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군 김정경 (蓮城君 金定卿)
조선왕조 건국 초기 때 원종공신과 선무공신으로, 본관은 안산(安山)이다.
신라(新羅) 경순대왕(敬順大王)의 4왕자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아드님인 시조 김긍필(金兢弼)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김 위(金渭)이고, 조부는 김원상(金元祥)이며,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김성경(金星慶)이고, 어머니는 한국부인(韓國夫人) 평양조씨(平壤趙氏)이다.
배위(配位)는 화혜택주 왕씨(和惠宅主王氏)이다. 조선 태조를 도와 개국하는 데 협력하여, 개국공신 다음가는 포상 직위인 원종공신으로 책봉되어, 연성군(蓮城君)에 책봉되었다.
1400년 (정종 2년) 경진(庚辰), 한성부윤에 있을 때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난을 진압하고, 좌명공신에 책봉되었다.
1410년 (태종 10년) 경인(庚寅), 명나라 황제 탄생일 때 성절사로 파견 다녀오기도 하였다.
관직을 그만두고, 지금의 경기도 안산에서 '망해정'을 짓고, 말년을 보냈다가 1418년 (세종 원년) 무갑(戊甲), 향년 75세로 별세하였다고 한다.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에 모셔졌다. 시호는 위정(威靖)이다.
연성군 김정경 원종공신 묘소
위정공은 부인을 세 번 맞이하였으니, 판서 신익지, 신양군 노영, 남평군 왕화의 딸이다. 5남 1녀를 낳았다. (부인 : 평산신씨, 교하노씨, 개성왕씨)
평산신씨와 교하노씨는 부장하였으며, 개성왕씨는 그 아래에 임좌로 장사 지냈다.
*** 부장(附葬) = 합장(合葬) ***
여러 사람의 시체를 한 무덤에 묻음. 또는 그런 장사. 흔히 남편과 아내를 한 무덤에 묻는 경우를 이른다. [비슷한 말] 부장2(附葬)ㆍ부폄ㆍ합부ㆍ합폄.
연성군 김정경 신도비
이 비는 1863년(철종 14년) 경기도 하남에 건립된 김정경신도비(金定卿神道碑)로 신석우(申錫愚)가 비문을 지었고, 홍현주(洪顯周)가 글씨를 쓰고, 아울러 전액을 하였다.김정경(金定卿 : 1345~1419년)의 본관은 안산으로,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진주목사 성경(星慶)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군부사총랑을 역임하였으며, 이성계를 지지하여 조선이 건국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개국한 이후 사문절도사, 이조전서, 판예빈시사 등을 역임하였고, 1400년(정종 2년) 방간의 난 당시 방원(태종)을 도와 진압하여, 좌명공신 4등에 봉해졌다. 1410년(태종 10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용맹하였고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며, 시호는 위정(委靖)이다.현재 탁본은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有明朝鮮佐命功臣吏曹典書蓮城君謚威靖金公神道碑銘」
推忠奮義翊戴同德佐命功臣崇政大夫行吏曹典書蓮城君謚威靖金公
神道碑銘并序」
資憲大夫禮曹判書弘文館提學 經筵日講官 申錫愚 撰」
綏祿大夫永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洪顯周 書并篆」
有若堂而高四尺于廣之治西玄川負亥原寔惟蓮城君金公定卿攸藏氏貫安」
山系出高麗左僕射肯弼若侍中渭判三司元祥牧使星慶爲曾祖祖稱母趙氏」
密直副使平壤千禩女生于元至正乙酉任爲延康殿直判護軍宗簿副令軍簿」
摠郞中正大夫及事我 太祖策原從功 太宗時佐戡朴苞亂策佐命勳秩視」
崇政封爵田民有券書嘗節制義興軍典吏曹再銜 命赴 朝咸著勞績寢疾」
世宗遣太醫而診內侍而訊畋而賜獐肝以病中欲嘗也公感泣 恩造恨無以」
卒萬一報是年七月十五日竟以赴 聞壽七十五即 永樂己亥輟 朝致侑」
贈謚威靖禮備哀榮公甞喜南容三復語好讀黃石素書凢立 朝處事得力爲」
多嗚呼 聖祖龍興天開一治炳幾達權如山川出雲盖多其人學問於陽村訏」
謨於厖邨質儉於夏亭皆乘運名世之材若公素負韜略戡平禍亂可以幷駕諸」
公爲 國初英豪豈不偉哉宜其順天迓休毓繁厥祉凡三娶判書申翼之新陽」
君盧瑛南平君王和女生五男一女別將沚申出護軍灌別將滌盧出判中樞平」
胡公漑安城尉澣署令安鐵山妻王出平胡之子校勘孟鋼始以科甲進孫琨瑋」
珌珌顯己卯彙征時六代孫就義七代孫沆繼登文科六代孫府使就礪七代孫」
參奉聲大 贈持平聲玉八代孫參奉始聲皆以學行稱錫命錫保以武顯九代」
孫知中樞相斗縣監定五傡罹辛丑士禍牧使相鼎十代孫防禦使養一竝參奮」
武勳養心文大諫外裔多達官顯人玄川之竁旣成申氏盧氏祔王氏葬其下壬」
坐十四代孫樂朋以陶谷李公所撰表來請神道之刻愚辭不獲謹纂次爲文而」
系之以銘 猗嗟蓮城赫閥宏器佐命翊運筮革六二旂常旣揭金帛蕃賜」
允㫌相報聿殫殄瘁秉銓銜 命績懋厥試圭無言玷石有書秘公服膺斯勳措」
于事勳烈山峙福履川至文武忠孝衍錫其類我銘牲繫永表玄隧」
崇禎紀元後四癸亥 四月 日立」
김정경 신도비
유명조선 좌명공신 이조전서 연성군 시위정 김공 신도비명
추충분의 익대동덕 좌명공신 숭정대부 행 이조전서 연성군 시위정 김공 신도비명병서
자헌대부 예조판서 홍문관제학 경연일강관 신석우가 글을 짓고,
수록대부 영명위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홍현주가 글씨와 함께 전액을 쓰다.
당과 같은 모습에 높이가 4척이며 광주 고을 서쪽의 현천에 해방을 등진 언덕은 곧 연성군 김공 정경의 묘소이다. 본관은 안산이고, 선계는 고려좌복야 긍필에서부터 나왔다. 시중 위와 판삼사 원상과 목사 성경이 공의 증조와 조부,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평양조씨로 밀직부사 천사의 딸이다. 원나라 지정 을유년(충목왕 1, 1345년)에 태어나 벼슬하여 연강전직 · 판호군종부부령 · 군부총랑 · 중정대무가 되었고, 우리 태조를 섬겨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태종때에는 박포의 반란을 평정하여 좌명공신에 책봉되어 품계가 숭정에 올랐으며, 작위를 봉하고 전호와 민호를 하사한 권서가 있다. 일찍이 의흥친군위 절제사를 지냈으며 이조를 관장하였다. 두 번이나 명을 받들고 명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가서 공적이 모두 현저하였다. 병들어 눕자 세종께서 대의를 보내어 진료하게 하고, 내시를 보내어 문병하셨으며, 사냥하여 노루 간을 하사 하셨으니, 이는 병중에 먹고 싶어하기 때문이었다. 공은 성은에 감읍하여 끝내 만에 하나도 갚을 수 없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7월 15일에 마침내 부음이 들렸으니 향년 75세이며, 해는 영락 기해년(세종 1, 1419년)이다. 조정의 정사를 거두고 제물과 제문을 모내어 조상하고, 위정이란 시호를 추증하여 신하의 죽음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공은 일찍이 남용이 세 번 반복했다는 ‘옥의 흠은 갈 수 있지만 말의 흠은 갈 수 없다’는 말을 좋아하였고, 황석소서를 즐겨 읽어 무릇 벼슬하여 일을 처리 할 때에 여기에서 힘을 얻은 것이 많았다. 오호라! 성조가 용흥하여 하늘이 한번 다스림을 열어주시어, 기미에 밝고 권형에 통달한 분들이 마치 산천에 구름이 일듯하여 그 사람이 많았다. 학문은 양촌이요, 나라를 위한 계책은 방촌이며, 질박하고 검소함은 하정이니, 모두 운을 타서 세상에 이름난 인재들이다. 공으로 말하자면 평소에 육도삼략을 지고 화란을 평정하여 제공들과 명예를 나란히 하여 국초에 영호가 될 수 있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그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아름다움을 맞이하고 그 복지를 육성 발전시키는 것이 당연하도다.
공은 부인을 세 번 맞이하였으니, 판서 신익지 · 신양군 노영 · 남평군 왕화의 딸이다. 5남 1녀를 낳았다. 별장 지는 신씨 소출이요, 호군 관 · 별장 척은 노씨 소출이요, 판중추 평호공 개와 안성위 한과 서령 안철산 처는 왕씨 소출이다. 평호공의 아들 교감 맹강이 비로소 과거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진출하였고, 손자는 곤 · 위 · 비인데, 비는 기묘년 휘정 때에 저명했다. 6대손 취의와 7대손 항은 계속하여 문과에 올랐으며, 6대손 부사 취려와 7대손 참봉 성대 · 증지평 성옥과 8대손 참봉 시성은 모두 학행으로써 일컬어졌으며, 석명 · 석고는 무로써 드러났다. 9대손 지충추 상두와 현감 정오는 함께 신축사화에 걸렸으며, 목사 상정과 10대손 방어사 양일은 함께 분무훈에 올랐고, 양심은 문과 대간이다. 외손도 높은 벼슬과 현달한 사람들이 많았다. 현천의 무덤을 완성하고 나서 신씨와 노씨는 부장하였으며, 왕씨는 그 아래에 임좌로 장사 지냈다. 14대손 악붕이 도곡 이공께서 찬한 묘표를 가지고 와서 신도비를 청하니, 나는 사양 할 수 없어서 차례를 모아 비문을 짓고 이어서 명하노라.
아! 연성이여! 혁혁한 문벌에 큰 그릇이로다.
좌명으로 군운을 붙잡았으니 혁괘 육이를 점침이로다.
표창한 기를 이미 올렸고 황금과 비단도 많이 내리셨도다.
포상하신 성은을 갚으려하여 마침내 몸이 병들도록 충성을 다하였도다.
전조의 일을 맡아 왕명을 받드니 시용에 공적이 많았도다.
옥의 흠은 갈 수 있지만 말의 흠은 갈 수 없다는 것과 황석공의 소서에는 비법이 있도다.
공은 이것을 가슴에 간직하여 행동하고 일을 처리하였도다.
큰 공훈은 산처럼 솟아있고 복록은 냇물처럼 흐르도다.
문무충효는 번성하여 대대로 자손이 이어 가도다.
나는 비석에 명하여 영원히 전해지도록 표하노라.
숭정기원후 네 번째 계해년(철종 14, 1863년) 4월 일에 세우다.
장명등
상석
오른쪽 문인석
왼쪽 문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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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군 처 화혜택주 왕씨 묘소
신 종 (神宗) |
-양양공 (襄陽公) 왕서(王恕) |
-시안공 (始安公) 왕인(王絪) |
-서원후 (西原侯) 왕영(王瑛) |
-익양후 (益陽侯) 왕분(王玢) |
- 순화후 (淳化侯) 왕유(王瑈) |
-정원군 (定原君) 왕균(王鈞) |
- 공양왕 (恭讓王) |
|
-학성후 (鶴城侯) 왕향(王珦) |
-남평군 (南平君) 왕화(王和) |
-女 : 金定卿 |
||||||
-보성군 (寶城君) 왕희(王熙) |
-경창대군 (慶昌大君) 왕유(王瑜) |
-순성군 (順城君) 왕정(王珽) |
연성군 처 화혜택주 왕씨 묘소 비석
연성군 처 화혜택주 왕씨 묘소 신비석
상석 향로석이 보이지 않습니다.
장명등
오른쪽 문인석
왼쪽 문인석
연성군 처 화혜택주 묘소 후경
출처 : 신라김씨 집안 선영 http://blog.daum.net/shilla57/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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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추가등재 합니다.
위정공 안산군(연성군) 김정경 묘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 57)
현천의 무덤을 완성하고 나서 평산신씨와 교하노씨는 부장하였으며,
개성왕씨는 그 아래에 임좌로 장사 지냈다.
안산군(연성군) 부인 개성왕씨 화혜택주 묘
* 옹주 및 택주 설명
조선시대 외명부(外命婦) 봉작(封爵)의 하나. 왕자군(王子君)과 종1품 종친의 처(妻)에게 이런 호칭을 붙였다. 군부인은 중국 당나라 때의 외명부제도에서 문무관 3품 이상의 모(母)와 처를 칭하던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 공양왕 때에는 대군과 군의 처를 구별하지 않고 옹주라 하였으나, 조선 초기에 와서 대군의 처를 옹주, 군의 처를 택주(宅主)라 하여 서로를 구별하였다.
세종 때에는 종실 종1품의 적처(嫡妻)와 공신 정1품·종1품의 적처를 모군부인(某郡夫人)이라 칭하고 군부인의 앞에 읍호를 붙이도록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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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김씨 김긍필의 14세(13대손) 암, 을신,맹감,지,맹린,맹전,맹추,맹균,
맹일,맹강,맹유,맹철,맹혁,
맹현에서 다음과 같이 1520년 전후로 분파되었습니다.
(윗어른 자제분의 과거급제 시기가 1510년대임, 근거 안김족보 1776년, 1989년)
o 상호군파 휘 암 (의주,용천)
** 휘(諱) :왕이나 제후 등이 생전에 쓰던 이름
o 사직공파 휘 을신 (강진)
o 학생공파 휘 맹감 (강진,황주)
o 대제학공파 휘 지 (합천)
o 부정공파 휘 맹린 (포천1동)
o 사재정공파 휘 맹전 (안산)
o 첨정공파 휘 맹추 (한산)
o 참봉공파 휘 맹균 (황해)
o 직장공파 휘 맹일 (포천)
o 교감공파 휘 맹강 (천안)
o 첨중추공파 휘 맹유 ?
o 판서공파 휘 맹철 (괴산)
o 참판공파 휘 맹혁 (포천, 청산)
o 첨지중추부사공파 휘 맹현 (장단)
* 장단파 근거 : 안산김씨세보 세계표 사직공파(강진파) 1-2 1978년판 추정
연성군은 부인을 세번 맞이하였으니, 판서 신익지, 신양군 노영, 남평군 왕화의 딸이다. 5남 1녀를 낳았다.
별장 지는 신씨 소출이요, 상호군 관, 별장 척은 노씨 소출이요,
판중추 평호공 개와 안성위 한과 서령 안철산 처는 왕씨 소출이다.
소생 5남 1녀 {사위 안철산}
지 (별장) 沚 (別將) | 관 (상호군) 寬 (上護軍) | 척 (별장) 滌 (別將) | 개 (좌참찬) 漑 (左參贊) | 한 (대호군) 澣 (大護軍) |
첫째 |
둘째 |
셋째 |
넷째 |
다섯째 |
의주파 |
강진파 |
합천파 |
포천, 안산, 천안파 |
괴산파 |
*** 滌(척) : 씻을 척, 물 이름 조 ***
11세 (10대손) |
12세 (11대손) |
13세 (12대손) |
14세 (13대손) | 분 파 내 용 (집성촌) | |
성경 | 정경 | 지 別將 |
암 (상호군) |
의주파 | 의주파, 용천파 |
진주목사 삼사우사 의정부사 자헌대부 |
좌명공신 연성군 (안산군) 이조전서 숭정대부 위정공 |
관 上護軍 |
을신 (사직) |
강진파 | 강진파 |
맹감 (학생) |
강진파 | 황해도 황주파 | |||
척 別將 |
지 (대제학) |
합천파 | 괴산파,합천파,산청파,만경파 | ||
개 左參贊 |
맹린 (부정) |
포천, 안산, 천안파 |
포천파, 양주파 | ||
맹전 (사재정) |
〃 | 안산파 | |||
맹추 (첨정) |
〃 | 한산파 | |||
맹균 (참봉) |
〃 | 황해도파 | |||
맹일 (직장) |
〃 | 포천파 | |||
맹강 (교감) |
〃 | 옥천파(청산파), 천안파 | |||
맹유 (첨중추) |
〃 | ? | |||
한 大護軍 |
맹철 (판서) |
괴산파 | 괴산파 | ||
맹혁 (참판) |
포천, 청산파 |
포천파, 청산파 | |||
주경 (판서) |
이용 (별장) |
정 判決事 |
맹현 (첨지중추부사) |
장단파 | 장단파 |
분파의 정식 명칭은 14세 되시는 선조님의 벼슬로 족보에서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 "상호군파", 다만 편의상 집성촌을 기준으로 "의주파" 로 호칭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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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의 좌명공신 교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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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1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1월 15일(을해) 2번째기사
이저·이거이 등에게 좌명 공신의 훈호를 내리는 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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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명(佐命)한 공(功)을 기록하여 4등(等)으로 하고, 하교(下敎)하였다.
“지난날에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해할 마음을 품고, 몰래 회안(懷安) 부자(父子)를 끼고 우리 골육을 해하기를 꾀하여, 마침내 군사를 들어 대궐로 향함에 이르러, 흉역(凶逆)을 자행하여 종사(宗社)의 안위(安危)가 순간(瞬間)에 있었는데, 상당후(上黨侯) 이저(李佇)·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 이거이(李居易)·우정승(右政丞) 하윤(河崙)·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이무(李茂)·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조영무(趙英茂)·좌군 총제(左軍摠制) 이숙번(李叔蕃)·중군 총제(中軍摠制) 민무구(閔無咎)·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신극례(辛克禮)·여성군(驪城君) 민무질(閔無疾) 등 아홉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의(義)에 따르고 사기(事機)에 응하여 계책을 정해서, 화란(禍亂)을 평정하고 종사(宗社)를 편안히 하여, 충성을 다해 좌명(佐命)하였으니, 1등(等)으로 칭하(稱下)하고, 부(父)·모(母)·처(妻)는 3등(等)을 뛰어 봉증(封贈)하고, 직계 아들은 3등을 뛰어 음직(蔭職)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으면, 조카와 사위를 2등을 뛰어 밭 1백 50결(結), 노비 13구(口), 백은(白銀) 50냥(兩), 표리(表裏)19) 1단(段), 구마(廐馬) 1필, 구사(丘史) 7명, 진배파령(眞拜把領) 10명을 주고, 처음 입사(入仕)하는 것을 허락한다.
예문 춘추관 학사(藝文春秋館學士) 이내(李來)는 의(義)를 따르고 사(私)를 잊어, 변(變)을 듣고서 제일 먼저 고(告)하여 충성을 다해 좌명(佐命)하였고,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와 완산후(完山侯) 천우(天祐)는 변을 듣고 급히 달려 와서 화란(禍亂)을 구제하고 익대 좌명(翊戴佐命)하였으니, 2등으로 칭하하고, 부·모·처는 2등을 뛰어 봉증하고, 직계 아들은 2등을 뛰어 음직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으면, 조카와 사위를 등수(等數)를 뛰어 밭 1백 결, 노비 10구, 백은 25냥, 표리 1단, 구마 1필, 구사 5명, 진배파령 8명을 주고, 처음 입사하는 것을 허락한다.
창녕백(昌寧伯) 성석린(成石璘)·완천군(完川君) 숙(淑)·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이지란(李之蘭)·개성 유후(開城留後) 황거정(黃居正)·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 윤저(尹柢)·김영렬(金英烈)·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윤곤(尹坤)·형조 전서(刑曹典書) 박은(朴訔)·도승지 박석명(朴錫命)·상장군(上將軍) 마천목(馬天牧)·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 조희민(趙希閔)·봉상경(奉常卿) 유기(柳沂) 등 12인은 정성과 힘을 다해서 여러 번 충성을 바치어 익대 좌명하였으니, 3등으로 칭하하고, 부·모·처는 1등을 뛰어 봉증하고, 직계 아들은 1 등을 뛰어 음직을 주고, 직계 아들이 없는 자는 조카와 사위를 음직을 주고, 밭 80결, 노비 8구, 2품 이상은 백은 25냥, 3품 이하는 은대(銀帶) 1요(腰), 표리 1단, 구마 1필, 구사 3명, 진배파령 6명을 주고 처음 입사하는 것을 허락한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박(趙璞)·삼사 좌사(三司左使) 조온(趙溫)·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권근(權近)·삼사 우사(三司右使) 이직(李稷)·참지 삼군부사(參知三軍府事) 유양(柳亮)·중군 총제(中軍摠制) 조경(趙卿)·좌군 총제(左軍摠制) 김승주(金承霔)·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서익(徐益)·전 동지총제(同知摠制) 홍서(洪恕)·병조 전서(兵曹典書) 윤자당(尹子當)·좌승지 이원(李原)·우승지 이승상(李升商)·한성 윤(漢城尹) 김정경(金鼎卿)·우부승지 서유(徐愈), 상장군(上將軍) 이종무(李從茂)·이응(李膺)·심귀령(沈龜齡), 대장군(大將軍) 연사종(延嗣宗)·한규(韓珪)·김우(金宇)·문빈(文彬), 전 중군 장군(中軍將軍) 윤목(尹穆) 등 22인은 정성을 바쳐 협찬(協贊)하고, 오래 조호(調護)를 부지런히 하여 익대 좌명하였고, 군자 소감(軍資少監) 송거신(宋居信)은 위태로움을 당해 환(患)을 구제하여 익대 좌명하였으니, 4등으로 칭하하고, 부·모·처를 봉증하고, 직계 아들은 음직을 주고, 밭 60결, 노비 6명, 2품 이상은 백은 25냥, 3품 이하는 은대 1요, 표리 1단, 구마 1필, 구사 1명, 진배파령 4명을 주고, 처음 입사하는 것을 허락하며, 아울러 모두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碑)를 세워 공을 기록하며 적장(嫡長)이 대대로 승습(承襲)하여 녹(祿)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자손은 정안(政案)에 기록하기를 좌명(佐命) 몇 등 공신 아무개의 후손이라 하여, 비록 죄를 범하는 것이 있더라도 영세(永世)토록 용서하라.”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한산(漢山) 서쪽에서 사냥하다가 성난 표범을 만나 말에서 떨어졌었다. 거신(居信)이 말을 달려 지나가니, 표범이 이를 쫓아갔으므로, 임금이 위태한 지경을 모면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좌명(佐命)의 열(列)에 참예시켰다.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 이거이(李居易) 등이 전(箋)을 올려 좌명 공신에게 상사(賞賜)한 물건을 사양하였다.
“신 등이 일찍이 무인년 정사(定社) 때에 주상 전하의 추장(推奬)하신 은혜를 입어 지나치게 상사(賞賜)를 받았사온데, 이제 또 전하께서 특별히 좌명 공신을 칭하하시어 의정부로 하여금 상사를 준비하게 하시었으니, 신 등은 감히 중첩(重疊)하여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1책 193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 *농업-전제(田制) / *변란(變亂) / *신분(身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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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9]표리(表裏) : 안팎 옷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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