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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방/고구려,백제,신라

백제와 일본 왕실 혈연 실체 발굴

by 연송 김환수 2010. 3. 3.

 

백제와 일본 왕실 혈연

실체 발굴

 

 

아키히토 일왕 “제50대 간무 천황의 생모는 무령왕 후손”
일본 학자 “비타쓰왕 친손자, ‘百濟天皇’으로 불려”
일본 고대 지도, 현 오사카 지역 ‘百濟洲’로 표기
일본 학자 “백제 성왕은 일본 긴메이왕 겸임했다”
“일본 최초 여제 스이코 여왕은 백제 성왕의 딸”
“게이타이왕은 무령왕의 친동생”

 

 

 

일본 제30대 비타쓰왕이 백제 왕족임을

밝힌 일본왕실 족보 ‘신찬성씨록’.

아래는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

지난해(2007) 5월, 필자는 일본 교토에 살고 있는 우에다 마사키 박사를 찾았다. 우에다 박사는 교토대 사학과 명예교수로 일본 고대 역사학의 태두로 불린다.

 

30여 년 전 “백제왕이 백제의 식민지였던 왜의 후왕(侯王)에게 ‘백제 칠지도(七支刀)’를 하사했다”고 밝혀 일본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킨 당사자이기도 하다.

 

우에다 박사는 당시 집으로 몰려든 일본 국수주의 청년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우에다 박사가 자택에서 필자에게 보여준 것은 훨씬 더 충격

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안에서 조상 대대로 고이 간직 해온 ‘신찬성씨록(新撰

姓氏錄)’을 꺼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제30대 비타쓰왕은 백제 왕족입니다.”

 

서기 815년 일본 왕실이 편찬한 ‘신찬성씨록’은 일본 고대의 왕도

(王都)였던 ‘헤이안경’(지금의 교토시)의 왕족과 귀족 1182개 가문의

신분을 기록한, 일종의 일본 고대 왕족 및 귀족 족보다.

 

우에다 박사는 일본 왕족 30개 가문이 나열되어 있는 대목을 펼쳐

놓고, 그중 12번째에 씌어진 ‘大原眞人’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大原

眞人’ 이라는 일본 왕족이 누구인지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씌어

있었다.

 

‘大原眞人. 出自諡敏達孫百濟王也. 續日本紀合.’

(대원진인, 그의 조상은 시호가 비타쓰(敏達)라는 백제 왕족이니라.

‘속일본기’ 기록에도 부합한다.)

 

풀이하면, ‘대원진인의 조상이 일본 제30대 비타쓰왕이며, 비타쓰왕

본래 백제 왕족이다.’ 또한 이 내용이 ‘속일본기’라는 왕실 편찬

역사서 (서기 797년)에도 부합한다고까지 적시하고 있다.

 

우에다 박사는 이 대목이 “비타쓰 천황이 백제 왕족 출신임을 말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순간 필자는 말을 잇지 못했는데, “비타쓰 천황이 백제 왕족”이라는

사실도 놀랍지만, 우에다 박사의 학문적 양심에 가슴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구다라 천황(百濟天皇)’

 

‘일본서기’(서기 720년, 일본왕실 편찬)에 보면, “제30대 비타쓰 천황

(敏達·572~585 재위)은 나라(奈良)에 ‘구다라오이궁(百濟大井宮)’을

지었다”는 대목이 있다. 비타쓰왕이 나라의 백제인 집단 거주지 ‘구다

오이(百濟大井)’에 왕궁을 지었다는 얘기다.

 

이 기록 또한 비타쓰왕이 백제 왕족 출신임을 방증한다.

그뿐만 아니라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제34대 조메이왕(舒明·629∼641

재위)도 나라의 ‘구다라강(百濟川) 옆에 구다라궁(百濟宮)과 구다라

데라(百濟寺) 라는 큰 가람을 지었다. 조메이왕이 구다라궁에서

살다가 서거했을 때 ‘구다라노오모가리(百濟大殯)’로 장례를 치렀다’

내용도 있다.

 

일본 학자 마유즈미 히로미치씨는 ‘일본서기’의 조메이왕 대목인

‘조메이기(舒明紀)’에 대한 주해(註解)에서 “여기서 말하는 빈소는

그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한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백제대빈

(百濟大殯)’ 이란 백제 왕실에서 행한 3년상(喪)을 가리킨다.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 재위)이 왕도(王都)였던 곰나루(웅진,

공주) 지역에서 ‘백제대빈’을 치렀다는 사실은 1971년 출토된 무령왕

의 ‘묘지명’을 통해 입증됐다. 백제 왕실의 성대한 장례 의식을 왜에서

거행했다는 것은 당시 나라 땅을 지배한 백제 왕가의 세력이 절대적

이었음을 추찰케 한다.

 

한편 일본 고대 사학자인 세이조대 사학과 사에키 아리키요 교수는

비타쓰왕의 친손자인 “조메이 천황은 생전에 ‘구다라 천황(百濟天皇)’

이라고 불렸을 것이다”라고 발표한 바 있다.

 

서기 572년에 등극한 비타쓰왕이 ‘백제대정궁’을 세운 오이(大井)는

어디인가. 지금의 나라현 ‘고료초 구다라(廣陵町 百濟)’라는 게 일본

사학계의 통설이다. 이곳에는 2007년 11월 현재 ‘구다라 우편국(百濟

郵便局)’도 영업 중이다. ‘고료초 구다라(百濟)’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백제’라는 행정 지명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두 곳 중 하나다.

 

 

 

 

교토시 동쪽에 ‘百濟寺’란 사찰이 있다.

일본인들은 ‘햐쿠사이지’라고 발음하지만,

‘백제’라는 행정 지명을 간직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나머지 한 곳은 교토시 동쪽의 ‘히가시 오우미시 햐쿠사이지초(東近江市百濟寺町)’다. 이 이름은 일본 최대의 비와코 호수 너머 스즈카산(鈴鹿山) 등성이에 우뚝 서 있는 유서 깊은 사찰에서 비롯됐다.

 

이 사찰의 이름은 ‘샤카산 햐쿠사이지(百濟寺)’, 일본에서는 ‘百濟寺’를 ‘구다라 데라’라고 하는데 유독 이 사찰만은 ‘百濟寺’의 한자어를 소리 나는 대로 읽어 ‘햐쿠사이지’로 부른다.

 

1910년 일제의 조선 침략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각지에 ‘구다라고우리(百濟郡)’ ‘구다라손(百濟村)’ ‘구다라강(百濟川)’ 나아가 ‘구다라대교(百濟大橋)’ ‘구다라

평야(百濟平野)’ 같은 행정지명이 널리 쓰였다.

 

일본 고대 지도인 ‘팔랑화도(八浪華圖)’는 지금의 오사카 지역인 난바

(難波·‘나니와’라고도 부름) 일대가 ‘구다라스(百濟洲)’ 로 불렸음을

보여준다.

 

이 지도는 서기 1098년(承德 二年)에 처음 그려졌다. 지금으로부터

900여 년 전 지도에 표기된 ‘구다라스’ ‘난바지(難波寺)’ ‘구다라리

(久太郞里·‘백제리’의 이두식 한자 표기)’ 등은 2007년 현재까지 오사

카 시내의 지명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당시 ‘구다라고우리(百濟郡)’ 지역은 지금의 오사카 중심 시가지

인 히가시나리구(東成區)이다. 1937년에 편찬된 ‘일본고어대사전’은

‘구다라고우리(くだら こうり)’의 ‘고우리’가 “한국어의 고을에서

파생된 말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오사카 중심지 일대는 한때 행정

구역상 ‘기타구다라손(北百濟村)’ ‘미나미구다라손(南百濟村)’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강제 점령한 후, 백제와 관계된 대부분의 일본

지명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가 지명

으로 남아 있는 곳이 두 군데에 불과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두 곳의

지명 또한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길이 없다.

 

 

“한국과 혈연이 있습니다”

 

일본의 구다라(백제) 불교문화는 6세기 초엽(538), 일본 나라 아스카

(飛鳥)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백제계 왕실에서 꽃피기 시작했다.

‘일본서기’는 “백제 제26대 성왕(聖王·523~554 재위)이 일본에 백제

불교를 전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왕은 제27대 위덕왕(554~598 재위)에게 왕위를 넘기고 난 다음에는

아예 아스카로 건너가 긴메이왕(欽明·539~571 재위)으로 군림했다.

 

성왕은 알려진 것처럼 554년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장남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일본 왕실로 건너갔다.

 

성왕은 이미 539년 센카왕(宣化王·536∼539 재위)이 서거했을 때부터

백제와 일본을 넘나들며 왜왕을 겸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도 “백제 성왕은 일본왕을 겸임했다”는 연구론을

펼쳤다.

 

성왕의 선대인 무령왕과 동성왕(479~501 재위)도 모두 백제왕으로

등극하기 전엔 왜 왕실에 살았다. ‘삼국사기’ 같은 우리 역사서엔

이 같은 기록이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동성왕과 무령왕이 각기

일본에서 귀국해 차례차례 백제왕으로 등극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니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백제계 왜 왕실에서 살다 귀국해 백제왕

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성왕이 어떻게 왜왕을 겸임할 수 있었는지

납득 할 만하다.

 

한 가지 더 밝혀두자면 794년, 일본 왕실에서는 새 왕도가 된 교토에

성왕의 일본왕실사당인 히라노신사(平野神社)를 웅장하게 세웠으며,

현재까지 잘 보존하고 있다.

 

일본 고대 왕실에서 히라노신사에 제사를 드려온 사실은 10세기 초

제정된 왕실 법도 ‘연희식(延喜式)’에도 실려 있다. 히라노신사는 일본

제50대 간무왕(桓武·781~806 재위)의 칙명으로 헤이안경(지금의 교토시)

새 왕궁의 북쪽에 세워졌다.

 

2001년, 아키히토(明仁·1989~ 재위) 현 일왕은 간무왕이 백제인의

후손임을 인정한 바 있다.

“제50대 간무 천황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왕자 순타태자의 직계

후손인 화신립(和新笠) 황태후입니다. 이 사실은 일본 왕실 역사책

‘속일본기’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도 한국과 혈연이 있습니다.”

 

68회 생일을 맞아 기자회견을 열었을 당시 한 말이다. 천황의 이 같은

발언에 황거(왕궁)를 관장하는 궁내청 고관들이 매우 당황했다는 후문

이다.

 

그 때문인지 일본 언론은 이날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면서 일왕이

언급한 한국과의 혈연관계 대목은 쏙 빼놓았다. 유일하게 ‘아사히

신문’이 일왕의 발언을 기사화했다.

 

 

성왕의 아들과 딸

 

 

 

‘팔랑화도’는 수백년 전, 일본 오사카

지역이 ‘구다라스(百濟洲)’라는 지명으로

불렸음을 보여준다.

‘신찬성씨록’이 백제왕족이라고 명기한 비타쓰왕(572~585 재위)은 백제 성왕의 제2왕자다.

 

성왕의 제1왕자는 백제 제27대 위덕왕이다. 비타쓰왕은 긴메이왕(백제 성왕)이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그와 동시에 최고대신으로 20세의 백제인 귀족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를 등용했다.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 교수는 소가노우마코 대신이 백제 제21대 개로왕(455~475 재위)의 신하였던 ‘백제조신 목만치(木滿致)의 5대손’이라고 밝혔다.

 

비타쓰왕은 576년 3월, 18세의 가시키야 공주를 왕후로 맞았다.

가시키야 공주는 다름 아닌 왕의 이복동생, 그러니까 성왕의 제2공주

였다. 근친결혼을 한 셈이다.

 

가시키야 공주는 비타쓰왕과의 사이에 2남5녀를 뒀으며, 서기 592년

에 일본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제33대 일본왕인 스이코 여왕

(推古·592~628 재위)으로 36년간, 아버지가 포교한 백제 불교문화를

눈부시게 꽃피웠다. 이 시기는 일본 역사에서 ‘아스카 문화 시대’   (592~645)로 높이 평가받는다.

 

14세기 초에 씌어진 일본 불교 왕조사인 ‘부상략기(扶桑略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推古天皇元年正月, 蘇我大臣馬子宿. 依合戰願, 於飛鳥地建法興寺,

立刹柱日 島大臣竝百餘人 皆着百濟服, 觀者悉悅, 以佛舍利, 籠置刹

柱礎中.”

 

588년, 백제 왕실에서 건너온 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 문가고자

(文賈古子) 등에 의해 일본 최초의 칠당 가람이 아스카에 착공됐다.

 

위 대목은, 스이코 여왕이 등극한 직후인 593년 1월에 소가노우마코

대신과 만조백관이 ‘백제옷’을 입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백제에서 보내온 부처님 사리함을 찰주의 기초 속에 안치했다

는 내용이다.

 

‘만조백관이 ‘백제복’을 입었다’는 것은 스이코 여왕의 아스카 왕실이

백제계 왕가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당시에 관한 ‘일본서기’ 기록에

서는 ‘백제복을 입었다’는 ‘부상략기’의 대목을 발견할 수 없다.

 

 

닌토쿠 왕실로 건너온 백제신(百濟神)

 

그러면 이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백제인 왕가가 형성된 시기로

추정되는 4~5세기, ‘난바(오사카)’의 ‘구다라스(百濟洲)’ 시대를 살펴

보자. 백제가 일본을 최초로 지배한 것은 오진(應神)왕 때부터라는 게

통설

이다.

 

이 사실을 고증하는 자료 중 하나인 오진천황 전신 초상화를 보면,

도포를 입은 천황이 머리에 남바위를 쓰고 있다. 남바위는 가죽을 댄

기다란 모자로, 우리 조상들이 겨울철 방한모로 착용해왔다.

 

당대의 오진왕과 그의 제4왕자 닌토쿠(仁德)왕이 백제인이었음을

일본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일본서기’는

백제의 학자 왕인이 오진왕의 초청을 받고 왜 왕실로 건너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인은 오진왕의 제4왕자 오사사기 왕자에게 글을 가르쳤다.

오진왕이 서거한 뒤 3년째 되던 해에는 왕인이 오사사기 왕자를 닌토

쿠왕 지위에 올려놓았다.

 

이 같은 사실은 805년에 씌어진 고대 문헌에 기록돼 있다. “왕인이

어대에 와카(和歌) ‘나니와쓰노우타(難波津歌)’를 지어 닌토쿠 천황을

왕위에 천거하였다.”(紀貫之 ‘古今集’) 오사카의 고대 나루터 이름인

‘나니와쓰’는 왕인이 지은 와카에서 유래했다.

 

이 지명은 현 오사카 중심의 번화가인 ‘나니와(難波)’로 그대로 이어

지고 있다.

 

또 주목할 것은 “닌토쿠 천황이 모국 백제로부터 백제신(百濟神)의

신주를 왕실로 모셔왔다”(‘風土記’ 8~10C 편찬)는 점이다. “백제신의

신주를 모셔왔다”는 것은 조상신을 숭경하는 종묘사직 신앙행위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며, 이는 곧 닌토쿠왕이 백제인임을 입증

한다.

 

닌토쿠왕과 그의 부왕 오진왕이 백제인이라고 주장한 사학자는

한둘이 아니다.

 

와세다대 사학과 미즈노 유 교수는 일찍이 “오진 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 천황은 구다라국(백제국) 왕가로부터 건너와 일본 정복왕조를

이루었다”(1978)고 단정한 바 있다.

 

도쿄대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다 교수도 이보다 앞서 “백제 사신

으로부터 칠지도(七支刀)를 전해 받은 왜왕 오진 천황은 구다라(백제) 왕족이며, 천황씨(天皇氏)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일본 이주자

였다"  (1960)고 밝혔다.

 

일본 고대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의 저서 ‘구다라에서 건너온

오진 천황’(2001) 또한 일본 사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오사카부 하비키노시에 있는 “오진릉(應神陵)에

매장된 시신은 5세기 후반에 건너온 구다라의 곤지왕자(昆支王子)

이다. 그는 5세기말에 일본에서 구다라계 왕조(百濟系王朝)를 수립

했다”고 주장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곤지왕자는 백제 제21대 개로왕(455~475 재위)

의 제2왕자다. 이처럼 한일 고대사를 성실하게 연구하고 그 결과를

양심적으로 밝힌 일본 사학자들은 반한(反韓) 세력으로부터 정신적

박해를 받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백제신 사당에 참배하는 일본인

 

 

 

일본 최초의 백제신 사당으로 유서 깊은 오사카의 ‘미시마카모신사(三島鴨神社).

백제신을 왕실로 모셔온 닌토쿠왕은 왕도에 사당을 짓기도 했다. 지난해 10월29일, 필자는 고대 일본 최초의 백제신 사당으로 유서가 깊은 오사카의 ‘미시마카모신사(三島鴨神社)’를 찾아갔다.

 

이곳의 마쓰이 나리후사(松井位幾) 궁사는 “이곳에서는 닌토쿠(仁德) 어대 때, 백제에서 일본 왕실로 건너오신 백제대신(百濟大神) 오야마쓰미노카미(大山積神) 신주의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백제신이 일본 왕실로 건너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인 5세기

다.

 

조상 대대로 백제신 제사를 모셔왔다는 마쓰이 나리후사 궁사는 이

고장 오사카 요도가와(淀川) 상류 동쪽에서 사당을 지켜온 백제인

후손 이구치 아키오(伊口明生) 등 열여섯 가문 대표들과 함께 5년의

노력 끝에 2006년 사당 역사에 관한 책을 펴냈다. 이 책 ‘三島鴨神

社史’ 의 서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닌토쿠 천황은 가와치(河內·오사카 옛 지명)에 ‘만다 큰제방’을 쌓으

시는 동시에 요도가와 강변 터전을 지켜주시는 신(神)으로서 백제로

부터 오야마쓰미노카미를 이 고장 미시마(御島·三島의 이두식 한자어

와 같은 의미)로 모셨습니다. 왕도 난바(難波)를 지켜주시는 수호신

으로서 이 신사를 계속해서 모셔왔습니다.”

 

마쓰이 나리후사 궁사에게 필자는 “고대 일본 최초의 백제신 사당에

한국에서도 더러 참배객이 오느냐”고 물었다. 마쓰이 나리후사 궁사

 “한국에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답했다. 마쓰이 나리후사 궁사

에게 “일본인은 이곳이 일본 왕실로 건너온 백제대신의 사당이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참배하는 신자가 많으며, 개중엔

(2007년) 10월 충남 부여에서 열린 ‘백제문화제’에 다녀온 분들도

있습니다. 해마다 조상의 고국 백제땅 부여, 공주 등을 찾아가는 분

들이 있습니다.”

 

마쓰이 나리후사 궁사는 이 사당을 찾는 참배객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안내서 ‘미시마카모신사 유서략기’를 필자에게 건네주었다. 그 첫 줄

에 “서기 400년대에 닌토쿠 천황이 창건해 백제로부터 건너오신 백제

신 오야마쓰미노카미 신주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라고 씌어 있었다.

 

 

국가신도와 전쟁의 비극

 

좀 더 살펴보니, 닌토쿠왕 시대에 백제로부터 건너온 백제신을 ‘미시

마카모신사’에서 제사지내게 된 연유를 일본 고대사 문헌 ‘風土記’는

이렇게 전하고 있었다.

 

‘御嶋 坐神御名 大山積神 一名和多志大神也 是神者 所顯難波高津宮

御宇天皇御世 此神者百濟國渡來坐 而津國御嶋坐’

 

‘미시마에 계신 신의 어명(御名)은 오야마쓰미노카미다. 일명 와다시

노오카미(和多志大神)이시다. 이 신은 나니와의 다카쓰노미야(高津

宮) 궁에 천황(닌토쿠왕)이 계시던 어세(御世)에 나타나셨다.

 

이 신께서는 구다라국(百濟國)으로부터 건너오셔서 나니와쓰의 미시

마에 계시게 되었다.’

 

한편 닌토쿠왕 때 일본 왕실로 건너온 백제신의 이름이 ‘和多志’인데,

무령왕의 왕성이 ‘화(和)’씨이며, 일본 제50대 간무왕의 생모가 백제

왕족 ‘화신립(和新笠)’ 황태후인 것은 백제 왕가의 성(姓)이 백제신의

성과 일맥상통하는 것을 보여준다.

 

‘미시마카모신사 유서략기’에는 “닌토쿠 천황 시대에 미시마에 살던

왕족들이 이 고장 다카쓰기(高槻)의 벤텐산(辯天山)에 3대에 걸친

고분을 만들었는데, 그때 모노노베 가문의 가라쿠니무라지(韓國連·

한국귀족 씨족)들이 협력했다”는 내용도 실려 있다.

 

이 책의 ‘국가신도(國家神道)와 전쟁의 비극’이라는 대목도 짚어볼 만

하다. 일제하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이곳 백제신 사당에 압력을 가해

백제신을 제쳐놓고 대신에 국가신도, 즉 황국신도(皇國神道)의 정점에

올려 세운 이른바 ‘천조대신’을 제사지내는 남녘의 이세신궁(伊勢

神宮)을 향해 최경례(허리 굽혀 큰절)하도록 강요했다.

 

그뿐 아니라 천황을 살아 있는 인간신(現人神)으로 신앙화하고, 사당

경내에 일본군 전몰자들을 위령하는 ‘표충비’를 세웠다. 이 책은

“그뿐 아니라 이 신사의 뒷길로 다니는 통학생들로 하여금 반드시

이곳 사당을 향해 최경례하고 지나가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곳 어제신(御祭神·백제대신)에 대한 숭경의 절이

아니라, 천조대신과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에 대해 숭경의 절을 올리

게 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

 

 

 

백제왕이 왜 후왕(侯王)에게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칠지도(七支刀). 일본 이소노카미신궁이 소장하고 있다.

일본 왕실이 백제인에 의해 형성됐다는 문헌 기록 외에 고고학적인 고증 또한 중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백제 ‘칠지도(七支刀)’와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의 금석문이다.

 

백제 제20대 비유왕(毗有王·427~455 재위)과 세자(훗날의 개로왕)가 왜를 다스리던 백제 왕족 후왕(侯王) 오진왕(應神·4~5C초)에게 429년에 보낸 백제 왕실 ‘칠지도’가 있다. ‘일본서기’는 왜의 제15대 ‘오진 천황’이 270~310년까지 재위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날조’

라는 것이 통설이다.

 

오진왕은 5세기경의 백제인이 맞고, ‘백제 비유왕이 하사한 칠지도

(74.9cm 길이)를 받은 백제의 후왕(侯王)이다’라는 것이 현존하는

칠지도(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 소장, 일본

국보)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백제 왕실에서 이 칼에 새긴 글은

이렇다.

 

‘泰和四年五月十一日丙午 正陽造百練鐵七支刀 以?百兵 宜供供候王 □□□□作’(칼의 앞면) ‘世以來未有此刀 百慈王世子寄生聖音 故爲

倭王旨造 傳示後世’(칼의 뒷면)

 

우리말로 옮기면, ‘태화 4년(서기 429년) 5월11일 병오날 정양 때에

무수히 담금질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어 모든 적병을 물리치도록 후왕

에게 주노라’(앞면), ‘선대 이래로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

및 세자(뒷날의 개로왕 - 필자 주)는 성스러운 말씀으로 왜왕을 위해

만들었도다. 후세에까지 잘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뒷면) 이다.

 

우에다 마사키 교수는 이 칼을 3번이나 조사하고 쓴 연구론에서

“그 당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보내줬음

을 밝힌 것이며, 칼에 새긴 글투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전하는

하행문서(下行文書) 형식의 명문이다”라고 단정했다.

 

백제 비유왕이 왜나라에 건너가 왜를 지배하던 백제의 후왕에게

왜나라를 잘 지켜 백제의 속령으로 번창할 것을 명한 것이다.

 

이노우에 미쓰사다 교수도, 그 당시 백제 사신으로부터 칠지도를 전해

받은 오진 천황은 백제 왕족이며, “천황씨(天皇氏) 자체가 조선으로

부터 건너온 일본 이주자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건너온 많은 사람을

간무 천황이 조정에 등용시킨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계미년 수수께끼

 

일본의 중요 문화재에는 고대 일본에 남긴 한국의 자취가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인물화상경’이라는 청동

거울이다.

 

일본 국보가 된 이 청동 거울은 503년에 백제 제25대 무령왕이 직접

제작을 지휘해서 완성한 다음, 왜나라 왕실의 친동생(男大迹, 오호도

왕자, 훗날의 게이타이왕(繼體王))에게 보내준 것이다.

 

지름 19.8cm로 둥글게 만든 이 청동거울에는 말을 탄 백제왕이며

신하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인물화상경이라고 통칭된다.

현재 일본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스다하치만신사’에서 보존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 1월, 이 신사를 방문했다. 스다하치만신사의 데라모토

요시유키 궁사는 육중한 금고 깊숙이 들어 있던 ‘인물화상경’을 꺼내

보여줬다. 필자는 귀중한 ‘인물화상경’을 직접 매만지면서 역사의

사실(史實)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물화상경은 도쿄 우에노의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다”는 설이 있었다. 이에 대해 데라모토 궁사는 “낭설이다”라고 일축했다. 데라모토

궁사는 이어서 “이 거울은 503년에 백제 무령왕께서 일본 왕실로

보내주신 겁니다”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데라모토 궁사의 이 같은 발언은 한일 고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증언이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일부 일본 학자들이 이 거울이 백제로

부터 건너온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연대 조작’ 등으로 역사를 왜곡

왔기 때문이다. 그 경위는 이렇다.

 

인물화상경에는 둥근 거울의 바깥쪽 테두리를 따라가며 48개의 한자

어로 된 명문(銘文)이 있다.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壽遺開中費

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銅二百旱作此鏡’

 

‘서기 503년(癸未年) 8월10일 대왕(백제 무령왕) 시대에, 오시사카궁

있는 오호도 왕자에게, 무령왕(斯麻는 무령왕의 휘)께서 아우의

장수를 바라시면서,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2인을 파견하여

거울을 보내시는바, 이 거울은 좋은 구리쇠 200한(旱)으로 만들었

노라.’

백제-일본 왕실 혈연 실체 발굴


日왕실 족보 “비타쓰왕은 백제 왕족” 백제 성왕 자손이 아스카 문화

꽃피웠다

 

 

                일본 백제왕조 오진왕 직계 계보

 

동생을 향한 무령왕의 애정이 간곡하게 담겨 있다. 그러나 일본 사학

자들은 이 명문에 대해 엉뚱한 해석들을 내놓았다. 일본 천황이 무령

왕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60년에 한 번 돌아오는

간지 (干支) 연대를 왜곡했다.

 

거울 제작 연대로 새겨진 ‘계미년’을 서기 263과 443년 등으로 몰고

간 것. 청동거울에 새겨진 계미년(癸未年)이 고대의 어느 시점을 가리

키는 것인가가 쟁점의 시발이 됐다.

 

인물화상경을 스다하치만신사의 창고에서 최초로 발견한 이는 사학

다카하시 겐지 박사다. 최초 발견자는 이 거울 명문에 나타나 있는

계미년이 서기 263년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교토교육대 사학과

와다 아쓰무 교수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다카하시설(說)은, 명문에 보이는 사마(斯麻)를 ‘일본서기’의 ‘신공기

(神功紀)’에 등장하는 시마노스쿠네(斯麻宿)와 연결 지으며 계미년에

대해 고증하는데, 여기엔 무리가 있다.”

 

필자의 생각도 와다 교수와 같다. 왜냐하면 ‘일본서기’에 근거해 일개

조신(朝臣)인 신하가 감히 청동거울을 만들어 왕자에게 하사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행적은 명문의 문맥과 도저히 조화될 수 없다.

 

더구나 ‘일본서기’의 ‘신공기’는 가공의 조작된 것이라는 게 통설이다.

그러니 시마노스쿠네(斯麻宿)와 인물화상경의 ‘사마’는 전혀 무관

하다.

 

무령왕의 휘가 사마(斯麻)임에도 불구하고 다카하시 박사가 이를

제쳐 두고 시마노스쿠네라는 일개 조신 쪽으로 논조를 몰고 간 것은

의도적 이었던 듯하다.

 

다카하시 박사가 ‘계미년 263년설(說)’을 처음 내세운 때가 한일합방

직후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당시 도쿄제실박물관(東京帝室博物館)

의 감사관이며 역사부장이었다.

 

 

게이타이왕은 동성왕 아들

 

다카하시 박사에 의해 최초로 제기된 ‘계미년 263년설’은 일본 사학계

에서 서서히 묵살되는 가운데, 443년설과 503년설이 대두되기에 이르

렀다. 443년설은 미즈노 유 교수의 주장이고, 503년설은 후쿠야마

도시오 교수의 주장이다.

 

먼저 미즈노 교수는 ‘서기 443년 8월, 윤공 천황(允恭天皇·412~453

재위)이 남동생(男弟)과 함께 황후(皇后)의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때, 사마(斯麻)가 장수를 염원해서…’라고 해석했다. 한편 후쿠

야마 교수는 ‘서기 503년 8월 인현대왕(仁賢大王)의 시대, (왕자시대

의) 게이타이왕(男弟王)이 오시사카궁에 있을 때, 사마가…’라고 해석

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男弟王’을 즉위 전의 게이타이왕으로 지목하고,

계미년을 503년으로 짚어내는 데까지는 정확했으나, 그 시기를 백제

무령왕이 아닌 왜의 닌켄대왕 시대라고 곡해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오호도(게이타이왕)는 무령왕의 친동생이

맞는가. 게이타이왕은 백제 제24대 동성왕(東成王·479~500 재위)의

제3왕자였다. 동성왕은 이름이 무대(牟大)여서, 왜나라에 있을 때

무대왕(牟大王)으로도 불렸다.

 

동성왕은 일본의 백제 왕가에 살고 있던 곤지(昆支) 왕자의 아들이다.

그리고 곤지 왕자는 백제 개로왕(蓋鹵王·455~474 재위)의 제2왕자다.

개로왕의 제1왕자는 문주왕(文周王·475~476 재위)이며, 문주왕의

뒤를 이은 것은 문주왕의 제1왕자인 삼근왕(三斤王·477~479 재위)

이다. 삼근왕이 승하하자 왜나라에 있던 문주왕의 동생 무대가 백제

  귀국해서 동성왕으로 등극했다.

 

여기서 잠깐 ‘일본서기’를 살펴보자. ‘왜나라의 무렬왕(武烈王·498~

506 재위)이 서거했으나 후사가 없었다. 대신들이 서둘러 왕위 계승

자를 찾던 중에, 오진왕의 5대손인 남대적(男大迹, 男弟, 오호도)을

왕위에 등극시켰다.’

 

남대적은 우시왕(汚斯王)의 제2왕자이며, 우시왕이 바로 동성(牟大)

왕이다. 동성왕의 또 다른 이름인 무대의 무(牟)가 소(牛)를 상징하며,

우시(汚斯, うし) 또한 ‘소(牛)’라는 의미가 있다.

 

1971년 7월8일, 마침내 충남 공주에서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됨에

따라 비로소 무령왕의 휘가 ‘인물화상경’에 새겨진 ‘사마(斯麻)’임이

고고학 적으로도 확인됐다.

 

또한 무령왕과 왕비를 모신 이 고분의 2개 묘지석(墓誌石)은, 무령왕

523년 5월3일에 승하했음을 입증했다.

 

인물화상경의 최초 발견자인 다카하시 박사는 일본 게이타이 천왕이

무령왕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60갑자를 4바퀴나 거꾸로
돌려 계미년이 263년을 가리킨다고 우겼지만, 무령왕릉이 발굴됨으

로써 계미년은 503년임이 확인됐다.

 

그뿐만 아니라 무령왕과 왕비의 왕관 장식이며 각종 유물에서 고대

일본 왕가 분묘의 유물과 같은 것들이 발견됐다.

 

1450여 년의 침묵을 깬 무령왕릉은 한일 고대 관계사의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일시에 풀어준 엄청난 고고학적 입증물이다.

 

 

히라노신사의 존재가치

 

일본의 고대 왕도 교토에 위치한 히라노신사는, 일본 천황이 한국의

피를 이어오고 있음을 웅변하는 뜻 깊은 장소다.

 

백제왕과 왕족을 모신 이곳에 역대 일본왕들이 방문해 백제 성왕의

신전 앞에 머리 숙여 제사를 지냈다. 히라노신사에서 제사를 모신

마지막 일왕은 쇼와 일왕(昭和·1926~1989 재위), 현 일본왕의 아버지다.

 

쇼와 일왕은 1940년에 히라노신사를 방문해 제사를 지내고 기념식수

도 했다. 히라노신사의 신관인 오사키 야스히로씨는 “쇼와 천황께서

기원 2600년(서기 1940년)을 기념해서 몸소 소나무를 심었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소나무 앞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진 나무판이 세워져 있었다.

 

‘紀元 二千六百年(昭和 15년) 天皇階下御手植松’

 

히리노신사에서 간행한 ‘히라노신사유서략기(平野神社由緖略記)’를

보면 과거 백제왕 신전에 제사를 모신 일본 왕들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덴겐 4년(天元·서기 981년-필자주) 3월에 엔유 천황(圓融天皇·969~

984 재위)이 이곳에 직접 행행(行幸)한 이후로 계속해서 역대의 천황

들이 행행했다. 또한 태황태후(太皇太后)며 황태후(皇太后), 황후

(皇后)의 행계(行啓)도 그 예가 적지 않았다.

 

가잔 천황(花山天皇· 984~986 재위) 당대인 간나 원년(寬和元年·985

년)에 천황이 이곳에 몸소 벚나무를 식수함으로써, 그로부터 벚꽃

(사쿠라)의 명소로도 이름이 높아졌다. 에도 시대(江戶·1903~1867)에

접어들면서부터 히라노신사는 ‘히라노의 밤벚꽃놀이’로 일반에게

친숙하게 됐다.

 

그로써 방문자가 경내에 넘쳤으며, 벚꽃나무는 500여 그루를 헤아리

  특히 진종(珍種)이 많아서 유명하다. 벚꽃축제인 앵제(櫻祭)며

신행제(新幸祭)가 해마다 4월10일에 거행된다. 추수를 감사드리는

‘햇곡식감사제’인 신상제(新嘗祭)는 11월23일에 거행된다.’

 

역대 일본 천황들이 이 히라노신사를 찾아 백제왕들에게 제사를 올렸

다는 히라노신사야말로 한국인들에게 감개무량한 터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히라노신사는 한국인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부끄러운 일이나 오랫동안 일본 역사를 공부해온 필자조차 불과 15년

전에야 이곳을 제대로 파악했다.

 

고대 문헌을 통해 백제왕들을 모신 사당임을 알게 됐다. 일부 사학자

들을 제외하고는 일본인들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일본

사학자들로선 히라노신사의 정체를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일본 교토시 기타구 히라노미야모토초(京都市北歐平野宮本町) 1번지

가 히라노신사 주소다. 교토역전 버스터미널(가라스마 추오구치 기타

가와, 鳥丸中央口北側)에서 교토 시내버스로 205번이나 50번을 타고

 ‘ 기누카사코우마에(衣笠校前)’ 정류장에서 내리면 100m 전방에 있다.

 

교토 관광안내 책자 어디에서도 히라노신사의 유서 깊은 역사를 소개

한 대목은 찾아볼 수 없다. 히라노신사는 백제인 간무천황(桓武天皇·781~806 재위)에 의해 794년에 처음 세워졌고, 1598년과 1604년에

재건됐다.

 

 ‘히라노쓰쿠리(平野造り)’또는 ‘히요쿠카스가쓰쿠리(比翼春日造り)’

로 불리는 신전 건축양식이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일본 신전 건축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럼에도 일본의 저명한 건축학자이며 역사

가인 도쿄대 마치다코이치 교수가 공동 저술한 ‘국보 중요문화재 안내’는 히라노신사에 대한 설명이 인색하기만 하다.

 

히라노신사의 유래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고, 아주 간략하게 건물에 대한 설명만 몇 줄 있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평론가 스기 시노부는 일인 학자들의 이런 태도를 비판한 바 있다.

 

‘여행 안내책자에서 고대 유적과 유물에 관해 서술할 때, 조선 문화의 영향을 당연히 써넣어야 함에도 의도적으로 설명을 빼먹거나, 일본

역사 사전의 부정확한 설명 등, 여하간에 고대 조선 문화와의 관련을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현실을 지적하게 된다.

 

일본 문화와 조선 문화가 같은 조상에 의해 이루어진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우리 일본인은 솔직하게 받아들여서, 일본 문화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學界展望’)

 

 

무령왕릉 참배한 일본 왕자

 

서두에 인용한 대로 2001년 12월23일 아키히토 일왕이 “간무 천황의

생모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공언한 내용은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까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왕조 말기의 영친왕비(英親王妃)였던 고(故) 이방자(李方子) 여사는 생전에 “일본

왕실에서도 숭늉을 마신다”고 말했다.

 

“지금의 천황께서도 숭늉을 마시다마다요. 그분도 조선 사람이 아닙

니까.” 이 여사가 가리킨 ‘그분’은 쇼와 일왕이다. 한 일본 학자(오비

린대학 神田秀一 교수)는 “전두환 대통령 방일(訪日) 때 만찬회에서

쇼와 일왕도 자신의 조상이 백제인이라고 발언했다”고 밝힌 바 있다.

 

 

홍윤기
한국외대 영어과 졸업, 일본 센슈대 박사(문학)
일본 센슈대 겸임교수, 단국대 초빙 교수, 한국

    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現 한일국제왕인학회장, 한국외대 교양학부 ‘일본

    문화와 사회’ 담당교수
저서 : ‘일본의 역사왜곡’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

    ‘일본문학백과’ 등

필자는 2002년 7월10일 직접 일본 도쿄의 황거에 들어가 천황궁의 왕실 제사를 진행하는

 

제사 담당관 아베 스에마사씨로 부터 지금의 아키히토 일본왕이 매년 11월23일 밤에 백제신(韓神)을 위한 제사 축문을 낭창(朗唱)하며 신상제(新嘗祭)를 지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같은 사실은 그해 EBS 광복절 특집 방송으로 방영됐다.

 

우에다 마사키 박사는 그 이듬해 1월에 필자에게 보낸 서신에서

“비타쓰왕의 후손인 대원진인(大原眞人)은 백제 왕족이며 의자왕의

핏줄을 이었다”고 인정했다.

 

현 일본 왕실의 아사카노미야 왕자는 2004년 8월 무령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몸소 충남 공주를 찾은 바 있다.

 

왕자는 직접 가져온 1300년 전 일본 왕실에서 만든 왕실 제사용 향로

(香爐)와 귀중한 향(香)을 무령왕릉(武寧王陵) 안에서 피우며 제주

(祭酒)와 제사용 과자 등 제물을 진설하고 무령왕의 영전에 머리 숙여

참배했다.

 

그러나 일본의 어떤 매체에서도 아사카노미야 왕자의 무령왕릉 참배

를 보도하지 않았다.  

  

신동아 2008.04.1 통권 583호(p494~509)

[홍윤기 한국외국어대 교수·일본문화 senshyu@naver.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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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백제 성왕은 일본 왕을 겸임했다”
외국어대 홍윤기 교수 논문서 주장

 

백제 성왕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역사 교과서를 부분 개정해야 할까?  6세기 무렵

백제를 삼국 최고의 문명국으로 중흥시키고 일본에 불교문화를 전파한 성왕(523~

554 재위). 그동안 역사학계는 <일본서기> 중 흠명천황 15년조 내용과 <삼국유사>

중 성왕 32년조에 기록된 ‘성왕은 죄지촌(지금의 충남 옥천 또는 보은)에서 신라의

복병에게 죽임을 당했다’라는 내용을 정설로 여겨왔다.


홍윤기 교수



하지만 그동안의 정설을 뒤엎는 ‘백제 성왕은 일본 왕까지도 겸임했다’는 내용의

연구논문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양학부 일본문화담당 홍윤기 교수가 발표해 학계

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홍 교수가 이 같이 주장하는 고증적 근거는 <대초자>와 <성예초> 그리고 일본

학자들이 발표한 연구논문 등이다.

일본사학자 후지와라노 키요스케의 저서 <대초자,1156~1158>는 고대 일본 왕실과

귀족들이 즐겨 부르던 일본 정형시가 ‘와카’ 모음집으로 일본 시가 연구의 중요한

고전으로 평가되는 자료다.

이 고문서의 내용 중 ‘코우닌천황(770~781 재위)의 어자(칸무천황)의 어조되시는

조부야 말로 히라노신(백제 성왕)의 증손자이노라’라는 대목이 홍 교수가 주장하는

‘백제 성왕이 일본 왕을 겸했다’는 주장과 일치되는 부분이다.

 

법륭사 비밀고문서인 성예초는 백제 성왕이 일본왕을 겸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 법륭사에 대한 모든 정보와 비사를 기록하고 있는 <성예초, 1394~1427>의
내용도 홍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고증자료로 신빙성을 더 하고 있다.
 
이 문서는 ‘백제 성왕의 전신은 지금의 성덕태자이시다. 따라서 이 구세관음상은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또 나라대학 나카가와 토모요시(中川友義) 교수의 논문 <일본에 도래한 신들>
에서는 ‘제1신전은 성왕, 제2신전은 구도왕(온조), 제3신전은 고개신 (비류왕과        근초고왕)이 모셔져 있는 곳’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밖에도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가 1991년 저술한 <두
개의 얼굴의 대왕>에서 ‘백제 성왕은 일본에 건너와 흠명천왕이 되었다’라고 기술
하고 있고, 교토산업대 역사학과 이노우에 미쯔오(井上滿郞) 교수의 논문 <헤이안
의 풍경, 1994>에서 ‘히라노신사에 모셔진 제신은 백제에서 건너 온 금래신(今來神)
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모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대초자.

 

일본 교토에 소재한 히라노신사(平野神社)는 서기 794년 칸무천왕이 수도를 교토로
천도한 기념으로 세운 사당이며 금래신 또는 흠명천왕, 히라노신이란 명칭은 이미
일본사학자들에 의해 백제 성왕으로 판명된 부분이다.

이에 대해 일본 교토대 사학과 우에다마 사아끼(上田正昭) 명예교수는 “‘백제 성왕
은 일본 왕을 겸했다’라는 내용이 담긴 홍 교수의 연구논문은 일본 고문서와 논문을
바탕으로 고증한 신빙성 있는 자료로 평가되며 이 대목에 있어서는 일본사학자들도
상당부분 인정하고 있다”며 “이 부분의 진위여부는 양국의 역사 교과서를 수정할
정도로 중요한 대목인 만큼 한ㆍ일 불교사학자들의 충분한 연구와 검증이 이루어져
야 한다”고 밝혔다.

한편 홍 교수는 200년 전 에도막부 말기에 쓰여진 고문서<일본시사>를 바탕으로
‘일본 정형시조인 와카의 창시자 또한 왕인 박사였다’는 내용의 연구결과를 1970년
대에 발표한 바 있다. 왕인 박사는 4세기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 집권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한자 보급은 물론 백제의 우수한 문화와 기술을 전수한 학자다.
 
노병철 기자 |sasiman@buddhap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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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聖王, ?~554]

 

백제의 제26대 왕(재위 523∼554). 웅진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였다. 지방통치

조직 및 정치체제를 개편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양나라 및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서기≫에는 성명왕()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휘()는 명농(襛)이며 무령왕()의 아들

이다. 무령왕과 함께 백제의 영주()라 일컬어진다. 523년 패수(浿)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

()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양()나라 고조()와 국교를 강화하여 고조로부터

 '지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529년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후 고구려에 대해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대처하였

으며,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항복하자 왕은 잔존 가야제국()을 회유하여 표면상으로는

신라에 대하여 적대()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적으로는 가야의 분할을 획책하였다.

538년 협소한 웅진(:충남 공주)으로부터 광활한 사비성(:충남 부여)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

()로 고쳤으며, 중앙의 22부(), 지방의 5부()·5방()제도를 이때 실시한 것으로 추측된다. 541년

양()나라로부터 모시박사()·공장()·화사() 등을 초빙하고 《열반경()》 등을 들여와

문화중흥을 이루고자 하였다.

550년 고구려의 도살성()을 쳐서 빼앗고, 그 이듬해에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 유역을 공격하여 76년간이나 고구려에 빼앗겼던 군()을 되찾았다.

552년 일본에 노리사치계를 보내 일본에 금동석가상 1구, 미륵석불, 불경을 전했다. 이 밖에 오경박사,

역박사, 의박사 등을 일본으로 보내 학술과 전문지식을 전수하였다.
 
553년 백제가 병합하려는 한강 유역을 신라가 차지하자 신라에 보복하기 위해  이듬해 일본에 구원병을

청하는 한편, 왕자 여창(:27대 위덕왕)과 함께 친히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신라의

군주() 무력()에게 대패하고 관산성()에서 신라의 복병()에 의하여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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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예봉(銳峯)을 꺾고 승리를 쟁취한 백제와 신라는 원래 공동의 강적을

막기 위하여 연합전선을 펼쳤지만 두 나라의 속셈은 애초부터 감추어진 채 이루

어진 오월동주(吳越同舟)였고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서 위태로운 밀월(蜜月)

이었다.

 

밀월이 끝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인 성왕 31년(553)이었다.

신라가 돌연 감추어진 야욕을 들어내어 백제가 회복한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주위의 6군을 재빨리 탈취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그 일대를 신주(新州)라 일컬

었다.

 

이로써 백제의 비유왕(毗有王)과 신라의 눌지왕(訥祗王)이 서기433에 와옹성

(瓦瓮城: 계족산)에 회맹단(會盟壇)을 쌓고 피를 마셔 동맹을 맺은 이래 각기의

국력과 정세에 따라 다소의 기복은 있었지만 그래도 면면히 이어 오던 동맹관계가

이제는 완전히 끝나고 삼국은 각각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바로 신라의 진흥왕 때로서 신라는 이를 계기로 하여 중흥의 길을 걸었고,

고구려는 쇠잔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 시작 했으며, 당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백제였다. 70여 년을 와신상담(臥薪嘗膽) 끝에 되 찾은 땅이요, 총력을

기우려 백제중흥의 기틀을 기필코 마련코자 했던 성왕의 좌절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거대한 고구려를 꺾기에 온 힘을 다 쏟은 백제로서는 신라를

바로 보복할 만한 힘이 남아 있지 못했다. 그래서 성급한 보복보다는 시간을

벌어서 재기의 꿈을 키워야겠다고 판단한 성왕은 배신 당한 분노와 뼈 아픈 굴욕을

무릅쓰고 그 해 11월에 자기 딸을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에게 시집 보내어 소비

(少妃)로 삼게 하였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1년간 묵묵히 전비(戰備)를 가다듬은 성왕은 다음해 (554) 7월

에 진군하여 12월에는 신라의 접경 요새인 관산성(管山城: 옥천)을 함락하고 계속

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너무나 깊숙이 들어간 것이었을까?

한강유역의 신주(新州)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 군대가 남하하여 공격해 옴으로서 앞

뒤에서의 협공을 받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진퇴양난에 빠진 백제군은 여기에서 대패하여 성왕은 三年山郡(報恩)에서 포로가

되고 경주로 잡혀 가서 목이 잘린 채 몸만 백제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 후 백제는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며 100여 년을 버티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하여 패망(660)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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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성왕의 사망년도는 554년이다.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신라와

전쟁을 벌이다 전사한 것은 현존하는 기록들 모두가 증언하고 있지만,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기록이 모두 다른 의견을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권26 백제본기4에 "32년(554년)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步騎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伏兵)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고 하고, 권4 신라본기4 진흥왕 15년(551년)조 기사에 "백제왕 명농이 가량

(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軍主)였던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이 주병(主兵)을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우도도(高于都刀)가 백제왕을 급히 쳐서 죽였다.

 

[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

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 急擊殺百濟王]."고 하여 성왕이

 밤에 몰래 신라를 기습하려다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성왕이 데리고 갔던 군사가 불과 50명에 불과했다는 기록을 볼 때 내용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태자 여창이 직접 참여한 관산성 전투오히려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으며, 성왕은

전후 수습을 위해 측근들을 데리고 관산성으로 가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니혼쇼키》에 보면 음력 12월 아들인 여창이 신라로 쳐들어가 구타모라(久陀

牟羅)에 요새를 쌓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전장에서 침식도 잊고 지내던 아들을

안쓰럽게 여긴 성왕은 이를 위로하러 관산성으로 향했다.

 

한편 성왕이 온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신라군은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성왕에

대한 기습을 감행했고, 불과 50명밖에 데리고 있지 않았던 성왕은 신라의 고도

(古都)가 이끄는 군사에 사로잡혔다.

 

고도는 성왕에게 "왕의 목을 베게 해주시오."라고 요청하고, 성왕은 "왕의 목을

천한 종의 손에 넘길수 없다"며 거절했으나 고도는 "우리 국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긴 자는 왕이라 해도 종의 손에 죽소."라며 잘라 말해버렸다.

 

이에 성왕은 "과인은 지금껏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안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때 성왕의 목은 신라 왕궁 북청(北廳)

의 계단 밑에 묻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히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고, 나머지

몸은 백제로 반환되었다.

 

관산성은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있었으며, 지금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은 성왕사절지(聖王死節地), 즉 성왕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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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 [威德王, ?~598]

 

백제 제27대 왕(재위 554∼598). 웅천성을 침공한 고구려군을 격퇴하였고 신라와 자주 싸웠으며 중국의

진(陳) ·북제(北齊) 등과 친선을 유지했다. 일본 쇼토쿠태자의 스승 아좌태자는 그의 아들이다.

 

휘() 창(). 성왕의 맏아들. 554년 즉위하자 웅천성(: )을 침공한 고구려군을 격퇴하였다.

561년부터 부왕의 패사()를 분풀이하기 위하여 신라와 자주 싸웠다. 중국의 진() ·북제() ·수()와

외교관계를 수립, 친선을 유지했다.

 

595년 10월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서 부여 능산리 창왕십삼년명사리()의

발견으로 새롭게 각광을 받았다. 그는 한국 역사서에보다 일본의 역사서에 더 자세히 알려진 인물로,

부왕()인 성왕()을 위해 출가하려 하였으며, 일본의 쇼토쿠태자의 스승 아좌태자()는 그의

아들로 597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 부여에서 출토된 청동 사리함 동체부에 백제 위덕왕이 새겨진 명문 기록 .  

    석함 뚜껑 개봉 직후의 사리함 모습 - "百濟王  昌"이란 이름이 뚜렷히 새겨져 있다.

 

 

 명문은 사리함 동체부에 5자6행의 음각체로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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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흥사지서 전성기 백제 금은동 사리기 등 발견

백제 창왕대 조성기 밝혀주는 명문확인 등 백제금동대향로

이래 최대 발굴

한상현 기자, dream21yw@naver.com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가 올 해 실시한 부여 왕흥사지 제8차 발굴조사 결과 전성기 백제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금ㆍ은ㆍ동 사리기 발견 및 백제 창왕대(577년) 조성기를 밝혀주는 명문을 확인하는 등 백제 금동대향로 이래 최대의 발굴성과를 거두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4일, 왕흥사지에 대한 발굴조사 자문위원회 및 현장학습의 날 행사에서 밝힌 이번 조사의 중요한 성과로는 ▲최초로 백제시대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장엄구 확인 ▲사리함에서 왕흥사 창건(577년)과 관련된 명문기록 확인 ▲사리기의 봉안수법과 목탑 심초부 조성에 대한 새로운 기법 확인 ▲사리구를 포함 백제시대 귀금속 및 장신구 등 다량의 진단구 출토 등 당시 공예기술의 우수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리함(높이10.3㎝)은 장방형 심초석(100×110㎝) 남쪽 끝단에 16×12×16㎝의 크기로 마련된 사리공 내부에 단면 사다리꼴의 화강암 뚜껑에 덮여 봉안 되어 있었다. 사리함 재질은 청동으로 원통형 동체에 보주형 손잡이가 부착된 볼록한 뚜껑을 덮었으며, 함 내부에는 다시 은제사리병(외병)을 봉안하였고 이 은제 사리병 안에는 다시 금제사리병(내병)이 봉안돼 있었는데. 실제 사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명문은 사리함 동체부에 5자6행의 음각체로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라고 적혀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의 기록에 600년(법왕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35년)에 낙성되었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위덕왕44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태자 이외에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 확인되었다.

명문 및 사리구의 구성내용을 통해서 절의 축조가 같은 위덕왕 대에 만들어진 능산리사지(567년) 보다 10년 뒤에 조성되었다는 절대연대가 밝혀짐으로써 백제사 편년과 동시기 고고학적 자료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백제 위덕왕대의 정치ㆍ사회ㆍ문화적 흐름을 연구하기 위한 새로운 단서를 확보하게 됐다.

 

 


진단구는 심초석 남쪽변을 중심으로 다량 출토되었는데 목걸이 및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등 장신구로 사용했던 구슬류와 옥류, 금제품, 금동제품, 은제품, 관모장식 등을 비롯 철도자, 운모로 만든 연꽃,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550~577년)에서 사용되었던 상평오수전 등 다량의 유물이 확인되어 백제시대 장신구연구 및 귀금속 제작, 대외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백제는 성왕대부터 중국에서 사리신앙의 영향을 받아 위덕왕대에는 일본에 사리와 함께 승려와 장인(匠人)을 파견하는 등 불교문화의 일본전파에 주된 역할을 하였는데, 이번 사리구와 진단구는 이러한 백제불교문화의 우수성과 국제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리함이 봉안되었던 목탑지는 중층기단을 하고 있으며 하층기단을 기준으로 남북ㆍ동서길이 14m의 정방형 규모로 중심부에 장방형 심초석(100×110㎝)이 안치되어 있는데, 심초석을 안치하기 전에 기단토를 먼저 조성한 후 되파기를 하여 그 중앙에 심초석을 안치하였고 심초석을 안치 한 후 다시 심주를 얹기 위한 80×80㎝의 황색 점토 및 사질토로 판축된 토심적심으로 보이는 정방형시설을 마련하였는데 유실로 인하여 그 상부에 심주를 위한 별도의 초석을 사용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목탑지와 관련해서 기단 특히 심초부의 조성수법은 그 동안 알려졌던 심초에 심주를 바로 올리는 수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백제시대 목탑 축조방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또 목탑지를 관통하는 절의 중심축선 상에 동서석축에 잇대어 남북방향으로 돌을 쌓아 축조한 왕의 행차와 관련된 어도(御道)로 추정되는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금강 쪽으로 연결되며 현재 확인된 규모는 남북길이 62m, 동서너비 13m로서 동서석축과 잇대어진 부분부터 남쪽으로 20m가량은 경사지게 내려가고 그 남편부터는 거의 평탄하게 조성되어 있어 어도(御道)로써 사찰로의 진입을 편리하게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또한 이 시설과 연결되는 동서석축의 약12m 구간에는 석축이 축조되지 않았는데 이는 이 공간에 접안시설에서 경내로 들어가기 위한 문지나 계단지 등을 시설하여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의 조사에서 석축은 경사구간에서 최대 10단(남북석축의 동측 부분)까지 확인되고 있으며 평탄한 구간에서는 4단 정도까지 확인되었다.

한편, 동서석축은 총 95m내외의 길이로 높이 380㎝ 16단정도 남아있으며 계곡부에 사찰을 축성하는 것과 관련하여 대지조성을 위한 축대로서의 기능과 강물유입을 막기 위한 제방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단구 이외의 출토된 유물의 대부분은 동서석축 전면부의 회색사질점토층과 황적갈색사질점토층에서 수습되었는데, 와전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와전류는 백제시대 평기와가 대부분이나 통일신라시대 평기와 및 고려시대 평기와도 출토되고 있으며, 특히 고려시대 기와는 목탑지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다. 또한 연화문수막새, 연목와 등이 다수 확인되고 있고, 특히 석축 전면부에서는 소조 광배로 보이는 토제품 2점이 출토됐다.

(인터넷신문의 선두주자 뉴스타운 Newstown / 메디팜뉴스 Medipharm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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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

554년에 성왕이 전사하자 30살의 나이로 국정을 이어받았다. 그는 태자 시절부터 성왕을 도와 국정에 같이

참여하였고, 신라가 동맹을 어기고 한강 유역을 장악했을 때는, 신라 정벌론을 펼쳤다. 그의 강경론에 따라

성왕이 신라 공격을 결심하자, 554년에 자신이 선봉을 서서 관산성(管山城) 공략에 나섰다.

 

이 일은 많은 신하가 반대하였으나, 창은 주장을 굽히지 않고 기어코 관산성을 공격했다. 성왕은 관산성을

공격하고 있던 태자 창을 위로하기 위해 밤길을 달려가다 신라군에게 급습을 당해 죽임을 당하였는데,

창은 그 죄책감에 시달리며 출가하여 승려가 되려고 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이 강력하게 만류하자, 창은 뜻을

굽히고 왕위를 승계했다.

 

그는 성왕의 삼년상을 치르고 557년 정식으로 왕위를 승계했는데, 이는 자기 탓으로 부왕이 죽은 것에 대한

참회의 의미로 보인다.

 

성왕이 전사하여 나라가 불안한 가운데 태자로서 왕의 임무를 수행하던 그는 국정을 맡자마자 고구려

침입을 받아야 했다. 고구려는 554년 음력 10월에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이는 성왕이 죽은 지 불과

3개월 만이었다. 고구려는 신라가 길을 열어주자, 단숨에 웅진성(熊津城)까지 달려와 백제를 위협하였다.

 

백제의 옛 도읍이자 군사적 요충지인 웅진성은 사비성에서 불과 한나절 거리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말하자면 백제의 와 같은 곳인데, 고구려가 한걸음에 달려왔으니, 백제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덕왕은 총력전을 펼쳐 가까스로 고구려군을 패퇴시켰지만, 고구려의 재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고구려의 침략은 신라가 길을 터준 결과였으므로, 고구려와 신라가 연합하여 공격해올 수도 있었다.

 

때문에 위덕왕은 오랜 동맹국인 가야 쪽에 밀사를 파견하여 신라에 빼앗긴 가야 땅을 되찾아 가야를 재건할

방법을 모색하였고, 그것은 562년 음력 7월에 신라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백제가 신라를 공략하는 사이,

가야는 내부를 수습하고 신라의 뒤를 후리는 양동작전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군은 신라의 반격에 밀려 1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주함으로써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백제군

을 물리친 신라는 그 여세를 몰아 가야를 공격했다. 가야를 집어삼킬 기회를 엿보며, 침공의 명분을 찾고 있던

신라로서는 이 이상 좋은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사부가 이끈 신라군은 장군 사다함을 앞세워 순식간에 가야 전역을 휩쓸어버렸고, 그것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가야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전쟁 위협이 사라지자, 위덕왕은 외교 경로를 통해 고구려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수나라가 진나라를 몰락시킬 당시, 수나라의 전함 한 대가 탐라에 표류해왔는데, 위덕왕은 그들의 배를 수리해

주고, 선물까지 가득 함께 돌려보냈다. 양견은 이 일로 백제를 매우 신임하고, 굳이 사신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서를 내리기까지 하였다.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유도

한다는 계획은 이런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다.

 

정황을 살피며 수나라에 그런 의지를 의지를 전달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위덕왕은 596년에 수나라와

고구려가 요동을 놓고 전쟁을 벌이자, 사신을 파견하여 고구려는 예의가 없고 오만한 나라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만약 수나라가 다시 고구려를 친다면 백제가 도와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러나 양견은 아직 고구려를

재침할 여력없다고 판단하고, 위덕왕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백제가 수나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도록 충동질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고구려는 즉시 병력을

동원하여 백제 국경을 노략질하며 보복을 감행하고 돌아갔다.

위덕왕은 그런 상황에서 74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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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武寧王, 462~523]

 

백제의 제25대 왕(재위 501∼523). 웅진으로 천도 후 혼란한 백제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름은 사마()·융(), 시호는 무령()이다. 무령왕의 계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개로왕

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받고 있다. 501년 백가(苩)가

보낸 자객에 의해 동성왕이 죽자 뒤를 이어 40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502년(무령왕 2) 가림성()에서

백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정벌하였다.

전() 왕인 동성왕은 신진세력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다 비대해진 신진세력에 의해 시해되었다.

그래서 무령왕은 구귀족세력을 등용하여 신구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화시켜 나갔다.

또, 22담로에 왕족들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한강유역을 잃고 웅진으로 천도한 상태에서, 금강유역과 호남평야를 개발하기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유민들을 귀농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유민을 정착시키고 농업 노동력을 확보하여 조세 기반을 마련

하였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고구려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다. 즉위하던 해인 501년에 달솔 우영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하였고, 이듬해에도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했다.

507년에는 말갈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령성()을 쌓았다. 512년 중국 양()나라에 조공()하였으

며, 같은 해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가불()·원산()의 두 성을 빼앗겼다. 521년 양나라의 무제()는

무령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에 책봉하였다. 523년 인우

()·사오() 등에게 명하여 한북주()의 장정을 동원시켜 쌍현성()을 쌓았다. 1971년

무령왕과 왕비가 합장된 능()이 충남 공주()에서 발굴되었다. 

 

 

 

 [사진] 무령왕의 평상복과 무령왕릉의 내부

 

 

무령왕릉 [武寧王陵]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錦城洞)에 있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

 

1971년 7월 7일부터 동년 10월 2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됨으로써 그 전모가 드러났다. 송산리()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를 접하고 있다. 분구()는 지름 약 20m의 원형() 플랜을 가지며 널방

[]의 바닥면에서 분정()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문전()·문자전() 등으로 쌓여진

단실묘()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을 둔다.

 

 

 
천장은 아치를 성하고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

과 그 아래에 연자창() 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

()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널길[]에서 발견된 한 개의 뿔을 가진 철제() 석수(), 청자육이호() 동제()의 발

()·시()·오주전()과 함께 이 분묘의 피장자()가 무령왕 부부임을 밝히는 각자석판()

2장이 나왔다.

널방[]에는 청자사이병()·청동용기류()·철모(鉾)·현금() 등의껴묻거리[

]와 금·은의 식금구()가 달린 흑칠()이 칠해진 목관()이, 왕의 것은 동쪽에, 왕비의 것은 서쪽

에 매치()되어 있었다.

붕괴된 관 안에는 목침·족좌()·동경()·단룡환두()의 칼, 울두(熨)와 동제()의 용기류

화염형관식()·수식()·이식()·과대(銙)·식리()·팔찌[] 등의 꾸미개[]가 들어

있었다. 또한 왕비의 제3대구치()가 출토되었다.

 

 

 무령왕릉 왕비금관식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관꾸미개. 국보 155호.

 

 금귀걸이 금제뒤꽂이

 

  무령왕릉

 

 무령왕릉(복원 전시물)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전시하고 있다.

 

 

 무령왕릉 입구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인 무령왕릉의 복원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제수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제수저의 복원도.

 

동탁은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제은잔의 복원도

 오수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오수전의 복원도. 오수전은 중국 한나라 때의 동전이다.

 무령왕릉 왕비의 관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비의 관을 복원한 복원도. 발견당시 왕비의 관은 나무가 부식되어 무너져 내려

있었다.

 무령왕의 관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무령왕의 관을 복원한 복원도.

 지석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의 복원도. 지석에는 무령왕(사마왕)이 사망하여 묘에 안장하고 매지문서를

작성한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무령왕릉 매지권 [武寧王陵買地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왕비의 묘지 매매계약서.

 

연도부 중앙에 있는 진묘수() 앞에서 왕·왕비의 것이 함께 발견되었다. 왕의 것은 겉면에 왕호와 향년,

사망과 장례에 관한 일자 등 52자의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졌으며, 뒷면에는 십간(), 십이지()

글자가 음각되어 일종의 방위도 겸 능역도()라고 생각된다.

왕비의 것은 겉에 41자의 왕비 묘지 명문이 음각되었으며, 뒷면은 매지권 본문으로서 돈 1만 문()을 가지고

토왕()·토백()·토부모(), 여러 관리 등 지신()으로부터 묘지를 사들인 매매계약서이다.

이 유물의 성격을 둘러싸고 발견 당초부터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다. 앞면의 내용에 생시의 행적이 기록되지

않고 일반적인 묘지의 체제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지석()이라기보다는 신에게 묘의 안호()를 기원

하고 묘지 소유권을 확인하는 매매계약문서인 매지권이라고 보는 견해와, 묘지로서는 매우 소략하지만

표면에 왕호·사망일자 등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에 지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제작 경위를 보면 왕의 것의 앞뒷면과 왕비 것의 뒷면은 왕을 안장할 때인 523년에 작성하여 널방 ·널길

중간에 놓아두었다가, 왕비가 죽은 뒤인 526년에 왕비를 합장하면서 왕비 것의 겉면에 왕비에 관한 기사를

추각한 것으로 보인다.

 진묘수

무령왕릉의 연도부에서 발견된 진묘수의 복원도. 진묘수는 무덤입구에서 무덤의 침입자를 막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발견 당시 오른쪽 뒷다리가 부러져있었다.

청자 육이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청자 육이호의 복원도. 청자 육이호는 중국식 도자기로 무령왕릉에서 총 9점의 중국

도자기가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