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李朝) 五百年 野談
차 례
第 一 話 - 寶娘과 靑湖 - 血痕奇譚
第 二 話 - 樂浪과 好童 - 悲戀哀史
第 三 話 - 楊書房의 致富 - 抱腹絶倒
第 四 話 - 風流監司 - 節佳妓話
第 五 話 - 哀戀話 - 靑春悲戀
第 六 話 - 異花 雪竹梅 - 復讐奇譚
第 七 話 - 將軍과 義盜 - 名將逸話
第 八 話 - 煩惱僧 - 佛力奇譚
第 九 話 - 悲愴의 賦 - 百濟哀話
第 十 話 - 金議官 叔侄 - 韓末逸話
第十一話 - 李星信의 最後 - 海戰悲話
第十二話 - 阿非知의 九層塔 - 望鄕哀話
第十三話 - 可憐杜十娘 - 名妓哀話
第十四話 - 公主와 神尺 - 怪夢奇譚
第十五話 - 餘愁 - 落照悲話
第十六話 - 斬首된 별아기 - 愛情悲譚
第十七話 - 千里遠情 - 義俠美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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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십 화>
韓末逸話(한말일화)
金議官 叔侄 (김의관 숙질)
1
하필 동대문 밖 동적전(東籍田)에서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친경(親耕)이
설행(設行)되는 날과 일본의 소위 원훈(元勳)이라는 늙은 이리같은
통감(統監)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서울에 도착하는 날과 겹질러서
마주쳤다. 하필이면 우연히 그렇게 된 것 같지마는 아무리 국운(國運)은
이미 기울었다 하여도 엄연한 일국의 지존(至尊)인데 국본(國本)인 농업을
장려하려고 군왕이 친히 쟁기를 잡고 농사를 짓는 국가적 성의(盛儀)를
거행하는 날자를 어제 오늘에 불시로 정하였을 리 없고 또 한편
이등박문의 내조(來朝)로 말할지면 호시탐탐, 이웃 나라를 집어 삼키려는
저희 나라의 국책을 띄우고 움직이는 국가의 대표이거늘, 이 역시 그
오고가는 것을 하루 이틀에 정하였을 리 없으니, 반드시 미리 양국 간에
연락이 있었을 터이라. 그런데 무엇때문에 꼭 이날을 택하여 황제의
친경과 이천만 국민의 뼈에 맺힌 원한을 품고 적시(敵視)하는
일사(일본사신)을 한날에 맞아 들이도록 일을 꾸몄는가 말이다. 여기에는
필연코 곡절이 있어, 일부러 꾸민 노릇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동적전은 장소가 비좁아서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으니, 각학교의 각반에서 반장, 부반장, 둘씩만 내보내라는 지시요,
이등이가 들어오는 정거장에는 동적전에 보내는 몇십명 학생 외의
전교생이 다 나가서 출영을 하라는 것이었다. 지금같은 시절이 아니라,
서울안의 학교가 그리 많지 않다 하더라도, 소학교, 중학교, 전문학교까지
전교생이 동원 된다면 지금의 서울역--- 그때의 남대문역에서부터
이등이가 들어갈 왜성대(倭城臺)의 사처까지 좌우도열(左右堵列)로 사람의
성을 쌓게 될 것이니 굉장한 위의(威儀)를 보이자는 것이다. 임금의
거동이나 국가적 의례(儀禮)는 아주 초라하게 해서 집어 치우고, 나라를
뺏으려고 도끼 눈을 뜨고 손톱 날을 날카롭게 하여 가지고 오는
외국사신을 환영하는데에는 세계의 이목을 속이려는 얕은 계책도
있겠지마는, 첫째는 민심이 응하나 아니하나 어디 보자는 것이요, 둘째는
민중을 위압하는 틀을 세우자는 정책이었던 것은 다시 말할 것 없다.
이때의 한국정부라는 것은 허울만 남아 있었지, 샅샅이 파고 들어서
실권을 쥐고 있던 일본놈에게 좌지 우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너 왜 오늘 집에만 들어 앉었구, 동적전에두, 남대문 역에두 안나갔니?
금방 정거장에서 들어온 김의관(金議官)은, 저녁밥 되기를 기다리면서,
땅거미가 짙어가는 사랑마당을 빙빙 돌고 있던 조카 진하더러 못마땅한
눈치로 말을 걸었다.
동적전에두 못나갔는데, 무슨 정성에 그깐놈을 맞으러 나가겠에요?
작은 아버지께서 우리집 대표로 나가셨다 오셨으면 고만이죠. 김씨집
살일 났습니까
진하는 잘못하면 코웃음을 칠뻔하였다.
인제야 소학교 사학년인 열네살짜리로서는 엄청나게 숙성한 소리요,
어른으로서 들을 수 없는 괘씸한 말버릇이었다.
김의관은 하도 기가 막혀서 당돌히 눈을 말뚱말뚱히 뜨고 마주섰는 어린
조카 자식을 눈길로 나무래며 한참 바라보다가
(대가리의 피도 안마른 놈이 무엇을 안다고--- 썩썩 나가거라)라고
호통을 치려다가, 마음을 쑥 눌러서
그런거 아냐. 네깐 놈이 뭘 안다구 중뿔나게 그러는거냐? 남하는대로
따라가야지
이렇게 한마디만, 거칠어 나오려던 숨소리를 죽이며, 타 일러 놓고 획!
돌쳐 마루로 올라갔다.
진하도 분통이 터지는 것을 참고 대문 밖으로 휙 나와서 어두어 가는
먼산만 바라보고 섰다.
진하는 지금 어린 마음에 난생 처음으로 커다란 일을 하나 해내었거니
하는 으쓱한 마음에 잠겨 호기를 봄내고 싶었던 것이다. 정거장에 아니
나갔다는 것은 조그만 일이지마는, 이등박문이를 무시하였다는 일이, 즉
일본에 대항하였다는 것이 무시무시하게 커다란 일이라고 믿는 것이다.
(흥! 작은 아버지두 한때는 지사(志士)였지마는--- )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고, 민충정공(閔忠正公)이
순절(殉節)하였을 때는 하룻밤을 통곡으로 새우던 그 작은 아버지는 간데
없고, 그것두 말씀이라고 하시는거야? 하며 진하는 어린 가슴을 바르르
떨며 분개하는 것이었다.
하기는, 지금도 김의관은 고성낙일(孤城落日)에 마지막판인
정우회(政友會)를 사수하고 있는 것은 자기 뿐이라고 큰 소리를 치고
있다. 정우회는 적어도 전날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정신과
투지(鬪志)를, 대한협회보다도 정통적으로 계승한 것으로서,
일진회(一進會)화 싸우는 굳은 결의와 지조(志操)는 결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나 내세우는 김의관이었다. 이런 것이 진하에게도
은근히 자랑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러던 작은 아버지가, 통감 이등박문이를 마중 나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마는, 그것은 회를 대표해서 마지 못해 그랬다 치더라도 진하가
정거장에 안 나갔다고 해서 그렇게 얼굴빛까지 달라지며 무엇이 잘났다고
쥐뿔같게, 남 하는대로 따라가지 않았느냐고 나무란 것은 기막히고 분한
일이다.
항일투쟁은 어른에게 맡기고 너는 공부나 잘해라. 어린 것이 지금부터
그러한데 머리를 쓰고 속을 썩이게 되면, 공부도 제대로 하기 어렵고
일생을 두고 고생일 것이라고, 여기지름(여겨짐?)으로 그렇게 눌러버리는
것이라면, 또 다시 생각할 점도 있기는 한 일이다. 그러나 삼촌이
그렇게까지 조카자식의 장래를 염려하고 아껴 준다고 할 수 있을까?
김의관은 자식도 없지마는, 아들이 없어 하는 사람도 아니요, 조카자식을
맡았다해도 그저 와 있나 할뿐이지, 원체 가사에도 그렇지만 아랑곳을
하는 삼촌도 아니었다.
(에이, 시끄러운 세상! 이런 꼴 안보구, 시골에 틀어박혀 있었더라면
도리어 좋았는걸!)
숙성한 진하는, 어른처럼 시국을 비분강개하고 삼촌에게도 반항하는
분심만이 치밀어 올랐다.
2
이제야 말이지, 월전에 송병준이가 나를 좀 만나자기에 가 보았더니,
그, 그러지말구, 이용구(李容九)를 한번 찾아가 보라더구먼. 온(원?)
말이나 되는 말이어야지
저녁때면 사랑에 모여드는 축들을 앞에 놓고, 김의관은 의기 양양해서
자랑삼아 하는 말이었다.
추파송정(秋波送情)도 있을법한 일이지만, 그래 조건은 뭐랍디까?
그 누군가가 말을 받는다.
조건이 무어거나 도대체 말 같아야 말이 되지
하며 주인은 코웃음을 친다.
하지만, 영감의 개결(介潔)한 성품으론 그럴지 몰라도, 외곬으로만
생각할게 아닐듯한 것 같은데--- . 아무래도 점점 대세는 기울어져 가는
이 판국에, 누울 자리를 보구 다리를 뻗으랬다구, 미구에 닥쳐올 사태를
고려해 봐야지 않겠소. 한사람의 손으로 막아낼 대세(大勢)가 아니고
보니, 고집만 부릴게 아니라, 앞날의 보신지책이라는 것도---
옆에 앉았는 김의관과 연상약한 중늙은이가 천천히 말을 하다가 뒤를
흐려버리고 만다. 좌중은 침통한 낯빛으로 모두 덤덤히 앉았다. 그
침통한 빛이라는 것은 시국을 비분해서라느니 보다는
(무어 뻔한 일인데--- )
하고 더 앙버티어 보았댔자 별 수 없지 않느냐는 절망적이요
타산적이면서도, 체면상 그런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서 그런 낯빛들을
지어보이는 것이었다.
그야 내 자리는 벌써 마련되어 있으니, 염려말고, 이용구만
만나보라는거지마는---
김의관의 안색에는 그리 침울한 빛도 없고, 걱정이 된다는 검은
그림자도 없이, 가볍게 도리어 자랑 삼아 하는 말이었다. 그 눈치로
보아서는, 아까, 말이 안되니까 거론(擧論)할 것도 없다 고 쾌쾌히
큰소리를 치던 것과는 다르다. 송병준이가 일진회에 포섭하겠다는 것을
거절한다는 말이 아니라, 오라는대로 가도 좋지마는 어떻게 혼자만
가겠느냐? 몇 안되는 식구지마는, 부하와 동료들을 적당한 자리에 앉히게
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라면 생각해 볼 여지도 없다(있다?)는 말 같다.
하여간 무슨말이 나오나 만나나 보시구려
또 누구의 입에선지 이렇게 권고하는 소리가 창밖으로 새어 나왔다.
사랑이래야 일자로 두간방 하나와, 장지를 격해서 달린 됫박같은 이편
끝방에는, 진하가 상노겸으로 대령하고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들의 숙설거리거나 떠들어대는 소리가, 늘 그게 그 소리 같아서 별로
신통한 것도 없고 들어야 잘 터득이 되는 것도 아니니, 귀담아 듣자는
것도 아니나, 송병준이니 이용구니 하는 이름이 귀에 스치니 자연 그리로
정신이 쏠리는 것이었다.
자강회를 당시의 내무대신 송병준이가 해산시킬 때 펄펄뛰던 작은
아버지다.
그것은 고사하고 송병준이나, 이용구라면 삼척동자라도 모르는 애가
없다. 그 송병준이가 만나자는데 쭐레쭐레 가는 삼촌이 알 수가 없는
양반이요, 게다가 만나보고 온 이야기를 자랑삼아 하다니? 아니, 그것
때문에 저렇게모여앉아서 숙덕공론을 하는 것인 모양이지마는, 이용구도
만나보라고 권고하는데에 작은 아버지가 무어라고 대답을 하나 하고 귀를
바짝 기울이고 있었으나 작은 아버지는 거기에는 아무 대꾸가 없다. 의례
허세로라도 펄쩍 뛸줄 알았더니, 대답이 없는 것을 보면, 솔깃해 하는
모양이다.
진하는 입을 비쭉하였다.
송과 만나게 된 것은, 누가 중간에 나선건 아니요?
아니!
하고 보면 송병준이와 어느새에 친해졌는지는 모르지만, 송에게 진정해서
그런 운동을 하고 다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들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이등이가 동경에 다녀온 뒤로는 좀 눈치가 다르대
또 누구의 목소린지 한마디 화두를 돌렸다.
왜?
좌중은 눈들이 커다래졌다.
이젠, 저는 차차 물러서려는 준비를 하는 눈치같더래
이러한 중대한 정보를 알아내서 제공한다는데에 큰 자랑을 느끼는 말
소리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성공자 거(成功者 去)니까
시국에 무슨 중대한 사태가 또 벌어지지나 않을까 해서 긴장하였던
좌중은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에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날이 긴박해 가는 시국을 들여다 보면 기막힌 일이지마는, 저희로서는,
더구나 이등이로서는 성공자인 것이다. 하여간 이등박문이같은 거물이 이
강산에서 자취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뒤에 누가 오나 마찬가지라 하여도
다행한 일이었다.
후임에는 누가 올텐구?
그야, 증니(曾 示+爾)가 올라 앉겠지
부통감 증니황조(副統監 曾니荒助) 말이다.
과연 이 정보는 적중(的中)해서, 그해 육월에 이등박문이는 갈리고
증니가 통감이 되었다. 증니야 이등이보다 인물이 수층 떨어지지마는 다
파먹고 빈 껍질만 남은 --- 네 기둥만 남은 집 한채 쓰러뜨리기에 증니
아니라 증니의 손자인들 못하겠는가.
그것은 고사하고, 정작 송병준이가, 이용구를 시켜서
한일합방(韓日合邦)을 부르짖게 하고, 저도 이등이한테 긴하게 보이려고
앞질러 서두르다 도리어 이등이의 눈밖에 나서 내무대신을 내놓고
동경으로 가버렸으니, 김의관이 송병준이를 만난 것은 물론 그전의
일이겠지마는, 끈떨어진 망석중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요지막(요즈음)은 이용구를 만나고 어찌고(어쩌고)하는 문제도
식어버리고, 누구하나 그 문제를 다시 꺼내는 사람도 없이 잠잠하여졌다.
그러는 동안에 일제는 한국의 경제권(經濟權), 사법권(司法權)까지를
마지막으로 뱄어갔지마는, 한편으로는 다행히도 이 해(隆熙三年,
西紀1909年) 시월 이십 육일에 동청철도(東淸鐵道) 할빈(哈爾賓:합이빈)
역두에서 이등박문이가 우리의 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에게 쓰러지고
말았다. 여기에서 다행이란 말은, 우리의 적년(積年)의 원수를 갚었으니
말이요, 그보다도 또 하나의 큰 도둑 구명을 찾아서 장차 그 소위
대륙정책(大陸政策)이라는 만주침략(滿洲侵略)을 그 첫걸음에서 막아서
동양평화(東洋平和)를 위하여 그 공헌(貢獻)을 우리의 민족의 손으로
성취하였으니 말이다. 쉽게 해서 동양을 뒤흔들고 세계의 평화를
깨뜨리려는 강도의 우두머리를 잡은 셈이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미
때를 놓쳐서 뺏길대로 다 뺏겼지마는, 문전에서 기웃거리는 그 강도를
뒤쫓아 간 우리의 안의사의 손으로 넘어뜨려서, 우선은 4억만 중국 백성이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잘 수 있게 되었으니 다른 어느 동양사람보다 먼저
중국사람들이 고마워 해야 할 것이다.
하여간에 이등이가 죽자, 학교에서 이 소식을 들은 지하는, 입가에
웃음이 피어오르는 것을 감추기에 애를 쓰면서도 속으로는
(그거 봐라!)
하고 곧 입에서 만세라도 터져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비틀어진 정우회의
문패를 문전에 붙이고, 그 조고만 사랑방 속에 들어앉았던 김의관은, 이
소식에,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차츰 차츰 얼굴빛이 반 죽게가 되었다.
이등이가 죽었다고 무슨 뼈저릴 일이야 없겠지마는, 일진회에 들어가려다
만것이 뉘우쳐지면서, 통감부의 벼락같은 탄압이 자기에게도 휩쓸려 올까
보아서 지레 겁을 집어 먹었던 것이었다.
3
그후 반년 남짓 넘어 이듬해(庚戌年 - 1910年) 초여름 어느날이었다.
그동안에 진하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년생이 되었을 때다.
학교에서 파해 나와서, 삼촌 집에를 마악 들어 서려니까, 새파랗게 얼굴이
죽은 작은 어머니가 문간으로 마주 나오며, 오들오들 떠는 목소리로
얘, 작은 아버지 못봤니? 지금 금방나가셨는데---
하고 말도 잘 어무르지 못한다.(더듬거린다?)
아뇨. 왜 그러세요?
진하는 심상치 않은 기색에 눈이 둥그레졌다. 소식적부터 아이가
없다는 것이 핑계로 싸움도 잦았고, 첩을 몇씩이나 갈아 들어가며,
근년에는 영 본집은 모른척 하다가, 남은 땅데기나마 다 없애고야, 인제는
할 수 없어 작은 어머니한테로 기어들어서 고개를 못들고 사는 처지라, 또
늙은 이 내외의 싸움이 벌어졌고나고, 진하는 예사로히 생각하면서도 하두
서두는 품에 놀랬다. 그러나 작은 어머니는 울음 섞인 목메인 소리로
얘, 헌병대(憲兵隊)에서 모셔 갔단다!
하는 한마디에 진하는 눈이 번쩍 띈듯이, 손에 들었던 검정책보를 작은
어머니한테 내던지듯이 주고 곤두박질을 해서 문밖으로 나섰다. 진하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다만 한가지, 작은 아버지가 헌병대에 잡혀 갔다니
친일파(親日派)는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얘, 너 헌병대 아니? 바루, 요리 나가셨단다. 남산 밑이란다
삼촌댁은 허겁지겁 따라나오면서 전찻길로 빠지는 길을 가리켜 주었다.
진하는 듣는둥 마는둥 뒤도 안돌아다보고 달음질을 쳤다.
아무리 삼촌이라도 육친의 애정이나 정리로 문제가 아니다. 이 시절에
헌병대라면 목숨을 내걸고 끌려가는 생지옥이다. 한번 끌려가면 다시
살아 나올 가망은 없는데다. 거기를 오십이 넘은 중늙은이가 끌려갔다면
생주검이 되어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이러한테로(이런 곳으로) 잡혀가니
작은 아버지는 진짜 항일과, 배일파이었던, 역시 애국지사이었고나! 하는
생각에, 진하는 감격 하였다. 그런 것은 모르고 이때껏 오해를 하고
미워하였던 것이 뉘우치고 죄송스러웠다.
헐레벌떡 전찻길로 빠져 나가서 큰 길을 건너 사람이 복작대는 틈을
비집고 거슬러 올라가며 남산쪽으로 가는 길을, 좌우로 눈을 휘휘 돌려
찾으며 뜀박질을 하였다. 회색 학생복을 입은 조고만 소년은, 얼굴이
샛빨개지고 모자 차양밑에서는 땀방울이 비 오듯 하였다. 숨이 턱에 닿고
다리의 힘이 차차 풀리었다.
그러다가 어쩐둥 왜성대(남산) 쪽으로 휘는 길 모퉁에서 작은 아버지의
뒷모양을 눈길 끝으로붙들었다. 진하는 마음이 덜컥하고 급작시리
가라앉으며 기운이 확 풀려서 뛰어 가던 발길을 느꾸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이만한 거리면, 원광으로 놓치지 않고 뒤를 달키에 알맞았다.
무엇보다도 작은 아버지가 수갑을 차지 않은 것이 다행하고, 데리고 가는
사람도 군모(軍帽)에 검정테를 두루고 육중한 환도를 차고 붉은 장화를
신은 정복한 헌병이 아니라, 평복을 입은 것이 좋았다.
호젓한 관청거리인지, 사택 거리인지 일본사람의 거류지를 휘돌아서
두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진데는 보초가 섰는 대일본 제국 육군
헌병사령부이었다. 두 그림자를 놓친 소년은 그 보초가 무서워서
문전까지 가지도 못하고, 멀거니 바라만 보다가 그대로 돌쳐서고 말았다.
그때의 진하의 꼴은, 지나가는 인적 하나 없는 헤넓은거리를 혼자 어깨를
쳐뜨리고 비쓸비쓸거리는 초상집 개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집에서는 김의관의 같혀 있는데를 안 것만 다행해서 이튿날부터
하루 세끼 밥을 해 가기에 없는 하인을 불시로 얻어들이고 돈 구처를
하러다니고 하기에 작은 어머니는 밤잠도 못자고 얼굴이 반쪽만해졌다.
그러나 대관절 무엇때문에 붙들려 들어 갔는지, 언제나 끝이 날 일인지
알아야 말이지, 간신간신히 조석을 이어나가는 집안에서 초조하기란 짝이
없고 기가 막혔다.
그러던 김의관이 일주일쯤되더니 풀려 나왔다. 집안에서는
반가우면서도 도리어 깜짝 놀랬다. 진하도 어리둥절하였다. 진하로서는
반갑다기 보다도 잔뜩 삼촌을 존경하는 새로운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쉽사리 풀려 나온 것이 이상하게도 큰 기대에 어그러진듯이 서운한
것이었다.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하고 물으면 김의관은 그저 가벼이 웃으면서
응, 아무일 없었어. 저희가 설마 날 어쩔라구
하며 혼연히 대꾸하는 것이었다. 저희가 설마 나를 어쩔라구 하는 말은,
자기의 지체, 위신, 배경 등을 자랑하는 말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은 곧이 들리지 않았다. 그저 의아하면서도 헌병대 라는데가
어떤덴데! 하고 가만히 눈치들만 보았다.
그러는 동안에 차츰차츰 생활이 늘어가는 것이 눈에 띄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어디서 돈이 새어나오나 이상하게들 생각하였다.
소위 정우회라는 간판을 문전에 붙여 놓고도, 겨울이면 화롯불 하나없이
입을 혹혹 불고 앉아서 그럴듯한 고담준론(高談峻論)만 서로 경쟁적으로
터뜨리고 있었고, 여름이면 부채 한자루 없이 땀을 질질 흘려가며 바둑
장기로 배를 골려가며 세월을 보내던 그들인데 김의관이 그 무서운
헌병대를 다녀 나오더니, 살림이 늘어간다는 말에 누구나 눈을 다시 한번
떴다. 진하는 힘이 빠진다기 보다도 풀이 없어졌다.
그런지 한달이 못되어서 김의관은 수표교다리 집을 내놓고
와룡동(臥龍洞)으로 새집을 사서 옮아 앉았다. 와룡동집으로 떠나왔을
때는 세간속에 정우회라고 큼직히 쓴 현판이 끼워왔기는 왔으나 광속에서
딩굴(뒹굴?) 뿐이요, 다시는 대문간에 내어 붙이지는 않았다. 아무도
거들 떠 보지도 않았고 그러한 문패가 있었던가를 생각하여 보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영리한 진하만은,
(흠, 이건, 정우회 문패를 팔아가지고 이 집 사왔나?)
하고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눈치만 보아 왔다.
그동안에 김의관은 별로 출입하는 일도 없이 한가로운 그날 그날을
보내고, 예전같이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집도 전보다는 여간 커진
것이 아니고, 사랑채가 웬만한 살림살이를 할만큼 방이 셋이나 되건마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이 쓸쓸하였다. 그러자 김의관과 마지막으로
헤어진 집 개성집이 스르르 달려 들더니, 사랑에서 몇밤 지낸 뒤에 이내
세간까지 옮겨 들이고 딴 살림을 채리기 시작하게 되었다.
하기방학이 되어 저의 집 양주(楊州)에 나려갔다가 다니러 잠간 올라온
진하는, 점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보다 살림이 늘어서 안채에도 늙은
식모를 하나를 두었기 때문에 삼촌, 식모는 그래도 의지가 되겠거니
싶었지마는, 작은 아버지가 헌병대에 붙들려 갈 때 얼굴이 파랗게 죽어서
혀끝이 얼어 붙어가는듯 하던 그 기막히던 형편을 생각하면, 집안
덩그런히 컸을 뿐이지, 우중충한 그 안채에 혼자 내버려 둔 작은 어머니가
가엾기(가엽기?) 짝이 없고, 작은 아버지가 또 다시 미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 돈이 어디서 나왔나? 남의 셋집을 내놓고, 이 와룡동 집을
사 오고, 개성 집을 다시 불러 들이고 한 그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양주집에 가서 어머니한테 이야기를 해도
그 누가 아니, 둘째 집이 잘 됐다니 좋지 않으냐
하시며 웃으실 뿐이요, 아버지는 그대로 눈만 껌벅껌벅 하시고 앉으셨을
뿐이었다.
4
개학 밑이 되어 진하가 다시 서울로 올라온 바루(바로)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늦은 아침에 동무집에 놀러 가려고 동구안(돈화문 앞) 큰길
거리로 나서 보니, 어쩐지 다른 때보다 길이 쓸쓸하면서도 어수선한
공기였다. 어린애의 육감으로 이상하다 생각하였다. 조금 나서 걷자니
벽에 붙은 무슨 커다란 종이 조각 앞에 허연 사람 그림자가 웅게
중게(옹기종기?) 몰켜서서 무언지 열심히 읽고 있다.
마치 언제 난리가 날지 모른다는 듯한 어수선한 세상인 것은 벌써부터
짐작하던 진하인지라, 깜짝 놀라서 쫓아가 보았다.
대문짝 반만한 커다란 양지장(洋紙張=서양종이)이 나란히 붙어 있는
앞에 사람이 삼지위겹을 해 섰으니 글자는 커닿건마는 자세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중에 더 큼직한 제목인 조서(詔書)니 칙유(勅諭)이니
하는 두가지 광고문 같은 것이 나란히 벽에 붙어 있었다. 하나는 일본
천황의 한일 합방의 선포요 하나는 가엾게도 여기에 따라가는 한국 융희
황제의 눈물어린 포고문이었다.
어른들이 웅성거리는 틈을 비집고 나간 진하는 어려운 한자문자로
씌었으나 글방공부를 한만큼 그것쯤을 끝까지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진하는 일변 읽으면서 일변 울분에 터져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한숨 쭉 읽고 난 진하는 비집고 들어갈때와 같이 급급히 빠져나오는
길로 미아리 쪽을 향하여 달려가듯이 발길을 옮겨 놓았다. 삼촌집에 들릴
새도 없었다. 집에서 눈만 끔벅거리며 세상이 어떻게 되나? 하고 반가운
소식도 아닌 무슨 소식을 조마조마 기다리며 앉았는 늙은 아버지에게부터
알려드리고 싶었다. 아버지가 듣는댔자 백발 노인이 목청을 놓고 통곡을
할 것 밖에 없는 것은 뻔한 노릇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린가슴에서
시원할 것만 같았다. 아버지를 맞붙들고 한번 시원히 울고나 싶었다.
그바로 직후이었다. 세상이 한참 수선거리는 판인데, 작은 아버지 집은
소리없이 양주 큰 형님집 곁으로 떠나 내려왔다. 새집을 사 들었건마는
어쩐지 세상이 뒤숭숭하니 농촌으로 돌아 온다는 것이었다. 남들은
만주니 해삼위니 상해방면으로 망명을 하고 법석인데 일대의 정치가 가
아니라도 당대의 지사 로 자처하던 김의관이 여전히 소리없이
귀농생활(歸農生活)을 한다는 것도 쓸쓸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 세상이래야 고작 양주 일경이나 읍내 바닥에 지나지
않지마는 - 김씨집 중시조(重始祖)가 났다고 떠들던 김의관이 합병이 되자
다 없앴던 땅데기를 다시 마련해 놓고 처첩을 데리고 내려온 것을 보고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물론 겉으로야 우리골에 큰손님을 새로
맞아들이는 것 같다고서 서로 칭하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김의관이 금시발복한 것은 아니겠고 어디서 돈이
나와서 벼락부자가 되었는가고 장 거리나 주막에 모여 앉아서 김의관
이야기가 나오면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길을 아는 사람만 알 노릇이었다. 어쩌면 김의관이
헌병대에 붙들려 갔다가 일주일이 못 되어서 무사히 풀려 나와서는
아무일 없었어 하고 싱글벙글 하다가는 차차 돈을 풀어 쓰기 시작하던 그
앞뒤 경위를 잘 아는 진하가 더 잘 짐작할지 모르겠다.
김의관과 주축이 잦던 사람들은, 사촌이 땅을 산 것 보다도 더 배가
아픈듯이
대관절 얼마씩이나 먹었을구?
하고 말을 꺼낼라치면
고작해야 몇천원씩으루 입을 씻겼겠지, 일본놈의 그 바튼 솜씨에!
하고 이사람들도 많이 따져보려 들기에는 인색하였다.
그래도 설마. 몇만원씩야 차례가 갔겠지. 사람대접을 하기루
이사람아, 사람 대접두 사람나름이요, 저희(日人)들 눈에는 다 등급이
있거던, 하여간 헌병대 구치감 구경을 한 덕택에 집간이라도 지니게
되고, 땅 마지기를 작만해 놓고 배를 문지르고 살게 됐다면 상팔자 아니고
뭔가! 허허허
대개 이런 따위수작이었다. 김의관은 그 상팔자에 한몫드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그 놈 합방(合邦) 덕 본놈! 하고
으르렁대는 데는 딱 질색이었다. 고향에서 세교(世交)가 있던
집안에서들도 그러한 비난을 하고 덤비니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실상은 합방 덕을 본 김의관이기도 하였다. 애초에 일진회와 반대파인
정우회를 끌고 나갔기 때문에 합방을 단행하는 직전에, 요샛말로 하면
예비금속(豫備禁束)같이 불평분자를 붙들어 들여다 놓고 일편 위협을 하고
일편 회유(懷柔)를 하는 판에 견디다 못해서가 아니라, 첫마디에 네네하고
손을 들었는지 손도장을 찍었는지, 그런 소식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마는,
하여간 그바람에 집이 나오고 개성집이 다시 현신을 하게되고 땅데기라도
장만하게 된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김의관이 자기의 고향에서도 이태(2년?)를 부지를 못하였다.
시골에 들어앉아서 할일은 없고 그래도 활동력과 명예욕은 남아 있어서
하기 쉬운 노릇으로 교육사업에나 전력을 하여볼까 하였었다. 또 사실
그때 시절에는 삼면(三面) 일교(一校)制로 세면에 보통학교를 하나 밖에
세우지 못하도록 왜놈의 총독부(總督府)가 교육과 지식까지를 극도로
제한하던 때이고 본즉 민간의 힘을 동원하여 보통학교 - 즉 지금의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사립(私立)으로 세워보려고 무한 애를 썼어야
촌민들이 들어먹지를 않았다.
다른 이유도 많지마는, 첫째 이유가 김의관더러 솔선해서 기부금을 많이
내라는 것이었다.
당신은 거저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덕택으로 누거만(屢巨萬)의 졸부가
된거 아니요. 아니 당신 단독으론들 학교하나쯤 못 세우겠소. 그래야 그
죄 땜도 될 것이 아니겠소
하고 노골적으로 덤비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김의관에게 그런 돈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만일 학교가 된다면 김의관의 여생을 학교에서
돌보아 주어야 할 형편이었을지 모른다. 일본 천황의 사금(賜金)이랍시고
입 틀어막기 위하여 준 돈이라야 고작 오천원인데 이것으로 빚갚고 서울서
집 장만하고 개성집 데려오는데 빚 갚아 주고 어쩌고 하여 흐지부지
쓰다가 시알다곱쯤 남은 것으로 땅 마지기나사두었던 것인데, 딱 합방이
되고 나니 서울에 처져 있기도 창피스러워서 집마자 팔아가지고
고향이랍시고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니 처첩과 거기에 딸린 식구들을 데리고 내려와서 예전에 쓰던
솜씨로 씀씀이는 과하고, 촌민이나 군청이며 일본 경찰들에게 잘 보이자니
교제비가 들고, 또 더구나 학교 설립운동 한다고 운동비를 들여가며, 한
이태동안 한푼 버는 것은 없이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먹듯이 쓰고 나니,
더 어떻게 지탱을 해 나갈 수 없는 곤경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생각다 못하여, 자 인제는 서울로 다시 올라가서
중추원참의(中樞院參議)나 운동해 보자하고 집과 남은 돈마지기를 팔아
들고, 큰마누라는 형님집에 떨어뜨려 두고 개성집과 서울로 다시
기어들었던 것이었다.
이때부터는 염체불고하고 매일 같이 송병준이 집 사랑에 댁대령을 하여
살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송병준인들 한일 합방을 하기 위하여 한때
이용하고 부려먹기에 알맞은 인물이지, 꾀있는 토끼가 죽은 다음에야
사냥개가 소용이 무엇이랴 총독부인들 이제와서야 송병준이의 말쯤 무어
그리 대수롭다고 일일히 들어줄 리 만무하려니와 애당초에 송가부터
김의관따위의 청을 들어서 어수룩하게 총독부에 운동을 하여 줄 까닭이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김의관은
내가 중추원 참의만 되는 날이면---
하고 중추원 참의만 되는 날이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올 것 같고
돈벼락이라도 맞을 것 같이 큰 소리만 땅땅 치면서 근 일년 무사 분주히
돌아다니고 나니, 전셋집 한 채나마 올라가고, 남의 집 현포(?)의 셋방
구석으로 기어드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셋방으로 옮아 들던 날 개성집은
하두 기가 막히고 울화가 터져서
여보, 영감! 날(나)같은 주변성 없는 년이나 그래두 의관영감으루
모시지, 누가 이 세상에 일본말 한마디 할줄 모르는 당신을 중추원
참의를(로) 모셔간답디까? 아직두 정신 덜 차리셨구려. 어서 보따리
싸요. 시골서 마나님 기다리지 않소
하고 퐁퐁 쏘아대었다.
진하는 그동안에 아주 몰라보게 자라서 제법 어른골이 백여갔다.
삼촌집에는 한달에 한번 들릴가 말가? 개성집은 귀여워하는 편이었으나
삼촌밑에 있기가 싫어서 여전히 하숙생활을 하여가면서, 발길이 점점
멀어져 갔다.
학교는 원채 제동이라, 이학년에서 월반(越班)을 하여 사학년이
되어가지고, 이봄에 벌써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졸업을 하면 동경 유학을
갈지,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될지 지금 망서리고 있는 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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