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李朝) 五百年 野談
차 례
第 一 話 - 寶娘과 靑湖 - 血痕奇譚
第 二 話 - 樂浪과 好童 - 悲戀哀史
第 三 話 - 楊書房의 致富 - 抱腹絶倒
第 四 話 - 風流監司 - 節佳妓話
第 五 話 - 哀戀話 - 靑春悲戀
第 六 話 - 異花 雪竹梅 - 復讐奇譚
第 七 話 - 將軍과 義盜 - 名將逸話
第 八 話 - 煩惱僧 - 佛力奇譚
第 九 話 - 悲愴의 賦 - 百濟哀話
第 十 話 - 金議官 叔侄 - 韓末逸話
第十一話 - 李星信의 最後 - 海戰悲話
第十二話 - 阿非知의 九層塔 - 望鄕哀話
第十三話 - 可憐杜十娘 - 名妓哀話
第十四話 - 公主와 神尺 - 怪夢奇譚
第十五話 - 餘愁 - 落照悲話
第十六話 - 斬首된 별아기 - 愛情悲譚
第十七話 - 千里遠情 - 義俠美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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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팔 화 >
불력기담(佛力奇譚)
煩惱僧 (번뇌승)
산고개턱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산촌에서는 저녁짓는 연기가 가볍게
덮였다.
아까부터 산고개 마루에 구름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석양진 서쪽하늘을
마주 대하고 우뚝선 마을, 마을이래야 십여호가 띠엄띠엄 널려있는 산촌을
내려다 보고있는 승의(僧衣) 차림을 한 사내가 있었다.
얼굴은 하루종일 산길을 걸어서인지 피곤한 빛이 가시지 않으나
눈동자는 새빨간 노을을 담은채 영롱히 빛났다.
퇴색한 장삼을 걸친 등어리에 배낭을 메고 손에는 염주(念珠)를 든
중(僧)은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마을을 뚫어져라 내려다 본다.
(바로 이곳, 내가 여태껏 찾던 곳이 이곳임에 틀림없다)
조용하기는 하나 중의 의미모를 이 말 한마디는 어떤 감격에 벅차서
떨려나오는 말소리만 같았다.
아까보다 더욱 저녁연기가 안개처럼 차분히 산골에 가라앉고 사위는
인제 어둑어둑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자 중은 마을을 내려가는 길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서 얼마 거리를 둔 곳에 아담한 초옥이 한채 있었다.
해가 진후 싸리로 엮은 울타리 밖으로 축 늘어진 해바라기가 몇송이
눈에 보인다.
가까이 가면 안개처럼 주위에 펼쳐진 국화의 향기가 낭랑히 안에서
들려오는 글읽는 소리와 함께 사뭇 아름답다.
굴뚝에서 실같은 저녁 연기가 피어오를 때쯤 산을 내려온 중은 집앞으로
걸어갔다.
소승 문안드리오
싸릿문 앞에 다가간 중은 집안을 향해 사람을 불렀다.
여자가 부엌에서 밥짓던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줄잡아야 서른, 그러나 숫처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다.
여인이 싸릿문을 열자 중은 고개숙여 합장하고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였다.
누추한 곳이지만 어서 들어 오십사와요
여자는 먼저 앞장 서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빗자루로 깨끗이 쓴 마당귀퉁이에 국화가 더욱 향기를 발한다.
여보, 스님 한분이 밤 지낼 곳을 찾아 오셨어요
여인은 글읽는 소리가 낭랑히 울리는 방안으로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글읽는 소리가 뚝 그치며 방문을 열고 젊은 주인 남자가 나왔다.
사내를 마주대하는 중의 얼굴에 일순간 형용 못할 표정이 스쳤다.
그러나 중은 곧 마음을 진정하여 합장하며
소승, 해는 져서 갈 곳이 없으므로 무례하게 이댁의 문을 두드렸나이다
하고 공손히 말하였다.
승려의 처지로는 너무 겸손한 말이었다.
어서 올라오십시오. 스님을 모시기에는 너무 집안이 누추하옵니다
사내와 중은 방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깨끗한 방 구석의 조그마한
선반위엔 몇권의 책이 놓여 있을 뿐 별다른 세간도 없는 것 같았다.
식사후, 중은 피곤함을 핑계로 일찌감치 아랫방으로 내려가 버렸다.
은하수(銀河水)가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중은
어둠속에 몸을 일으켰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마당에 가득 넘쳐 흐른다.
일어나 앉은 중은 어둠속에서 장삼을 입고 장지문을 열었다.
달빛이 물결처럼 왁- 방안으로 밀렸다. 중은 염주를 든 채 달빛을 향해
꿇어앉았다.
눈을 감고 염주를 하나하나 헤이며 중은 입을 가볍게 움직이며 들릴듯
말듯 이상한 주문을 외이기 시작했다. 달빛이 중의 얼굴에 부닥쳐
서기(瑞氣)를 발하는 것처럼 감돈다.
중이 일어나서 주문을 외이는 바로 그시간, 일각을 틀리지 않고
웃방에서 남자와 같이 잠든 여자는 깊은 잠속에서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통 이 세상에선 볼 수 없던 이상한 광경이었다.
흙과 바위는 유황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불구덩이에서 새빨간 불꽃이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혀를 날름거렸다.
그러나 여자는 자기 발밑이 펄펄 끓는 유황염초의 용액인데도 주위에
불꽃들이 옷깃을 매만지며 쓰다듬고 얼굴을 뒤덮는데도 그리고 연기가
자욱히 앞을 못보게 하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불꽃이 얼굴을
휩쓰는데도 뜨거움을 깨닫지 못했다.
끓어 오르는 유황염초에 발이 푹푹 잠겨도 아무런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그대로 여자는 그 자리를 서성서성 헤매이었다. 자욱한 연기속에서
따글따글 쇠사슬 끄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발자국소리와 함께 쇠사슬소리는 점점 가까워 왔다.
얼마 앞의 자욱한 연기와 불길속에서 네개의 비틀거리는 그림자가
쇠사슬에 엉킨채 눈에 띄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림자
으악-
비명소리와 함께 여인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앞서서 쇠사슬에 묶인 채 걸어오는 사내, 바로 남편이었다.
살은 너덜너덜 피와 엉켜서는 벌겋게 타있었다.
어리카락은 길게 자라 앙상한 어깨까지 덮이고 손발은 육주안 쇠사슬에
묶인채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몸서리 쳐지는 금속성(金屬聲)을 울렸다.
과거보러 떠난 분이.....
여인은 미칠 것처럼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으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 뒤를 따라오는 세명의 원귀(怨鬼) 역시 쇠사슬에 묶였으나 여자의
남편을 앞세워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허공을 향해 핏발 돋힌 흰자위가 무기미하게 고기비늘처럼 미물거리는
사내, 뒤따라 가는 세명의 원귀의 피묻은 뼈가 드러나 보이는 얼굴에는
증오와 원심의 표정이 무섭게 드러나 있다.
여보.....
여인은 자기 앞으로 다가온 남편을 향하여 힘껏 외쳤다.
그러나 그 말 역시 입속에서 우물거리는 것에 불과 했을뿐 밖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여보, 당신이 웬 일이요?
다시 외쳤으나 그것도 울음먹은 훌쩍거림과 함께 입속에서 굳어 버렸다.
발바닥마저 땅에 붙어버린 것처럼 떨어지질 않는다.
남편은 여인의 앞을 흰자위만 드러낸 동공을 허공에 내동당이 친채
그대로 앞을 나갔다.
그뒤를 역시 세명의 귀신이 뒤 따를고, 아까 나타날 때처럼 그들은
무기미한 쇠사슬소리를 울리며 뭉클뭉클 피어 오르는 연기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여인의 이마에 땀이 비오듯 흐르며 손이 허공을 몇번 휘젓다가 잠이
깨었다.
(나무아미타불)
아랫방 중의 주문도 끝났다.
잠이 깨자 여자는 옆에 누워있는 남자를 건너다 보았다.
과거를 보려고 늘 글만 읽어 수척해진 남자의 얼굴이 어둠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났다.
후-
여자의 잎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러나 다시 자리에 눕는
여자의 얼굴에는 의미모를 심상치 않은 의혹(疑惑)이 깃들어 있었다.
주문을 다 외운 중은 그대로 앉은채 들릴듯 말듯하게 엷은 한숨을
토로했다. 어느덧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중의 현몽(現夢)으로 여자에게 어떤 끔찍한 예감을 갖게했다. 끔찍한
예감을.... 중은 방구석에 있는 배낭을 주섬주섬 찾아들고 열어논
문밖으로 조용히 나갔다.
마당은 달빛이 교교히 넘쳐 흘렀다.
중은 짧은 달그림자를 끌며 웃방에 대하여 합장하고 조용히 집밖을
나갔다. 문밖에서 중은 그대로 선채 잠시 무슨 생각에 잠겨 있었다.
스님
어느새 기미를 알았는지 여자가 싸릿문 밖으로 따라나왔다.
어?
중은 놀라 멈칫하며 뒤로 돌아섰다.
달빛을 마주봐서 그런지 여자의 얼굴은 몹시 창백해 보였다.
스님, 새벽부터 떠나시나이까?
내 길을 멀고 해서 일찌감치 떠나 봐야겠읍니다. 주인님 곤히
주무시는데 깨울 수도 없고하니....
그래두..... 아직 첫닭도 울지 않았는데....
여인은 중의 얼굴에서 무었을 찾으려는지 한참 중을 쳐다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중의 얼굴은 무표정하였다.
저- 스님 황송하지만 소녀가 꾼 조금전의 꿈을 좀 풀어 주십사와요
중은 물끄러미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담지 않은채 여자를 내려다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승은 한낱 미천한 돌중이요, 돌중이 어찌 해몽(解夢)을 하겠소, 그런
해몽일랑 유명한 대사님들이나 할 수 있소
그러하오나.....
해몽은 할 수 없어요, 단 한마디 여쭐 말씀이 있소. 내 관상을 좀
볼줄 알아, 주인님 얼굴을 보니 올해 액운(厄運)이 있소. 올해 집을
등지고 멀리 가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중은 내배앝듯이 말하고는 획 돌아서서 발걸음을 휘적휘적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兄弟의 運
이십여년을 뒤로 거슬러 올라 봄기운이 농후한 송도(松都)근처의
촌락이었다.
마을 타작마당으로 쓰는 빈터에 쌓여 있는 북더기 위에서 두명의 어린
소년이 놀고 있엇다.
열살쯤 되어 뵈는 소년과 동생인지 얼굴이 닮은 다섯살쯤 되어뵈는 애가
짚더미 위에서 따뜻이 햇빛을 받으며 희희거린다.
한명의 중이 논둑길을 걸어 오다가 다리가 아픈지 타작마당으로 와서
저쪽 짚더미 밑으로 가 앉았다.
중은 두 아이가 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허-
하고 의미 모를 장탄식을 늘어 놓았다.
얘들아 이리오너라
중은 두명의 소년을 불렀다. 소년은 우르르 중 앞으로 달려 왔다.
중은 두 아이의 얼굴을 한참 번갈아 내려 보다가 큰 아이에게 물었다.
넌 이름이 뭐냐?
혜륵(惠勒)이요
혜륵? 좋은 이름이구나. 너는 무엇이라고 부르느냐?
중은 또 작은 아이에게 물었다.
혜성(惠星)
그것도 좋은 이름이다
중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은 쉬지않고 두 아이의 얼굴위를 스쳤다.
너희 집이 어디냐?
중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물었다.
우리집은 저기요
큰 아이가 빤히 중을 올려다 보며 대답했다.
오냐, 너희의 집으로 가자
중은 아이들을 앞세우고 걸어갔다.
아이들은 별 이상한 중도 다 봤다 하면서도 서로 번갈아 쭐레쭐레 앞장
서며 집안으로 향하였다.
문안으로 따라 들어가자 아이들은 방안을 향해 소리쳤다.
엄마 스님이 오셨어, 스님.....
문이 열리며 부모 늙은이가 방문 밖으로 나왔다.
스님 어서올라오십시오, 누추합니다만.....
마루에 앉아 다리를 쉰 중은 곧장 자리를 일어났다.
스님 벌써 가시렵니까? 하룻밤이라도 묵고 가시지.....
그만 가봐야겠소이다. 그런데.....
중은 잠시 주저했으나 다시 말을 이었다.
저 큰 아이를 소승이 절에 데려가서 맡아 중으로 만들겠으니 소승에게
맡기실 수 없사옵니까?
노인부부는 잠시 놀라더니 곧 기뻐 응낙하였다.
(당시 고려(高麗)는 중이 최상층 계급에 속하므로 중이 된다는 것은
여간 힘들지 않았으며 또한 누구나 바라고 있었다)
그날로 스님이 아이를 데리고 절에 들어갔다.
춘하추동이 번갈아 바뀌기를 몇번을 거듭했다.
절에 들어간 혜륵은 나이 열아홉살이 되었다.
스님은 어느날 불경을 읽고 있는 혜륵을 방안으로 불러 들였다.
방안에 들어와서 끓어앉은 혜륵을 묵묵히 건너다 보는 스님의 얼굴이
사뭇 경건(敬虔)했다.
혜륵아 인제 나에게는 네가 더 배울 것이 하나도 없다. 내일 길을
떠나 원나라로 가거라. 원경(元京)에 마침 나와 서면(書面)이 있는
인도승(印度僧) 지공(指空)이라는 분이 계시니 가서 더욱 배워라
너무도 뜻밖의 말에 혜륵은 할말을 찾지 못하고 스님 앞에 엎드려
버렸다.
혜륵아 원대한 불도 앞에서는 한낱 인간의 사소한 정리는 버려야
하느니라. 내일 당장 길을 떠나거라. 떠나기전에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몇년동안 오늘을 위해서 나혼자만이 알고 있던 것이다
스님은 잠시 말을 뚝 그쳤다. 눈자위가 푸르르 떨렸다.
혜륵아 잘 들어라.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느냐? 너의
집앞 짚더미에서 네 형제가 같이 놀고 있었다. 그때 내가 너의 관상을
보니 너는 반드시 중이 될 상이었다. 그 다음 내가 네 아우를 봤을 때
너의 어린 아우의 머리에 살기가 감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좀 더 자세히
보니 네 아우의 머리에는 세마리의 원귀가 붙어다닐 상이었다. 혜륵아
놀라지 말아라. 그것은 네 아우가 살인을 할 상이다
네?
혜륵은 고개를 들어 경악의 눈초리로 스님을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아우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건 문제가 아니다. 네가 그 살인을 막는 것이 문제가 된다. 네
아우는 지금부터 이십육년이 지나면 세사람의 인명을 빼앗고 지옥으로
빠질 것이니라. 너는 그때까지 원에 건너가서 불도를 정성껏 닦고
배워라. 그래서 네 불력(佛力)으로 그 살인을 막아야 하느니라. 만일
네가 그 사실을 막지 못한다면 불도는 너에게서 너무나 멀다. 살인을
막지 못하면 설혹 녜게 다른 신통력(神通力)이 있었다 치더라도 너는 아직
중생(衆生)을 면치 못한 탓이니라. 네 불력의 강도(强度)에 따라 한
인간이 중생의 죄를 지고 나락(奈落)으로 떨어지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된다
그 다음날 혜륵은 스님을 이별하고 원(元)으로 향하는 길을 떠났다.
남편이 과거를 보러가는 날이 며칠안으로 박두하자 여인은 통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불안속에서 떨고 있었다.
산으로 들어가 어느 동굴속에 있는 중이 새벽녘 달빛을 받아가며 주문을
외일 때마다 그 시간 여인은 늘 꼭 같은 꿈을 꿔야만 했다.
여자는 중이 떠날때 한 말대로 남편이 과거보러 가는 것을 한사코
막으리라고 마음 먹었다.
과거보러 가는 것을 사흘 앞둔 날, 밤늦게까지 글을 읽는 남편의 옆에
여자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보 글을 그만 읽고 어서 주무세요, 그따위 글은 읽어서 뭘해.....
임자는 그게 무슨 말이라고 하나?
사내는 뒤돌아 보며 말하였다.
그렇죠. 뭘 과거봐서 낙방될 것 같으면 글은 해서 뭘해요 농사나
짓지.....
뭐? 임자는 말이면 다 하는 줄 아나?
요새 세상은 보통 백성은 아무리 과거를 봐도 급제가 안된다고들
하더이다. 대가(大家)집 자식 쯤 돼야 과거 볼 맛두 나지.....
닥쳐! 왜 재수없게 과거보러 가는 날이 가까웠는데.....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사내의 얼굴이 붉게 충혈(充血)되어 있는
까닭이었다. 조금 더 심하면 사내의 병이 발작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내는 흥분하면 자기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었다.
여자는 과거보러 남편이 떠나는 날까지 남편의 마음을 돌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과거보러 간다는 날 새벽 여자가 잠을 깼을때 남편은
자리에 없는채 이부자리는 싸느랗게 식어 있었다. 여자는 미친듯이
송도(松都)로 향한 산길을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지며 기어 올라 갔으나
아침햇발이 막 드리우는 산골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보---
하고 외쳤으나 그 소리는 산울림이 되어 파도처럼 출렁거릴 뿐 남편은
돌아오질 않았다.
여자의 휘청거리는 다리가 산길을 내려오다가 여자는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져 끝내 자기말을 듣지 않는 사내를 원망하듯 손은 허공을 향해
굳어진 채 죽어 버렸다.
駭怪한 應報
과거날이 되자 송도는 시골서 올라온 선비들로 한창 흥청거렸다.
과거날 아침 선비들은 일찍부터 경방궁(慶方宮) 문전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초헌(車召 軒 = 종이품<從二品>이상이 타는 높은
외바퀴수레)을 탄 어느 대감집 아들이 거드럭거리면서 거만히 사면을 휘휘
둘러보며 들어왔다.
어느덧 경방궁 앞뜰은 선비들로 가득차고 북소리가 울린후 왕이 친히
은은한 음악소리에 맞춰 마당앞의 누각위에 올랐다.
다시 북이 울리자 운자(韻字)가 내려지고 선비들은 돗자리를 깔고 앉아
종이위에 열심히 붓끝을 날리기 시작했다.
선비들의 정성에 찬 글발이 단상위에 차곡 차곡 쌓였다.
얼마후 장원급제를 한 선비의 이름과 장원시를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군중속에서 이때
아?
하는 놀란 소리가 가볍게 들렸다.
바로 그 사내, 여자가 아무리 가지말라고 애원을 해도 뿌리치고 송도에
온 바로 그 사내였다.
장원급제된 선비의 이름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데 장원시는
조금전에 자기가 지어올린 시가 아닌가?
사내는 눈앞이 아찔했다.
어느덧 우르르 사람들은 궁밖으로 몰려 나갔다. 사내는 그들 틈에 밀려
나가면서 가슴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두방망이질을 쳤다.
요새 세상은 아무리 과거를 봐도 우리같은 평민들은 되지도 않는다고
하더이다. 대가집 자식쯤 해야 무슨 수로든지 급제가 되지.....
아내의 목소리가 꿈속처럼 귀를 간지렀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군중에서 점점 뒤로 처진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혼자 궁밖에 남아 숨어서 급제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깨닫지 못했다.
불같은 증오심이 그의 가슴을 올바르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해가 궁궐의 높은 지붕너머로 넘어갈 때쯤 해서 궐문으로 호화롭게
단장한 말을 탄 사내가 나왔다. 뒤에는 수십명의 기병(騎兵)이 오위한 채
그들은 궐문을 빠져나와 고루거각이 즐비한 동촌(東村)으로 달렸다.
사내는 말을 탄 남자를 보고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뻔 할만큼 놀랐다.
바로 아침에 거드럭거리며 초헌(車召 軒)을 탄 채 과거장으로 들어온
남자가 아닌가?
음.....
사내의 입에서 분노를 억제치 못하는 신음소리가 빠져 나왔다.
동촌으로 향해 달리는 일행을 사내는 몰래 뒤따랐다. 일행은 어느
궁궐같은 개와(기와)집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담밑에서 샅샅이 바라본 사내는 이를 뿌드득 갈며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그날밤 밤이 이슥해지자 사내는 날이 새파란 비수를 준비하여 품에
감추고 으슥한 뒤곁의 담을 뛰어 넘었다.
꿈속처럼 모든 것이 몽롱한 가운데 증오심만이 사내의 가슴속에
가득찼다.
사내는 남자가 자고 있을듯한 방문을 찾아 어둠속을 이리저리
헤매이다가 대청마루 건너편 방으로 다가갔다.
집안은 등불마저 꺼지고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방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간 사내는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장지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보니 잠자는 사람의 얼굴은 확실히 낯이
익었다.
사내는 손마디마디가 후들후들 떨렸다.
비수가 번쩍 쳐들렸다.
달빛이 비수에 비쳐 번쩍하고 몸서리 쳐지는 빛을 발하였다.
(..........)
두개의 숨소리가 조용히 들릴뿐.
휘이익
으으윽
칼이 잠자는 남자의 가슴에 가서 푹 꽂혔다.
남자는 가슴에 꽂힌 칼을 빼낼려는 듯이 손으로 두어번 어둠을 위젓더니
눈을 까뒤집고 손가락이 방바닥을 긁어쥔채 점점 굳어갔다.
가슴에는 시커먼 피가 달빛에 미물거리며 흘러내렸다. 피가 뭉클뭉클
흐를 때마다 칼이 가슴에 꽂힌채 서너번 끄떡끄떡 하였다.
방바닥을 흘러 내려가던 피가 실신한 것처럼 숨을 헐덕거리며 우뚝
서있는 사내의 발을 휘감아 문있는 쪽으로 흘러가며 시커멓게 응결해
갔다.
남자는 잠시후 입에서 귀신의 머리카락같은 실같은 핏줄기를 깨문 채
영영 굳어 버렸다.
사내는 이제는 완전히 미친 사람모양 그자리에 우뚝 선채 초점잃은
동공(瞳孔)을 싸늘한 고기덩어리에 던지고 있을뿐 희뜩 사내의 비뚤어진
입술이 악마같은 웃음을 그렸다.
그 단정한 용모에서 그런 악마같은 잔인한 미소가 그려지리라곤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다. 마치 수십년 동안 긔의 가슴 한 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는 나락의 마귀가 잠을 깬듯 사내는 온몸을 악마적인 희열에 불사른 채
잠시 그리고 서 있다가 열어논 문밖으로 나가서 조용히 담을 뛰어 넘었다.
그길로 사내는 송도의 성문을 빠져나가 미친듯이 새벽길을 비틀거리며
도망해 갔다.
밤이 되자 사내는 피곤한 몸을 이끌며 산속에 있는 초가집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배고픔과 피곤함을 느낄만큼 그의 정신이 정상적이
아니었다.
집안에는 희미한 심지불이 켜져 있다. 마당에서 신발 끄는 소리가 나며
호롱불을 든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밤이 늦어 죄송하오만 하룻밤신셀 질까해서.....
여자는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얼굴에 스치며 옆으로 비켜 섰다.
사내는 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있던 주인남자가 문을 반쯤 열고 역시 못마땅한 듯이 어
보다가
들어 오슈
하고 퉁명스레 내뱉고는 방문을 닫아 버렸다.
사내는 주인 내외가 거처하는 옆방에서 감자죽으로 배를 메꾸고 자리에
들었다. 잔뜩 피곤한 몸인데도 사내는 잠이 들지 않았다.
잠을 자는지 깨어 있는지 분간못할 지경에서 사내는 웬일인지 몸에 땀이
쉴새 없이 흘러 옷을 척척 들어붙게 했다. 마치 무거운 돌더미 밑에 눌린
것처럼 몸이 느줄근이 아파왔다.
어렴풋이 잠이 들었을까 사내는 또 무엇에 놀란듯 퍼뜩 잠이 깨었다.
밤이 한창 깊었는가 보다.
사내는 이상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옆방에서 소근대는 소리가 벽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내는 번쩍 벽에다가 몸을 붙이고 전 신경을
벽 건너방으로 쏟았다.
.....그러지 말고 잠든 후에 오랏줄로 묶어 버리면 되는거야.
삼천냥이 한꺼번에 굴러든단 말야. 저방은 튼튼하니까 정 안되면 밖으로
문을 잠궈 버리면 돼
그건 안돼요. 젊은 놈이 발악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그러지 말고 새벽안으로 관가에 내려가서 나졸 몇을 데려오세요. 몸이
피곤하니까 새벽까지 깨지 않을 테니까요, 내말대로 하세요
허어 글쎄.....
사내는 더 이상 들을 것이 없었다.
또다시 그의 머리는 혼란해지며 악마의 화신처럼 마음이 뒤틀려 왔다.
사내는 조용히 문밖으로 나왔다. 뒷뜰로 돌아가서 도끼를 찾아 들고는
짚더미 뒤에서 주인 남자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주인남자는 살며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사내가 자던 방의 문고리를
살며시 잡아 당겼다.
사내는 조용히 뒤로 다가갔다.
주인 남자가 막 문을 열고 오랏줄을 든 채 한발 앞으로 들어갈려고 할
때였다. 휙 바람을 일으키며 도끼가 머리위에 바로 떨어졌다.
악---
주인남자는 짧은 비명과 함께 나무등걸처럼 앞으로 탁 꺼꾸러 졌다.
머리통이 무참히도 박살된 채 피가 사내의 옷에 튀어왔다.
주인남자는 꼼짝없이 깨어진 머리에서 피를 콸콸 쏟으며 죽어버렸다.
아악
남자의 비명소리를 듣고 여자가 뛰어 나왔다.
사내는 휙 돌아서며 거침없이 도끼로 여자의 허리를 후려쳤다.
피가 소낙비처럼 얼굴에 뜨거운 감촉을 주며 뿌려졌다.
사내는 도끼를 땅에 떨어뜨리고 힘없이 서 있었다.
온 전신에 묻은 검붉은 피가 지옥의 완장처럼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사내의 귀가 멍멍해졌다.
고향에 두고온 아내의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나 그것도 잠간 뿐
사내는 몰려드는 피로를 억제할 수 없어 도로 방문을 열어 젖히고
들어갔다.
바다밑처럼 가슴이 가라앉았다.
안개처럼 잠이 몰려들었다.
마을서 송도로 가는 산길위에 중이 석상(石像)처럼 우뚝 섰다.
뉘엿뉘엿 하는 햇빛이 중의 그림자를 꾸불꾸불 길게 끌었다.
중은 그대로 송도로 향한 산골길을 빛나는 눈동자로 주시하고 있다.
저쪽 고개를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인 듯한 그림자가 기어올라 오는 것이
보였다. 둥근 눈을 감았다.
시커먼 그림자는 점점 크게 다가왔다. 사내였다. 옷은 피가 뭏은
그대로였다. 머리는 산발된 채 눈은 이제 막 첫별이 나타난 하늘을
향했는지 고기 눈알 처럼 핏발이 돋혔다. 다리는 휘청휘청하며 짚신마저
벗겨진 발은 피가 엉켜 있었다.
중은 그대로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눈시울이 씰룩거렸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내는 이윽고 중의 앞에까지 다가와서는 딱 하고 걸음을 멈췄다.
사내의 숨소리가 중의 얼굴앞에서 헐떡거렸다. 사내는 마치 바위에라도
막힌듯이 우뚝 선 채 어떻게 된 셈인지 한발도 꼼짝할 수 없었다.
중이 천천히 눈을 떴다.
번쩍하고 빛나는 눈동자가 바로 사내의 얼굴을 뚫고 나가는 것 같았다.
중은 조용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사내의 얼굴이 점점 핏기를 잃고
핼쑥해졌다. 무릎이 와들와들 떨렸다. 가슴이 뻐개지듯 숨이 찼다.
그러기를 얼마동안 중의 주문이 끝나고 다시 눈동자가 사내를 노려보자
사내는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에 잠시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스르르 쓰러져 드디어 죽어버렸다.
자기의 뒤를 저주성(詛呪聲)을 지르며 따라다니는 세 원귀와 함께
사내는 지옥으로 굴러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나무아미타불>
중은 무표정한 얼굴로 뒤를 돌아서서 그대로 마을로 내려가 버렸다.
아내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사내마저 지옥의 불구덩이에 굴러
떨어져 죽어버린 집은 인제 텅텅비어 귀기(鬼氣)만 자아낼 뿐이다.
중은 그 집마저 불을 질러 버렸다.
화광이 충천하였다.
불꽃은 혀를 날름거리는 집을 송두리채 삼켜 들이켰다.
충천하는 불길속에 중이 홀연히 서 있는 것 같았다.
아! 불도(佛道)란 내게 멀기만 하다. 눈앞에 무궁 무진한 길이 트인다
중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일찌기 자기를 길러 주신 스승님, 자기가 원으로 떠나기전에 하신
말씀이 귀에 울렸다.
설혹 네게 다른 신통력(神通力)이 있었다 치더라도 너는 아직 중생을
면치 못한 것이니라
불꽃은 집을 덮었다.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기에는 내 불력이 너무나
사소하구나,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라도 한낱 중생을 면치못한 내게
무엇을 주실까?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없고 그도다 더한 불도를 닦기
위해서 몸을 더욱 깊은 부처님의 품안으로 던지노라
(대자연의 섭리를 깨달을 때까지 다시 불도를 닦자. 설령 그것이
영원한 길일지라도.....)
불꽃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올랐다.
혜륵과 혜성 너무나 기구한 운명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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