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李朝) 五百年 野談
차 례
第 一 話 - 寶娘과 靑湖 - 血痕奇譚
第 二 話 - 樂浪과 好童 - 悲戀哀史
第 三 話 - 楊書房의 致富 - 抱腹絶倒
第 四 話 - 風流監司 - 節佳妓話
第 五 話 - 哀戀話 - 靑春悲戀
第 六 話 - 異花 雪竹梅 - 復讐奇譚
第 七 話 - 將軍과 義盜 - 名將逸話
第 八 話 - 煩惱僧 - 佛力奇譚
第 九 話 - 悲愴의 賦 - 百濟哀話
第 十 話 - 金議官 叔侄 - 韓末逸話
第十一話 - 李星信의 最後 - 海戰悲話
第十二話 - 阿非知의 九層塔 - 望鄕哀話
第十三話 - 可憐杜十娘 - 名妓哀話
第十四話 - 公主와 神尺 - 怪夢奇譚
第十五話 - 餘愁 - 落照悲話
第十六話 - 斬首된 별아기 - 愛情悲譚
第十七話 - 千里遠情 - 義俠美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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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구 화>
百濟哀話(백제애화)
悲愴의 賦 (비창의 부)
第一章 誅劒
부소산 거창한 군창(軍倉)들이 탄다.
十五만호를 자랑하는 사비성(泗비城) 화려한 도성이 송두리채
타는듯하다.
영원히 꺼지지않는 연옥(煉獄)의 겁화처럼 검은 연기가 기둥이 되어
반공에 피어 오른다.
그것은 七백년 백제의 사직이 무너지는 장송(葬送)의 향연(香煙)인듯도
싶다.
백제의 의자왕(義慈王) 二십년 秋七월 보름.
신라와 당나라의 군병들은 사비성 안으로 몰려들었다.
사비성중은 그대로 수라(修羅)의 지옥으로 변하였다.
적병의 무자비한 칼과 창과 화산에 백성들은 무참하게 죽었다.
사비성 백성들은 갈바를 몰랐다.
여인들의 비단을 찢는듯한 부르짖음이 죽어가는 사나이들의 신음소리와
더불어 참혹한 조화를 이룬다.
피의 냇물!
시체의 산!
인간이 할 수 있는 한의 잔인한 행동은 모조리 벌어졌다.
거기에다 불까지 곁들였다.
불이 타는 열풍(熱風)은 사비성 전체의 공간을 불어 혔다.
더운 기운은 사람의 넋을 빼앗았다.
찌는듯한 노염(老炎)에 병화(兵火)로 인한 뜨거운 불이 곁들였으니
사람들은 몸을 사릴 겨룰도 없이 타 죽었다.
백제 전부가 그대로 불타고 있는듯 했다.
왕은 이미 사흘전인 십이일 웅진(熊津=現 公州)으로 몽진(蒙塵)하셨다.
왕으로부터 지켜 싸우라는 명령을 받은 왕자 태(泰)는 스스로 왕이라
일컬었다.
태와 더불어 사비성에 남아 있던 태자 효(孝)의 아들 문사(文思)는
숙(叔)의 칭왕(稱王)을 마땅치않게 여기고 성을 나가니 성중의 백송과
군병이 많이 문사를 따라 나갔다. 백성과 군병이 태의 명령을 듣지
않으니 태는 드디어 성문을 열고 나당(羅唐) 양국의 군문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누구의 지휘를 받는 것도 아니었으나 백성들이 일어섰다.
맨주먹에 가까운 백성들은 성중으로 몰려드는 적병을 맞아 싸웠다.
지붕뒤에서 기왓장을 던졌다.
흙을 파는 광이(괭이?) 쇠스랑으로 칼과 창에 대결했다.
정규의 훈련을 쌓은 적병들도 백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항전에는 겁을
먹고 한때의 난전을 면치 못했다.
그 백성들에는 백제의 패잔병까지 합세했다.
그러나 인구 백만을 헤아리는 큰 도성 사비의 최후는 가가왔다.
금화(錦花)! 금화
대궐에는 아직 불이 붙지 않았다. 그러나 도성이 타는 연기가 대궐안에
크나큰 적각들의 지붕을 덮고 있었다.
금화는 어디 있소! 금화
텅 빈 후궁을 관복 소맷자락으로 코에 스미는 연기를 헤치면서 이렇게
소리치며 바쁘게 헤매는 사나이가 있었다.
머리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허리에 자주빛 띠를 두른 것으로 보아
일품(一品) 재상의 지위를 가진 것이 분명하다.
금화
몇개의 전각(殿閣)을 찾아 보았으나 허사였다.
그가 후원의 마지막 제일 깊은 곳에 있는 전각의 분합문을 열었을 때
오! 금화!
그는 반가운듯이 이렇게 소리쳤다.
금화, 내 목소리를 못들었소? 왜 대답이 없었소?
아, 임자(任子)대감!
전각안 중앙에 단정히 앉았던 여인 한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나이를 보고 자칫 놀란다.
여인은 성장(盛裝)을 하고 있었다.
세저(細苧) 웃옷에 비단 아래옷.
머리엔 역시 화관을 쓰고 몸에는 한껏 치장한 찬란한 패물들이 눈을
황홀하게 한다.
그렇소. 좌평(佐平) 임자외다
어찌하여 오셨소?
달, 꽃, 아니면 무엇이라 비유해야 할지 모를만치 아름다운 금화의
얼굴이 이렇게 묻는다.
어찌하여라니? 금화는 모르오? 성중에는 벌써 나당 두나라의 군병이
들어 왔소. 이나라는 이제 망한 것이요. 자 어서 신라의 진문으로
갑시다. 이나라가 망한 것은 다름아닌 금화와 나의 공이요. 우리
두사람을 지휘하여 오던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장군이 기다리고
있을것이요
금화의 기품있는 가늘은 눈이 임자를 흘겨 보았다. 그 눈에는
경멸(輕蔑)의 빛이 있었다.
대감! 대감은 백제의 사람이 아니요?
응? 금화! 그것은 무슨 말? 내야 분명 백제사람이지! 금화는
신라사람이고---
대감. 잘 아시었소
금화. 대체 무슨 말이요. 이렇게 있다가 아직 성중에 남아있는
백제의 패잔병이라도 만나면 큰 일이요. 우리 두사람에 대한 백제 백성과
군병들의 원망이 크오. 어서 가오. 자 나와 함께 신라의 진중으로
가게하고. 나는 금화를 사모하오. 금화에게 왕의 총애가 하도 크시어서
감히 이 마음을 금화에게 말하지 못했을 뿐이요. 우리는 이제 터놓고
함께 살수 있지 않소. 나의 이 마음은 금화도 이미 오래전에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요
나는 백제의 백성들을 기다리고 있소
금화의 말은 가을날 서릿발처럼 싸늘 했다.
금화 그것이 무슨 말이요? 내나 금화가 백제에게 한 일이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게 있겠단 말이요?
백제 상감의 마음을 사로잡아---
음!
백제의 충신들을 모조리 죽이시게 하고---
그렇소!
임자는 비명처럼 몸을 떨었다.
상감의 마음을 홀리어혐악한 지덕(知德)을 진압(鎭壓)한다 하고 백제
나라안의 쇠(鐵)라는 쇠는 모조리 걷어들여 큰 못(釘)과 쇠기둥을
만들어서 각처 명산(名山)에 박고 강물에 가라앉혀 병기를 만들 쇠를 없애
놓았소
이제 새삼스러이--- 그 무슨---
아니요, 또 있소. 상감께 큰 역사(役事)를 일으키시게하여
왕흥사(王興寺)와 태자궁(太子宮) 망해정(望海亭) 그 밖에 큰 집들과
지당(池塘)을 꾸미게 하여 백제의 국재를 말리어 버렸소
-----
그리고 독한 술과 이 금화 스스로는 물론이고 그 외의 수 많은
아름다운 계집으로 하여금 상감의 몸과 마음을 아주 폐인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소
그것이 다 김유신장군의 지휘를 받아 이 임자가 그대를 상감께
천거하여 나는 밖으로 그대는 안에서 백제를 망하게 한 것이 아니요?
그러니 우리는 신라에 큰 공을 세운것이요. 자 어서 부질없는 말은 그만
하고 이 자리를 떠나오
그러나 금화는 그 자리를 떠나려 들지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무당(巫)년 노릇을 하여 사(邪)스러운 술법과 이 몸으로
상감을--- 그 어지시고 바른 마음을 가지신 상감을 속이고 백제를 이꼴로
만든 이 계집이 스스로 원수 같소
아니 금화 그러면 지금 와서 후회를 하는 것이요?
금화는 임자를 노려 보았다.
여보 대감! 당신은 피도 없고 눈물이 없소? 저 도성에 들려오는 하늘에
사모치는 죽음의 비명을 당신은 못듣는단 말이요
-----?
나라가 망하는--- 죄없는 백성들이 죽어가는 저 소리를 나는 진정
못듣겠소
임자는 애원의 빛을 얼굴에 띄우고 금화의 앞으로 다가 섰다.
금화, 그러니 십년이요. 내가 그대를 처음 보던 때가 이제 십년이
되었소. 나는 그대를 상감께 천거하여 놓고 얼마나 그대가 주야로
그리웠는지..... 금화, 인제는 내마음도 알아주오. 이몸도 일국의
재상으로 정말 허다한 계집들을 품어 보았으나 그대만을 생각하는
마음이라 다 부질없는 노릇이었소. 내가 내나라를 배반한 것도 그대
때문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요! 자 금화
듣기 싫소!
금화는 꾸짖듯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백제의 대감이라는 당신이나 신라에 가서 싫도록 부귀를 누리시오
금화 그럼 금화는 가지 않겠단 말이요
그렇소. 금화는 이곳에서 백제의 백성을 만나려 하오! 몰려드는
적군에게 욕을 당할까 두려워 대궐 뒷문으로 피하여 달아난 무수한
비빈들과 궁녀들의 틈에 끼이지 않은 것도 이몸을 백제의 원한 품은
백성들에게 내어 주기 위함이었소. 아- 정말 적은 내 재주를 믿고 이러한
소임을 맡고 신라를 떠나오던 십년전 일이 원망스럽소
금화는 그 고운 얼굴의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앉아서 스스로의 지나간 날의 죄의 심판을 받으려는 무당
금화의 얼굴은 성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금화! 그래 진정 안가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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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 마지막 부탁이요. 이 임자와 함께가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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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는 금화의 뜻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임자는 정말 금화의 앞을 떠나기 어려운듯했다.
멀리 대궐밖에서 아우성소리가 들려왔다.
임자는 왈칵 겁을 먹고,
금화! 할 수 없니 내 홀로 가오
하고 전각밖으로 나오려는데-----.
그렇게 쉽게 가지는 못한다!
말의 주인공이 적각의 앞문을 막는다.
?
겁결에 임자가 바라보니 거기에는 갑옷 입은 한 사람의 백제의 장수가
피묻은 큰 칼을 짚고 서 있었다.
신라로가 아니라----- 지옥으로 보내줄까?
젊은 백제 장수의 원한 맺힌 눈이 임자를 노리고 있었다.
너는 누구?
너 간신 임자를 지옥으로 인도할 사자다!
임자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엄하다. 나는 백제의 상좌평(上佐平=首相)이다!
그러나 최후의 발악으로 한번 소리쳐 보는 임자였다.
나라를 팔아먹고 상감마마께 요녀를 천거하고 충신을 모함하여
성충(成忠)대감, 윤충(允忠)대감을 돌아가시게 하고 흥수(興首)대감을
무고히 귀양가게 한 너. 상좌평? 이 칼이 너같은 상좌평의 피를 마시고
싶어한지 이미 오래다
말을 마친 장수는 그 피묻은 칼을 비스듬히 어깨위로 들었다.
그리고 한걸음 두걸음 전각으로 올라왔다.
음! 상감을 매혹한 요녀 금화도 함께 있구나. 아 하늘이 나를 도와
너희들의 십년 쌓은 죄를-- 죄악의 형발을 받게 하는구나
장수는 이미 적각안으로 들어왔다.
임자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화관을 쓴 임자의 이마에서 수슬땀이 흐르고 있다.
임자의 눈은 겁에 질려 뒤집혔다.
금화가 눈을 떴다. 그러나 곧 다시 그 눈을 감았다.
대체 너는 누구냐?
임자가 물었다.
장수는 천천히 임자의 앞으로 다가 가며
오냐 너에게 마지막 선물로 이 얼굴을 자세히 보여주마. 지옥에
가거든 백제의 지체낮은 십삼품 흰띠 띠는 호반인 무독(武督) 지위밖에
안되는 계창(季昌)이가 너를 지옥으로 인도 하더라 일러라!
하고 머리에 썼던 투구를 벗어 젖혔다.
오 너는 계창!
그래 계창이다
살려다오. 날 살려주는 값은 무엇이고 네 소원대로 하마
계창은 더 바싹바싹 다가갔다.
인제 임자의 등뒤가 바로 벽이다.
절대절명!
계창아. 날 살려다오. 뭐든지 다 주마
계창은 좀더 높이 칼을 들었다.
무엇을 주겠느냐?
살려다오. 뭐든지---
내가 꼭 네게서 받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네 목숨
살려--- 악!
비스듬히 내려친 계창의 칼이 깊숙히 임자의 목과 어깨를 곁들여
찍었다.
칼을 잡아 채니 쭉 뻗치는 임자의 피가 계창의 갑옷으로 튀어와 묻는다.
임자의 손이 힘껏 벽을 쥐어뜯고 몸은 거꾸러졌다.
임자를 두번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이킨 계창은 단정히 앉아 눈감고
있는 금화의 앞으로 왔다.
금화
대답없이 얼굴을 드는 금화.
후광(後光)이 비칠듯 아름다운 금화의 얼굴은 한가닥의 거리낌도 없는
맑은 얼굴이었다.
너의 죄의 빚을 갚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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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다!
계창이 지금 임자를 죽인 큰칼을 금화의 앞에 내던졌다.
계집을 내손으로 치기는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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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가 계창을 쳐다 본다.
눈!
금화의 눈은 계창에게 깊은 존경의 빛을 띄우고 있다.
금화가 칼을 집어 들었다.
눈은 계창을 바라보는 그대로였다.
금화는 빚을 갚겠소
비로소 말문을 여는 금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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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계창이 말이 없다.
백제에 몹쓸 짓을 많이한 빚을 지금 금화는 갚으리다
금화가 피묻은 칼날을 넓은 소매자락으로 쭉 어 씻었다.
순간!
금화는 칼끝을 입에 물고 앞으로 고꾸라 졌다.
금화의 목에서 뭉클뭉클 피가 쏟아져 나왔다.
몸을 뒤틀던 금화의 숨이 끊어졌을때 계창은 금화의 목에서 칼을
뽑았다.
내세(來世)에선 바르게들 살아라!
내던지듯 말하고 계창은 전각 밖으로 나갔다.
스무살이 얼마 넘지 않았을 젊은 장수였다.
누님 분하외다
여기는 사비에서 웅진으로 통하는 간도(間道).
지름길 언덕이다. 서남쪽 사비성 하늘에는 아직도 검은 연기가
충천한다.
말하는 사람은 어제의 모습대로 갑옷을 입고 있는 계창이었다.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구나!
사비성쪽 하늘을 바라보는 계창의 눈에는 비분의 눈물이 고여 있었다.
대답하는 사람은 계창의 단 하나뿐인 누이 천절(千節)이다.
천절은 한숨을 쉬었다.
서른안쪽 나이 밖에 안될 천절의 곱다란 아미(蛾眉)에도 비분을
머금었다.
역적과 요녀는 이 손으로 베이고 왔으나--- 보오 저 불더미를--- 누님
그 아름다운 도성이---
화려한 궁전과 허다한 집들 다 불더미 속에 들었나 보오!
계창은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천절도 소맷자락으로 눈을 매만진다.
당나라의 힘을 빌어 겨레의 나라를 치는 신라가 밉구나!
신라도 밉고--- 당도 밉소. 그러나 그 보다도 더 미운 것은 나라를
신라에 팔아버린 이 나라의 간신(奸臣)의 무리들이요. 그리고 어진
신하를 멀리하시고 눈앞의 즐거움과 편안함만 바라시어 간신의 무리를
용납하신 상감마마께도 원망의 마음 누를 길 없소
계창(季昌)! 너는 그 무슨 말이냐? 무엄하다 너는 어느나라 백성이며
어느 상감의 신하이기에 감히 그런 말을---
누이는 내색하여 오랍동생 계창을 꾸짖는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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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미 글을 배웠고 무술(武術)을 닦아 범상한 시정의 무리가
아니거늘 그 무슨 무엄한 말을 입에 올리느냐? 내 상감마마의 은혜를
입었고, 너 또한 말직(末職)일지언정 백제의 호반으로 상감마마의
신하아니란 말이냐?
너무 분하여서--- 누님
지금 너와 내가 저 불타는 사비성을 빠져나와 웅진에 파천(播遷)하신
상감마마를 따라가는 이 길은 무엇때문이냐?
누님!
상감마마를 원망하다니---
아니 누님. 계창이 하도 비분하여 말을 삼가지 못했소
사비성은 이미 적에게 빼았겼다. 그러나 백제는 아직도 북쪽의
여러성과 남쪽의 고을들이 남아있다. 아직도 백성들은 나라를 사랑하고
변방에는 남아있는 충신이 있을 것이다. 웅진으로 파천하신 상감마마를
따라가 섬기어 빼앗긴 사비성을 다시 찾는 날을 보려고 너와 내가 굳게
맹세하고 가는 이 길이 아니냐
삼십에 이르려면 아직도 이, 삼년은 더 있어야 할 천절의 나이에 비하여
애띤 얼굴은 엄숙했다.
누님, 계창의 허물이요. 다시는 않으오리다
예절을 숭상하는 백제의 백성들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달음에도 빨랐다.
준절한 누이의 꾸짖음에 그대로 잘못했음을 승복하는 젊은 백제의
무인이었다.
저 연기를 보아라! 저 연기 속에는 백제의 원한이 피어 오르고 있지
않느냐? 우리는 저 원한을 그냥보고 있을 수는 없다. 누이는 저 원한의
불구덩이에서 살아나온 이 목숨을 상감마마 섬기기에 바치려 한다
천절의 말소리는 부드러워졌다. 그대신 그 맑은 얼굴엔 새로운 결심의
빛이 나타났다.
누님 알았소. 계창 더욱 깨닫겠소
고맙다!
누님
두 사람의 오누이는 새삼스럽게 두 손을 맞잡았다.
듯과 피가 두 손을 통하여 흐르는 듯 했다.
그 피는, 그 뜻은, 백제에 삶을 타고 날때 백제의 할아버지와 백제의
아버지, 어머니에게 물려 받은 백제의 피였고 백제의 뜻이었다.
비분과 적개심을 가진 오누이의 눈들이 서로 말없이 거듭 맹세했다.
상감마마께서슨내가 알고 있거니와 지극히 어지신 분이시다.
선대왕이신 무왕(武王)께 효도가 지극하시어 고구려와 신라에는
물론이려니와 멀리 당나라에까지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라는 말씀을
들으신 분이다. 중년에 곤전마마 승하(昇遐)하시어 적적하신 성념을
틈타서 간사한 무리들이 그만 성총(聖聰)을 가리워 이렇게 되었다.
그러나 십년전만해도 그러니까 누이가 궁중에 있을때만 해도 밝은
다스리심과 충실한 국력으로 신라의 대야성(大耶城)과 무산(茂山),
감물(甘勿) 동잠(桐岑)등 사십여성을 쳐서 차지하여 크게 나라의 위엄을
빛내신 분이다
계창도 잘 아오
내가 성은을 입고 궁중을 떠나 집에서 나와 있은지 어언 십년. 누이는
한시도 상감마마를 잊은적 없었다. 그냥 그립고 그냥 어렵고 그냥
고마워서---. 누이가 대궐쪽 하늘을 바라보고 상감마마를 받들어
사모하옵던 봄 가을철이 지금 꿈만 싶구나
천절은 가냘프게 한숨을 쉬고 스스로가 느끼지 못하는 눈물---.
그것은 왕을 사모하여--- 다만 홀로 사모하여 온 여인의 애정의
결정(結晶)이었다.
왕을, 그 어지시고 총명하고 용감하시던 십년전의 의자왕(義慈王)을---
그리고 지금 나라의 도성을 적군에게 잃고 변방의 옛서울 웅진성에
몽진(蒙塵)하신 지극히 기력이 쇠모 하시어 성격조차 달라지셨다는
의자왕을 못잊는 한 여성으로서의 변할줄 모르는 연모(戀慕)의 표적이기도
하다.
누님! 계창은 누님이 불쌍하시어 못견디겠소. 누님이 홀로
상감마마를 사모하시며 보내신 십년의 세월이 슬프오
계창의 말엔 오누이간의 지극한 정을 머금고 있었다.
오누이간의 정이란 참 맑고 깨끗한 것이다.
아무 바람이 없는 높은 사랑이 오누이간의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지금 계창은 그 높고 맑고 깨끗한 오누이간의 육친의 정으로 누이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상감마마를 사모하는 누이는--- 생각하면 참 분수에 지나치는 하늘
무서운 일이 아니겠니, 그러나 누이가 세상에 나서 아직 상감마마처럼
뛰어나신 남정네를 만나보지 못했다. 누이는 계집사람이어서--- 별수
없는 한 계집사람이어서 상감마마가 그립고나. 평생을 이대로 상감마마가
그리운 채로 살다가 말지언정 상감마마를 받들어 생각하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을--- 누이는!
어느덧 여인의 말소리는 그대로 하소연이었다. 푸념이랄까?
푸념이라면 참 아쉬운 푸념이다.
오라비이기에 터놓고 말하는 하소연이며 푸념이다.
남의 앞이라면 어찌 왕을 사모하고 왕을 못잊는다 감히 말할 수 있으랴?
물환성이(物換星移) 십년을--- 이룰 가망없는 왕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고 혼인의 기회조차 저버리고 그대로 세월을 보낸 여인의 호소였다.
누님. 십년만에 이제 상감마마를 뵈오면 누님을 알아 보실줄 아오?
계창이 누이의 애처로운 가슴을 짐작하여 보려는듯이 물었다.
나는 십년전 궁중에서의 그날밤 일을 눈에 선하게 역력히 기억하고
있다. 상감마마의 부드러우신 말씀의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도 귓가에
그대로 되살아 난다. 보산(寶算)이 오순(五旬)이 넘으셔서--- 그리고
간신과 요녀의 무리들이 총명을 가리워 주야로 행락(行樂)하심에 옥체
많이 손모(소모)되시어 신기 흐리셨다 듣자웠다. 누이를 알아보시든
못알아보시든지 누이는 그것을 가리지 않는다. 그냥 한번 용안을 우러러
뵈었으면 누이에겐 한이 없겠다. 옆에 두어두시면 더욱 고마웁겠다.
그것만으로 누이는 더 바랄것이 없다
천절은 가벼운 그러나 깊이 서린 회포를 못이기는듯 또 한숨을 쉬었다.
누이의 말이 너무 애처로운듯 들리어서 계창도 따라서 슬퍼졌다.
누님 해가 벌써 높소. 이제 가지 않으려오?
들을 덮어골짜기를 메꾸어 달려드는 헤아릴 수 조차 없는 나당 두나라의
군병이 포위하고 있는 사비성을 어젯밤에 탈출하여 중도에서 밤을
드새고---.
지금은 늦은 아침.
오 그래. 뜻밖에 말이 길었구나
오누이는 일어섰다.
다시 돌아다보니 사비성의 검은 연기는 더욱 굵게 피어올라 구름처럼
하늘을 덮고 있다.
그 연기의 기둥과 그 연기의 구름을 바라보니 다시 용솟음 치는 분노와
비감이 두 사람의 가슴 속을 물결치는 것을 느낀다.
계창아!
네?
이몸은 계집사람이어서 내손으로 이 원한을 갚지 못하는 것이 진정
한스럽구나. 너는 사나이--- 백제의 물을 마시고 자란 사나이가 아니냐?
지금 저 원한의 연기를 바라보고 누이의 몫까지 이 원한을 꼭 갚아야 한다
누님! 이를 말씀이요? 누님의 그 말씀 계창은 뼈에 새겨 들으오
저 연기 아래에서 양같이 온화하고 댓쪽처럼 바르고 인심후한 죄없는
백제의 백성들이 무자비한 적병의 칼날아래 무수히 죽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가오! 누님
가자
오누이는 걸음을 옮겼다.
원한의 사비성을 뒤로 두고 상감이 계신 웅진성 쪽 지름길 내리막을
걸어간다.
第二章 聖 代
십년 전!
의자왕 九년 봄.
사비성 화려한 궁전에 봄이 드니 후원(後苑)의 기화이초(寄花異草)는
철을 맞아 다투어 아름답게 꽃 피었다.
의자왕 5년 이후 해마다 백제의 강토는 넓어져 왔다.
달솔(達率) 의직(義直)과 달솔 은상(殷相)이 거느린 백제의 군병은 정말
무적(無敵)의 상승군이었다.
그야말로 치면 뺏고 나가면 무찔러 버리는 막강(莫强)의 군병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백제는 상무의 나라였고 국민개병(國民皆兵)의
나라였으니 위으로(위로) 어질고 밝으신 의자왕이 계셨고, 재상이하
관원은 사(私)에 치우치지 않고 공(公)에 힘을 써서 강기가 엄정하고
상벌이 분명하니 그 나라의 군병이 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졸이 죽기를 영광으로 알게 용감했으니 지나간 5년동안에 신라의 서쪽
요충(要衝) 대야성 이하 40여 성을 뱄고 신라를 위협하여 백제의 위세를
천하에 떨쳤으며 한토(韓土)엔 말할 것 없고 동으로 일본을 비롯하여 남쪽
유구 탐라는 물론이요, 멀리 서해 건너 당나라까지 겉으로는 천자(天子)의
나라이라 허세를 부렸으나 은연히 백제를 두려워 했다.
그 봄에---.
남쪽 바다의 섬나라인 탐라나라에서 방물(方物)을 진헌하는 사신으로
도내(都內)가 사비성에 이르렀다.
도내는 탐라나라의 왕제였다.
도내에 대한 백제 조정의 대우는 극히 융숭했다. 상국(上國)으로
자처하는 백제였기 때문이었다.
음식거처는 물론이려니와 침실에는 궁인을 골라 천침까지 시키는 극진한
대우였다.
도내가 왕을 알현(謁見)하는 날의 의식은 장려(壯麗)를 극했다.
대궐 정전앞에는 계품을 따라 상좌평(上佐平)이하 6부 좌평과
좌장우보(左將右輔)의 문무 백관이 갈라섰다.
사도부(司徒部=禮部)의 악사들이 아뢰는 웅장하고 청아한 궁악(宮樂)이
흐르는 중에 왕은 도내의 정중한 하례를 받으시고 도내에게 술을 내리시어
먼길의 수고를 위로 하시었다.
이렇게 도내를 융숭히 접대함은 백제와 신라와의 국교가 멀어지매
탐라를 신라에 멀게하고 백제와 더욱 화친케 하려는 백제의 외교적인
정책의 일부이기도 했다.
탐라뿐이 아니었다.
백제는 북쪽 고구려와도 맹약을 맺어 서로 위급할때에 원군으로
돕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왕이 밝으시고 조정엔 어진 충신들이 많았으니 백제는 안으로
밖으로나라를 크게 빛냈던 것이었다.
그날밤.
백제에는 또 한번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장군 은상의 거느린 백제의 군병이 동쪽 신라의 석토성 이외의
일곱성(城)을 차지하였다는 승리의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대궐에서 이 소식이 들려나오자 사비성 백성들은 집집이 초롱을 내걸고
명절처럼 즐겁게 축하했다.
사비성중의 어느 거리 어느 골목에도 쏟아져 나온 백성들의 행렬로
가득찼다.
누가 인도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그들은 대궐 앞 넓은 공터로 모이었다.
만세!
상감마마 만세!
백성들이 감격에 벅차서 저절로 목이 터지라고 부르는 환호성은
사비성중에 드높아 대궐에 울렸다.
그때 왕은 편전에서 아름답고 기품이 높으신 왕비마마와 더불어 멀리
들려오는 백성들의 환호성을 들으시고 극히 만족하시었다.
곤전마마. 저 백성들의 흔희작약하는 소리 들으시오?
왕의 말씀에--- 옥배에 술을 따르던 왕비마마께서는 고개를 드시었다.
성은에 화답하는 백성의 뜻이라 듣자왔소
지나친 말씀인가? 짐은 생각하오. 그러나 짐은 아직 조종의 성업을
더럼히지 않은 것이 다행이며 아래로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바를 더불어
즐길 뿐이요. 곤전마마.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지금 저 백성들의
환호성이 그 어느 비할 바 없는 좋은 음률을 듣는 것 보다 짐에게는 더
아름답게 들리는 것이요
신첩도 기쁘외다
왕은 술잔을 드시었다. 단숨에 술을 마시고 나신 왕은 술잔을 상위에
내려놓으시고 그윽히 왕비마마를 바라보셨다.
평소에 만기(萬機)를 몸소 살피시어 겨를 없는 날들을 보내시는
왕이시매 한가롭게 술잔을 드시는 일이 참 드물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내나라 건아들의 빛나는 전과를 들으시고 이날 그대로 넘기실 수
없었다.
육부(肉部=御膳部)에 명하시어 간소한 주안을 들이어라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왕비마마와 다만 두 내외분이 호젓하신 청아한 대작을 하시는
것이었다.
성왕(聖王)의 간소하신 자축(自祝)이었다.
민(民)은 천(天)이라 짐은 항상 백성을 보기 하늘같이 하였소. 하늘을
어기고 왕업이 있을리 없는 것이요. 그러기에 짐은 주야로
동동속속(洞洞屬屬)하여 스스로 편할 날이 없었소. 거기에는 곤전마마의
어지신 내조(內助)가 없으셨던들 어찌 오늘의 기쁨이 있었겠소.
곤전마마, 짐은 마마께 하례하오
왕이 한껏 애정을 머금으신 눈으로 왕비마마를 바라보시니 왕비마마는
자못 수태(羞態)를 지으셨다.
신첩이 무엇을 아오며 무엇을 상감마마께 도움이 되었다 하오리까?
다만 어의(御意)를 받자와 지나친 허물이 없었음은 다 성덕(聖德)의
소치인줄 아뢰나이다
막 40고개를 넘으신 왕은 취흥과 애정을 이기지 못하시어 왕비마마의
옥인양 흰손을 덥석 잡으셨다.
곤전마마! 곤전마마가 있으시어 짐은 살고있는 보람을 느끼오
왕비마마는 살며시 왕의 손에서 스스로의 손을 뽑아 내셨다.
상감마마! 이목을 삼가소서
왕비마마의 말씀소리는 엄숙하시었으나 왕비마마의 아름다우신 눈은
지극히 행복의 빛을 띄우고 왕을 바라보시는 것이었다.
그날 밤이 좀더 깊어.
아마 술시(戌時)가 지났을 무렵이라 할까?
모처럼만에 취흥을 얻으신 왕은 그 즐거운 봄밤을 그냥 보내시기
섭섭하신 생각이 드셨다.
왕비마마를 침전에 들게 하시고 이내 후원에 홀로 납시었다.
봄밤은 부는 바람조차 향그러웠다.
곁들여 달빛이 은은하니 후원은 유수한 선경같이 그윽했다.
지당가엔 어디서 풍기는지 아련한 화향.
?
왕이 걸음을 연못가의 정자아래로 옮겨 오셨을 때. 왕은 문득 고이한
소리를 들으시고 걸음을 멈추시었다.
그것은 은은히 슬프게 흐느껴우는 소리였다. 누가 들을세라 숨죽여
우는 울음소리였다.
왕은 넌지시 정자안을 살펴보셨다.
거기 울음의 주인공이 있었다.
달빛이 그늘져서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왕이 정자위에 오르셨다.
그러나 울음의 주인공은 왕이 정자에 올라 오셨음을 깨닫지 못하고 왕의
앞에 등을 둔채 아직도 흐느끼고 있었다.
가까이 보니 울음의 주인공은 한사람의 여인이었다.
모습으로 보아 젊은 여인이었다.
?
그러나 곧 왕은
에헴
낮은 기침을 하셨다.
앗!
여인이 울음을 그치고 얕은 비명과 함께 소스라쳐 몸을 돌렸다.
누구냐? 너는---
왕은 역시 낮은 목소리로 물으셨다.
용서하소서. 소녀는 하도 일이 급하옵기에 몸을 피하여 무단히 이곳에
들어왔나이다
목소리가 심히 애띠다.
후원에 들어감은 법도에 금하는 바이다.
비록 궁중의 관원일지라도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금원(禁苑)이다.
아마 왕을 후원을 지키는 관원으로 알았던지 여인은 우선 용서를 빌고
있다.
이리 오너라
왕은 달빛이 비치는 곳으로 옮겨서시면서 말씀을 하셨다.
여인은 할 일없이 왕의 분부대로 고개를 숙인채 밝은 곳으로 나왔다.
한번만 용서하소서
얼굴을 들어라
여인은 비로소 얼굴을 들었다.
앗! 상감마마
여인은 그제서야 앞에 섰는 사람이 왕인줄을 깨닫고 바쁘게 몸을
부복하고 전신을 벌벌 떨었다.
아! 상감마마
여인의 애띤 목소리가 그윽한 한탄을 머금고 또 한번 달빛속으로
흘렀다.
두렵고--- 황송하고--- 무엇이라 형언할 수 있는 감격이 섞인
목소리였다.
너는 누구냐?
이몸, 후궁부(後宮部)의 침선녀(針繕女) 천절(千節)로 아뢰나이다
여인의 목소리는 무엇에 힘을 얻었는지? 다소 낭랑한바 있었다.
왕의 인자하신 천성을 아는 탓일까?
천절! 고개를 들어라
천절은 달빛속에 고개를 들었다.
그림처럼 고운 얼굴이었다.
왕이 취하신 중이어서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던 기막히게 예쁜 얼굴이었다.
몇살이냐?
열일곱살로 아뢰나이다
열일곱
네
어느 때 궁중에 들어왔더냐?
열다섯살에 들어 왔나이다
그러면? 3년이 된다. 왕이 여색에 담백하시어 명색 후궁부가 있어서
유마행시의 아름다운 궁인들이 후궁에서 이때나 저때나 왕의 은총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왕은 그것을 거들떠 보시지 않으시니 자연히 후궁의
소식을 아실 까닭이 없다.
여기는 어찌해서 들어 왔느냐?
몸을 사려 피해서 들어 왔나이다
무슨 연고로 피했더냐?
왕이 거듭 물으셨다. 그러나 천절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무슨 연고로 피했더냐?
그제서야 천절은 입을 열었다.
소녀에게 탐라국의 사신이 머무시는 객관에서 사신께 천침을 들라는
외사부(外舍部=外交部)의 영이 있사옵기로 피했더이다
천침이란 침석에 모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천침? 천침의 영을 어찌해서 피했느냐?
이몸 아직 숫계집이여이다
참 당돌한 말이었다.
속계집이어서 어떻다는 말이냐?
왕은 천절의 대답하는 말에 기이한 흥미를 느끼시며 또 물으셨다.
이몸, 계집은 절개를 무겁게 알라 배웠더이다
누구에게 그렇게 배웠느냐
이미 죽은 아비에게 배웠더이다
음!
왕은 깊이 마음으로 탄복 하시었다.
그래서 울고 있었느냐?
왕은 마음에 지금 어전에서 당돌하게 계집은 절개를 소중히 알도록
배웠다는 처녀 천절에게 저윽히 한 사나이로서의 어떠한 욕정이
움직이시는 것을 느끼셨다.
아무도 없는 후원.
봄이요, 밤이었다.
황차 왕은 취하고 계셨다.
네
너 사모하는 사람이라도 있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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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사모하는 사람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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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서인가? 대답이 없다.
어찌하여 대답이 없느냐?
황송하여이다
사모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냐?
왕을 속이는 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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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말못하는 천절.
있다는 말이냐?
있나이다!
꺼질듯 얕은 목소리로 천절이 대답했다. 그러나 분명한 말이었다.
절개를 안다는 숙계집이 사나이를 사모한단 말이냐?
마음으로 사모하옵는 것은 죄가 아닌가 하나이다. 그 마음을 위하여
계집은 절개를 지키는 것이라 믿었나이다
열일곱살이라는 천절의 대답은 사리에 당연했다.
왕은 더욱 아찔한 흥분을 느끼시었다.
누구냐? 네가 사모한다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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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지그시 흥분을 누르시고 물으셨다.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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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대답이 없다.
달빛속에 엎드려 있는 천절의 어깨가 가쁘게 들리고 있다. 천절의
가슴에 오고가는 상념의 괴로움을 나타내는듯 하다.
누구란 말이냐
그것은 아뢰옵지 못하겠나이다
무엇? 말을 못하겠다?
짐짓 노해 보이시는 왕의 목소리였다.
천절의 죄 만사무석인가 하나이다
천절이 말소리는 떨리었다.
이렇게 총명하고 숙성한 처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사나이는 과연
누구일까? 왕은 그것이 알고 싶으셨다.
말을 해보아라!
왕의 목소리는 다시 부드러워지셨다.
황공하여이다. 말씀 여짜옵기 진정 황공하여이다
너와 짐 이외에는 아무도 업사. 어서 말을 해보아라
여짜옵기 진정 두려워 하나이다
무슨 말이든 가릴바 아니다. 짐이 너를 기특히 알고 있는 것이다
천절은 손을 땅에 짚고 약간 몸을 들었다.
왕을 쳐다보는 천절의 눈.
낮이라면 그 눈이 지극히 사모의 정을 머금고 왕을 쳐다보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상감마마!
천절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정말 하늘이 무서워서 이 말씀 못 며쭙겠나이다
하늘이 무섭다니?
진정 하늘이 무섭소이다
어째서 사람이 사람을 사모하는데 하늘이 무섭단 말이냐?
천절은 이나라의 한분밖에 안계신--- 지극히 높으신 분--- 그 분을
사모하여 왔더이다
한분밖에 없는 분이라면--- 그것은?
상감마마! 천절을 죽여 주옵소서
아 나라에 한분밖에 없는 분이라면---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면
왕을 일컬음일까?
그것은 누구? 짐! 여기있는 짐이란 말이냐?
왕은 숨가쁘게 물으시면서도 잠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감마마! 진정 천절의 마음은 천절 스스로가 어찌할 수 없더이다.
상감마마! 천절은 죽을 죄를 졌나이다. 천절을 죽이시옵소서. 하늘이
무섭소이다
가여운 한송이의 꽃봉오리!
그 꽃봉오리가 머금고 있는 아직 피어나지 않은 향기.
왕은 천절에게서 그러한 느낌을 받으셨다.
지금 눈앞에서 그 꽃봉오리가 속임없는--- 열일곱살 풋정을 호소하고
있다.
왕의 격정은 정말 폭발하려는 직전에 있었다.
왕비마마 이외의 계집사람을 모르시던 왕이시었다.
그런데 웬일이냐? 지금 한번도 가져보시지 못했던 마음의 크나큰
흔들림은 진정 웬 일이냐?
40이 넘으신 왕은 그 40평생에 처음 당해보시는 격렬한 마음의 충격을
누르고 있으시기에 숨이 가쁘셨다.
천절을 굽어보시는 왕.
왕을 쳐다보는 천절.
달빛속이어서 눈을--- 눈동자를 서로 뚜렷하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
마음이 오고 갔다.
상감마마! 천절에게 죄를 주소서. 처음 진실로 처음에 상감마마를 먼
빛으로 뵙던 그 시각부터 천절의 마음엔 상감마마의 거룩하신 모습으로
가득 찼더이다. 외람하온 천절에게 죄를 주소서
천절!
술의 힘이랄까? 왕의 마음이랄까? 왕은 더 참으실 수 없어서 몸을
굽히시어 보기에도 가냘픈 천절의 몸을 힘껏 끌어안으려 하실 때---.
(인기척)
돌연한 인기척을 느끼시고 왕은 몸을 바로 가누셨다.
서너사람의 갑옷입은 병졸이 정자아래로 다가왔다.
거 누구?
병졸들의 날카로운 수하의 호령.
위사좌평(衛士佐平=宿衛大臣)의 거느리는바 숙위의 군병임이 분명하다.
짐! 짐이다
썩 밝은 곳으로 나서신 왕을 보고---.
네이!
병졸들은 황망히 땅위에 부복했다.
웬일들이냐?
위사좌평의 명령을 받들어 후궁부 궁인 천절을 나포하려고 기찰중으로
아뢰오
궁인 천절을?
네이 천절은 관부의 명령을 어기고 후궁부를 무단히 탈출하여
도주중으로 아오나 궁금(宮禁)단속이 엄중하매 아직 궁성중에 있으리라
추측하오. 혹시 이 금원(禁苑)에 잠입해 있지 않나 하여이다
그러냐! 천절은 지금 짐의 앞에 있다
네에?
부복해 있던 병졸들은 비로소 왕과 더불어 함께 있는 천절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러나 지존의 어전이니 감히 어찌 손을 대랴? 잠시 생각하신 왕은
천절이 관부의 명하는 바를 어기었으면 마땅히 법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것이다. 천절을 이끌어 가거라!
엄숙히 말씀하시고 다시 천절을 돌아보시며---.
천절아 너 가거라!
강잉히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는 왕의 가슴에 서린 만단상화를 머금고 있었다.
상감마마! 천절 가겠나이다
천절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어 정자 아래로 내려갔다.
고래를 돌려 왕을 바라보며 내려갔다.
천절이 정자 아래로 내려오니 병졸들은 몸을 일으키어 허리에 달았던
오라를 끌러 천절을 묶으려 했다.
묶지말고 데려가게 하여라. 죄인이 가냘프다
네이
천절을 묶으려던 병졸이 왕명을 듣고 오라를 걷었다.
천절! 앞서라
병졸의 호령을 듣고 천절은 앞서서 걸어간다.
병졸들이 그 뒤를 따른다.
잠간만(잠깐만)!
왕이 말씀하셨다.
네이
위사좌평에게 일러라. 짐의 별명(別命)이 있을 때까지 천절을
치죄(治罪)하지 말고 별실에 보호하라 하여라
네이
병졸들은 다시 천절을 앞세우고 걸어 간다.
왕은 달빛속을 애처롭게 걸어가는 흰옷입은 천절의 모습을 한껏
바라보셨다. 당돌하게도 왕에게 사모의 정을 고백한 열일곱살 처녀의
뒷모습을---.
이튿날 아침.
조회가 끝난후. 왕은 친히 위사좌평을 가까이 부르시어 특지를 내려
천절의 형별을 면하게 하시고 따로 후한 상록(賞祿)을 주어 사가(私家)로
내어 보내셨다.
천절에게는---.
왕이시기 보다 그리운 분이었다.
그 그리운 분의 너그러우신 처분에 천절은 얼마나 감읍(感泣)했는지
열일곱살 가슴에 더욱 왕의 모습이 굳게 아로색여(새겨) 졌던 것이었다.
사가에는 천절이 대궐에 있을 동안 남의 손을 빌려 키워오던 어린 동생
계창이 있었다.
부모없는 남매는 서로 한집에 모여사는 것이 즐거웠다.
그러나 천절은 밤이나 낮이나 겨를을 얻으면 샘물처럼 끊임없이 왕에
대한 잊을 수 없는 사모의 정을 못이겨 괴로웠다. 그런 마음이 죄라
싶기까지 했다.
40이 넘으신 왕은 나이로만 따지면 어버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그분이 그리운 것을 어찌하랴!
분수에 넘치는 그릇된 마음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천절의 사모의 정은 더해갔다.
마땅히 혼처가 여러번 나섰다.
그러나 천절은 처녀인 그대로 살았다.
천절은 계창과 더불어 호젓이 살아갔다.
침선을 생계로 하여 아우 계창을 가르치니 백제에 이름 높은 큰 선비로
좌평벼슬을 지나신바 있는 여자신(餘自信) 선생의 문하에서 배우게 하였고
겨를에 사기(射騎), 창검의 술법을 익히게 했다.
세월은 흘러갔다.
그러나 대궐쪽 하늘을 바라보며 애끊는 사모의 정을 지니고 있는 천절의
마음엔 변함이 없었다.
왕은 천절의 일을 아주 잊으셨는지 세월이 그렇게 길게 흘렀건만 천절의
외로운 그리움만 부질없이 그 세월과 더불어 애절하였을 뿐이었다.
상감마마!
허공에 불러보았다.
철을 따라 꽃은 피고 지고 했다.
그러나 천절의 가슴속엔 영영 꽃피지 못하는 슬픔으로 가득차 있었다.
第三章 昏 政
달은 차면 이즈러지고 물은 차면 넘쳐 흐르는 법이다.
이것이 무상(無常)한 인생세계의 변치않는 법측(법칙?)일는지도 모른다.
빛은 백제에만 비치란 법이 없었던지 의자왕 십년 이후에는 백제에
그늘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왕비마마가 승하 하신 것이다.
왕비마마는 본시 포류의 기질이신데다가 미녕(未寧)하시매 왕의
지극하신 약석(藥石)의 보살피심도 모르시는듯 가셨던 것이었다.
왕의 슬픔은 크시었다.
슬프시면 술을 드시었다.
술을 드시면 밤을 새우시고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으셨다.
간신이 그틈을 엿보고 왕의 마음을 맞추어 왕으로 하여금 주색에
빠지시게 하니 이는 좌평 임자, 충상(忠常) 등의 무리였다.
후궁에서는 그칠줄 모르는 장야(長夜)의 연락(宴樂)이 벌어졌다.
따르는 술은 감로(甘露) 같은 방순(芳醇).
옥반에는 그대로 산해의 진미.
단순(丹脣)에서 흐르는 곱다란 노래소리는 구궁(九宮)에 흘렀다.
왕의 총희(寵姬)로 금화(錦花)가 있었다.
금화는 신라의 계집이었다.
백제의 미녀로는 은고(恩古)가 있었다.
은고도 왕의 총애가 깊었다.
금화와 은고와 그밖에 무수한 미녀들은 왕의 앞에 그 아름다움을
다투었다.
왕은 취하시면 금화나 은고를 이끌고 침전에 드셨다.
무르녹는 육체의 향기속에 왕은 세월을 잊으셨다.
어 태평이로다
어 천하는 짐을 위해 있나니---
날이 새면 다시 끝없는 호화로운 잔치가 벌어졌다.
금화는 신라의 무당이었다.
신라 손급(飡級)의 지위로 천산(天山) 고을의 영(令)이었던
조미곤(租未坤)이란 자가 진격하던 백제 군병에 포로가 되어 좌평 임자의
집 종이 되어 있었다.
조미곤이 틈을 보아 신라로 달아났다가 신라의 지장(智將)
김유신(金庾信)의 영을 받고 다시 백제로 돌아와 이(利)로써 임자를
꼬이어 임자로 하여금 신라 김유신과 태통을 하도록 해 놓고 임자에게
금화를 왕에게 바치게 하였다.
금화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이한 술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용모
또한 경국절대(傾國絶代)의 아름다움을 지녔으니 즉시 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김유신이 금화를 백제로 보낸 것은 금화로 하여금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백제의 국력을 소모케 하고자 함이었다.
김유신은 뒤에서 금화와 임자를 지휘했다.
임자는 밖에서 금화는 안에서 백제를 좀먹어 들어갔다.
좌평 성충은 왕의 행락을 직간하다가 옥에서 죽고 윤충(允忠)은 나라의
글러감을 보고 분사(憤死)했다.
좌평 흥수는 고마미지(古馬彌知=長興)로 귀양을 갔다.
어진자는 물러가고 간사한 무리들이 조정을 휩쓸었다.
이렇게 십년을 지나서 백제에는 그 옛날 융성했던 모습은 찾아볼 길
없고 백성은 주리고 헐벗었다.
군병들은 싸움에 쓸만한 병기를 갖지 못했다.
이때.
십삼만의 당병(唐兵)과 오만의 신라군이 동쪽 서쪽에서 일시에 백제로
쳐들어 왔다.
신라군을 막던 계백(階伯) 장군은 황산벌(黃山原?)에서 패하여 죽었다.
당병을 맞아 싸우던 의직(義直) 장군은 사비수(泗比?水) 물가에서
뭍(陸)으로 오르려는 적군과 격전 후에 전사했다.
의자왕 이십년 칠월 십이일.
왕은 십년 행락하시던 아름다운 사비를 버리시고 황망히 북쪽
웅진성으로 파천하시니 그 모습은 진정 참혹하시었다.
공포에 떨며 목을 놓아 우시었다.
교자도 차릴 겨를이 없으시어 말을 몰으셨다.
왕을 따른 두어사람의 궁녀와 태자 효(孝)와 왕자 연(演)이 왕을
모시었을 뿐이었다. <-???
진정 숨가쁜 도피행(逃避行)이었다.
왕이 웅진으로 파천하시던 날 밤.
왕은 마음이 떨리시어 신기(神氣)를 수습하지 못하셨다.
옛 궁궐이엇던 관아(官衙)를 이궁(離宮)으로 삼아 들으셨다.
모시어 받드는 내관도 없고 낯익은 신하도 없다.
사비에서 따라온 태자 효(孝)와 왕자 연(演)이외엔 두어사람의
궁녀(宮女)가 지근(至近)에 모실 뿐이었다.
십년행락에 몸과 마음이 다 쇠모하신 왕은 그 옛날 천하를 떨치시던
패기의 편린(片鱗) 조차 찾아 볼 수 없는 초라하신 모습이시었다.
웅진의 수성대장(守城大將)이 받드는 저녁 수라를 받으셨으나 별로
드시지 않은채 낯설은 침전에 드셨던 것이다.
아바마마 존체를 돌아보시어 편히 쉬사이다
태자가 꿇어 앉아 왕에게 고하였다.
태자의 옆엔 왕자 연이 역시 꿇어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수많은 비빈과 후궁의 궁녀를 거느리시던 왕이어서 태자 이외의 왕자가
사십여인이나 있었다.
사십여인의 왕자들 중에서 지금 왕의 앞에 있는 아드님은 태자 효와
왕자 연 뿐이다.
오냐! 자자. 그러나 잠이 오겠느냐? 마음과 몸이 온통
못견디겠구나!
아바마마 신등이 불충하온 죄로소이다
태자가 눈물을 지었다.
왕의 등뒤에 시립한 두사람의 궁녀들은 벌써부터 눈물을 지으고 있었던
것이었다.
너희들 물러가 자거라
왕은 슬픔을 덜기 위하여 태자와 왕자를 물러가라 하시었다.
네이
태자와 왕자는 왕이 잠들게 하기 위하여 마악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던
때.
아뢰오
밖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태자가 몸소 침전의 분합을 열었다.
밖에는 십여사람의 군병을 거느린 웅진성 수성대장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태자가 물었다.
상감께 주달할 말씀이 있소!
수성대장의 말소리가 귀의 탓인지 무엄하게 들렸다.
지금 옥체가 다소 미녕하시어 누우시려 하신다. 지급한 일이 아니거든
밝는 날 여쭈어라
아니오. 태자마마가 관여하실 바 아니오. 상감 어전에 바로 주달할
일이요. 이미 성중의 장졸들과 의합(意合)된 바를 주달하려 하오
확실히 무엄한 말투였다.
강박(强迫)과 같은 말싸다.
왕이 몸을 움직여 분합문 앞으로 나오셨다.
무슨 말이냐. 말해라!
힘 없으신 왕의 목소리다.
수성대장이 국궁했다.
상감마마 대세가 이미 기울어 도성이 적병에게 함락되고 이 웅진의
적은 군병으로는 적병을 대적할 길이 없소. 상감마마께서 이곳에
주련(駐輦)하시면 조만간 적병이 이 웅진으로 달려들 것이 분명한 일인가
하오. 사세가 거기에 이르면 화(禍)가 바로 상감마마께 미칠까 신은
염려외다
그러면--- 짐에게 어찌하란 말이냐?
신은 이미 수하의 장졸과 의견이 일치되어 밝는 날 사자(使者)를
사비의 나당 양군의 군문에 보내어 항복할 뜻으로 있사옵기 부질없이
승산없는 항전(抗戰)을 단념하시고 상감마마께서도 항복을 하사---
수성대장의 말끝이 채 마치기 전에
무엄하다! 어느 앞이라 네가 감히 항복을 말하느냐?
태자가 목소리를 돋구어 꾸짖었다.
태자마마는 말씀을 마오. 지금 소장은 상감께 주달하고 있소
너는 가만 있거라! 말을 듣고 보자
왕이 힘 없으신 말씀으로 태자에게 말씀하셨다.
거듭 아뢰거니와 상감마마께서 친히 항서(降書)를 쓰시와 신에게
주시오면 신이 적진에 보낼까 하오--- 만일---
수성대장은 말끝을 흐리었다.
만일--- 어떻다는 것이냐?
만일 신의 주달을 듣지 않으시면--- 할 수 없이 신은 상감마마를
위하여 본의는 아니오나 적진으로--- 상감마마를 모실 뿐이요
수성대장은 말을 마치고 왕의 기색을 살폈다.
이놈! 네가 상감마마를 적진에 팔아버리고 적국에 공을 세울
작정이냐--- 이놈 너는 아마 간신 임자의 무리가 아니냐?
태자가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렇소. 나는 임자대감의 천거로 이 웅진성 대장이 된 것이요.
그러나 소리만 높인다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니오--- 상감마마 신의 의견에
확답을 내리시옵기 바라오
네놈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
태자가 또 소리쳤다.
왕은 몸을 와들와들 떨고 계시었다.
분기를 참으시기에 떨리는 것이었다.
네가 누구의 신하이냐?
왕은 일부러 부드럽게 물으셨다.
상감마마의 신하인줄 아뢰오
그런데 짐에게 항복을 말하느냐?
사세가 그렇소
짐이 듣지 않으면---
황송하오나 부득이 구집(拘執)하여 유폐해 모시고 적진으로 갈 뿐이요
태자가 소리쳤다.
죽일 놈!
태자는 벌떡 일어나서 벽에 걸었던 패검을 내려 뽑아 들었다.
그것을 보자 수성대장도 칼을 뽑았다.
분명한 반역이엇다.
무엇을 하느냐? 너희들은!--- 상감을 별실(別室)에 가두어라
수성대장은 뒤에 섰는 군병들에게 소리치고 전각으로 뛰어 올랐다.
태자의 칼과 수성대장의 칼이 맞부딪쳤다.
칼과 칼이 부딪쳐 불똥이 튄다.
병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왕을 끌고 전각 밖으로 나가려 한다.
왕자 연이 빈손으로 병졸들에게 덤볐다.
왕을 모시던 궁녀들은 목을 놓아 울며 헤맬뿐 어찌할 바를 모른다.
분기를 못참아 먼저 칼을 뽑은 태자였으나 검술에 있어서 수성대장의
적수(敵手)가 아니었다. 태자는 칼을 떨어뜨렸다.
날카로운 칼이 바야흐로 태자를 해하려는 때.
솟아 오른 것 처럼 전각안으로 달려들은 한사람의 장한(壯漢)은--- .
보기 좋게 수성대장의 목을 쳐서--- 그 목은--- .
천정(天井)에 매달려 있는 밝은 등롱 불빛을 뚫는 핏줄기와 함께 전각
바닥에 굴렀다.
이어서 장한은 왕을 잡아 이끄는 병졸들을 닿는대로 베었다.
악
으악
외마디 소리. 비명과 함께 병졸들이 짚단 쓰러지듯이 자빠졌다.
혈연(血煙)이 뻗친다.
모두 짧은 순간의 일들이었다.
태자와 궁녀들--- 그리고 왕과 왕자 연은 넋을 잃고 장한의 솜씨있는
날랜 활약을 바라볼 뿐이었다.
병졸들이 손한번 써볼 겨를없이 다 쓰러뜨린 장한은 이내 피묻은 칼을
버리고 묵연히 서 있으시는 왕의 앞에 부복했다.
서부(西部) 변경을 지키던 신 달솔(達率) 흑치상지(黑齒常之)로
아뢰오. 신 상지 망극하와 여쭈울 말씀을 모르오
흑치상지는 가쁜 숨결에서도 그의 눈에서는 더욱 눈물이 떨어졌다.
오, 네가 흑치상지! 짐은 너의 입시(入侍)를 가상히 안다
왕은 긴장이 풀리셔서 그대로 자리위에 털석 주저 앉으셨다.
신은 도성이 위급하다는 급한 파발을 받잡고 수병(手兵)을 거느려
사비로 가옵던 길 이미 상감마마 웅진으로 파천하셨다 하와 다시 이곳에
당도하온즉 수문(守門)의 군병이 신의 입시를 막기로 신은 의아하와 우선
수문의 군병을 베이고 들어와 이에 이르렀소. 신 외람되이 어전에
용무(用武)하옴은 만사무지로 아뢰오
흑치상지는 칠척이 넘는 거구의 소유자였다. 그 칠척 장신이 비분에
떨며 말했다.
그는 백제에 이름 높은 용장이었다.
짐은 너로 인하여 욕을 면했다
흑치상지의 손을 잡고 왕은 느끼어 우시었다.
신이 끌어온 군병이 아직 천명이 다 못되오나 우선 반역에 가담한 이
성의 군병을 처치하고 상감마마를 받들어 모시기에는 충분하오니 만만
신념을 편하게 하소서
왕의 울음은 통곡이 되었다.
어느새 들어 왔는지 침전 뜰가엔 흑치상지의 수병들이 숙연히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조종(祖宗)의 성업(聖業)을 이 지경을 만들고 짐이 무슨 낯으로 지하에
들어가 열성(列聖)께 뵈인단 말이냐?
왕은 목메어 우시며 태자의 옆으로 가셨다.
순간!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태자가 떨어뜨렸던 태자의 패검을 집어 드시고
이내 그 칼로 스스로의 목을 찌르셨다.
앗! 상감마마
아바마마
태자와 왕자 그리고 흑치상지 궁녀들이 함께 왕에게로 달려들었다.
놓아라! 짐은 죽어야 하느니--- 십년행락하여 나라를 이꼴로 만든
짐은 죽어야 마땅하니라!
여러사람의 동작이 민첩하여 왕이 입으신 상처는 깊지 않았으나 워낙
주색에 손모하신 몸이시어 숨결이 몹시 가쁘시다.
누가 없느냐?
흑치상지가 뜰을 향하여 소리쳤다.
네이
병졸의 몇사람이 청령하고 나선다.
바삐 성중의 의원(醫員)을 불러라!
네이
병졸들이 달려 나갔다.
놓아라! 짐은 죽는다
왕은 칼을 더 깊이 찌르시려 하셨다.
그러나 칼을 태자에게 뺏기셨다.
기막혀 우는 울음소리가 전각을 울렸다.
뜰안에 무리지어 섰는 흑치상지의 군병들도 소리 없이 흐느꼈다.
第四章 悲愴
이튿날 부터.
한두사람 북부(北部) 군현(郡縣)의 성주(城主)들이 약간씩의 휘하의
병마(兵馬)를 이끌고 웅진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백제의 모든 고을의 성주들에는 간신 임자의 무리가 많았다.
임자가 국권(國權)을 농단할 때 임자에게 가까운 자들을 많이 쓰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멀리했던 까닭이다.
지금 임자에게 가깝던 자들은 도성이 두려 빠지고 왕이 참혹한 몽진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세의 돌아감을 관망하하여 태도를 결정하고자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직 왕에 대한 충성심을 그대로 갖고 있는 성주들만이 모였다
할 것이다.
그들이 거느린 군병의 수효는 적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기는 만만치 않아 만일 나당의 군병이 이르면 생사를
걸고 한번 싸울 결의가 굳었다.
흑치상지는 모여 온 성주들을 통솔하여 군병을 조련하고 넉넉지 못한
병기를 다시 정비하여 다가오는 싸움에 대비했다.
왕의--- . 상처는 경미했다.
응급히 불려온 의원의 치료는 효력을 발생하여 다소의 출혈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왕의 입으신 상처에 있지않고 왕의 몸과 더불어 극도로 약해지신
마음에 있었다.
짐은 왕재(王材)가 아니로다. 짐은 조종의 유업(遺業)을 망쳤도다.
짐은 죽어야 하느니라
왕의 눈에 눈물이 마르실 때가 없었다.
짐은 적신(賊臣)의 칼아래 죽어야 마땅한 것을---
차라리 죽어서 짐의 허물로 인하여 목숨을 끊은 성충 이하 여러
신하에게 짐의 허물을 사과해야겠다
이렇게 슬픈 말씀만 하시었다.
흑치상지 이하 성주들은 차례를 정하여 번을 들었다.
거듭 왕이 자살을 도모하실까 하여서였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짐을 지키고 있느냐?
왕은 숙위(宿衛)의 성주를 꾸짖으셨다.
상감마마. 어의(御意)를 진정하소서. 신등은 상감마마를 우러러
모시고 나라를 다시 회복하려 하나이다. 부디 자애(自愛) 하시와 신등의
충정을 살피소서
싫다. 물러가거라. 짐은 홀로 있고 싶다. 물러 가거라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지신 왕은 사람을 두려워 하시었다.
십년 정사를 돌보시지 않고 무수한 후궁의 아름다운 궁녀들의 풍만한
육체에 파묻혀 끝없는 욕정의 파도속에서 술과 노래로 세월을 보내시던
왕이 일조에 적국의 군병으로 인하여 도성을 버리시고 또 믿고있던
스스로의 수성대장의 모반으로 인하여 거듭 놀라심이 컸으니 왕의 마음엔
일종의 강박관념과 같은 심각한 회의의 감정이 생겨났던 것이었다.
작은 음향에도 깜짝깜짝 놀라셨다.
작은 일에도 짜증을 내셨다.
상감마마 신념을 진정하소서
숙위의 성주는 그냥 왕의 앞에 부복하고 너무도 참혹하게 변하신 왕을
우러러 볼 뿐이었다.
자진(自盡)하시려던 이후에는 태자와 왕자에게 까지 사납게 대하시고
어전에 태자나 왕자가 나타나면 역시 공연한 꾸지람을 하셨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
사흘이 지나 십육일 아침 사비에서 웅진으로 피해온 왕손 문사(文思)와
문사를 따라온 군병과 백성들의 보고는 왕을 더욱 실의(失意)의
나락(奈落)으로 몰아 넣었다.
그것은 왕이 도성을 맡겼던 왕자 태가 스스로 왕을 일컬으다가 드디어
적진에 항복했다는 것이요--- 또 수많은 궁녀와 비빈들이
대왕포(大王浦)로 달아나 암석위에서 백마강(白馬江) 푸른 물결에 차례로
몸을 던져 죽고 도성은 그대로 불바다가 되었다는 비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슬프고나! 진정 슬프고나! 짐은 모든것이 귀치않다. 부귀는
무엇이며 향락은 무엇이며 삶은 무엇이냐? 왕업은 무엇이란 말이냐?
만사가 다 구름이다. 물거품이다. 하잘 것없는 공허로다. 짐은 차라리
모반했던 수성대장의 뜻을 용납하여 신라의 춘추(春秋=太宗武烈王)와
당나라 이치(李治=唐高宗)의 군문에 항복하여 번거롭지 않은 마지막
가련한 생명을 이어 가련다
흑치상지 이하로 성주들은 서로 마주보고 비분할 뿐 왕에게 대꾸할 말이
없었다.
누구나 짐의 길을 막지말라! 짐은 적군의 진문앞에 항복하러 가련다.
춘추와 이치가 짐을 죽이면 죽을 뿐 살려주면 살 뿐이다. 이 괴로움과
슬픔보다는 그편이 차라리 얼마나 짐에게 편할는지 모르리로다. 누구나
나의 길을 막지 말라
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어 그대로 계석아래로 내려 오셨다.
왕의 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성주들은 묵연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감마마!
흑치상지가 몸을 일으키어 바삐 왕을 따라 계하에 내려가 걸음을
옮기시는 왕의 용포 소맷자락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상감마마! 신 흑치상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오. 상감마마는 아직도
백제의 하늘이시고 백제의 빛이시외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데 자고로
위급한 지경을 당한 나라가 하나 둘이 아니오며 도성을 빼앗겼던 군왕이
또한 하나 둘 뿐이 아니외다. 인간이 최선을 다하고 비로소 하늘의
도움을 기다릴 수 있다고 신은 생각하오. 신등 지금 일신의 존망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 백제의 회복을 뜻하옴은 오직 상감마마께서 위에
임어(臨御)하여 계시기 때문이외다. 지금 상감마마 신등의 미충(微忠)을
버리시고 적의 군문에 항복하시면 신등은 뜻을 어디에 모아 적을
대항하오리까? 상감마마께서 지금 가시오면 신등에겐 하늘이 없어지고
빛을 잃은것과 다름없는 줄 아뢰오. 통촉하옵소서
흑치상지의 말소리는 불을 뿜는 것 같이 들렸다.
태자와 왕자 그리고 궁녀들도 마당에 내려와서 왕의 기색을 살핀다.
성주들도 추연한 빛을 띄우고 흑치상지의 등뒤로 모였다.
흑치상지의 말은 옳은 말이었다.
왕이 계시므로써 비로소 그들의 적병에 대한 항전 의욕을 발휘할 수
있었고 단결이 되어있는 것이다.
왕에 대한 충성심이 곧 그들의 항전할 의욕을 갖게 하였고 그들을
단결케 한 것이다.
왕이 계시므로써 그들은 승패이둔(勝敗利鈍)을 가리지 않고 한몸의
존망을 돌아보지 않고 수효적은 군병을 이끌고 이 웅진에 모인 것이
아니냐?
만일 왕이 적진에 항복하면 그들은 대들보없는 서까래처럼 흩어져 버릴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아니다. 짐은 세상에 모든 것을 다 못믿는다. 믿고 있었던 맹약의
나라 고구려에서도 소식이 없다. 고구려가 짐을 저버린 것이다. 짐은
아들에게 배반을 당했다. 사비성을 맡긴 짐의 아들 태는 짐이 없는
동안에 스스로 왕을 일컬었더ㅏ. 충신인줄 믿었던 임자는 간신이었고
짐이 총애하던 금화는 짐을 망치지 않았느냐? 짐은 외롭다. 무섭다.
짐은 왕이라는 자리가 싫어졌다. 짐은 춘추와 이치에게 이 목숨을 맡겨야
겠다. 그들에게 자비를 구하련다
왕은 소매를 뿌리치고 걸음을 옮기셨다.
쇠약한 왕의 걸음은 비틀비틀 몸을 잘 가누지 못하셨다.
그러나 누구하나 왕의 앞을 가로 막는 자는 없었다. 모든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왕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상감마마!
누가 비통하게 불렀으나 왕은 돌아다 보시지도 않았다.
왕이 이궁(離宮)의 삼문밖을 나서시매
상감마마 신등도 가오리다! 모시고 가오리다. 잠시 걸음을 멈추시오.
거마(車馬)를 차리오리다!
왕의 뜻을 돌릴 수 없음을 알자 흑치상지는 할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누가 없느냐? 거마의 차비를 해라!
명령하는 흑치상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라와 신하를 버리고 적진에 항복하려는 왕에게 오히려 충성심을
버리지 못하는 무부의 더운 눈물 이었다.
흑치상지뿐이 아니라 성주들, 그리고 그들의 군병들도 다 눈물을
머금었다.
태자 효(孝) 그리고 연, 궁녀들도 목놓아 울고 있었다.
비참한 기운이 웅진성중을 덮고 있는 듯 했다.
아침해는 동쪽 하늘에 높건만 그 해는 이미 백제의 해가 아니요 적국의
해다.
그 햇살은 옛이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건만--- .
계창과 천절이 지름길 내리막을 내려와 큰길로 나서서 멀리 웅진성이
바라보일때---
웅진성문으로 부터 두사람을 향하고 나오는 긴 행렬을을 바라보고
의아한 마음을 갖는 계창과 천절이었다.
계창아! 저 무슨 행렬일까?
묻는 누이에게
누님! 반드시 사비로 진격하려는 우리 군병의 행렬인가 보오.
상감마마가 몽진하신지 이미 오륙일이니 북부의 여러 고을의의 군병을
모아 다시 적군에게 빼앗긴 사비로 진군하는 행렬이 분명하오
항복이란 계창의 마음엔 털끝만치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그렇구나!
누님 됐소. 당병에게 패하여 쫓겨온 계창이 죽지않은 보람이 있소.
이번에야 말로 계창은 군병의 행렬에 가담하여 마음껏 싸워 보겠소!
오냐! 누이도 정성을 다하여 상감마마를 섬기겠다
오누이는 끓어 오르는 흥분을 참을 길 없이 서로 바라보았다.
어서 가오! 누님
바삐 가자
새로운 희망을 느낀 두사람은 걸음을 재촉했다.
행렬은 점점 가까워졌다.
계창과 천절은 더욱 걸음을 빨리 했다.
천절의 얼굴이 상기가 되어 아름답다.
계창의 얼굴엔 비분의 빛이 스러지고 환하게 밝다.
행렬의 선두는 말을 탄 장군이었다.
계창이 바라보니 틀림없는 흑치상지의 의연(毅然)한 모습이었다.
흑치장군의 뒤를 보니 행렬의 중간쯤 말위에 누런 용포를 입으신 왕.
계창은 흑치장군의 말앞에 무릎 꿇었다.
장군! 무독 계창이요
기쁨에 넘쳐 말하고 쳐다보니 흑치장군의 얼굴이 지극히 어둡다.
?
생각하는데
오 계창
흑치상지의 말소리는 힘이 없었다.
일찌기 서로 알던 사이였다.
천절도 왕의 모습을 먼빛에 보고 길가 풀섶에 무릎꿇고 두손을 땅에
짚었다.
장군! 계창은 싸움에 패하고 왔소. 그러나 이 손으로 간신 임자와
요녀 금화를 베이고 왔소. 사비로 진격하시는 행군이라 보오니 계창은
기쁘외다
-----
흑치상지는 외면을 하였다.
흑치상지의 탄말이 멈추니 행렬은 스스로 멈추어 졌다.
장군. 계창도 다시 싸우겠소. 계창으로 하여금 선봉에 서게 하여
주오
계창!
비로소 흑치상지가 말문을 열었다.
네이
진격이 아닐세!
그러면?
항복의 길일세
네이?
계창은 귀를 의심했다.
백제의 보반이 항복을 말하는 것을 듣지못한 계창이었기 때문이다.
항차 흑치상지의 입에서랴?
천절도 의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항복이요?
묻지말게--- 항복은 어의일세
진정 기막히는 말이었다.
아찔한 실망을 느끼고--- .
항복이요?
더 묻지 말게. 괴로워서 말을 못하겠네. 내 신하가 되어 상감마마를
모시고 갈 뿐일세
이때 뒤에서 전갈이 왔다.
어찌하여 길을 멈추느냐는 상감마마의 전갈이요
도성을 탈출한 군교로 인하여 잠시 멈추었으나 곧 떠나겠다 여쭈어라!
흑치상지가 전갈의 군병을 보내고 계창에게 빠른 말로 말했다.
상감마마의 상심하심은 말하기 어렵다. 스스로 자문(自刎)하시려
하시기까지 하시어 경미하지만 상처를 입고 계시다. 웅진에는 충성된
성주들이 군병을 이끌고 모여와서 적군과 일전의 준비도 되었으나
상감마마께서 항복을 고집하시니 내 인신의 몸으로 어찌할 수 없이 지금
상감마마를 모시고 적진으로 가거니와 만일 적국에서 상감마마를 대우함이
무례할 때엔 나는 적진을 탈출하여 재기를 도모할 작정이다. 웅진에
모였던 성주들 중엔 항복하신다는 상감마마의 말씀을 듣고 병졸을 이끌어
지금 임존(任存)성에 계신 은솔(恩率) 부여복신(扶餘福信)장군의 아래로
달아난 몇사람이 있다 또 오산(烏山=禮山)에는 전(前) 좌평
자진(自進=道深)대감이 계시어 복신 장군과 반드시 합세하실 것이니
그대로 지금 항복하시려는 상감마마를 따를 생각은 말고 임존성으로 가게,
임존성은 우리백제의 북쪽요새로 비록 백만의 적병이 온들 난공불락할
험지일세. 할말이 많으이. 그러나 상감마마 또 꾸중이 계실까하여 그냥
가네
흑치상지는 고삐를 당기어 말을 몰았다.
행렬이 따라 움직였다.
이윽고 왕이 타신 말이 계창과 천절의 앞을 지나 간다.
천절!
흑치상지와 계창의 말을 다 들은 천절의 가슴은 찢어지는듯 했다.
십년을 그리우다가 지금 길섶에서 뵈옵는 왕의 참담하게 초췌하신
모습을 우러러 바라보는 천절!
상감마마 십년전 대궐 후원에서 은혜를 입자온 천절이오이다
천절이 고개만 들고 외쳤다.
그러나 왕은 묵묵히 말이 없으시고--- 그대로 말을 몰아 지나가셨다.
천절은 몸을 일으키어 왕을 따르려 했다.
열일곱이 되기전에 어린애 천절 가슴에 아로색여졌던 왕에 대한 사랑의
회포를 갖고 십년 숨어 흐르는 지하수처럼 간직해 변치않던 사랑이 이제
혹발하는 분수처럼 터져 쏟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왕을 따르려던 천절은 소매자락을 잡는 계창으로 인하여
멈추어졌다.
계창아 왜잡느냐? 이몸은 상감마마를 따르련다. 놓아라. 물이든
산이든 북이든 지옥이든 상감마마가 계신 곳이면 나는 따라가야 한다
누님!
놓아라!
누님! 상감마마는 항복의 길을 가시고 있소! 계창은 항복을 버리고
싸움을 택했소. 계창은 임존으로 가려오
항복의 행렬은 아직도 지나가고 있다.
나는 상감마마를 따르련다
누님! 상감마마는 적진으로 가시는 것이요. 계창도 상감마마를
모시고 가고 싶소. 그러나 상감마마를 모시는 충성보다 계창은 적군과
싸워서 잃은 나라를 찾는 싸움으로 충성을 하려하오
누이는 상감마마가 계신 곳으로 가련다. 신라든 당나라든 상감마마
가시는 곳으로---
뿌리치는 천절!
놓치 않으려는 계창!
누님! 계창과 함께 가시오
계창아. 너는 임존으로 가거라. 상감마마는 누이를 잊으셨는지
모르나 누이의 가슴엔 날이 갈수록 더욱 더욱 그리움이 더한 것을
어찌하느냐? 누이는 상감마마를 모시는 충성을 하련다
행렬은 다 지나갔다.
길 위엔 하얗게 먼지가 인다.
계창은 누님을 적진에 보내기는 차마 못하겠소
나도 너를 떨어져 있기 어려울줄 안다. 그러나 이 가슴을 이 마음을
어찌하느냐. 평생 상감마마의 돌보심을 못받을 지언정 누이는 상감마마의
옆에 있고 싶다. 누이는 계집사람이어서---
천절의 흥분이 좀 가라앉았다.
오누이는 길가 풀섶에 앉아 서로 바라보았다.
누님. 진정 가시려오
저 참혹하게 형모가 초췌하신 상감마마를 꼭 따라가야겠다
진정?
상감마마가 불쌍하시다
계창의 얼굴에는 비장한 결의가 떠 올랐다.
누님. 가시오
계창아!
가라는 말엔 천절이 다시 계창을 바라본다.
오누이!
한 어버이에 태어나 한 젖을 빨고 자라 의지하고 살아온 오누이!
너! 누이는 가야겠다. 몸조심해라
천절은 몸을 일으켰다.
누님 계창은 임존으로 가겠소
나는 사비로--- . 상감마마를 따라---
누님 몸조심 하시오
오던 길은 함께 왔건만 지금 헤어져야 하는 오누이들의 가슴에는 만단
회포 구비 구비 서린다.
어서 가시오. 이것이 생전의 이별이올는지---
네가 먼저 가거라!
막상 이별이라 하니 유연(油然)히 샘솟는 오누이의 정을 느끼는
천절이었다.
누님이 먼저 가시오
네가---
두사람의 눈에는 다 눈물이 흘렀다.
계창이 돌아섰다.
누님! 잘 가시오
계창은 달음박질로 걸었다.
눈물이 어려 아무 것도 잘 보이지 않는다.
돌아다 보지 않았다.
길이 산기슭을 구비돈다.
거기서 계창이 고개를 돌렸다.
천절이 아직도 헤어진 자리에 그냥 서있고 멀리 고개를 넘는 왕의
항복의 행렬이 보인다.
누님!
계창은 입속으로 불러 보았다.
몇걸음만 산기슭을 돌면 다시 누이의 모습을 못보리라.
강잉히 계창이 걸음을 걸었다.
서너걸음!
인제 계창의 시야(視野)에 천절의 모습이나 왕의 행렬이 보이지 않는다.
계창은 몸을 돌려 누이가 보이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누이 천절이 돌아서서 왕의 행렬을 따라가고 있다.
누이도 울며 가리라!
생각하니 눈물이 막 쏟아져 나온다.
잘 가시오
노까려 보고 계창은 돌아섰다.
먼 하늘에 구름송이가 흘러간다.
저 구름송이! 저 구름송이가 한번 바람결에 흩어 지면 다시 언제
모일까?
계창은 이렇게 생각하고 얼굴에 흘러 내리는 눈물을 씻을 생각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계창의 눈에는 돌아서서 왕의 행렬을 따라가는 누이의 가여운 모습이
역력히 보이는듯 했다.
계창은 또 불러 보았다.
누님!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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