할 경우에는 원은 파직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누가 살해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한낮 전에 여러 사람이 관가에 끌려 갔다 나오군(나오곤) 했다.

운월은 고을의 소동을 들으며 지팡이를 더듬 더듬 길을 떠났다.

(못된 놈들을 모조리 없애야 한다)

(그런 피는 얼마든지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이틀밤을 연거푸 사건을 일으킨 운월은 칠산 고을을 등

뒤에 두고 백리길을 걸어서 갑주 고을로 들어 왔다.

해가 저물고 이어서 어둠이 내려 덮이자, 그는 밤을 새우려고 길가에서

노숙할 자리를 찾았다.

(오늘 밤만은 편히 좀 쉴까)

그러나 그 생각도 산산히 부숴지고 또 다시 알숭달숭한 사건에 휘감겨

버리고 만 것이다.

운원은 한참을 기다렸다.

이윽고---

다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온다!)

온 신경이 귀로 갔다.

넷이다.

그러나 발걸음이 갈 때 보다는 더디다. 누구를 메고 오는 기척!

억센 사내의 어깨 위에서 뒤틀거리는 소리가 귀에 닿는다.

비단 소리.

(여인이다!)

입을 틀어 막았는지 소리 하나 없다.

(왜 이리 사건에는 여인만이 낄까)

차차 가까워 온다.

(규수 피납!)

곧 납득이 갔다.

야반(夜半)에 규수를 붙잡아 오는덴 필경 좋지 못한 곡절이 있을께다.

누구냐! 길을 비켜라!

어둠을 등에 지고 길 복판에 우뚝 서 있는 시커먼 그림자.

움직이지 않는 한 사람.

소리 친 사내는 이 의외의 출현자에게 무척 놀랜 모양이다.

아닌 밤중에 이렇게 호젓한 곳에 우뚝 서 있는 사내의 정체는?

짐을 맡기시오

싸늘하나 빈틈 하나 없이 갈아 앉은 소리가 말한다.

베어 버려! 귀 은데

커렁커렁한 소리가 말한다.

고이 짐을 맡기고 가시지

조금도 동요를 보이지 않는 소리.

찰나.

칼 뽑는 소리와 이어서

으으윽---

하는 비명.

제법 안다?

경탄이 섞인 소리가 비꼰다.

(조그만 놈이다)

운월은 자기의 지팡이에 의하여 나가 떨어진 놈을 속으로 감정했다.

이내 칼 뽑는 소리가 뒤섞여 나고 그리고

악!

음!

비명과 비명이 처절하게 야기속을 흐른다.

어느 새 길 가에 동당이 쳐진 땅 위의 짐이 꿈틀하는 모양이다. 비명

셋이 연이어 나자 쏜살 같이 달아나는 외톨이 발자국소리가 운월을

상쾌하게 했다.

으하하핫!

검은 하늘로 운월의 호쾌한 너털웃음이 거침없이 퍼진다.

운월은 웃음을 거두고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몸을 굽히며 손을 뻗치자

손 끝을 통하여 전신으로 스며드는 부드러운 감촉!

그의 손이 두어번 놀려지자 여인의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답답하게 막혔던 숨!

그 숨이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공포에서 풀리지 않은 듯 콱 흐르지 못한다.

이윽고 운월의 부축을 받고 상반신을 일으킨 여인은 힘에 겨운듯 입을

열었다.

어느 분이시온지!

아!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어찌된 일이냐!

티 하나 없이 맑은 목소리이긴 하나 고통에 사로잡힌 성대였다.

오랏줄이 파고 들었던 자리의 아픔이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으리라.

그 보다도 어디로 옮기셔야지? 댁은?

긴 말 어찌 다 사뢰리까. 하찮은 목숨 건져 준 은혜 백골

난망이겠사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 몸이 무엇을 했단 말씀이요. 댁으로 가셔야지?

댁은?

은혜를 입은 몸이 기망하기 어렵사오나 그 말씀만은---

여인의 뒷말이 가늘게 사라진다.

운월은 이 여인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어둠속에

망연히 서 있었다.

혹시?

운월의 가슴속에 그 어떤 감격이 벅차게 솟아 올랐다.

 

 

法水

 

반년 전의 얘기다.

봄의 향훈이 향긋이 몸에 닿는다.

해가 서산 마루에 걸려 있다.

저녁 연기가 집집에서 오르고 있었다.

길 가는 사람!

누가 부르는 소리에 운월은 걸음을 멈추었다.

나 말이요?

음, 당신 말이다!

운월은 목소리로 상대의 정체를 점치며 한발 다가선다.

무슨 볼 일이요?

소경!

운월의 흰자위만이 데굴 데굴 구른다. 요기(妖氣)가 운월의 전신을

싸고 있는 것을 불러 세운 사나이는 보았다.

운월의 손에 들려 있던 지팡이가 수평으로 오르더니 자기를 향한다.

사내는 운월의 몸을 감싸고 있는 요기를 뚫고 운월의 가슴속을 한참

파헤쳐 보다가

흉상(凶相)!

그러나 또렷이 내 뱉았다.

뭣? 흉상?

운월의 핏기없이 새파란 입술이 구겨졌다.

그렇소. 그러한 상을 검난(劍難)의 사상(死相)이라 하지

사내의 목소리는 조금도 동요가 없다. 오히려 검난(劍難)의 사상이라는

대목에는 힘까지 넣었다.

음! 우롱할 셈인가?

사내를 향하고 있던 지팡이 끝이 꿈틀거렸다.

이제는 해가 떨어진 어스름 속에 퍼지는 그것은, 무서운 살기였다.

내 관상에 거짓은 없다!

한참 동안이나 침묵!

그러자 사내의 목소리가 또 흐른다.

사람의 운명이란 지팡이로는 모른단 말이야. 역시 당신은

사운(死運)이야. 아무리 보아도 사운! 언젠가 당신은

비명횡사(非命橫死)하고 말걸

그 목소리는 얼음 보다도 짙다.

죽지 않는다!

한마디 부르짖고 운월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에 사취(死臭)가 풍겼다.

보아라!

운월은 한 발을 가벼이 벌렸다.

들개(野犬)리라.

털이 버숭 버숭한 강아지가 너털 너털 걸어오다가

캥!

하고 피를 토했다.

운월의 지팡이가 어느 새 강아지의 두골을 산산히 부수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죽는 것은 이 놈이다!

툭- 하고 죽은 강아지를 걷어차고는 덜렁 덜렁 걷기 시작하는 운월---

그러나 다음 순간!

몸을 돌리는가 했는데 오른 손의 지팡이가 마치 번개처럼 사내를

엄습했다.

나도 안죽는다!

그 소리는 열자나 떨어진 곳에서 들려 왔다.

흥! 언젠간 죽는다!

소경 운월은 한마디 씹어 뱉고 또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리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운월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던 사내는

흐---읏

하고 한숨을 길게 내뿜고 중얼거렸다.

무서운 놈이다. 소경이라 하나 걸음걸이가 범상치 않아서 무술을 익힌

놈인가 한번 시험하려 했더니 과연 광귀(狂鬼)같은 자식이야!

사내는 터덜 터덜 어둠을 뚫고 장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안에 가까이 이르렀을 무렵!

타닥 타닥 타닥---

어둠의 저쪽에서 발자국소리다.

흩으러진(흐트러진?) 발자국!

휘청 휘청, 휘청거리다간 멈추고 또 걷기 시작해서 연약하게 계속

되다간 다시금 멈춘다.

급병이 발생한 사낸가? 취한일까? 그렇지않으면--- 혹?

-----피!

개처럼 코가 발달했는지 이 사내는 발자국을 향하여 뛰고 있었다.

그림자가 움직인다.

꼭 그렇게 볼 수는 없다.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뛰어가는 사내다.

나무가 몇그루 있는 거리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

여자---

젊은 여인이다!

그 여인의 오른 편 어깨는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큰일 났군!

사내는 여인을 부축한다.

정신 차리시오

이--- 이것을---

하며 여인은 허리춤으로 손을 넣으려고 한다.

내가---

사내가 대신 손을 넣어보니 하나의 봉지가 나왔다.

이것을 어떻게 할까?

이 사내는 여인의 상처가 이미 출혈다량(出血多量)으로 도저히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으- 으- 으-

여자는 무엇인가 말할듯 했다.

하지만 이 사내는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말 하오. 다시 한번

-----

그러나 대답이 없다.

주검.

여인은 숨이 끊어진 것이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통의 주름살이나 죽음의 공포조차도 없었다.

미모(美貌).

비록 핏기가 가신 얼굴이라 하나 어둠속에서 보아서 그런지 몸이 오싹할

정도의 미모였다.

어둠이 두 사람을 싸고 있었다.

삶과 죽음!

명암(明暗) 두개의 남녀의 자태가 거멓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때.

어느 사이엔가, 그 사내의 주위를 흑장의 괴한 여덟이 둘러 싸고

있었다.

여덟명의 괴한이 이룩한 울타리에는 빈틈이 하나 없다.

보았다!

씹어 삼키는 듯한 소리로 흑장의 괴한 한사람이 말했다.

이리 내라

이번에는 등 뒤로부터 흐린 소리가 나왔다.

무엇을?

사내는 동요 하나 없다.

계집의 허리춤에서 꺼낸 것 말이다

그것 때문에 이러나?

내 놔라!

거절한다!

뭣?

어느 새 뽑혀진 여덟개의 칼.

이 사내를 둘러싼 여덟이 말없이 뽑은 것이다.

목숨이 날은다!

흐흐흥!

사내는 웃고 그리고---

오늘은 묘하게도 죽느냐, 사느냐 문답이 많은 날이군

에잇!

배후의 한 사람이 칼을 내려쳤다.

미친!

벌떡 일어선 사내는 어느틈에 허리춤에서 짤막한 칼을 꺼내서 그 사내의

배를 찌르고 옆으로 七척을 뛰고 있었다.

옆으로 뛰면서 짜르는 검법(劍法)!

횡비류검법(橫飛流劍法)이다.

원진(圓陣)에 뻥 뚫어진 구멍을 뒤에 두고 그대로 뛰어가는 사내.

빠르다.

마치 번개처럼.

그는 그림자처럼 소리도 없이 상대방의 허를 찌르고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그것이 눈깜짝 할 사이의 운신(運身)이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사내, 이름은 법수(法水)다.

그저 법수라고 불러 두자.

북악에 있는 조그마한 암자.

법수는 한숨을 내쉬고 앉아 있다.

그리고 여인의 허리춤에서 꺼낸 것을 보았다.

음---

법수의 입에서 흐른 신음.

지금의 법수의 손에는 금비녀가 들려있다.

그렇다.

여인이 법수에게 넘겨준 것은 찬란히 빛나는 금비녀였다.

머리가 제비꼬리처럼 갈라진 금비녀!

법수의 머리에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정화옹주(貞花翁主)!

(정화옹주의 비녀다!)

법수는 속으로 외쳤다.

정화옹주의 금비녀는 소문이 세상에 자자했다.

청(淸)의 궁중에서 선사로 받은 비녀다. 그 머리가 제비꼬리처럼

생겼다는 소문도 아울러 퍼졌다.

그 정화옹주가 궁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 얼마전의 일이었다.

실종(失踪)!

하늘로 솟았는가!

땅으로 꺼졌는가!

스스로 행방을 감추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피납(被拉)되었는가.

세상은 떠들석했다.

비록 공주는 아니라 하나 왕손의 실종은 말썽이 안될 수가 없었다.

법수는 죽어간 여자와 옹주사이에 어떤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다.

(음, 옹주가 어디 계신지를 알리려 했나부다)

(어떤 음모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일각의 유예가 있을 수 없다.

옹주를 찾자, 옹주를---

(그래서 음모를 부수자)

(아까의 흑장 괴한들은 무엇일까?)

법수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홀연히 암자를 떠났다.

풍운이 일어날 것만 같다.

어떤 풍운일까?

피비린내를 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달콤한 사랑! 옹주가 지니고 있는 애련(哀戀)을 볼

것인가!

검풍(劍風)이냐!

연풍(戀風)이냐!

하여간 풍운은 일어날게다.

법수의 걸음은 어디론지 향했다.

 

入山修道

 

등불이 반짝이는 초가가 보였다.

호젓한 집.

운월은 여인을 부축하고 길을 걸었다.

웬일이냐!

지팡이로 앞을 더듬지 않고도 성큼 성큼 잘 걸어가지 않는가.

괴상한 맹인이다.

괴인 운월.

그의 정체는 무엇이냐!

이윽고---

방안에 들어 앉을 수가 있었다.

기름쟁반에 담겨진 심지 끝에서 붉으레한 불꽃이 하늘 하늘 춤추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현상이 하나 있다.

힌자위만 있던 눈에 꺼먼, 초롱 초롱 빛나는 꺼먼 눈동자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운월은 소경이 아닌가?

맹인이 아니란 말인가?

옹주!

비로소 운월의 입에서 감격에 넘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수(廷壽)님!

놀란 눈동자와 함께 건성에 뜬듯 들리는 소리.

옹주!

아! 대체 이들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어떠한 비밀, 어떠한 참극이 있는가!

가짜 소경 운월.

그러나 언제나 눈을 감는 운월.

눈을 감고도 칼에 날랜 적 서넛을 무서운 무예로 무찌르는 운월.

그에게서 옹주라고 불리운 여인은 그를 정수라고 부른다.

노숙하려던 맹인의 뜻하지 않은 사건에 뛰어 들어 난지에 빠진 여인을

구했다는 그런 사실 밖에는 정말로 없던 이 밤이다.

운월도 정화 옹주도 뜻하지 않은 사실이 이곳에서 벌어진 것이다.

얘기를 먼 과거로 돌려 보자.

그러니까 다섯해 반전의 얘기가 된다.

옹주의 나이 열일곱.

활짝 필대로 핀 옹주의 아리따움은 어느 사람이든지 한번 보기만 하면

황홀함에 을 잃을 지경이었다.

정수는 옹주를 본 이후로 오매불망 돋아나는 반달같은 옹주를 잊을 수가

없었다.

과거를 보아 승지가 된 정수는 궁중에서 옹주를 대할 기회가 있었다.

옹주도 사내답게 생긴 정수를 한번 보자 그만 열일곱해 동안 고이

간직해 온 그의 향긋한 사랑을 보냈다.

반년!

서로 안타까운 반년이 지났다.

남의 이목이 두려운 궁중이며 지체에 차이가 있는지라 두 사람은

터질듯한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한채 애틋한 나날을 보냈다.

매일 같이 같았다.

서로 호젓이 만날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사랑은 나날이 짙어가기만 했다.

그 무렵.

커다란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정수는 어느날 입궐치 않는 하루를 소요하기 위하여 북악(北岳)밑

활터를 구경간 일이 있었다.

그곳에는 역시 비번인 무관들이 서넛 활을 가지고 나와 과녁을 겨누고

연거푸 시위를 잡아 당기고 있었다.

문관인 정수는 그저 망연히 구경하고 있었다.

서로 겨루어 가면서 활만 쏘던 무관들은 정수를 보자 저희들 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킬킬거리고 웃어댔다.

정수는 비웃음! 그들의 웃음 속에서 지독한 비웃음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자기를 비꼬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비꼬는 풍은 도가 점점 높아져 갔다.

개들이 짖어대는 꼴은 정말 보기가 역겨웁더구만

상감마마 앞에서 남 모략 할땐 있는 주둥이 없는 주둥이, 다 까대고서

참새떼처럼 짖어 대는 주제에 싸움만 한번 나보지. 걸음아 나살려라하고

염체 체통 다 버리고 달아나기 바쁘지

분명히 자기의 옷을 보고 비웃어대는 것이다.

궁정에서나 어디서나 문관은 무관을 비웃어대는 버릇이 있던 터였다.

싸움터에 나가서 너희들은 초개같이 목숨을 버려라. 호강은 우리가

한다.

이러한 관념들이 문관의 머리에 틀어 백여 있었고 사실상 여러가지

면에서 그러한 사건이 나타나고 있던 때다.

무관들의 가슴속에는 은근히 반항의 싹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모였던 울분이 지금 조금 터진 것이었다.

그렇지. 주둥이만 깐 참새떼들!

정수는 더 서 있을 수가 없어서 발길을 돌렸다.

몇발자국 걸어 갔을까?

그때 갑자기 등이 시큰하면서 고통이 온몸에 퍼졌다.

찌르르한 아픔!

의식이 몽롱해지는 것이었다.

정수는 그 몽롱한 가운데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등어리의 고통으로 인하여 운신조차 할 수

없었다.

뼈가 으스러진 것만 같았다.

어느새.

해는 무척 기울고 인적이 드문 북악 밑에는 그만이 홀로 쓰러져 있었다.

옆에는 활촉이 뽑힌 화살 하나가 있었다.

(음---)

정수의 가슴에는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분하고 원통함으로 인하여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무술만 믿고 건방지게 구는 놈들!)

정수의 가슴에는 갑자기 무예를 익히고 싶은 충동이 일어 났다.

그래서 무기를 믿고 날뛰는 놈들의 코를 깍아주고 싶어졌다.

문무겸전(文武兼全)한 자기를 생각해 볼 때 그의 머리속에는 황홀한

공상이 뭉게 뭉게 피어 올랐다.

한번 결심한 정수는 잠시도 유예치 않았다.

몸이 회복되고 겨우 행동이 자유로워졌을 때 그는 입궐하여 퇴궐할 때가

되어도 퇴궐치 않았다.

숨어 있었다.

낮에 옹주와 밀회를 약속했던 것이다.

사뢰올 말씀이 있사옵니다. 자정에 뵈웠으면

시종들의 귀를 피하여 잠간 속삭였다.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고개를

끄떡인 옹주는 그날밤 밀회하기로 지정한 장소로 나왔다.

정수는 비로소 떨리는 소리로 오랫동안 간직해오던 사랑을 고백했다.

옹주는 지체도 잊고 그녀를 대담하게 해주는 야음을 타서 정수의 품에

몸을 던졌다.

정수는 중책을 사임하고 무예를 익히려 입산할려는 결심을 토로했다.

옹주는 만류하지 않았다.

재회를 약속하면서 둘은 헤어져야만 했다.

정수가 품은 앙심은 그렇게도 굳세던 것이다.

정수는 곧 금강산에 들어 갔다.

거기서 검사(劍師)로 모신분이 맹인 초광(超光)선생이었다.

평안감사의 사원(私怨)에 의하여 두 눈알을 파인 초광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평양 감영에 있을 때에, 감사의 수청 기생 초월(草月)이가 그와

정을 통했던 것이다.

사랑의 바람이라는 것은 세찬 것이다.

이성을 여지없이 마비시키는 것이다.

초광은 초월의 정을 처음에는 받아 들이지 않았으나 아리땁고 우아한

그가 매일처럼 육박해 옴에 견디지 못하여서 정을 맺고 말았다.

눈을 잃은 초광은 금강산에 틀어 백혀서(박혀서?)

독심검법(讀心劍法)의 길을 닦았다.

독심이란 글자 그대로 마음을 읽는 다는 것이다.

적과 칼을 마주 대할 때에 우선 제 마음을 구석 구석까지 읽는다는

것이다.

그 다음엔 자기에게 엄습해 오는 모든 적을 베인다는 것이다.

우선 바람으로 안다.

얼마나 굵고 가는 것인지가 구별이 간다.

한해 두해.

이미 초광은 자기 지척에 있는 모든 물체는 구별이 갔고, 자기를

향하여 날아드는 파리의 몸마저 두동강이 낼 수 있도록 숙달된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그 암흑에 티끌만한 이상이 생겨도 곧 감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수, 아니 운월은 그때부터 팔자에 없는 소경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후부터 네해.

운월은 단 한각도 눈을 뜨지 않았다.

눈을 꼭 감은 운월은 처음 한 두달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반년이 가고 한해가 지나니 눈을 뜰 수가 없을 것 같았고

마음까지가 완전한 소경이 되어있었다.

네해 동안 정말 눈을 뜨지 않았다.

이미 앙심 품은 그인지라 초광을 초월할 정도로 독심검법에 숙달했다.

그는 체감(體感)으로 만물이 구별이 갔고 그가 한번 지팡이를 휘두를

때에는 그 주위에 운무(雲霧)가 끼고 번개가 그 속에서 번쩍 했다.

그가 선생앞을 떠나서, 삼천리를 떠다니기 시작한 것은 여섯달

전이었다.

폭력을 증오하는 그의 마음엔 광기(狂氣)가 끼고 있었다.

용서가 없었고, 인정이 없었다.

자기 등에 억울한 화살을 맞던 생각을 할 때마다 폭력자의 피를

보아야만 후련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거의 사건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그의 지팡이에

악한들이 쓰러져 갔다.

그의 독심(讀心)에 착오는 없었다.

운월이 옹주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여 서울에 나타났을 때에는

예친구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눈을 떳을 때도 동자는 시울 속에 감추고 흰자위만을 내놓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얼굴 모습이 정말 완연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옥같이 부드럽고 하얗던 살결이 거무틱틱, 울퉁불퉁 했고 몸가짐도

우아(優雅)를 떠나서 거칠어졌다.

그가 서울에 이르렀을 때 이미 옹주는 실종된 다음이었다.

그 소문을 귀에 한 그는 옹주의 실종에 일말의 의심을 품고, 옹주를

찾을 결심을 굳게 했다.

막연한 일이었다.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옹주를 찾아 낸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와

마찬가지었(였?)다.

우선 옹주를 찾기전에 그녀가 왜 실종되었는가를 알아내야 한다.

흥인문 밖에서 그가 법수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劒風戀鍾

 

맹인의 육감이란 무서운 것이다. 운월은, 옹주의 사랑이 자기에게서

떠나지 않았는가 하는 의아까지 품어 보았으나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소문을 모으며 운월은 장안을 돌아 다녔다.

옹주에 대한 이야기꺼리가 구석 구석에서 벌어졌지만, 하나도 운월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말은 없었다.

옹주는 어디로 갔을 것인가?

무엇 때문에?

그때 운월의 머리에 떠오른 육감이 있었다.

혹시나?

궁궐 깊은 곳에 틀어 백여(혀?) 있는 옹주를 납치해 가기란 하늘에 별

따기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옹주 스스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왜 옹주는 스스로 궁궐을 떠나야만 했는가.

기실 운월의 어림에 틀림은 없었다.

얘기를 돌리자.

후궁들이 머물고 있는 호젓한 곳.

밤이 이르렀다.

옹주는 밤내 잠도 못 이루고 그 어머님 되시는 숙빈(淑嬪) 홍(洪)씨의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한 두어달 전부터 시름 시름 앓다가 자리에 누우신 후로는 좀체 차도가

없는 터였다.

전의(典醫)의 백약도 아무 효험이 없이 숙빈 홍씨의 숨소리는 나날이

작아만 갔따.

이미 임종을 맞게 된 것이었다.

홍씨는 그날 따라 측근을 물리고 정화옹주만을 옆에 앉혔다.

그리고 그야말로 놀라운 사실을 그녀에게 얘기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제 가기 숨은 곧 끊어지리라는 얘기와 아울러 세상에서도 끔찍한

소리를 옹주는 들어야만 하였다.

너는 상감마마의 피를 받지 않았느니라. 이 이 죄받을 몸이---

그리고 옹주의 안색이 지나친 놀라움으로 창백해질 때 숙빈의 숨은

완전히 꺼져 버린 다음이었다.

장례식이 있은 뒤.

옹주는 드디어 궁궐을 떠날 결심을 하였다.

자기는 왜 답답한 궁중에서 옹주라는 탈을 쓰고 답답하게 살아야만 한단

말인가.

떠나자. 궁 밖으로.

비록 빌어먹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자기는 궁밖으로 떠나야 한다고

옹주는 스스로 다짐 두었다.

옹주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값진 패물을 이용하여 사람을 매수하기에

성공했다.

그 매수된 자가 번드는 틈을 타서 옹주는 궁 밖으로 자유로이 나다닐 수

있을 수가 있다.

궁밖으로 나가서는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로?

옹주에게 갈 곳이라곤 없다.

그러나 단 한군데 머리에 집히는데가 있었다.

생소한 곳이기는 하나 어머님의 고향이 있는 것이다.

자기가 어릴 때 늘 어머님에게 얘기를 듣지 않았는가.

갑주 고을---

그렇다. 그리로 가자. 그래서 연줄을 찾아보면 반드시 가까운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

그러나 이내 옹주는 머리를 설레 설레 흔들었다.

자기가 그 곳에 있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나라에서 가만 있지는

않으리라. 찾으러 오거나 찾아내면 죄를 물을 것이다.

그러한 오뇌가 옹주를 감싸고 있는 반면에 하나의 즐거움이란 정수를

마음속에 그리는 것이었다.

꼭 한번 밀회했던 생각이 달콤하게 그녀의 가슴속에 되살아 올랐다.

잠시 자기 머리를 기댔던 그의 가슴의 체취가 강렬하게 그녀를 엄습할

때마다 옹주는 기억속에서 아슬히 사라져 가려고 하는 정수의 모습을

안타까이 더듬었다.

옹주는 낯선 곳에 가서 무슨 짓을 하던 어떠한 시련을 겪던우선은

나가려고 하였다.

어머님의 고향인 갑주에나 한번 가보고---

어느 날.

달도 없는 칠흑이었다.

흑의(黑衣)로 몸을 걸친 옹주는, 가까운 시녀 하나만을 데리고 삼엄한

경비속에 싸인 궁을 빠져 나왔다.

순라꾼의 발소리조차 들리지않는 고요한 밤---

만뢰는 죽은듯이 잠자고 있었다.

궁궐 후문을 빠져 시녀와 둘이 발소리를 죽여가며 얼마쯤 걸어 왔을까.

갑자기

주위의 소란!

검은 그림자들이 서넛 움직인다.

아니, 서넛이 아니라 여러개다.

숱한 인원들---

옹주와 시녀가 미처 입조차 열기전에 어느새 그녀들의 몸은 자유를 잃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정신을 찾은 것은 어느 컴컴한 토방속에서였다.

어둠이 꽤 깃든 토방.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계집은 나가라. 그리고 옹주는---

이윽고 사내는 방을 비우고 밖에서 빗장을 채웠다.

그때 시녀는 옹주의 몸에 다가올 위기를 알았다.

곧 둘은 옷을 바꾸어 입고 패물까지도 시녀가 모조리 달았다.

금비녀--- 소문이 자자하던 금비녀도 시녀의 손으로 넘어 왔다.

한참 후.

다시 빗장이 열리고 시녀는 밖으로 내쫓기었다.

옹주만이 남은 토방에는 빗장이 걸려지고 시녀는 눈을 가리운채 어두운

골목을 이리 저리 한참 끌려서 어느 곳엔가 버려졌다.

홀로 된 시녀--- 아니 정화옹주는 걸음을 재촉하여 갑주를 향하였다.

어머님의 고향을 한번만 다녀서 어디로든 가리라.

한편 옹주가 시녀가 되어서 빠져 나간뒤에 가옹주가 된 시녀는 어찌

되었는가.

그보다도 옹주 일행을 납치하게 된 경위부터 더듬어 보자.

값진 패물로서 옹주가 번 서는 군사를 매수 하였을 때 그곳에는 커다란

암이 하나 있었다.

놈은 옹주의 탈출 계획을 불한당에게 내통했고 그 댓가로서 막대한

보수를 받았던 것이었다.

흥인문에 본거를 둔 독수리 일당은 이 놀라운 정보에 그들의 재물을

아끼지 않았다.

옹주만 자기네 수중에 들어 온다면---

그렇다.

그 이상의 재물을 얻을 수도 있고 또한 어떤 음모를 꾸밀 길도 열리는

것이다.

독수리 일당은 미리 내통이 있던 장소에서 대기하다가 옹주와 시녀를

납치했던 것이다.

옹주를 한번도 대해 보지 못한 독수리 패는 다음날 동이 훤히

터서야(도?) 시녀를 옹주인 줄만 알았다.

우선, 그들의 계획으로는 옹주를 딴곳으로 옮겨 놓으려는 것이었다.

옹주의 실종이 알려지면 곧 서울 장안엔 삼엄한 경계망이 퍼진다.

그렇게 되면 자기네의 죄가 들어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다음날 밤으로 시골 구석에 숨겨둘 작정을 하고 흥인문 밖으로

끌어 내려 하였다.

다시 밤이 이르렀다.

궁궐을 빠져나와서 첫번째 맞이하는 밤.

옹주는--- 아니 시녀는 놈들의 일당에게 끌려서 길을 떠났다.

시녀의 머릿속에는 도망갈 생각이 무럭 무럭 일어났다.

어떻게 이놈들의 수중을 빠져 나갈 것인가.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리에 떠오는 것은 뒤를 본다는 핑계였다.

아무리 세상에 없는 악당이라 할지라도 여인이--- 그것도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 한 나라의 가장 귀한 왕족인 분이 뒤를 본다는데까지 옆에 바싹

붙어서 있을 놈은 없을상 싶었다.

그러는 동안에 연락할 곳이 생기든지 아니면 도망 갈 수 있으라.

그러나 시녀의 이 생각은 잘못이었다.

여러놈은 그 곳에서 머물러 있었지만 한놈이 지키러 따라온 것이었다.

여럿 있는데서 좀 떨어진 으슥한 곳에 이르자 놈은 일을 빨리 보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시녀는 옹주의 위엄을 가장해서 사람눈이 미치지 않는 호젓한

곳에 이르자 시녀를 지키는 놈의 욕정이 불끈 솟았다.

그는 앞뒤를 헤아릴 길없이 이 귀한(?) 왕녀에게 덤벼들었다.

시녀는 가슴이 철렁 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이 곤욕!

그러나 시녀의 머리에는 번개같이 계략 하나가 떠 올랐다.

왜 이래? 무엄한지고!

거짓 꾸짖었으나 다음 순간 시녀의 입이 악한의 귀 가까이 옮겨졌다.

이 몸 반항은 안한다. 궁궐 담속에서 이토록 자란 이 몸 무척 사내

품이 그리웠느니

시녀는 스스로 안겨 갔다.

놈은 이 너무나 황감함에 만사를 잃고

옹주마마!

하고 감격에 넘치는 소리를 질렀다.

이어서---

어둠속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바로 뒤.

으으윽---

목줄기로 기어드는 듯한 사내의 신음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시녀의

몸위에 덮치려던 놈의 몸이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시녀는 사내의 상징(象徵)을 두 손으로 꽉 움켜 쥐고 힘껏 나꿔 채었다.

사내가 쓰러지자 재빨리 몸을 일으킨 시녀는 어둠을 가르고 뛰기

시작했다. 쓰러진 놈은 의식이 몽롱한 속에서 움직일 수 없는 몸이나마

꿈틀거려 거의 본능적으로 칼을 뽑아서 한 두어 발자국 뛴 시녀의 등뒤로

칼을 던졌다.

음---

시녀의 비명!

그러나 그녀는 결사적으로 뛰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깊은 상처를 받은 시녀는 숨이 끊어질때까지 뛰다가 쓰러졌다.

그때 그 자리에 이르른 것이 법수 였다.

옹주의 뒤를 찾는 운월과 법수!

하나는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그리고 또 하나는 나라의 옹주룰 위하여

탐험의 길을 떠났다.

이들이 어떻게 만날 것인가.

운월은 서울에서 맹인떼거리에 끼이게 되었다.

맹인 불한당 거지, 그들 사이에는 언통이 있는 법이다.

운월은 불한당 패의 소행을 줏어 들었다.

운월은 불한당에 대한 증오가 치솟았다.

그러나 그들을 찾아낼 수 없는 설움때문에 복수를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법수는 옹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대로 해 보았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우연히도 같은 점에 착안할 수가 있었다.

나라의 옹주에 대한 의협에서 행동을 개시한 법수도 옹주의 혹 스스로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우선 그렇게 가정하고서 그길로 염탐을 해볼 심산이었다.

스스로 궁궐을 떠났다면 어릴 때부터 궁중에서만 자라 온 그녀가 간

곳이 어데일까.

궁중에 들어 가기전까지 세속에 있었던 모후(母后)의 고향이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올랐다.

모후의 친족에 의탁해서 살지도 모른다.

법수는 이런 경로로 숙빈의 고향 갑주를 알아내었고, 갑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운월은 시녀를 강제로 욕 보이려다가 겨우 정신을 돌이켜서 살아난 놈의

입에서 나온 말로 그것이 옹주가 아닌듯 하단 얘기를 들었다.

도망 가겠다는 일념에서 그런 잔꾀를 쓰도록 자라오지 않는

옹주였으리라.

옹주가 시녀 대신 납치 되던 날 밤에 도망쳤다면 어디로 갔을 것인가.

운월 역시 법수와 꼭 같은 추리--- 그리고 그것은 사실인--- 추리를

했다.

운월은 갑주길을 재촉하면서 사건 하나 하나 오고 가는 말 하나 하나에

정신을 바싹 모았다.

그동안 몇개의 사건을 치루었다.

운월의 재주, 독심검법은 사람의 피를 숱하게 보았다.

닥치는대로 해치웠다.

얘기는 돌아간다.

갑주에 이른 공주는 홍씨 일문을 찾았다.

모후의 친척중에서 꼭 한번 모후 덕에 시골 군수 한자리를 얻어 한 삼촌

되는 분을 만난 일이 있으나 그 외엔 궁중 출입이 금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도 만난 일이 없었다.

양주에 들어선 옹주는 자기의 정체를 그대로 숨긴채 홍씨 일문을

찾았다.

찾아서 여생을 의탁하겠다는 마음은 없었으나 누구든지 만나 보아야만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도 가까운 친척을 만나지 못했다.

옹주가 비밀히 지녔던 패물로써 갑주에서 며칠 묵는 동안 그녀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퍼져갔다.

옹주가 묵고 있는 집 주인이 그녀의 평상 거동과 식음법을 보고서

아무래도 상사람(常人)이 아닌 것을 눈치 챘다.

그녀의 목같이 고운 살결, 단아한 몸매, 무척 고상한 품이 구한 집

자손이라 해도 이만 저만 귀한 집 자손이 아닌 것 같았다.

뒤에서 수근 수근 말이 돌아 갔고, 선녀같은 여인이 갑주고을에 묵고

있다는 얘기는 인근 동네에 파다하니 퍼졌다.

옛날에 포도대장이라는 나라의 중직을 맡고 있다가 여자와의 치정관계로

인하여 상감마마의 노여움을 서서 벽지로 유배되었다가 풀린 후 고향

칠산에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고 있는 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본래 성질이 호랑이 같아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포도대장까지

되었으나 여색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이었다.

포도대장 시절에 무예에 능숙했던 부하 다섯을 데리고 집에 두었었다.

박노인이 옹주에 대한 소식을 모를 리가 없다.

귀한 집 딸?

그의 뇌리에 스치는게 있었다.

그가 조정에 있을 당시 왕의 총애를 받아 숙빈이 된 홍씨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힘이 컷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흥! 혹 그녀의 몸에서 태어난 딸일지 모른다)

포도대장은 당시 자기와 막역한 벗이었던 병조참판이 홍씨와 불의

관계를 맺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자기는 병조참판을 협박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치부를 하지

않았던가.

음분한 피가 그 어미에게 있었으니 딸인들 없으랴.

박노인은 수하의 장한중 네명을 갑주로 보내어 옹주를 납치해 오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운월을 만나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다.

등불이 반짝이는 초가에서 오랫만에 진실로 오랫만에 눈을 뜬 운월, 아니

옛날의 정수와 정화옹주는 마주 앉아 있었다.

한참동안 말이 없이 감격에 차있던 정수의 몸에는 그 옛날에 불었던

사랑의 바람, 그러나 오랫동안 어느 곳에 머무른체 풀려나지 않던

연풍(戀風)을 쐬일 수 있었다.

거칠대로 거칠어지고 굳을대로 굳어진 정수의 몸에 사랑의 바람이

서서히 스며 들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읍니다

이미 굳어져 버린 그의 버릇 때문인지 보지 않던 빛에 눈이 부셔서인지

정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정수님 보입고, 보입고 싶었음니다

열일곱의 꽃같은 가슴에 사랑의 씨를 뿌려 놓고 홀연히 떠나버린 이

사내를 쳐다 보는 옹주의 가슴에는 새로운 설움이 맺혔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오이까?

정수는 그제서야, 어둠속에서 옹주의 목소리를 들을 때에 가슴속에

벅차게 밀려오던 감격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았다.

말씀 드리자면 기옵니다

그 얘기에 이어 옹주의 입에서도 그 말 못할 비밀---

커다란 비밀이 줄이어 나왔다.

음---

모든 것을 알고 난 정수는 놀랬다.

그리고 신음이 흘렀다.

이제야 우리가 속 편히 있을 날이 온 모양입니다

정수의 마음은 웬일인지 오히려 흐믓 하였다.

그 밤이 새었다.

감격에 찬 그리고 모든 인생이 일변하는 하룻밤이 지난 다음이었다.

이미 둘은 딴 사람이 아니었다.

예를 갖추지 않았다 해도 이미 지아비와 지어미는 찬란히 솟아 오르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초가집을 나섰다.

정수는 여전히 맹인이었고, 지팡이를 더듬었다.

그때다.

갑자기 그들 앞에 불쑥 나타난 사나이가 있었다. 법수였다.

옹주를 찾아서 이곳까지 온 법수였다. 옹주와 같이 걷고 있는 맹인!

그렇다.

흉상(凶相)!

언젠가 흥인문 밖에서 만났던 그 소경!

(음, 그때다 예사놈이 아니었다. 그 비범한 무예. 그 기괴한 태도!

놈이 옹주에 대한 음모를 기도한 바로 장본인일지 모른다!)

법수의 가슴에는 뭉클 증오가 치밀었다.

흉상!

법수는 외쳤다.

흥인문 밖에서 외치던 바로 그 외침을---

그때는 놀림쪼였지만 이번에는 무서운 증오가 담겨 있는 소리였다.

음! 문밖의 놈! 개같은 놈!

운월은 대뜸 알았다.

그 소리.

아직도 귀에 남아있는 소리가 있었다. 살기가 어려오는 지팡이.

어느 새 법수는 짧막한(짤막한?)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옹주를 모시러 왔다

법수의 소리

이어서

허허허헛

하늘로 하늘로 퍼지는 운월의 웃음. 서로 말하고 웃었으나 바람 한점

샐틈없는 무서운 경계였다.

서로의 칼끝이 파고 들어갈 여지가 없는 장벽같은 방어.

흉상! 비명횡사수다!

죽는 건 너다!

이어서 살기가 어려있던 법수의 칼이 번개 같이 움직이면서 눈을 감고

있는 운월을 엄습했다.

정화는 길옆에 끓어 앉아 합장하고 있었다.

(왜 눈을 감으세요. 뜨시지 않고!)

열심히 기원했으나 그 말은 입밖에 나오지 않았다.

법수의 칼이 번개 같이 움직였을때, 옹주는 눈을 감았다.

이미 운월의 몸은 두 동강이가 나 있으리라.

그러나 그때까지도 짚은 채로 있던 지팡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니,

딱!

법수의 칼이 튄다. 놀라운 방어다.

옹주는 입을 벌린채 다물줄 몰랐다.

눈을 감고도 천하에 다시 없는 무서운 칼을 막아낸 정수!

그가 눈만 뜬다면---

이번에 정수의 지팡이가 무지개를 그으며 법수의 목덜미를 파고

들었으나, 이미 법수는 저쯤 뛰어 난 다음이었다.

뽀얀 안개 속에서 무지개만이 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가끔씩 맞부딪치는 소리.

그때 운월의 가슴에 옹주에 대한 근심이 불끈 솟았다.

이 처참한 싸움을 보아야만 하는 옹주!

그녀는 지금 얼마나 애처로이 이 피비린내 이는듯한 대결을 보고있는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지팡이 끝은 법수를 노리고 있었으나 마음은 옹주에게 있었다.

보아야 견딜 것만 같은 이 안타까움.

갑자기 눈을 번쩍 뜬 운월---

앗!

운월이 눈을 뜨는 순간 법수는 지나친 놀라움에서 짤막한 비명을 남기고

몸을 피했다.

소경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함과 거의 동시에 법수는 횡비류검법의 묘(妙)를 다하여

운월을 공격했다.

음---

운월의 신음.

그의 허리에서는 검붉은 피가 흐른다.

눈을 뜬 운월.

그에겐 이미 독심검법의 묘에는 허가 생겼던 것이다.

광명(光明)이 파고 들은 허(虛)!

그러나 운월의 허리를 가르고 옆으로 나르는 법수의 목에도 어느듯

운우러의 손을 떠나서 허공을 나른 지팡이의 첨단이 깊숙이 박히고

있었다.

짧막한(짤막한?) 법수의 신음이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옆에서는 옹주의 울음만이, 애처로운 울음만이 한참

흐르다가 뚝 그쳤다.

울음 그친 옹주의 목에는 법수의 목에서 뽑은 운월의 지팡이 끝이 박혀

있었다.

어느 새 중천에 뜬 해가 뜨겁게 내려 비치기 시작했다.

한 여름 태양의 옆에 바람은 다 사라져 가고 만것이다.

칼 바람 사랑 바람이---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