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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조선오백년 야담

조선 오백년 야담 제5화 / 哀戀話 - 靑春悲戀

by 연송 김환수 2013. 8. 29.

朝鮮(李朝) 五百年 野談

 

차 례

 

第 一 話 - 寶娘靑湖 - 血痕奇譚

第 二 話 - 樂浪好童 - 悲戀哀史

第 三 話 - 楊書房致富 - 抱腹絶倒

第 四 話 - 風流監司 - 節佳妓話

第 五 話 - 哀戀話 - 靑春悲戀

第 六 話 - 異花 雪竹梅 - 復讐奇譚

第 七 話 - 將軍義盜 - 名將逸話

第 八 話 - 煩惱僧 - 佛力奇譚

第 九 話 - 悲愴- 百濟哀話

第 十 話 - 金議官 叔侄 - 韓末逸話

第十一話 - 李星信最後 - 海戰悲話

第十二話 - 阿非知九層塔 - 望鄕哀話

第十三話 - 可憐杜十娘 - 名妓哀話

第十四話 - 公主神尺 - 怪夢奇譚

第十五話 - 餘愁 - 落照悲話

第十六話 - 斬首된 별아기 - 愛情悲譚

第十七話 - 千里遠情 - 義俠美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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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오 화> 靑春悲戀(청춘비련)

哀戀話 (애련화)

 

< 1 >

백제(百濟)와의 국경지대가 다시 시끌시끌해 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신라(新羅)의 백성들이 연중가절(年中佳節)인 한가위를 그냥 무의미하게

넘겨 버리지는 아니하였다. 내일은 싸움에 나가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질지언정, 오늘만은 흥겨웁게 보내지 않으 수 없다는 듯,

고을마다 추석놀이가 성대히 행하여 지는 것이었다.

노룻골이라고 해서 예외(例外)일 수는 없었다.

신명나는 풍물소리가 골 안에 듣기 좋게 메아리지는 가운데,

아침나절부터 동구 앞 모래사장에는 씨름판이 벌어졌고, 마을 뒤 참나무

숲에서는 추천(그네)놀이가 열리었다.

이 날의 씨름판에서 첫째를 차지한 사람은 이듬해 추석까지 젊은 축의

두령격이 될 뿐 아니라, 총각일 경우에는 동네 처녀들의 무한한 사모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처녀들의 추천놀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으뜸을 차지한 처녀에게는

총각들의 은근한 시선이 두고 두고 던져 지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이

날의 씨름판과 추천놀이는 연중 어느 가절의 놀이보다도 볼만하였다.

씨름판이 끝나면, 젊은이들은 첫째를 차지한 새로운 두령을 중심으로

크게 자리를 벌려 달이 중천에 올 무렵까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드디어는 둥실둥실 춤까지 추며 즐기는 것이었다.

추천놀이 를 마친 처녀들은 남자들처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지는

아니하였으나, 그네들은 그네들대로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달밤에는

다시 참나무 숲에 모여 이번에는 숨박꼭질이었다. 그러는 것이 예년의

관습으로 되어 있었다.

숨박꼭질이라곤 하지만 오늘날 아이들이 하는 그런 소규모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인원을 두 패로 나누어서 한 편은 숨고 한편은 찾으러 다니는

것이다. 모조리 찾아 내면 교대를 하게 된다. 그러니만치 숨는 쪽은

뿔뿔이 흩어져서 꽁꽁 재주껏 숨어야 했고, 찾는 쪽은 또 이 구석 저

구석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멀리 숲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은 안되기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 2 >

뒷산 봉우리 위로 불그레한 빛이 피어 오르더니 보름달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저녁 성찬을 마친 처녀들은 막 돋아 오르는 달을 바라보면서 즐거이

참나무 숲으로 몰려 나갔고, 오늘 씨름판에서 첫째를 차지한 바위쇠네 집

마당에 자리를 벌린 젊은이들은 손에 술잔을 들고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였다.

명년 한가위까지 마을 젊은 축의 두령이 된 바위쇠는 넓은 이마에 담뿍

달빛을 받으면서, 잔을 높이 들어 벌떡벌떡 잘도 마신다. 그 곁에

도사리고 앉은 검달이도 한 잔을 단숨에 비워 냈고, 좌중의 모든

젊은이들도 앞을 다투어 호음(豪飮)을 하였다.

한 잔, 또 한 잔, 술이 거듭됨에 따라 판은 점점 흥그러워 갔다.

그네 뛰기선 누가 첫째라노?

검달이가 이런 소리를 꺼내자, 좌중은 신이 나는 듯 한층 더 떠들어

댔다.

복사녀지 누구까봐

복사녀가 언제부터 그네 잘 뛰노?

뱃속에서부터 란다 와?

에잇 지랄!

하하하---

호호호---

웃음소리가 고요한 밤 공기를 흔들며 뒷산 골짜구니에 가서 은은히

메아리진다. 이 쪽 웃음소리를 따라라도 웃는듯 멀리 참나무 숲 속에서도

처녀들의 깔깔대는 소리가 들려 온다.

달은 어느덧 산봉우리 위에서 성큼 솟구쳐 올랐다.

젊은이들의 처녀들에 대한 시시닥거리는 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누구는 어떻다느니 아무개는 어떻느니- 떠들어 대고는 킥킥킥 괴상한

소리로 웃기도 하였다. 그러나 바위쇠만은 두령다운 위신을 지키면서

이따금 껄껄껄 호기있게 목줄기를 울릴 따름이었다.

좌중의 화제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것은 역시 오늘의 추천놀이에서

으뜸을 차지한 복사녀(복숭아 여자)였다. 그네의 복스러운 얼굴과 박속

같이 하이얀 살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젊은이들은 몸을 비비 꼬며

으으응!

혹은

아유우!

하고 , 괜히 못 견디는 것이었다. 그럴적마다 바위쇠는 일부러 못들은

척하고, 잔을 입으로 가져가 벌컥벌컥 들이키기만 하였다.

마당에 깔렸던 집 그늘이 말끔 걷히어 가고, 온 뜰안에 달빛이 환하게

쏟아져 내릴 무렵에는 술들도 어지간히 된 듯 구성진 노랫가락이 연신

쏟아져 나왔고, 마침내 벌떡 일어나서 둥실둥실 춤을 추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위쇠는 술기가 얼근(얼큰)하게 오르자 가슴에 뿌듯이 사무치는

그리움을 어쩌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오늘 밤을 그냥 노래나 춤만으로

넘겨서는 안될 것 같았다. 슬그머니 자리를 일어서고 말았다.

벌써 몇 해 전부터인지 모른다. 두고두고 가슴 속에 간직해 온

일념(一念). 씨름판에서 첫째를 차지하기만 하며는--- 하고, 바로 이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애태우며 기다려 왔던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오늘

이 밤을 헛되이 넘겨 버려서는 안된다.

노래와 춤으로 신명나게 어울려진 일동들을 그냥 남겨 놓고, 슬며시

집을 빠져 나가는 바위쇠의 머리 속에는, 보름달보다도 더 뚜렸한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바로 오늘의 처녀들의 주인공인

복사녀의 얼굴이었다.

참나무 숲으로 통하는 비탈길을 막바로 올라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기운이 장사고 담대한 바위쇠일망정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지는

못하였다. 꼭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남의 눈에 띄일까 봐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지름길로 해서 언덕마루로 올라가는 수 밖에 없었다. 언덕마루에 올라

타박솔(물기가 마른 소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눈아래 퍼져 있는 참나무

숲을 유심히 내려다 보았다. 나무가 섬금성금 서 있는 숲 안으로 밝은

달빛이 좌악 흘러 들고 있었다.

숨박꼭질은 지금 막 새 판이 시작된 듯 한 편은 그냥 그자리에 까아맣게

모여 섰고, 다른 편은 이리저리 거미새끼처럼 흩어지는 것이었다.

바위쇠는 바짝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 중의 어느것이 복사녀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타박솔을 움켜 쥔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려

나가는 듯하였다.

달은 어느새 중천 가까이까지 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숨박꼭질도 이번으로 마지막일는지 모를 일이다. 추석날

밤이란 일년 중에 다시없는 좋은 기회인데, 이 기회를 그냥 헛탕쳐

버린다면 생각할수록 온 몸에 조바심이 잦아 들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있을 때였다.

까아만 그림자 두 개가 나무 그늘에 가렸다가 나타났다가 하면서 이

쪽을 향해 달려 오고 있었다. 어디 그럴듯한 곳을 찾아서 숨으러 오는

모양이었다. 한참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 오던 두 개의 그림자는 제각기

방향을 달리하여 왼쪽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것이었다.

오른쪽으로 미끄러진 그림자는 어느 덤불 속으로 숨어 들어가 버렸으나,

반대 방향으로 갈라진 그림자는 쉬임없이 달리고 있었다.

달빛이 너무 밝은 탓만은 아니리라. 거리가 꽤 가까워진 탓만은

아니리라. 바위쇠의 두 눈은 크게 번쩍 뜨였고, 얼굴에는 화끈 피가 모여

들었다. 물론 달빛이 밝은 탓도 있겠고, 거리가 가가워진 까닭도

있겠지마는 그것은 틀림없는 영감(靈感)의 작용이었다. 달리고 있는

그림자가 바로 복사녀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이었는 것은--- .

우연이라면 이렇게 고마운 우연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그네와의

사이에는 아름다운 인연이 숙명적으로 맺어져 있는지도 모르지---

바위쇠는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겨를(겨룰)도 없이 똑바로 복사녀가

달리고 있는 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복사녀와의 거리가 불과 얼마 되지 않을 만큼 가까워졌을때 그네는

인기척에 놀란듯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

쪽을 조심스러이 살폈다. 그네가 놀랄까봐 바위쇠도 얼른 멈추어 섰다.

우뚝 멈추어 서서 마주 바라보는 바위쇠와 복사녀. 한 쪽은 젊은이들의

두령, 한 쪽은 처녀들의 주인공. 휘영청 밝은 달빛이 두 사람 위로 곱게

내리고 있었다.

복사녀!

바위쇠의 입에서 뛰어 나온 첫 마디였다. 뜨거운 목소리였다.

------

복사녀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옷고름을 만지작 거릴 따름이다.

복사녀! 나 바위쇠여

하고, 복사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서는 바위쇠의 가슴 속은 그지없이

더웠으나 아까처럼 울렁거리지는 아니하였다.

바위쇠가 다가오자 복사녀는 살쁘시 돌아 섰다. 치렁치렁 땋아 내린

머릿채 끝에는 댕기가 약산 나풀거린다.

복사녀 곁으로 다가 간 바위쇠가

복사녈 내가 얼마나---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또 한 사람 찾았네!

누구 누구 남았노오---

하는 고함소리가 저 쪽에서 들려 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있었는 듯 얼른 그 자리에 앉아버렸다. 어느새 그랬는지

바위쇠는 복사녀의 두 어깨를 잡고 있었다.

어깨에 바위쇠의 손이 와 있는 것을 안 복사녀는 귀밑이 얼마나

화닥거리는지 견딜 수가 없어 허리를 약간 옆으로 틀었다. 그러자

바위쇠는 도리어 바싹 다가들어 그네의 가슴을 왈칵 안아버리고 말았다.

복사녀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좀 꿈틀거리기는 했으나 결코 바위쇠의

가슴에서 빠져 나갈려고 몸부림을 치지는 아니하였다. 바위쇠는 복사녀를

안은 한 쪽 손을 풀어서 그네의 얼굴을 이 쪽으로 돌렸다. 복사녀의

얼굴은 순순히 바위쇠의 얼굴 앞으로 돌아 왔다.

달빛을 받아 한결 더 탐스럽고 어여쁘게 보이는 복사녀의 얼굴.

입술--- 바위쇠의 입술이 복사녀의 그것을 가서 지긋이 누를려고 했을 때

---아직 아직 멀었다!

복사녀도 남았다!

하는 고함소리가 꽤 가까이에서 늘려왔던 것이다. 복사녀는 놀란

토끼처럼 바위쇠의 품안에서 빠져 나가며

딴 데로 갑시다

하였다. 정말 그러는 것이 얼마나 좋으냐. 바위쇠는 그네의 손목을 잡고

그늘진 곳으로 해서 숲을 빠져 나가 언덕마루마저 넘어 서 버렸다.

언덕마루를 넘어 골짜구니를 타고 얼마를 갈라치면 거기에

애기소()라는 못이 있었다. 조그마한 못이기는 했지만 거기에 고여

있는 물은 몇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을만큼 깊은 것이었다.

바위쇠와 복사녀는 말 없는 가운데 합의라도 된 듯 바로 이

애기소에까지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

암석이 병풍처럼 둘려 있는 아래에 깊이를 모르는 물이 주름살 하나

없이 담겨 있고, 물 위에는 달이 한 개 소리도 없이 떠 있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이 둘레를 싸고 있기 때문에 벌레 우는 소리가 가냘피 들려 올

뿐 사방은 고요할대로 고요하였다.

바위쇠는 펑퍼짐한 반석에 가서 걸터앉았고, 복사녀는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면서 그 곁으로 다가섰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이 없이 물

위에 더있는 달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러나 바위쇠의 귀에는

복사녀의 조심스러운 숨소리가 들렸고, 복사녀 역시 바위쇠의 숨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얼마만이었을까? 가슴 속이 다시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바위쇠는

뜨거운 목소리로 사방의 적막을 깨고야 말았다.

복사녀!

그녀를 바라보는 바위쇠의 두 눈은 달빛 아래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복사녀도 가슴속에 벅차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어쩌지 못하여 황홀한

시선으로 바위쇠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리웠던 얼굴인지

모른다. 남 몰래 마음속에 고이고이 간직해 온 오직 하나의 님. 그 님의

얼굴이 바로 여기 눈앞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지 않느냐.

복사녀는 바위쇠의 이글거리는 시선 앞에 오래도록 몸을 가누고 있을

수가 없어 그만 그의 가슴 속으로 무너지듯 달려 들고 말았다.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서로 말을 못해 온 바위쇠와 복사녀. 그러나 이미

말 같은 것은 소용이 없었다. 입술이 입술을 찾았고, 가슴이 가슴을

안았다. 이제는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거저 노자근한(매우

노곤한) 공기만이 두 사람을 싸고 돌 뿐이었다.

얼마 후에 바위쇠는 복사녀을 안은 채 반석 위에 나가 쓰러지며, 그네의

몸뚱아리를 손으로 더듬어 내려가고 있었다.

결혼하고 나서 예, 아으으--- 결혼하고나서어---

복사녀는 바위쇠의 가슴을 떠밀었다. 그러나 그녀의 팔에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그것은 반항도 아니었고, 애원도 아니었다. 그저 이런

경우에 취해지는 여자들의 무의식적 태도라고나 할까.

아으으으---

발이 비잉 돌아 가는듯 하였다.

복사녀는 온몸에 바위쇠의 뜨거운 무게를 느끼며 두 눈을 지긋이 감아

버렸다.

 

< 3 >

그런 일이 있은 뒤로부터 바위쇠와 복사녀는 남들의 눈을 피하여 여러

차례 그 애기소에서 만났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밤이 깊어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온몸에

이슬이 내리는 것도 상관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의 단꿈을

언제까지나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아니하였다.

시끌시끌하던 백제와의 국경지대가 본격적인 큰 싸움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노룻골의 젊은이들에게도 징모(徵募)의 국령은 내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바위쇠는 물론 검달이도 출정(出征)하게 되었고 그밖에 스무살 안팎의

몇몇 장정들이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내일이면 마을을 떠나는 날 밤, 바위쇠와 복사녀는 마지막으로 애기소를

찾아 올라 갔다. 못가의 잠든 반석 위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가슴속이

자꾸 얼어 붙는 듯 덜덜덜 떨리기만 하였다. 밤공기가 제법 선뜩해진

탓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그들 두 사람의 운명위에 검은 그림자가 와서

덮이는 듯한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복사녀! 너무 근심하지 말어---

바위쇠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처량하게 앉아 있는 복사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싸움터에 나간다고 어디 다 죽는가, 걱정없어, 나 곧 돌아 올테여

------

백젯놈들한테 죽을까 봐? 문제 없어, 까짓놈들 막 쳐없애고, 나 꼭

돌아올께

바위쇠의 얼굴만을 하염없이 우러러 보고 있던 복사녀는 그만

흑흑---

느껴 울며, 바위쇠의 가슴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져서 서럽게

서럽게 흐느껴 우는 복사녀의 들먹거리는 어깨를 내려다 보며 바위쇠는

울긴 왜 울어, ?

하였으나, 자기도 코허리가 시큰해 지는 것을 어쩌지 못하였다.

바위쇠의 품안에서 한참 느껴 울고 난 복사녀는 눈물을 씻고,

옷매무새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듯 입을 발끈

다물며 품 속으로 손을 넣는 것이었다. 품속에서 나온 그녀의 손에는

조그마한 손거울이 한 개 쥐어져 있었다. 보름달처럼 동글한

석경(石鏡)을 바위쇠 앞으로 내밀며

이것 받아 주세요

하였다. 바위쇠는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랐으나 그것을 넙쩍 받아

들었다.

그것 볼 때마다 저를 생각해 주세요, 그리고 부디 몸조심 해요,

바위쇠의 얼굴을 우러러 보는 복사녀의 두 눈에는 다시 서러운 이슬이

맺혔다.

바위쇠는 가슴에 넘치는 뜨거운 기운을 어쩌지 못하여 왈칵 복사녀을

쓰러 안았다. 그녀의 따뜻한 체온을 온몸에 느끼면서 바위쇠는 은근한

목소리로

고마워, 그런데 나는 뭣을 주면 될까?

하였다.

나야 아무것도 안 작고 있어도 괜찮아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기다리겠어요, 부디 몸 성히 돌아오시기나 해요,

그럼 돌아오고 말고, 꼭 돌아올테니 아무 걱정 말어

서리라도 내릴듯 밤 공기가 여간 선득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이제

조금도 그런 줄을 몰랐다. 밤이 깊어 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출정하는 일행이 마을을 떠난 것은 이튿날 아침 나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남녀 노소 할것없이 온통 모두 나서서 전송을 하였다.

바위쇠는 동구 앞에 모인 사람의 무데기 속에서 복사녀를 찾을려고

두리번거렸으나 끝내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가 않았다. 가슴 한쪽이

흔들리는 듯 무너지는 듯 하였으나 어쩌는 수가 없었다.

복사녀는 아무도 몰래 혼자서 뒷산 언덕마루로 올라 갔던 것이다. 거기

타박솔 뒤에 몸을 숨기고 서서 출정하는 일행을 살피고 있었다. 바위쇠가

동구 앞에 모인 사람들 쪽을 두리번거릴 때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깨물곤 하였다. 어느덧 그녀의 탐스러운 볼에는 두 줄기의

뜨거운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었다.

일행이 동구 앞을 떠나 벼가 누우렇게 물결치는 들녘으로 점점 멀어져

가더니 마침내 저 건너편 언덕 모롱이를 돌아 사라져 버리자 복사녀는

그만 그자리에 풀석 엎으러지는 것이었다. 엎으러져서는 어깨를

들먹거리며 서럽게 서럽게 흐느끼는 것이었다.

 

< 4 >

어느덧 가을도 저물어 가고, 온 들녘을 매운 바람이 휘몰아 치는 무렵

싸움터에 나갔던 젊은이들 중에서 단 한사람 검달이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무슨 큰 사건이라도 일어난듯 검달이네 집으로 모여

들었다. 검달이는 여러 사람들에게 싸움터에서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난 몸서리나는 경험담을 들려 주는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여러 사람들은 숨을 크게 쉬지 못하였다.

바위쇠네 부모를 위시해서 출정한 젊은이들의 가족들은 얼굴 빛이

무섭도록 험악해 갔다. 집 모서리에 모여 서서 검달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처녀들 중에는 복사녀도 섞여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핏기가

조금도 없었다. 아랫입술이 경련을 일으킨 듯 이따금 가느다랗게

떨리기도 하였다.

검달이의 이야기에 의하면---

바위쇠랑 검달이들이 끼어 있는 신라의 신졸(新卒) 일대(一隊)

백제군의 본거지를 기습하기 위해서 진()을 떠난 것은 달이 휘영청 밝은

깊은 밤중이었다. 기침소리 하나없이 산등성이를 타고 적진의 배후를

향해 가는 군졸의 대열(隊列)은 정연(整然)하였다.

어느 산봉우리에 이르렀을 때 산줄기는 두 쪽으로 갈려져 나가고

있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오른쪽 줄기가 가가 뻗칠곳에도 불빛들이 빤짝

거리고 있었고, 멀리 왼 쪽 산맥이 뻗칠 곳에도 한떼의 불빛들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오늘 낮의 척후병(斥候兵)의 보고에 의하면 결코

그럴 까닭이 없는 데 이상한 일이었다.

대열은 멈추어 졌고 병졸들은 모두 긴장하였다. 공론 끝에 결국 오른쪽

편에 산재해 있는 불빛들이 적의 본거지의 불이라는 것이 확인되었고,

거기를 습격하기로 결정이 내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미심쩍은 것은

왼쪽으로 바라보이는 불빛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오래기처럼 한줄로 이어져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행군하고 있는

대열인 듯 싶었다. 그것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의문을 남긴 채 대열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산등성이에서

비탈을 타고 내려 적진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는 달도 어느덧 서천으로

기울어지고, 멀리 일렬로 움직이고 있떤 불빛들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제 한시도 머뭇거릴 겨룰이 없었다. 돌격의 명령이 내리자마자

우렁찬 함성이 고요한 밤 하늘을 마구 흔들어 댔다. 풀속에서 뛰어 나온

군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의기충천하여 잠자고 있는 백제군의

진지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적막한 들판이 금새

일대수라장(一大修羅場)으로 화하고 말았다.

바위쇠는 물론 검달이들도 용감하게 덤벼들었다. 삽시간에 적의 진지는

쑤셔놓은 벌집처럼 억망진창(엉망진창)이었다. 기습을 받은 백제의

군졸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거미새끼들 처럼 뺑소니를 치기에 바빴고, 놀란

말들은 껌충껑충 뛰어 오르면서 하늘을 향해 코를 마구 불었다.

기습은 완전히 성공하였다.

무수한 적을 무찌르고 유유히 귀영(歸營)의 길에 오른 병졸들은 마음껏

떠들어 댔다. 한바탕의 신명나는 싸움때문에 흥분될대로 흥분된 그들은

크게 소리를 지르고 웃기도 하였고, 휘휘 휘파함을 불기도 하였다. 나는

몇놈의 목을 날렸다느니 나는 어떤치의 사타구니께를 칼로 쳐버리기도

했다느니--- 제각기 무공담(武功談)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렇게 떠들어 대며 어느 산기슭을 돌아 가고 있을 때였다.

산등성이에서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화살이 빗발처럼

마구 쏟아져 내려오는 것이었다.

역습(逆襲)이었다.

아까 산등성이에서 멀리 바라보이던 실오래기 같은 불빛의 군졸들에

틀림 없었다. 너무나도 방심(放心)을 하였기 때문에 대열은 무너져

버리고 제가끔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살길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것이었다.

더러는 바위에나 나무등걸 같은데에 은신하고 활시위에 화살을 가져가는

사람도 있고 하였다.

바위쇠가 그런 무사(武士) 중의 한사람이었다. 빗발치는 적의 화살을

두려워하지 않고, 덤불 속에 은신하여 활시위를 힘껏 잡아 당기곤 하였다.

그럴 때 마다 화살이 무서운 힘으로 산등성이를 향해 날라가는 것이었다.

검달이가 바위쇠 곁으로 기어 갔을 때는 산등성이에서 활을 쏘기만 하던

백제군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산이

와그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무서운 기세였다.

신라군은 끝끝내 맥을 추지 못하였다. 패주 또 패주였다. 바위쇠와

검달이도 죽어라 하고 달렸다.

어떤 개울 가에 이르렀을 때 바위쇠의 안주머니에서 쨍그랑 하고

떨어지는 물건이 있었다. 석경이었다. 달빛에 번쩍이는 석경.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 하고 달리는 판인데 석경 하나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그러나 바위쇠는 뜀박질을 멈추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냥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바위쇠가 그것을 줏으러 가는 사이에

검달이는 벌써 얼마나 뛰었는지 몰랐다.

검달이가 본진(本陣)으로 돌아간 것은 희끄므레 하게 새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살아서 먼져 돌아와 있는 동료들의 수효는 불과 십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날 검달이보다 늦게 생환(生還)하는 병졸들이 더러 있긴

했으나 끝내 바위쇠를 비롯해서 노룻골의 친구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검달이의 이야기가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일시에 큰 숨들을 내쉬었다.

출정한 젊은이들의 가족들은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하였고,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우울한 얼굴로 곧장 장탄식(長歎息)이었다.

복사녀는 검달이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거기서서 듣고 있질 못하였다.

바위쇠가 떨어진 석경을 줏기위해서 뜀박질을 멈추고 돌아섰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녀는 눈 앞이 노오래지며 하늘과 땅이 한꺼번에 비잉

돌아가는 듯하여 비실비실 그 자리를 뜨고 말았던 것이다.

검달이네 집을 나온 복사녀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길로 언덕마루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그 이가 그 이가 정말 죽었단 말인가? 아아- 그 석경때문에 죽게

되었단 말인가? 그게 정말일까? 정말이라면 그 이를 내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늘도 하늘도 무심하다. 너무하다. 그 이를

죽이다니, 죽이다니---

복사녀의 오장육부는 마구 찢어지는 듯 하였다. 언덕마루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모른다. 멀리 동구앞 길을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에는

피보다도 진한 눈물이 아프게 아프게 맺히는 것이었다.

동짓달 사나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사정없이 날리며 불어 갔다.

저 길로 멀어져 가더니, 저 언덕모통이를 돌아 사라져 가더니--- 흐흑

마침내 복사녀는 그 자리에 힘없이 엎으러지고 말았다.

 

< 5 >

바위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부터 복사녀는 집안에서나

집밖에서나 통 말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찬바람에 섞여 희뜩희뜩

눈이 나리기 시작했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마을안 골목까지

호랑이가 내려와 쏘다녔다는 이야기가 동네를 시끌하게 했을 때도, 그저

그렇거니쯤 여기는 것이었다.

밤이면 잠을 자지 않았고, 낮에도 집안일을 거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노상 실신한 사람처럼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따금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아무도 모르게 방바닥에 엎으러져 오래오래

흐느껴 울기도 하였다.

그녀의 부모는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무슨 곡절이 있거니쯤 짐작은

했지만, 일을 어떻게 수습했으면 좋을지 몰라 퍽으나 초조한 나날을

보냈다.

그럴 무렵에 생겨난 것이 검달이와 복사녀와의 혼담이었다. 여러

모로(여러모로) 걱정이 되던 복사녀의 부모는 그렇게라도 얼른 처리해

버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검달이가 복사녀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하였고, 검달이네 부모들도 복사녀라면 마을에서 제일 가는 처녀인지라,

여간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다. 복사녀의 부모들도 찬성을 하였으니

혼인은 이미 결정적이었다. 남은 것은 다만 절차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말이 들려도 복사녀는 이렇다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세상만사가

무의미하였고, 귀찮을 따름이었다.

그 해 겨울은 여니해보다 눈이 많이 쏟아져 내렸다. 마을의 집집들은

물론 뒷산도 언덕마루도 온통 눈이 덮여 백금의 무더기인 듯 번쩍거렸고,

동구앞 들에도 백설은 은세계를 이루어 놓았다.

섣달도 지나가고 새해의 정월도 저물어 갈 무렵 복사녀와 검달이의

혼인식은 거행되기로 결정이 되었다.

마을 총각들이 모두 싸움터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검달이가 복사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보면

검달이는 여간한 행운아가 아니었다.

내일이면 복사녀는 검달이의 아내가 되는 날 밤이었다. 자정이 훨씬

넘었을 무렵까지 집에서는 음식 준비에 바빠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곤하게 잠들어 버리고 난 뒤, 복사녀는 이불 속에서

소리도 없이 빠져 나와, 방문을 살며시 밀고, 바깥으로 나갔다. 마루

밑에서 신을 찾아 신은 그녀는 눈이 깔려 있는 마당을 조심조심 걸어서

사립을 밀고 집을 나서 버리는 것이었다.

자정이 훨씬 넘은 겨울 밤의 공기는 귀와 코를 도려내는 듯 하였으나,

그녀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마을을 빠져 나가, 뒷산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었다.

내가 검달이의 아내가 되다니--- 말도 아닌 소리다. 검달이? !

복사녀는 연신 자기의 운명을 비웃어 댔다.

눈이 무릎을 묻는 골짜구니를 자꾸 기어 올라, 그녀는 마침내

애기소에까지 오고 말았다. 애기소. - 바위쇠와의 아름답던 사랑의

보금자리. 그 정답던 반석도 지금은 눈 속에 묻혀 보이지가 않는다.

깊이를 모르는 애기소의 물만이 이 추위에도 얼어 붙질 않고, 찰랑찰랑

넘치고 있다.

복사녀는 아무렇게나 그 물 가에 퍼지고 앉았다. 이미 추위를 느낄

그런 감각은 온몸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가슴속에 다만 한 가닥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불길은 지금 그녀의 목숨을 조금씩

조금씩 불사르고 있는 것이다.

검달이에게로 시집을 가느니보다는 차라리 이 물 속으로 뛰어 들자.

이미 죽어서 저승에 가 있는 그 이를 따라 나도 가자. 가서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소원을 저승에서라도 이루어야지

찰랑찰랑 넘치는 물을 노려보는 복사녀의 두 눈은 무섭도록 싸늘하였다.

눈물 같은 것은 벌써 의미를 상실한지가 오래였다. 마지막 한번의

피나는 의지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녀가 죽음을 각오한 것은 검달이가 돌아온 바로 그 날

언덕마루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듯 오늘까지

단행(斷行)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단행을 하지 못한데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도 바위쇠가 혹시 살아서 돌아오지나

않을까 하는 실같은 한가닥의 희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허물어지고 말았다. 내일이면 마음에도, 꿈에도 없는 검달이의 품에

안겨야 할 굴욕의 몸이 되고 만 것이다. 살아서 뭘 하겠는가?

그녀는 어금니를 빠드득 깨물었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치맛폭으로

머리를 뒤집어 썼다. 눈 앞이 갑자기 깡깜(깜깜)해 졌다. 눈을 감았다.

깡깜하던 눈 앞에 보름달처럼 떠오른는 것이 있었다. 바위쇠의

얼굴이었다.

아아 얼마나 얼마나 애태우며 기다리던 얼굴이냐. 이 얼굴 때문에

긴긴 겨울 밤을 얼마나 안타까운 몸부림으로 새웠더냐--- 아아 이 얼굴!

이 얼굴!

복사녀는 아랫도리에 열이 벌겋게 오르는 것을 어쩌지 못하였다.

바탕 단꿈을 꾸고 난 뒤처럼 머리 속도 어지럽고 노자근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바로 이 때, 마을 쪽에서 두번째의 닭이 홰를 치며 울었다.

날이 밝는다, 날이 밝으면 아아- 날이 밝으면---

복사녀의 온몸에서 미친 듯이 솟구쳐 오르는 기운이 있었다.

순간! 간장을 끊는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툼벙!

애기소의 잔잔한 물결이 깨어지고, 커다란 파문이 자꾸만 번져 나갔다.

그리고는 밤은 다시 무섭도록 고요해 졌다.

슬픈 일이 많았던 노룻골의 겨울도 어느덧 지나가고, 산에서 눈 녹는

물이 쫄쫄쫄 흐르기 시작하였다. 산비탈 양지쪽에는 벌써 할미꽃이랄지

진달래가 봉오리를 맺었고 들녘에도 파릇파릇 새순들이 보기 좋게 솟아

올랐다.

그런 어느 날.

멀리 언덕 모둥이를 돌아 동구앞 길을 찔룩찔룩 걸어오는 웬 병신 같은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마침 밭갈이를 하고 있던 검달이는 저게 웬 사람이까 하고 그 수상쩍은

내객(來客)의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게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지나가는 나그네인 모양이었다. 그 초라한 행색의

나그네는 검달이에로 가까이 오더니

아 이 사람아!

하고, 알은 체를 하는 것이었다. 검달이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나 바위쇠여

! 바위쇠?

참으로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바위쇠가

살아서 이렇게 돌아오다니--- .

마을은 발칵 뒤집혀졌고, 울음소리가 다시 쏟아졌다.

절룸발이(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온 그를 맞이하여,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바위쇠네 집안 사람들의 눈물. 혹시 우리 아무게도 살아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눈물들. 그리고 공연히 딸생각이 나서 쏟아지는

복사녀의 부모의 원통한 눈물.

봄이 돌아왔건만 노룻골의 슬픔은 좀해서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신라의 기습군이 역습을 당하던 그 날 밤, 바위쇠는 떨어진 거울을 집어

들다가 적군의 화살에 넙쩍다리를 맞았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하여 뛴

보람이 있어 적군의 눈을 피하게 되었고, 어느 깊은 산중의 이름도

국적(國籍)도 없는 마을에서 화살에 맞은 다리를 치료하며 겨울을 났던

것이다.

천명으로 살아서 고향에 돌아온 바위쇠는 무엇보다도 복사녀의 소식이

궁금하였다. 그래서 고향에 돌아온 이튿날 검달이를 찾아 갓다.

이 사람아 검달이! 복사녀도 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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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달이는 대답이 없을 뿐 아니라, 이상스러운 빛이 두 눈에 떠올랐다.

일종의 질투와 저주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 사람 왜 말이 없나?

! 복사녀, 죽은지가 언제라고

뭣이! 복사녀가 죽어! !

물에 빠져 뒤진지가 언제라고, 애기소에 빠져 뒤졌어! 뒤져!

에익!

어느새 바위쇠의 주먹은 검달이의 뺨을 가서 보기 좋게 갈겨 놓았다.

으악!

하고, 나가 쓰러지는 검달이의 몸뚱아리를 바위쇠는 되는대로 마구 차

넘겼다.

이놈 자식아! 니가 죽였지 니가, 니가 복사녈 못살게 했지! ! !

 

바위쇠의 목줄기에는 시퍼런 핏대가 몇 개나 몇개나 붉어져 올랐고,

온몸은 사시나무 떨듯 마구 떨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노여움의

화신(化身)인 듯 하였다.

봄은 무르익어 가고 있건만 노룻골에는 앞으로 또 어떤 종류의 슬픔이

생겨날는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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