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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조사 진철대사비(廣照寺 眞澈大師碑)

by 연송 김환수 2013. 6. 29.

 

광조사 진철대사비(廣照寺 眞澈大師碑)

 

시대 : 고려

연대 : 937(태조20)

유형/재질 : 비문 /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 228.8cm, 115.1cm, 글자크기 2.8cm

출토지 :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광조사

소재지 :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광조사

서체 :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최언위(崔彦撝) / 이환상(李奐相) / 상신(常信)

 

 

 

고려 광조사 진철대사탑비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광조사

 

이 광조사 진철대사탑비는 937(청태4)에 죽은 진철대사(이엄)의 부도비로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광조사에 위치하고 있다.

 

비는 귀부(거북받침), 비신, 이수(용틀임)로 이루어졌다.

 

거북이의 네 발은 바닥돌을 힘있게 딛고 있고, 잔등의 6각 구갑무늬는 세겹으로 새겨 안에 왕()자를 새겼다.

 

거북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겨, 부릅뜬 눈과 사납게 벌린 큰 입 등은 마치 살아있는 동물처럼 느껴진다.

 

비의 앞면에 만 해서체로 된 비문이 새겨졌다. 이수는 네 모서리 쪽으로 머리를 둔 네 마리의 용이 운동감이 넘치게 새겨졌며, 그 앞면 방형의 구획 안에 비명을 새겼다.

 

빗머리의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이 있고 작은 연꽃잎들을 새겼다.

 

귀부를 비롯한 비의 조각은 전반적으로 힘차고 기백있어 고려 초기의 비 형식과 발전된 돌 조각기술을 잘 보여준다. (높이 3.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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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황해도 해주시 학현동에 있는 국보 문화유물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초의 고승이자 광조사의 주지였던 진철대사 이엄(利嚴)의 부도비로, 937년(고려 태조 20)에 조성했다. 높이 2m, 너비 1m, 받침돌 높이는 1m이다.

 

고려 건국에 숨은 공이 컸던 진철대사가 죽은 다음해에 태조 왕건이 진철(眞澈)이라는 시호와 함께 보월승공(寶月乘空)이란 탑비명(塔碑名)을 짓고 문인 최언위(崔彦)가 대사의 도학과 생애를 적은 비문을 지어 새긴 것이다.

 

귀부(거북받침), 비신, 이수(용틀임)로 이루어졌다. 거북 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겼으며, 두 눈은 부릅뜨고 입은 크게 벌린 상태이다. 거북 등 가운데에 직사각형의 비좌를 설치하고 대리석으로 된 비신을 세웠다. 비문은 비의 앞면에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광조사의 건립 배경과 진철대사의 일대기가 주 내용이다.

 

이수(螭首)는 낮은 구름과 힘찬 용무늬를 새긴 신라 말의 양식이다. 구조 전체가 당시 고려 건국기의 강건한 기백을 여실히 보여 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비교적 초기의 석비로, 신라말~고려초의 역사와 언어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는 금석문이다.

 

비의 찬자는 최언위(崔彦撝)이며 이환상(李奐相)이 썼다. 최언위는 최인연(崔仁渷)과 동일인으로 고려에 귀순한 후 개명하였으며, 이환상은 이환추(李桓樞)라고도 했는데, 『해동금석존고』에서 이오상(李吳相)이라 한 것은 이환상의 오기로 보인다. 비문의 서체는 해서로, 대체로 구양순(歐陽詢)계통의 서풍을 띠고 있다

 

 

 

 

황해도 해주시 학현동 광조사(廣照寺) 터에 현존하는 비이다. 신라 말의 선사로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 마지막으로 형성된 산문인 수미산문(須彌山門)의 문호를 연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 : 경문왕 10, 870~ 태조 19, 936)의 생애를 기리는 탑과 함께 세운 비이다.

 

비문은 여말선초에 활동한 대표적 문인인 최언위(崔彦撝)가 지었고, 이환상(李奐相)이 썼으며, 상신(常信)이 새겨서 진철대사가 돌아간 이듬해인 937(고려 태조 20)에 세웠다. 현재 35행에 177자의 비문 구성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대사의 가계와 탄생에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출가와 수행 및 중국에 유학하여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이어 귀국하고 귀국 후에 교화한 활동을 서술하였으며 입적과 비를 세우는 과정에 이은 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라말 선사들의 출가와 수계 그리고 입당 수학과 귀국 및 당시 호족들과의 관계, 그리고 개경에 가까운 해주 수미산에 산문이 설립되는 과정을 통해 본 고려 태조의 불교계 정책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일찍부터 금석 관련 문헌에 실려 알려졌고 탁본도 남아 있다.

 

 

 

유당(有唐) 고려국(高麗國) 해주(海州) 수미산(須彌山) 광조사(廣照寺) () 교익진철(敎謚眞澈) (결락).

 

문인(門人) 원보(元輔) 검교(檢校)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겸어사대부(兼御史大夫) 권지(權知) (결락) 최언위(崔彦撝)가 왕명을 받들어 찬하고, (결락) () 이환상(李奐相) (결락) 이 비문을 쓰고 전액(篆額)까지 쓰다.

 

옛날 육신보살인 혜가선사(惠可禪師)는 노자(老子)가 기회 있을 때마다 항상 천축(天竺)에서 탄생한 우리의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해 말하였으며, 공자(孔子)도 제자들로부터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위대한 성인이냐고 물음에 대하여 서방(西方)의 석가(釋迦)는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감화가 되는 대성인(大聖人)이라고 찬양하였다라고 들었다.

 

달마대사는 총지(總持)의 임완(林菀)이요, 불이(不二)의 천택(川澤)이다. 그는 멀리 중국에 선법(禪法)을 전파하고자 양()나라로 건너와서 양무제를 만났으나 기록(機緣)이 투합(投合)하지 못하였다. 다시 위()나라로 가서 효무제(孝武帝)를 만나고는, 아직 선법(禪法)을 펼 때가 오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숭악(嵩岳) 소림굴(少林窟)에서 9년 동안 면벽(面壁)하였다.

 

법을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법인(法印)을 전수(傳授)하지 않다가 비로소 대홍(大弘)인 혜가(慧可)를 만나 심법(心法)을 주고 겸하여 가사를 줌으로써 신표(信表)를 삼았으니, 이 또한 우담발화(優曇鉢花)가 세상에 한 번 핀 것과 같았다.

 

그 후 5() 홍인대사(弘忍大師)에 이르기까지 사자상승(師資相承)하면서 그 도가 더욱 존중되어 끊어지지 않았다.

 

6조 대감(大鑑)에 이르러서는 모든 종파가 함께 존숭(尊崇)하였으나, 그 후부터는 많은 영납(英衲)이 출세하여 분파대립(分派對立) 수견(殊見)이 심하게 되자 이때부터 신의전수(信衣傳授)가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조계혜능(曹溪惠能)을 존조(尊祖)로 삼아 법수(法水)가 길이 흘러 (결락) 하늘에까지 넘쳐 흘렀으니, 마치 노공(魯公)이 국정을 행함에 먼저 문왕(文王)의 전통을 계승하였고, 강숙(康叔)의 가풍 즉 국정지표는 주실(周室)의 제도를 존숭(尊崇)하였던 것과 같다. ()을 감당할 만한 그의 뛰어난 제자는 남악회양과 청원행사 두 사람이었고, 그 휘하에 많은 도제(徒弟)가 배출되어 퍼져 나감이 끝이 없었다.

 

회양을 계승한 스님은 마조(馬祖)인 대적(大寂)이고, 행사(行思)를 사법(嗣法)한 이는 석두희천(石頭希遷)이다. 이어 석두는 약산유엄(藥山惟儼)에게 전하고, 약산은 운암담성(雲岩曇晟)에게, 운암(雲岩)은 동산양개(洞山良价)에게, 동산(洞山)은 운거도응(雲居道膺)에게, 운거(雲居)는 대사(大師)인 진철이엄(眞澈利嚴)에게 각각 전하였으니, 이와 같이 진리의 등불을 전하여 광명(光明)을 계승함으로써 사법존조(嗣法尊祖)의 사자상승(師資相承)한 본적에 더욱 빛나게 하였다.

 

스님의 법위(法諱)는 이엄(利嚴)이고, 속성은 김씨이니, 그의 선조는 계림(鷄林)사람이었다. 스님의 모국(母國)과 조상을 상고해 보니 본래 성한(星漢)의 후손이었으나, 먼 조상 때부터 점점 세도(世道)가 쇠락하였다. 사로(斯盧 : 신라)가 여러 차례의 국난을 겪으면서 가세(家勢)가 몰락하여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웅천(熊川)에 이르렀다.

 

아버지의 이름은 장()이니 깊이 운천(雲泉)을 사랑하여 부성(富城)의 들판에 우거(寓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사는 소태(蘇泰)에서 탄생하였으니 신상(身相)에 많은 기이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죽마(竹馬)의 나이에도 마침내 (결락) 함이 없었다.

 

12살 때 가야갑사(迦耶岬寺)에 가서 덕양법사(德良法師)에게 나아가 간절한 마음으로 품은 뜻을 피력하고 은사(恩師)스님이 되어 주길 간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그로부터 반년 이내에 경··론 삼장(三藏)을 두루 통달하였다. 스님이 이엄(利嚴)에게 이르되 너는 마치 유실(儒室)의 안생(顔生)이요, 석문(釋門)이 환희(歡喜)와 같으니 옛말에 후생가외(後生可畏)란 말을 자네에게서 증험하겠다하였다.

 

오랜 숙세(宿世)로부터 인()을 심은 사람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으리오. 그러므로 그의 어머니가 처음 임신할 때 어느 날 밤 꿈에 신승(神僧)이 와서 푸른 연꽃을 전해 주고는 이것으로써 영원히 징신(徵信)을 삼는다하였다.

 

이것은 곧 세간(世間)의 진로(塵勞)를 끊고 진리와 계합함을 상징함이니, 회임(懷妊)할 때 푸른 연꽃을 받은 것이 곧 이 뜻이라 하겠다. 중화(中和) 6년 본사인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도견율사(道堅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부터는, 유발(油鉢)이 조금도 기울어짐이 없었고 부낭(浮囊)이 조금도 새지 않는 것과 같이 하였으니, 삼보(三寶) 중 하나인 사문(沙門)의 위()에 참여하여 오직 안거(安居)중에만 부지런히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초계비구(草繫比丘)와 같이 지율정신(持律精神)을 마음에 새겼으니, 어찌 평생에 간절히 지키는데만 그쳤으랴.

 

그 후 돈독한 마음으로 도를 묻기 위해 서방(西方)으로 스승 찾기를 결심하고는 행장(行裝)을 꾸려 하산하였다. 육환장(六環杖)을 짚고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건녕(乾寧) 3년에 이르러 마침 절강성(浙江省)인 전당(錢塘)으로 가는 사신 최예희(崔藝熙) 대부(大夫)를 만나 그 배에 편승(便乘)하게 되었다. 돛을 높이 내걸고 문득 파도를 넘어 얼마 되지 않아 은강(鄞江)에 이르렀다.

 

당시 운거도응대사(雲居道膺大師)가 선문(禪門)의 법윤(法胤)임을 듣고 천리를 멀리 여기지 않고 바로 그의 문하에 나아가 친견하였다. 대사가 말하되 서로 이별한 지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다시 만남이 그리 빠른가?”하니, 스님이 대답하되 일찍부터 친히 모신 적도 없는데 어찌하여 다시 왔다고 말씀하십니까?”하였다. 대사가 묵묵히 입방(入榜)을 허락하시니 그윽이 서로 통함이 있었다.

 

그 후 6년 동안 수행하면서 혹한의 고통을 이겨 신심이 더욱 견고하였다. 어느 날 대사가 이르시되 ()는 본래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히는 것이므로, 동산(東山)의 종지(宗旨)가 타인의 손에 있지 아니하며 불법(佛法)의 중흥이 나와 너에게 달려 있으니, 나의 도()가 동국(東國)으로 흘러가리니 이것을 생각하며 또한 이 뜻을 놓치지 말라하였다. 스님은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을 이상(圯上)에서 만났던 것과 같은 고생을 하지 아니하고도 쉽게 법왕(法王)의 심인(心印)을 받았다. 그 후 영남(嶺南)과 하북(河北)으로 돌아다니면서 스투파(窣堵波)인 명찰(名刹)과 성지(聖地)를 순례하고, 호외(湖外)와 강서(江西)를 행각(行脚)하면서 모든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참견(叅見)하였으니, 북쪽으로는 항산(恒山)과 대산(岱山) 등을 답사하여 두루 순유(巡遊)하지 아니한 곳이 없었으며, 남쪽으로는 형산(衡山)과 려산(廬山) 등 발이 닿지 않은 산이 없었다. 그 후 여러 제후(諸侯)를 알현(謁見)하고는 목민(牧民)의 헌칙(獻勅)을 베풀고, 열국(列國)으로 다니면서 그 나라마다의 풍속을 살피기도 하며, 서방(四方)으로 선지식을 참방하여 오()와 한()나라까지 유력하였다.

 

천우(天祐) 8년에 이르러 뗏목으로큰 파도를 무사히 헤치고는 나주(羅州)의 회진(會津)에 도달하였다. 이 때 스님은 부두의 한 구석에 배를 매어둔 채로 모든 것을 던져버리면서 잘 있으라 인사하고 이어 풍신(風神)인 병예(屛翳)에게 감사하고 동쪽으로 정처 없이 지나다가 김해(金海)까지 이르게 되었다.

 

마침 김해부(金海府) 지군사(知軍事) 소공(蘇公) 율희(律熙)의 귀의(歸依)를 받게 되었으니, 승광산(勝光山)중 연하(煙霞)의 절경(絶景)에 터를 잡아 절을 짓고 정성스러운 큰 뜻을 경주하여 이 절에 계시도록 청하였다. 마치 도리(桃李)나무는 구경꾼에게 찾아 오라고 불러들이지 아니하나 저절로 길이 생겨나는 것과 같이 또는 벼와 삼밭처럼 대중이 열을 지어 모여들었다.

 

이 진경(眞境)에 주석한 지 어언 네 번의 성상(星霜)이 지나갔다. 스님은 마음으로 선림(禪林)을 사랑하였으며 또한 세상을 등지고 수도함에 답답하거나 불편해 하지는 않았으나, 지리적으로 적굴(賊窟)과 인접되어 수도에 안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위험하거나 시끄러운 곳에서 머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곳에 머문 지 12년 만에 이석(移錫)하여 사화(沙火)를 거쳐 준잠(遵岑)에 도착하여서는 영동군(永同郡) 남쪽이며 영각산(靈覺山) 북쪽인 곳에 토굴을 짓고 잠깐 머물자 스님과 신도들이 스님의 도풍(道風)을 듣고 찾아와 귀심(歸心)하는 이가 많았다.

 

그 때 태조(太祖) 임금이 스님의 도덕(道德)이 천하에 으뜸이며 명성(名聲)이 해동(海東)을 뒤덮었음을 듣고, 스님을 직접 뵙고자 하여 자주 학판(鶴版)을 보냈다. 스님이 대중에 이르되 임금이 다스리는 땅에 거주하는 자가 감히 왕명(王命)을 거역할 수 있으리요하고는 내가 임금을 보고자하는 것은 왕의 국사를 돕고 나아가 부처님께서도 왕에게 불법의 외호를 맡기신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서울에 가려 한다하고, 곧바로 서울인 제양(帝壤)을 향했다.

 

임금은 거듭 대업(大業)을 빛나게 하였으니, 우러러 그 성덕(聖德)이 고산(高山)과 같음을 알고 태흥사(泰興寺)를 수축하여 스님이 계시도록 청하였다.

 

다음 해 2월 중에 특사인 전() 시중(侍中) 권설(權說)과 태상(太相) 박수문(朴守文)을 보내어 다시 사나내원(舍那內院)으로 맞이하여 주지(住持)하기를 청하였다.

 

곧 이어 예궁(蘂宮)에 처소를 꾸며 모시고 높이 연화좌(蓮華座)를 펴고 사자(師資)의 예로써 대우하여 공손히 찬앙의 예의를 바치니, 마치 서역의 마등(摩謄)스님이 일찍이 한()나라 명제(明帝) 임금의 궁전에 오르고, 강승회대사(康僧會大師)가 비로소 오()나라 임금 손권(孫權)의 수레를 탄 것과 같았다.

 

드디어 스님은 법상에 올라 불자(拂子)를 떨치면서 설법하니 임금(龍顔 : 용안)은 크게 기꺼워서 우러르는 마음이 신금(宸襟)을 감동케 하였다. 이 때 임금과 스님이 만나 서로 반가워한 것이 마치 물과 고기가 서로 좋아하는 듯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 후 임금이 한가한 틈을 타서 스님이 있는 선비(禪扉)로 찾아가 묻기를, “제자는 공손히 스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대하여 진솔한 간청을 드리고자 합니다하고는 지금은 나라의 역적들이 점점 시끄럽게 하고 인근의 적들이 서로 침범하는 것이 마치 초()의 항우(項羽)와 한()의 유방(劉邦)이 서로 버티는 것과 같아서 아직 그 승부(勝負)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삼기(三紀), 36여 년 동안 항상 이흉(二兇 : 궁예와 견훤)이 있어 마음에는 비록 살리기를 좋아하지만, 반대로 점점 서로 죽이고 있습니다.

 

과인(寡人)이 일찍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그윽이 자비한 마음을 일으키고 있으나, 만약 살생을 주저하거나 적을 업신여겨 마치 구경하듯 방치해 두면, 나라는 물론 자신까지 위태롭게 하는 앙화(殃禍)를 부를까 두렵습니다.

 

스님께서는 만리(萬里)의 먼 길을 사양하지 마시고 오셔서 삼한(三韓)을 교화하고, 온 나라 강산(江山)의 곳곳마다 전쟁에 휩싸여 불타고 있음을 구제하시길 바라오니, 좋은 말씀이 있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하였다.

 

스님께서 대답하시길 대저 도()란 마음에 있고 밖에 있지 않으며, 나를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요, 결코 타인으로 말미암음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제왕과 필부(匹夫)의 닦을 바가 각각 다르지만, 임금께서는 비록 군사를 동원하여 적과 싸우더라도 항상백성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은 왕이란 본래 사해(四海)로써 집을 삼고 만민을 아들로 여겨 무고한 사람은 죽이지 말고 죄가 있는 무리만을 엄선하여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곧 널리 중생을 제도함이라고 합니다하니, 법문(法門)을 들은 임금이 책상을 어루만지면서 찬탄하되 우리 속인들은 심원한 진리가 먼 곳에 있는 것으로 잘못 알아서 미리 염라대왕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참으로 천상과 인간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하였다.

 

스님은 다시 당부하기를 가능한 한 사형할 죄인의 죽이는 시기를 완화하고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을 연민히 여겨 도탄에서 벗어나게 하라하였으니, 이것은 곧 스님의 덕화(德化)였다.

 

그 후 스님은 서울인 경련(京輦)에 머물러 여러 해를 지났는데 항상 산천에 마음이 끌리고 열반(涅槃)할 곳을 선택하여 안개 속에 숨어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 소문을 들은 임금이 스님의 도정(道情)을 막지 못하여 그윽이 서로 이별함을 아쉬워 하다가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마침내 허락하였다.

 

스님께서 임금과 작별하는 때에 슬픈 소감을 피력하여 어진 임금의 크나 큰 서원(誓願)은 불법(佛法)을 지켜나가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멀리까지 외호(外護)하는 은혜(恩惠)를 드리워 창생(蒼生)이 영원히 복()을 쌓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후 장흥(長興) 3년에 개경(開京)의 서북이며 해주(海州)의 남쪽에 신령스런 봉우리를 택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광조사(廣照寺)라 이름하고는 이곳에 스님이 거주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약간의 문도(門徒)를 거느리고 이 절에 주석하니 배우려는 학도가 방을 채우고 참선하는 무리들이 당()에 가득하였다. 마치 법융선사(法融禪師)가 북해(北海)에 돌아가서 머문 것과 같고 혜원법사(惠遠法師)가 여산 동림사에서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가진 것과 같다고 하겠다.

 

스님은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느니, 마치 거울이 사람의 얼굴을 비추되 조금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이 하였다. 문하의 대중은 삼밭 같고 그의 뜰은 저자거리와 같았다.

 

그런 까닭에 분위(分衛)인 걸식(乞食)을 하지 않아도 공자(孔子)가 진()나라에서 양식이 떨어진 것과 같은 사정은 면하였다.

 

이에 관장(官㽵)은 삼장(三㽵)으로 나누었고, 공양(供養)은 사사(四事)로 구분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당군(當郡)과 주변의 인주(鄰州)가 모두 깊은 신심(信心)을 내었다.

 

아울러 청청한 행을 닦았으니 곧 담복화(薝蔔花)가 보배나무 수풀 속에 의지한 것과 같았으며, 전단향 나무가 암마라과수의 무리에 섞인 것과 같았다.

 

스님이 먼저 와서 둘러본 다음 여러 대중이 함께 산을 살펴 터를 골랐다. 스님이 어느 날 혼교(魂交)에 이르러 신()이 와서 예배하고 공양하니 마치 수()나라 문제(文帝)가 옥천사(玉泉寺)에 있는 천태지자(天台智者)에게 공양을 올리던 것과 같았으며, 정성을 표함에 있어서는 왕이 광조사(廣照寺)를 지어드린 것이 마치 혜원법사(惠遠法師)에게 려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를 지어 올린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으니, 모두 신령스러운 일이어서 귀의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은 류라고 하겠다.

 

어느 날 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되 나 이제 법연(法緣)이 다하였으니 반드시 죽어 타방(他方)으로 떠나리라. 내가 임금과는 옛부터 인연이 있었으니 이제 마땅히 마지막으로 왕을 만나 결별(訣別)의 인사를 하려 한다하고는 행장(行裝)을 꾸려 하산하여 서울에 이르렀다. 때마침 왕은 잠깐 용패(龍旆)를 앞세우고 마진현(馬津縣)에서 죄인을 문책하고 있었다.

 

스님은 병이 심하고 매우 허약함에도 특별히 왕을 만날 기회를 내어 찾아갔으나, 왕이 있는 리두(螭頭)인 마진(馬津)까지는 갈 수가 없어 입적(入寂)을 미리 알리려는 마지막의 기회는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아난(阿難 : 迦葉이라 함은 잘못된 것)이 열반(涅槃)에 들기 전에 아사세왕과 약속하기를, 서로 누구든 먼저 죽게 되면 찾아가서 고별(告別)하기로 한 언약을 지키기 위해 왕을 찾아갔으나, 문지기가 왕이 주무시고 있다 하여 만나지 못하였던 유한(遺恨)과 화하(華夏)의 백양(伯陽)이 임종전(臨終前)에 관윤(關尹)인 윤희(尹喜)를 만나러 갔으나, 만나지 못한 슬픔과 같을 뿐이겠는가.

 

그 다음날 가마를 타고 오룡산(五龍山) 중턱에 이르러 모든 제자를 불러 모으고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엄한 훈계를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라는 유훈(遺訓)을 남기었다.

 

청태(淸泰) 3817일 중야(中夜)에 당사(當寺)의 법당(法堂)에서 엄연(儼然)히 입적하니, 속세 나이는 67세요, 승랍은 48이었다. 이 때에 태양은 처참하고 바람도 처참하였으며, 구름은 수심에 잠긴 듯하였고, 시냇물은 울음을 머금은 듯하였다.

 

문하(門下)의 스님들도 흠모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모두 창자를 오려내는 듯 슬퍼하였다.

 

그 달 20일에 신좌(神座)인 영구를 본산(本山)으로 옮겨 절의 서쪽 기슭에 하관(下棺)하였으니, 절과의 거리는 약 300백보(百步)쯤 되었으며 이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장사지낼 때 사서(士庶)는 계곡을 메웠고, 향화(香華)는 골짜기에 가득하였으니, 마지막을 보내는 의례의 성대함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임금이 사방(四方)으로 순행(巡行)하다가 문득 스님의 열반 소식을 전해 듣고, 대들보가 부러지는 듯한 아픔으로 간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안광(眼光)을 잃은 슬픔이 한층 더하였다. 특명으로 친관(親官)을 보내어 멀리서 조의(吊儀)을 표하였다.

 

스님의 풍모와 정신은 하늘로부터 품 받았으며, 지혜는 날로 새로웠다. 날 때부터 배우지 않고도 잘 알아서 뭇 묘리를 마음에 지녔고, 숙세(宿世)부터 많은 선근(善根)을 심어서 뛰어난 기틀에는 순수함을 간직하였다.

 

그러므로 살아감에 오직 착하게 살도록 인도하고, 미묘(微妙)한 법문(法門)으로 몽매한 중생(衆生)들을 제도하여, 자성(自性)의 바다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마치 산이 빛나고 물이 아름다우면 그 수려(秀麗)한 기운을 감추기 어려운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승광산(勝光山)에서 수미산(須彌山)에 이르기까지이 두 곳에 머물면서 많은 제자들에게 깊이 감추어 두었던 소중한 보배를 나누어 주었고 중국 삼하지방(三河地方)으로 순례(巡禮)할 때에는 모두에게 마니(摩尼)의 보배를 보여주었다. 전업제자(傳業弟子)인 처광(處光), 도인(道忍), 정비(貞朏), 경숭(慶崇) 등과 아울러 상족(上足)에 오른 이들은 모두 전심(傳心)을 감당하였고, 어떤 스님은 니부(尼父)의 인비(仁悲)를 행하기도 하고, 어떤 제자는 복상(卜商)처럼 일생동안 가르침을 의무로 하기도 하였건만, 한탄스러운 것은 보탑(寶塔)은 비록 높이 솟아있으나 스님의 크신 덕을 홍명(洪銘)에 새기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불후(不朽)의 연()인 비를 세우기 위하여 재가제자(在家弟子)인 좌승상(左丞相) 황보제공(皇甫悌恭)과 전왕자태상(前王子太相)인 왕유(王儒)와 전시중(前侍中) 태상(太相) 이척량(李陟良)과 광평시랑(廣評侍郞) 정승휴(鄭承休) 등은 모두 하()나라 우()임금과 같은 선정(善政)을 본받았으며 항상 은()나라의 이윤(伊尹)과 같은 충신들이 있어 진실로 인국(仁國)의 금성(金城)과 탕지(湯池)라 할 수 있으며, 또한 법성(法城) 방벽이며 요새였다.

 

소현대통(昭玄大統) 교훈(敎訓)과는 쇠도 끊을 정도의 굳은 우정으로 의기가 투합하여 진리의 은혜에 대해 깊이 감사함을 느끼고, ()과 교()를 빛내신 큰 이름을 내려줄 것을 청하니, 왕이 조칙(詔勅)으로 그러리라 하였다. 그리고 익호(謚號)를 진철대사(眞澈大師), 탑명(塔名)을 보월승공지탑(寶月乘空之塔)이라고 추증하고, 하신인 나에게 명하였다.

 

스님의 고상하고 위대하신 행적(行跡)을 영원히 선양토록 하라하였다. 언휘(彦撝)는 재주가 연석(鷰石)에 부끄럽고, 학문 또한 형설(螢雪)의 공을 쌓음이 없으므로 사양하였다. 유한(有限)의 미재(微才)로써 스님의 무위법(無爲法)에 통철하신 위대하고 빛나는 행적을 기록하는 것이, 마치 바다 위를 걷는 것과 같이 아득하고, 산을 붙잡는 것처럼 어려워서 묵묵히 그 높고 깊음을 헤아려 보았으나, 그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문도(門徒)인 현조(玄照)스님이 일찍 금구(金口)인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고, 또 한편 스님의 옥음(玉音)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 후에도 귀문(龜文)을 재촉하여 여러 번 누추한 나의 집을 찾아왔는데, 그때마다 초상(抄狀)에 없는 일을 얻어 듣게 되었으니, 마치 밝은 달이 허공에 떠 있고, 맹풍(猛風)이 노을을 쓸어버린 것과 같이 확연하였다.

 

오직 두터운 뜻을 진술하여 스님의 공적(功跡)을 찬양하게 되었으니, 끝으로 임금께서는 이 비문(碑文)을 읽어보시고 돌아가신 스님에 대한 유한(遺恨)을 잊으시길 바라며 아울러 크고 우뚝한 이 비()가 문인(門人)들의 절학(絶學)의 근심과 슬픔을 위로하길 바라노라. 사실을 가장(假裝)하지 아니하고 있었던 일을 진실하게 적었다.

 

다시 명()하여 가로되

스님은 선종의 적윤적손(嫡胤嫡孫)으로써

대대로 상승(相承)하여 당당한 그 모습.

번뇌를 파()해주는 인중(人中)의 사자(師子)이며

우주를 비추는 세상의 법왕(法王)이로다.

깊고도 오묘한 현관(玄關)의 문턱이요

성불(成佛)의 길로 찾아가는 나루터일세.

천축(天竺)에서 전해온 부처님 법()

해동의 곳곳에 전파하였네.

위대하신 우리의 진철대사님!

요동의 왼쪽에서 태어났지만

어찌 국사가 협루(狹陋)하다고 하여

동이(東夷)니 중하(中夏)이니 논할 수 있겠는가.

얼음같은 자태에 눈빛 같은 피부여!

언설(言說)을 봄바람처럼 온화하시고,

입당(入唐)의 구법(求法)에 배를 탔음이여!

노도 같은 설랑(雪浪)을 헤쳐 가면서

서래밀지(西來密旨)의 도를 배우기 위해

운거도응(雲居道膺)의 회하(會下)를 찾아갔도다.

소견(所見)을 인가하고 입실을 허락받아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법인(法印)을 전해 받고는

이름난 명승고적 샅샅이 찾아가서

명안종사(明眼宗師) 남김없이 친견하였네.

험난한 바닷길로 본국에 와서는

홀연히 태조 임금 귀의(歸依)를 받았도다.

임금의 초청으로 궁중에서 설법하니

군신상하의 숭앙함이 비길 데 없네.

해주(海州)의 수미산에 총림(叢林)을 열었으니

조계종(曹溪宗)의 정통법맥(正統法脈) 이어 받았네.

높고도 거룩하신 진철 대종사(大宗師)!

모두가 합장하고 자부(慈父)라 일컬었네.

예고 없이 갑자기 열반에 드시니

하늘도 슬퍼하여 비눈물을 뿌렸도다.

임금이 흠앙하여 시호를 내리시니

위대하신 스님의 법은에 보답함이라.

넓고도 깊은 큰 자비 드리우시어

광조사(廣照寺)의 선우(禪宇)를 길이 비추어 주소서.

청태(淸泰) 4(937) 1220일에 세우고,

각자(刻字)는 군윤(軍尹)인 상신(常信)이 글자를 새기다.

 

출전: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1(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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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臣李

      奐相 ☐☐☐書幷篆額

昔者肉身菩薩惠可禪師每聞老生談天竺吾師夫子說西☐☐☐☐☐☐☐☐☐☐☐☐☐☐☐☐☐☐☐☐☐☐☐☐☐☐☐☐☐☐達摩大師乃總持之林菀不二之川澤也於是遠賷祖法☐☐」

梁而又遊北魏朝往尋嵩岳非人不授始遇大弘因物表心付衣爲信猶亦優曇一現洎于五葉相承其道彌尊不令斷絶格於大鑒玄學咸宗殊見所生信衣斯止是故曹溪爲祖法水長流波☐☐☐」

滔天浩浩猶魯公之政先奉文王康叔之風以尊周室則知當仁秀出者唯二曰讓曰思寔繁有徒蕃衍無極承其讓者大叔嗣其思者石頭石頭傳于藥山藥山傳于雲巖雲巖傳于洞山洞山傳于雲

居雲居傳于大師傳法繼明煥乎本籍且曰

大師法諱利巖俗姓金氏其先雞林人也考其國史實星漢之苗遠祖世道凌夷斯廬多難偶隨萍梗流落熊川父章深愛雲泉因寓富城之野故 大師生於蘇泰相表多奇所以竹馬之年終無☐☐」

年十二往迦耶岬寺投德良法師懇露所懷求爲師事自此半年之內三藏脩探師謂曰儒室之顔生釋門之歡喜是知後生可畏於子驗之者矣則非久植宿因其孰能至於此然則母氏初於有娠

夢神僧來奇靑蓮永爲徵信則知絶塵合契懷日同符中和六年受具足戒於本寺道堅律師旣而油鉢無傾浮囊不漏桑門託位不唯守夏之勤草繫懸心寧止終年之懇其後情深問道志在觀方結

甁下山飛錫㳂海乾寧三年忽遇入浙使崔藝熈大夫方將西泛伌跡而西所以高掛雲颿遽超雪浪不銷數日得抵鄞江于時企聞雲居 道膺大師禪門之法胤也不遠千里直詣玄關大師謂曰曾

別匪遙再逢何早 師對云未曾親侍寧噵復來大師默而許之潜愜元契所以服勤六戴寒苦彌堅大師謂曰道不遠人人能弘道東山之旨不在他人法之中興唯我與汝吾道東矣念玆在玆

師不勞圮上之期潛受法王之印以後嶺南河北巡禮其六窣堵波湖外江西遍叅其諸善知識遂乃北遊恒岱無處不遊南抵衡廬無山不抵謁諸侯而獻勑投列國以觀風四遠叅尋遍於吳漢迺於

天祐八年乘槎巨寖達於羅州之會津此際 大師一自維舟偏宜捨筏珎重屛翳邐迤東征爰有金海府知軍府事蘇公律熈選勝光山仍修堂宇傾誠願海請住煙霞桃李無言稻麻成列一栖眞境

四換周星大師雖心愛禪林遁世無悶而地連賊窟圖身莫安所以亂邦不居於是乎在十二秊途出沙火得到遵岑永同郡南靈覺山北尋謀駐足乍此踟蹰緇素聞風歸心者衆矣

今上聞 大師道高天下聲盖海東相對 龍頤頻飛鶴版 大師謂衆曰居於率土者敢拒 綸音儻遂朝天者須霑顧問付囑之故吾將赴 都所以便遂 皇華來儀帝壤 上重光大業仰止

高山所以脩葺泰興請停慈盖粵二明年二月中特遣前侍中權說太相朴守文迎入舍郡內院虔請住持無何逈飭 藥宮高敷蓮座待以師資之禮恭被鑚仰之儀猶如西域摩騰先陟漢皇之殿康

居僧會始昇吳主之車遂以摩尼發揮 龍顔欣悅其於瞻仰偏動 宸襟此時魚水增歡不可同年而語哉他時乘閒之夕略詣禪扉門曰弟子恭對 慈顔直申素懇今則國讐稍擾隣敵交侵猶似

楚漢相持雄雌未决至於三紀常備二凶雖切好生漸深相殺 寡人曾蒙佛誡暗發慈心恐遺玩寇之仍致危身之禍 大師不辭萬里來化三韓救爇崑崗昌言有待對曰夫道在心不在事法由

己不由人且 帝王與匹夫所修各異雖行軍旅且慜黎元何則王者以四海爲家萬民爲子不殺無辜之軰焉論有罪之徒所以諸善奉行是爲弘濟 上乃撫機歎曰夫俗人迷於遠理預懼閻摩至

 大師所言可與言天人之際矣所以救其死罪時緩虔劉憐我生靈出于塗炭此則 大師之化也其後  大師自栖京輦頻改歲時每以注目山川欲擇終焉之地隱霧之志懇到聞 上莫

阻道情潛憂生別思惟良久久乃許焉 大師臨別之間特披悲感云仁王弘誓護法爲心遙垂外護之恩永蓄蒼生之福所以長興三年下 敎於開京西北海州之陽遽擇靈峯爲搆精舍寺名廣照

請以居之是日 大師略領門徒就栖院宇學流盈室禪客滿堂若融歸北海之居疑惠結東林之社所以誨人不倦如鏡忘疲其衆如麻其門如市然則不資分衛唯免在陳此乃官㽵則分錫三㽵供

事則具頒四事况復近從當郡傍及鄰州咸發深心並修淨行則知花惟薝蔔如投寶樹之園林是栴檀似赴菴蘿之會 大師先來於踏地脩自餘山師至魂交神來頂謁獻粲輸玉泉之供披誠指廬阜

之居其爲神理歸依皆如此類 大師謂衆曰今歲法緣當盡必往他方吾與 大王曩有因緣今當際會須爲面訣以副心期便挈山裝旋臻 輦下此時 上蹔駈龍斾問罪馬津 大師病甚虛羸

任特不得詣螎頭留語人雞足有期豈惟昔在竺乾迦葉別闍王之憾曾於華夏伯陽辭關令之嗟而已矣哉明日肩輿到五龍山頤使招諸弟子云佛有嚴誡汝曹勉旃淸泰三年八月十七日中夜順

化於當寺法堂俗年六十有七僧臘四十有八于時日慘風悲雲愁水咽門下僧等不勝感慕俱切攀號以其月二十日奉遷神座於本山窆于寺之西嶺去寺三百步雅奉遺敎也士庶闐川香華溢谷

送終之盛前古所無者矣

上乃旋在省方忽聞僊化爰切折梁之慟亦增亡鏡之悲自此特命親官遙申吊祭 大師風神天假智惠日新生知而衆妙會心宿植而玄機藏粹所以事惟善誘譚以微言引彼蒙泉歸於性海其奈

山輝川媚秀氣難逃故始自光山終於彌嶺可謂栖遲兩地各分韞匵之珍戾止三河俱示摩尼之寶者矣  傳業弟子處光道忍貞朏慶崇並昇上足皆保傳心或早牽尼父之悲或堅護卜商之業所

恨寶塔雖聳洪銘未刊然則扣不朽之緣於在家弟子左丞相皇甫悌恭前王子太相王儒前侍中太相李陟良廣評侍郎鄭承休俱早調夏鼎常艤殷舟誠仁國之金湯亦法城之墻壍與昭玄大統敎

訓斷金相應深感法恩請贈大名以光禪敎 詔曰可故追諡眞澈大師塔名寶月乘空之塔申 命下臣式揚 高躅彦撝才慙鷰石學謝螢光以有限微才記 無爲景行杳猶行海難甚緣山潛測

高深莫知涯際爰有門徒玄照上人夙傳金口親奉玉音因趣龜文數臨蝸舍所以得於無得聞所未聞譬凉月之遊空如猛飊之掃靄唯以敷陳厚旨齊贊成功所冀翠碣披文感 國主亡師之憾豊

碑相質嗟門人絶學之愁言莫愼諸直書其事銘曰

禪宗之胤代代堂堂 人中師子世上法王 玄關閫閾覺路津梁 遠從天竺來化海鄕 偉矣吾師生於遼左 何陋之有豈論夷夏 氷姿雪膚言說溫雅 乘査兮雪浪中 問道兮雲居下

命之入室仍以傳心 栖遲道樹偃仰禪林 鯨津近棹忽遇知音 便昇金殿欽仰殊深 卜地海壩曹溪接武 唯我導師謂之慈父 忽歎泥洹天收法雨 贈諡兮感法恩 流慈兮光禪宇

淸泰四年十月二十日立 刻字軍尹常信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